|
1.4.8. 전라도 湖南
속리산俗離山 남쪽 간맥幹脈이 뻗어 나가 지맥支脈을 이룬 것이 전라도의 경락經絡이 된
다. 동쪽은 경상도와 큰 고개를 두고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큰바다와 접해 있고, 서쪽
으로는 끝없는 바다와 접해 있다. 북쪽으로 충청도와 접해 있다. 좌도[동부 지방]에는 계곡
이 많고, 우도[서부 지방]에는 들판이 많다. 전라도에는 명산과 대천이 가장 많고, 여러 가
닥의 물길이 나뉘어져 바다로 흘러가는데 하나로 모이는 형상은 없다. 산세는 뾰족하고 수
려하며, 탁 트이고 맑지만 두텁고 온축된 자태가 다소 부족하다. 그래서 이 지역 출신들은
재주가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지만, 충성되고 소박한 풍조는 경상도보다 못하다.
팔도에서 먹고 살기가 가장 좋으므로, 온갖 물산이 전국에서 제일 풍부하다. 큰 흉년만 만나
지 않는다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다. 가을이 되면 곡식 값이 전국
에서 가장 싸다. 조정의 경비는 삼남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라도가 제일이다. 토
질은 단단하고 기름지며 물맛은 담백하다. 절기는 경기도보다10 여 일 정도 더 빠르다.
전라도는 백성들의 습속이 근면하지만, 문기가 지나쳐서 사치와 떠벌리기를 좋아하며,
소박한 풍조가 적고 기예로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자못 은근한
태도가 있어서, 사람들을 헤아리고 비교하는 경우가 많으니, 마음을 터놓고 서로를 받아
들이기 어렵다. 유사儒士들은 문예를 숭상하고 재주가 많으며 자애롭고 아량이 있어 변
화를 좋아하지만, 토속土俗에서 벗어난 사람이 적어서 바깥에 나가 입방아 찧기를 좋아
한다. 고을에서는 향전鄕戰95)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고, 서울의 유세가를 찾아다니는 사람
도 많다. 그 습속이 사치하고 부랑하기를 좋아하므로, 화랑花郞96)과 유녀遊女97)가 가장 많
다. 남녀 중에는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면서, 용모를 다듬고 노래하고 놀러 다니며, 입고
먹는 자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온 식구들이 행상하
며 해를 넘겨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니, 한결같이 정해진 뜻이 없다. 그러므로 같은 고을,
-----------------------
95) 향전鄕戰: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향권鄕權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여러 형태의 향중鄕中 다툼이다. 기본 성격은 기존 향권
을 장악하고 있던 사족 세력士族勢力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회 세력의 도전, 또는 향권에 도전하고 있던 사회 세력들 간의 대립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향전이 공식적인 연대기에서 집중적으로 문제되었던 것은 영조·정조 연간이었다. 이는 사족 중심의 향
촌 지배 질서가 붕괴되고, 관 주도의 통제책이 강화되던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96) 화랑花郞: 광대와 비슷한 놀이꾼의 패. 옷을 잘 꾸며 입고 가무행락歌舞行樂을 일삼는 점이 광대와 다르다.
97) 유녀遊女: 노는 계집. 갈보 같은 부류이다.
-------------------------------
같은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기호와 취향이 서로 달라서 비방과 칭찬하는 데 근
거가 없다. 이것은 모두 호남 풍속의 단점이다.
향현鄕賢을 위해 조두俎豆를 설치하는 일은 죽어서 사社를 제사 지내는 뜻에서 나왔으므
로, 각 도의 사림士林은 사적으로 제사를 설치하여 흠모하는 정성을 기울였는데, 전라도에
서 이런 풍속이 가장 심하다. 사족士族과 대대로 문벌이 있는 집들이 이러한 풍속을 서로
모방하여, 향사를 설치하지 않은 마을이 거의 없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이 없다. 대개 조
두俎豆의 혈식血食98)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데 이처럼 쉽게 사적으로 향사할 수 있단 말인
가? 이것은 유습의 폐단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지식이 있는 사류士類의 수치가 될 만하다.
전라도는 토지가 전국에서 가장 비옥하고 흉년을 만나는 경우도 적다. 10년에 7~8년은
풍년이니 평화롭고 풍요하여 친구와 술로 즐긴다. 이곳에는 뽕과 삼, 닭과 개가 있으며,
퉁소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들린다. 따라서 전국에서 이곳이 가장 태평하다. 장시는 날마
다 사방의 경계에 즐비하므로, 이익을 좇으며 행상하는 무리들도 많고, 오랫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인연을 맺어 이익을 좇는 풍조가 전국에서 가장 심하다.
전라도는 농업農業에서 밭이 적고 논이 많으며, 벼농사에만 힘쓴다. 올벼 이외에는 모두
모내기를 한다. 모판을 다스리고, 모내기할 때에 거름을 주고 밭을 가는 것이 영남과 거의
같다. 밭에는 보리와 콩을 심지만, 동부 지방의 산간 지대 가까운 곳에서는 조를 심는 경
우가 많다. 목면도 이곳의 토산물이지만 경상도의 것만은 못하다.
밭은 그루갈이를 하고 논농사만을 숭상한다. 그러므로 2~3차례 뒤집어 갈고 모를 심고,
모내기 한 뒤에는 3~4차례 호미질한다. 매년 가을철에 벼가 익어 누런 구름이 들을 덮을
때에 가라지가 하나도 없었다. 호미질하고 씨 뿌릴 때는 남녀가 들에 두루 퍼져 무리를 지
어 대를 이루어 농가를 부르며, 힘을 모아 먼저 올라가고 징을 울리고 북을 쳐서 그 수고
로움을 위로한다. 서주西周 시대의 빈邠 지방에서 권농하던 풍조가 호남에 아직 남아 있
다. 관개灌漑의 이로움은 호남이 영남과 같으며, 산골짜기에 있는 밭은 겨릿소로 경작하
고 나머지는 모두 호릿소로 경작한다.
---------------------------
98) 혈식血食: 혈은 희생犧牲을를 뜻하는 말로, 희생을 바쳐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
--------------------------------------
전라도는 농업 이외에도 마포麻布·면포綿布·뽕나무·모시·담배·대자리[竹簟]·대
그릇[竹器]·빗·삿갓·패랭이 등에서도 이익을 낸다. 마을마다 대나무 밭을 두어, 1경
마다 대나무를 심으면 100묘의 농사와 맞먹을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 온갖 과일이 다 있
고, 바닷가와 섬에서는 석류石榴·귤橘·유자柚·비자枇子 등의 토산물이 있다. 바닷가
에 있는 호와 포구에 있는 백성들은 물고기 잡이와 소금만을 업으로 삼는다. 산간 지역의
고을에서는 나무·산나물·벌꿀도 생활에 보탬이 되고, 민가에서는 삼을 심는 것을 업으
로 삼는 수도 있다. 종이는 전국에서 가장 이름이 나 있다. 그러므로 수경은 닥나무를 심
어서 먹고 살기도 한다. 전주의 생강 밭은 실제로 팔도의 각 고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
이니, 이익이 대단히 많다. 온갖 물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온갖 공인들이 다 모이므로,
큰 상인들도 다른 어느 도보다 많다.
전라도는 산천이 우리나라 땅의 마지막 끝에 있으며, 산은 두드러지고 물은 넓고 깊어서,
이름난 산과 큰 강이 얽혀 감돈다. 나지막한 산과 조그마한 강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고,
비단같이 밝고 빼어나고 열려 있지만, 웅혼하고 두터운 기상은 없다. 그러므로 이곳 사람
들은 실질의 풍조가 적다. 북쪽으로는 충청도와 인접해 있어 사치스런 습속에 물들어 있
고, 동쪽으로는 경상도와 접해 있으면서 문文을 존숭하는 풍조를 모방하였으며, 남과 비
교하고 바깥으로 꾸미기를 좋아하는 풍속도 겸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하는 품에 여
유가 있으나, 성실함이 부족하다. 사치를 존숭하며 과장이 심하면서도, 학행과 충절을 칭
찬하여 장려하니 진실로 아름답다. 그러므로 허와 실이 서로 비기는 일이 없지 않아서, 탁
월한 절개와 순수한 행실 등 아름다운 일을 하는 한편, 헛된 폐단을 꾸미니, 이 때문에 나
머지 모든 도들의 비웃음을 산다.
전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의식과 어염, 산해진미山海珍味들이 생활을 풍족하게 하므로,
국내에 거주하는 낙원으로 전라도에 비할 만한 데가 없다. 그러나 순박한 풍속이 적어서
쟁송爭訟이 대단히 많다. 관속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요행을 바라므로, 사송詞訟의 번거
로움이 전국에서 제일 많다. 굳건하고 밝고 공적이고 염치 있는 수령이 아니라면, 속임수
에 빠지기 쉽다. 마땅히 염치로 위엄을 삼고 공정함으로 밝음을 삼으며, 휘지 않고 올바르
------------------------------
며 번거롭지 않고 간단히 해야만 풍속을 바로잡아 다스릴 수 있는 도가 될 것이다.
전라도의 관액과 형편을 논한다면, 해방영海防營99)은 육진陸鎭보다 더 중대하다. 천리의
쏜살같은 바람은 한 호흡의 사이에 있으니, 서남쪽 큰바다의 바깥은 모두 아득히 헤아릴
수 없는 곳이다. 육로陸路는 팔량치八良峙가 운봉지계雲峯地界에 있고, 그 험한 곳은 원
래 조령이니, 그 요지는 원래 조령과 죽령처럼 견고하지 않다. 그러나 경상도로부터 우하
도右下道로 통행하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다. 그러므로 운봉雲峯에 겸진兼鎭을 설치한
것은 참으로 그만한 까닭이 있다.
남원은 원래 웅부雄府100)로서, 교통의 요충지에 있으며, 수로와 육로가 모두 폭주하는 곳
이다. 따라서 이곳에 성지城池를 두고, 방영防營을 설치하기에 마땅하며, 운봉雲峯과 보
거지세輔車之勢101)를 이루니 호남에 육군의 절제사로 두었다. 남으로는 좌수영左水營과
접해 있으니 완급이 있을 수 있다. 의지할 만한 해방海防으로는 우수영右水營에서 북쪽
의 소영蘇營까지 700여 리 떨어져 있으면서 바다로 통하는 목구멍인 군산도群山島만 한
곳이 없다. 바다의 파도가 크고 아득하며, 섬은 섞여 떨어져 있으나 배가 통하지 않는 곳
이 없다. 이 섬의 왼쪽으로는 숨겨진 섬과 얕은 항구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큰 물결이 있
다. 다만 섬의 남북에는 두 산이 벽처럼 서 있어 그 사이가 절로 바다로 통하는 포구가 되
고, 평평한 일대는 바람을 머금고 흐름을 느리게 한다. 그러므로 삼남三南 선박의 왕래는
모두 이곳을 말미암지 않는 곳이 없다. 이것은 실제로 하늘이 낸 해방海防의 형승形勝이
된다. 연전에 관찰사는 장계狀啓를 올려 본진 첨사僉使를 수군 영장으로 승진시킬 것을
청하였지만, 지금은 도리어 오랫동안 근무해야 되는 자리로 강등되어, 한만한 진鎭으로
버려졌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중원일통지中原一統誌』에는 천하의 형편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해도를 논한다면, 그
형편을 대충 논하는 것이 없는데, 이 섬은 12개의 봉우리가 성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 험
한 것은 이미 화인華人이 일컬었던 도이고, 오직 본국이 진을 두는 방식은 이처럼 소루하
다. 지금 첨사를 영장營將102)으로 승진하게 하고, 칠산七山 바다 이북에 각각의 진을 두어
야 한다. 그리고 수군의 절제는 백성을 모집하는 방법을 조치해야 한다. 은연중에 급한 일
을 당한 뒤에야 막고 차단하려 해서는 안 되며, 해방海防은 결코 좌우수영左右水營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
---------------------------
99) 해방영海防營: 조선조 말엽 경기·황해·충청 삼도三道의 수군을 통할한 군영으로서, 고종 21년(1884)에 두었다가 동 25년
(1888) 친군영속의 우영右營·후영後營과 합하여 통위영統衛營으로 고쳤다.
100) 웅부雄府: 웅장하게 큰 고을을 말한다.
101) 보거지세輔車之勢: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형세이다
102) 영장營將: 조선조 때 각 진영鎭營의 으뜸 장관將官. 총융청摠戎廳·수어영守禦營·진무영鎭撫營과 팔도八道의 감영監營· 병영兵營에 딸리는 두 가지 계통이 있으나, 그 직무는 지방 군대의 관리에 있다.
1.4.9. 제주도 耽羅
제주는 원래 우리나라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나라 이름이었다. 국조에서는 제주濟州·
대정大靜·정의旌義 등 세 읍을 설치하고, 제주목濟州牧으로 하여금 도 전체를 총괄케
하였다. 이곳은 이국적인 풍토이다.
한라산漢拏山이 섬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고, 사방으로 뻗친 지맥이 제주도의 경락이
된다. 이 섬은 둘레가 600여 리이고 동서가 200여 리이며 남북은 90여 리이다. 동쪽, 서
쪽, 남쪽은 모두 끝없는 큰바다이고, 유구琉球는 서남쪽에 있으며, 일본은 동남쪽에 있
고, 소주蘇州와 항주는 곧장 서쪽으로 가면 있으나, 아득히 추측할 따름이다. 북쪽으로
는 영암靈巖의 소안도所安島까지 700여 리이고 추자도楸子島까지는 500여 리이며, 동
북쪽으로는 강진康津 남운도南雲島까지 600여 리이고 청산도靑山島까지 700여 리이
다. 한라漢拏란 은하수[운한雲漢]를 잡을 수 있다[가나可拏]고 하여 붙여진 옛 이름이
다. 옛날부터 매년 춘분과 추분을 전후로 하여 3일의 자시子時에 노인성老人星103)이 산
꼭대기에 나타났다.
한라산 위에 백록담白鹿潭이 있다. 백록담은 세속에서 선인이 백록을 타고 놀았다고 하
여 붙여진 이름이다. 4~5월에도 얼음과 눈이 녹지 않고 남아서 붉은 꽃과 초록색 풀과 서
로 비춘다. 산천은 맑고 기괴하며 웅혼한 것이 많으므로 배출 인물들이 준수하고 아름다
운 사람들이 많다. 맹인병이 거의 없고, 단지 독 안개 때문에 간질과 학질이 많다.
제주도의 절서와 풍기는 육지와 사뭇 다르다. 겨울에 단단한 얼음이나 서리, 눈이 없다.
---------------------------
103) 노인성老人星: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남극南極 하늘에 가까이 있는 별. 중국 고대古代 천문설天文說에서 사람의 수명壽命
를 맡아보는 별로 기술되었는데,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한다.
----------------------------------------
5월에도 여전히 솜옷을 입고, 8월에도 여전히 칡베 옷을 입으며, 1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겨울옷을 입는다. 2월에는 도리어 가장 추울 때와 같이 입는다. 8월 이후부터 3월 이전까
지는 날씨가 맑고, 4월부터 7월까지는 축축하고 흙비가 약간 왔다가 갠다. 토속은 바람을
두려워하는데, 특히 남풍을 가장 두려워한다. 남풍을 많이 접하면 두통이 생겨 죽을 때까
지 병이 된다. 온 도에서 우물물이 대단히 귀하니, 물맛이 탁하고 소금기가 많으며, 토질
은 뜨고 건조하다.
제주도는 백성들의 습속이 우둔하면서도 간교하고, 말을 잘하고 영리하며, 성품이 인색하
다. 딸을 귀히 여기고 아들을 천히 여긴다. 속칭俗稱 첫째는 기녀妓女, 둘째는 관노官奴, 셋
째는 아전衙前, 넷째는 향소鄕所104), 다섯째는 무반武班, 여섯째는 유사儒士이다. 여기서
기녀를 첫째로 꼽는 이유는 그녀가 관장官長과 친하고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전들
이 기녀를 보면 먼저 절한다. 관노가 기녀와 친속이 되므로 권력이 아전보다 강하다.
풍속은 쩨쩨하고 성질도 인색하므로, 쟁송하기를 좋아한다. 장례는 산에다 하지 않고, 반
드시 들에서 치른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넘으면 대나무로 닭 둥지처럼 광주리를 만
들어 아이를 그 가운데에 두고 흔들며,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을 사용하
지 않는다.
또한 배를 타는 데 익숙하다. 양인과 천인을 막론하고 수절하는 여자가 없다. 어머니는 같
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은 서로를 너무나 친애하는데 반해,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
른 형제들은 거의 길거리의 남 보듯 한다. 신역身役으로 대단히 고생한다. 친족들은 모두
호적 하나에 싣는다.
2월을 영등迎燈이라고 한다. 해로로 통하니 언어는 많은 류가 있고, 화음華音도 모두 문
자로써 한다. 의복은 피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황구黃狗 가죽을 상급으로 치니, 대체로
모두 이역의 물색이다. 남자들은 적고 여자들은 많다. 1부夫가 4~5명의 처를 두어서, 1사
람에게는 10여명의 자식이 있는 경우도 있다. 5~7명의 자녀를 둔 자가 늘비하고 아들이
--------------
104) 향소鄕所: 유향소, 향청이라도 한다. 고려, 조선 시대에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으로,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감
찰하며, 민의를 대변하였다.
---------------------------
없는 자는 매우 적다.
제주도는 농업이 보리밭과 조밭이니, 모두 7~8차례 경작하고, 파종한 뒤에 소와 말을 몰
아 4~5차례 두루 밟게 한다. 이곳의 토질은 뜨고 건조하므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발아
한 뒤에 반드시 말라 죽는다. 벼·보리·콩·대두·팥·메밀·목면은 모두 심을 수 있
다. 봄보리를 경작하지 않는 것은 대개 4월 이후에 흙비가 오며 습기가 많아서 알곡이 맺
지 않는 까닭이다. 온갖 곡신들이 모두 있지만 다만 귀리는 없다.
제주도의 생리生利로는 농업 이외에도 해산물·삿갓·말총 등의 물건이 있다. 딸이 10세
만 되어도 모두 삿갓을 만든다. 이년목二年木·산추자山杻子·무환자無患子·진주·조
개로 만든 물건은 모두 토산품이며, 진주의 크기가 호도만한 것도 있지만 바다를 넘기를
매우 꺼리므로 고가로 팔 수 없다. 노자鸕鷀·앵무배鸚武杯·산호실珊瑚實·무회실無
灰實·노실蘆實·노죽蘆竹 등은 때때로 해안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이것들은 바다에서 나
온 것이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 떠내려 온 것이기도 하다. 포구의 백성들은 이것들을 얻
어서 생활에 보탠다.
도민島民은 육지로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고질과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고향을 떠나 떠돌 수가 없다. 그 중 가장 괴로운 것은 목자牧子105)·포작鮑作106)·선격船
格107)·답한畓漢108)의 4가지 역이다.
환곡還穀은 매년 창고를 기울여 다 나누어 준다. 왜냐하면 이 지방의 습기와 흙비 때문에 창
고에 보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창고에 두면 썩어 상한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백성들
은 감히 고향을 떠나지 못했고, 또 암행어사와 관찰사의 염찰이 없으므로, 그곳의 목백牧伯
이 아무리 탐욕스러워도 감히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도민이 관장을 원수 보듯
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아울러 중죄를 지고 이 섬으로 귀양 온 사람은 많지만, 도리어 이
섬에서 기강이 점차 해이해졌다. 일단 민심이 움직이면 관장을 보호하기 어렵다.
근년 이래로 내지에 있는 육지의 고을들도 오히려 아전들과 백성들이 관령을 따르지 않
------------------------------
105) 목자牧子: 목장에서 소와 말을 사육하는 인부를 가리킨다.
106) 포작鮑作: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소금에 절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107) 선격船格: 사공을 돕는 곁꾼이다.
108) 답한畓漢: 논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
고 수령을 범하는 폐단이 있는데, 하물며 이처럼 절역의 해도로서 왕의 교화로부터 뚝 떨
어진 먼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무궁한 심려가 있는 것이다. 관장이 된 사람은
마땅히 공명하고 청렴하면서 위엄이 있어야 하고, 백성들을 관대함과 인자함으로 두텁고
무거우면서도 진중하게 어루만지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다른 풍속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존중하고 두렵게 여길 줄 알게 한 다음에야 풍속대로 다
스리는 정사를 펼쳐야 할 것이다.
한라
1.4.10. 총론 總論
맹자孟子는 “현실적으로 물건은 모두 다 같을 수 없다.”고 하였다. 나무가 몇 아름이 되면
이치상 나무의 중심과 주변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오이는 직경 1촌의 굵기이지만, 열
매와 줄기의 맛이 전혀 다르다. 하물며 수천 리 땅이 팔도로 나뉘어져 있고, 고을이 3백 개
나 되는데 풍요風謠와 토속土俗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공부자께서 시를 추려 뽑을 때
에 먼저 여러 나라의 풍속을 기준으로 하였다. 공부자는 이 시들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각각의 시는 그 지방의 풍요風謠에서 얻은 것이다. 「교목喬木」과 「표매標梅」에서 남국의
교화를 볼 수 있고, 「당솔堂蟀」과 「산추山樞」에서는 이전 성인의 풍모를 상상해 볼 수 있
다. 「빈인豳人」에서 토고土鼓를, 「위녀魏女」에서 칡신을, 「중하中河」에서 잣나무, 배, 준
교浚郊의 간모干旄 간澗에 있는 쟁반, 담菼의 모직물, 정鄭의 관치의館緇衣, 제齊의 뉴로
환狃盧環, 창겸蒼蒹, 깃털부채[노도鷺翿], 고의羔衣, 부우蜉羽를 읊은 것은 모두 인심人
心에서 나온 것이다. 풍요와 토속의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을 얻었으니, 성정性情이 성음
聲音과 영향影響에 드러났다. 이를 통해 후대 사람들은 오히려 여러 지방의 풍속을 상상
해 볼 수 있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에서 생장하고 우리의 풍속을 보고 들었는데도, 그 인심
이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민습의 사치와 검소는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두우
니 그 방향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히려 소리와 음, 영향에서 얻는 것만 못하니, 또
한 옛날의 이른바 박식한 군자에 비해 모자람이 있다.
천리나 백리 밖의 풍속은 본래 같지 않다. 사람에게 모여 있는 것은 지령地靈이지만, 지령
에는 조화롭거나 조화롭지 못하거나, 맑거나 탁한 구분이 있다. 곡식을 기르는 것은 흙의
성질이지만, 비옥함과 척박함, 소금기가 있거나 없는 차이가 있어서 이용후생하는 데에
각 지방 물산에 따라서 풍부하고 그렇지 않음이 있다. 우공禹貢에 실린 구주九州의 각 땅
에는 각각의 공부, 각각의 바구니가 동일하지 않으니, 삼도三都와 팔로八路, 산천山川, 민
속民俗, 농업農業, 생리生利 등의 경우 어떤 것은 같은 데 또 어떤 것은 다르다. 비록 마치
등한하고 적연한 가운데에 있는 듯하지만 이러한 차이를 풍요風謠를 보고 채집하니, 실
제로 풍속에 따라 가르치고 다스리는 교화와 관계가 있다. 이는 이것으로 그것을 기록하
는 것이니 건도建都의 아래에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식견 있는 사람들은 필시 강역疆域의 구분이라고 말하겠지만, 하늘이 그것을 한
정지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8도를 구획한 뒤부터 산천山川·요속謠俗·토산土産도
어찌 이렇게 저렇게 경계가 다른가? 빈邠·진秦·정鄭·위衛·제齊·진陳·용鄘·위
魏·조曹·회檜의 경계와 기주冀州·연주兗州·청주靑州·서주徐州·양주楊州·형주
荊州·옹주雍州·양주梁州의 경계들은 모두 실처럼 얽혀있으나, 제나라가 위나라에 가
까우니, 어찌 위나라 풍속에 근검이 없었겠는가? 청주는 서주와 붙어 있으니 필시 서토徐
土의 적식赤埴이 있을 것인데, 성인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였을까? 대개 대체로 같은 것
을 취한 것일 뿐이다.
같은 도를 두고 말하더라도, 같은 도 안의 풍속에도 동서남북의 차이가 있고, 한 읍을 두
고 말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동서남북의 차이가 있다. 비록 1방防 1리里 안에서라도 서로
섞여 똑같은 것이 없으니, 여기서 기록한 것은 대충 같은 것을 취한 것일 뿐이다. 우리나
라의 이남二南이 기주冀州에 해당하므로 경기도는 그것을 실었다. 그 다음은 삼도三都
니 중요한 것으로 순서를 정한 것이고, 그 다음의 칠도는 지형으로 순서를 정하였다. 백
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북에서 서까지, 서에서 바다까지, 바다에
서 관동·호서·영남·호남까지이니 이것은 각 도의 순서를 줄지어 서술한 것이다. 백
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라산에서 멈추므로, 북으로부터 서쪽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부터
바다까지, 바다에서 관동關東·호서湖西·영남嶺南·호남湖南까지이니, 이것은 각 도
의 순서를 줄지어 서술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공禹貢에서는 곧 산천의 이
름으로 지형을 구획하고 나열할 때에 양주와 형주를 앞에 놓고 옹주와 양주를 뒤에 기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록할 때에 서북쪽을 먼저하고 동남쪽을 뒤로 한 것이니 어떻습니
까?”라고 하였다.
우공禹貢에는 물과 땅을 평평하게 다스리는 공적이 서술되었으므로, 먼저 아래에 있는
것에서부터 차례로 높고 평평한 육지에까지 기록하는데, 산천의 경락을 서술하므로 대개
산진과 택사의 뜻에서 취한다. 한 도 가운데에서 차례로 서술하여 예를 들 때는 먼저 산천
의 경락, 풍기로부터 인물들의 품성, 절후의 빠르고 늦음을 서술하고, 백성들의 습속에 대
해서는 문예와 질박함, 풍성함과 검박함을 차례로 서술하고, 인심의 두텁고 박함, 풍속의
상황을 서술하고, 다음으로 농업과 생리를 기술하여, 따뜻함과 풍족함, 그리고 봉양과 장
례 도구를 서술하였다. 각각 토의土宜109)에 따라서 풍흉이 되고, 형편과 습속으로 총괄하
고 무마하여 은혜를 베푸는 정사에 대비하고, 각각 토속을 따라서 잘 인도하고 관액關扼
으로 끝맺는다. 삼가 성조들이 마련한 방도에 내 견해를 삼가 부친다.
중국의 산천은 모두 곤륜산崑崙山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으로부터 큰 줄기를 일으키니, 오
른쪽으로 돌아 동남쪽에서 멈춘 것이므로, 서북쪽은 등이 되고 동남쪽은 배가 된다. 중원
의 모든 물건들은 모두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돌아가 조회하고, 선천의 산진은 서북쪽
에서 동남으로 은택을 쏟아 붓는 형상이다.
우리나라는 산천이 모두 백두산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니, 동북으로부터 큰 갈래가 왼쪽으
로 돌아서 동남쪽에서 멈춘다. 그러므로 동북쪽은 등이 되고 서남쪽은 배가 된다. 나라 안
의 모든 물들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돌아간다. 이것은 후천後天이니 간艮, 즉 산
山은 동북쪽에 있고, 태兌, 즉 택澤은 서쪽에 있는 상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여러 나라들
이 각자 수립되지 않음이 없다. 혹은 멋대로 황제니 왕이니 말하고, 때로 빈으로서 복종하
기도 한다. 우리 동쪽은 산천과 지형이 본래 중국과 서로 짝이 되어 조회하여 받들므로,
개국한 이래로부터 일찍이 중화中華에 신복하고, 일심으로 사대하지 않지 않은 적이 없
--------------------
109) 토의土宜: 토산물을 말한다.
-----------------------------
으니, 이것 또한 천지자연의 이치이다.
물산物産과 요속謠俗은 모두 풍토를 따르므로, 개천과 그 물의 근원이 서로 접해 있고, 닭
소리와 개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우니, 이것은 같고 저것은 다른 것이 있어서 서로
닮지 않았다. 향랑香娘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서 나서 절개를 지켜, 불이제不二製 산에 화
곡花曲을 두어 화살에 맞아 끝내 강에 빠져 죽었으니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아름다웠으므
로, 영남의 풍속이 교화되었다. 무릇 가요歌謠의 곡조는 모두 느리고 소리를 끈다.
서관西關의 효녀孝女들이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매번 달 아래에서 스스로 창하고 스
스로 화답하여, 그 슬픈 마음을 술회했지만, 그 효녀의 마음을 알아 주는 이가 없었다. 그
소리가 슬프고 느리며, 원망하고 그리워하니, 서쪽 지방의 풍속이 교화되었다. 농요와 들
에서 부르는 노래는 모두 처연하고 원한이 있다. 경주의 개는 모두 꼬리가 없는데, 경주를
동경이라 칭하므로 꼬리 없는 개들은 모두 동경견東京犬이라고 한다. 안협安峽의 순채
나물은 하동河東의 사방에서 나고, 인근에서는 농어가 나지 않는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에 있다. 길이 대단히 좁아서 한 줄기를 통하자마자 사람들이 몸
을 굽히고 서너 리쯤을 가고 나서야 조금은 빈 공간을 만날 수 있으니, 네 귀퉁이가 모두
평평하고 가운데에 비옥한 땅이 있으니, 파종하기에 적당하다. 푸른 학이 서식하므로 이
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옛날 세상을 피해 거주하는 곳으로, 지금은 무너졌지만 담과 도
랑, 밭두둑은 아직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산호는 간성군杆城郡에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큰물이 열산을 잠기게 하였을 때, 새로운 현을 산록으로 옮겨 짓고 옛날 현
은 물 바닥에 깊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하늘은 맑고 물결은 고요한데 장옥墻屋은 의연하
여 볼만하다.
의성현義城縣에는 빙산氷山이 있고 돌구멍이 있다. 입하立夏가 지난 뒤에는 얼음이 구멍
바닥에서 나오고, 흙 가운데는 극히 뜨거우니 얼음이 단단하였다가 입동立冬 뒤에는 절
로 녹는다. 이것은 모두 산수山水 사이의 이적異蹟이며,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다. 이
또한 풍토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편말篇末에 기록하였다.
재상 직은 황제黃帝 때부터 설치하기 시작하여 당唐·우虞·하夏·상商에서도 재상 직
을 설치하였다. 주대에 이르러 삼공三公을 두었는데, 삼공은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
太保이다. 그 아래에 삼고三孤도 두었으니, 삼고는 소사少師·소부少傅·소보少保를 말
한다. 고孤는 공公보다는 못하다. 진대秦代에는 승상丞相라고 하였고, 그 아래에 어사대
부御史大夫를 두었다. 한대漢代 초기에 양부兩府를 두었으니, 양부는 승상부丞相府와 태
위부太尉府이다. 동한대東漢代에는 삼공三公과 사부四府를 두었는데, 태부太傅를 상공
上公이라 하고, 태위太尉·대사도大司徒·대사공大司空을 삼공三公이라 하였다. 헌제獻
帝는 삼공三公의 관직을 혁파하고, 상국相國을 복설復設하였다.
진대晉代부터 수대隋代까지 연혁沿革은 일정하지 않고 변화가 심했다. 태부太傅·태재
太宰·태보太保·태위太尉·대사마大司馬·대장군大將軍·사마司徒·사공司空·중
서中書·비서秘書·문하門下ㆍ상서尙書·내사內史 등이 모두 재상 직을 가리킨다. 당
대 초기에 삼공三公을 두었는데 태위太尉·사공司空·사도司徒이고, 삼성三省도 두었
는데, 상서尙書·문하門下·중서中書를 가리킨다. 정관貞觀 연간에 주나라 제도를 다시
복원하여, 삼태三太를 삼사三師로 삼았고,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와 평장정사平章政事를
두었다.
개원開元 연간에 좌우승상左右丞相을 설치하였다. 송대宋代 초기에 당대의 제도를 따랐
으며, 신종神宗 때에 좌우복야左右僕射로 고쳐 정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철종哲宗은 태
재太宰와 소재少宰로 고쳤고, 모두 참정參政을 겸하게 하였다. 휘종徽宗은 삼공三公을
두었다. 남송南宋에서는 태조太祖·신종神宗의 제도를 참고하여, 이어서 좌우승상左右
丞相으로 고쳤으며,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을 설치하였다. 황명皇明 초에 좌우승
상左右丞相을 설치하고, 그런 뒤에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고 전각태학사殿閣太學士를
겸하게 하였다.
우하영의 천일록 --도읍의 건립 建都 중에서....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