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설교일 : 2008년 08월 17일
본 문 : 마가복음6:32-44
설교자 : 조재진목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기적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기적 사건입니다. 아마 모든 복음서에 기록할 정도로 이 기적의 사건은 여러 가지 부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전도하고 돌아온 열두 제자들과 함께 쉬기 위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쉬러 간 그곳까지 따라 왔습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여기는 빈들이고 날도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을 보내어서 무엇이라도 사먹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이 명령은 사실 제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남자 어른들만 하더라도 오천 명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실제로는 아마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이 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하게 되지요. 그때 주님은 그러면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알아보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전부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백 명씩, 혹은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향해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광주리에 담아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물고기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는 떡이 떨어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나누어주고 또 나누어주었더니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나 남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되었을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 기적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감히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사람들을 통해 이 땅 한가운데서 일어났고, 그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 땅에 나타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자의든 타의든,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일어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 기적에 동참시켰다는 것입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기적의 중심에 그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의 중심에서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였을까요? 주님이 일으키는 기적에서 제자들이 한 일을 어떤 것이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시대, 하나님의 기적이 이 땅 가운데 일어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픔을 함께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첫 번째 우리가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낄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아픔을 함께 나누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본문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허기진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4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십시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여기에 보면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그들의 절망, 그들의 아픔, 그들의 배고픔을 함께 느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 연민의 정, 이것이야말로 모든 구원과 생명의 역사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심, ‘하나님의 compassion’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기적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죄와 심판에 대해 하나님은 연민을 느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슬퍼하셨고, 그 죄 값으로 사람들이 당할 지옥의 심판을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 말로 바로 ‘하나님의 compassion’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고통을 몸소 ‘함께 느낀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심판받고 저 지옥으로 가는 인간의 고통을 주님은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이 연민의 정,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바로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십자가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기적을 가능케 한 이 compassion이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35절과 3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소서” 여기에 보면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해가 저물어 갈 때였습니다. 더군다나 빈들이었습니다. 아주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기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때가 저물어 가고, 이곳은 빈들이고, 이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배가 고플 것이고, 지쳤을 것이고... 라는 무리들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하고, 이들과 함께 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서 ‘주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을 보내어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은 사실 어디에서 먹을 것을 구해오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너희가 바로 저들의 아픔을 짊어지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빈들에서 굶주리던 수많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준비될 때 일어나는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같이 아파하고, 함께 책임질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부르짖는 사람을 찾습니다. 나라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서 ‘하나님 이 나라를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교회의 부흥이 나의 소원이 되어서 마치 내 소원인 것처럼 ‘오 하나님 우리교회를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동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왜 선교사들이 평생 한 나라에서 헌신하는 줄 아십니까? 그 나라에 가서 그들의 아픔을 눈으로 보고 함께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선교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함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즉 compassion이 없습니다. 누가 교회의 일군입니까?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눈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일군이 되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충북 음성 꽃동네가 시작된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걸인 한 명이 어느 신부님의 숙소에 찾아왔는데, 신부님은 그 걸인에게 한 끼의 식사할 정도의 돈을 주었답니다. 얼마 후에 그 걸인은 다시 찾아왔고, 그 후에도 계속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 신부님은 이 걸인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를 따라가 보았답니다. 그 걸인은 신부님에게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더 구걸하더니 꼭 아홉 명의 식사비 정도만을 구걸하고는 숙소로 갔답니다. 신부님이 몰래 그 사람을 뒤따라가 보니까 형편없는 그의 숙소에는 아홉 사람이 누워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이 걸인이 다시 그 신부님에게 구걸을 하러 왔을 때 신부님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몸도 성하지 않는데 어떻게 아홉 명의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까?”그러자 그 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걸어 다닐 수 있거든요, 걸어 다닐 수 있는 제가 누워있는 이 사람들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한마디에 신부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음성에 있는 꽃동네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이웃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갑니까? 얼마나 교회의 비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compassion을 가지고 ‘아무대책 없는 이 많은 무리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기 시작할 때, 그들에 대해 책임감,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에게 있는 것을 드립니까?
두 번째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에게 드렸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드릴 때, 그 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돈은 노동자들의 연봉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런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혹시 있다 하더라도 해도 저물어 가고 빈들인 이곳에서는 먹을 것을 준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우선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3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여기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 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기적이란 제자들과 전혀 상관없는 곳, 전혀 엉뚱한 곳에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된다. 불가능하다’라고 계산만 하지 말고, 너희들이 가진 것, 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그것을 가서 알아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서 제자들이 알아보니까 무엇이 있었습니까? 정말 보잘것없는 것,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여자와 아이들의 숫자를 제외하고 세어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 많은 무리에 비해 제자들이 가진 것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에 보면 떡도 그냥 떡이 아니라 ‘보리떡’이라고 말합니다. 물고기도 그냥 생선이 아니라 ‘옵사리온’입니다. 옵사리온이란 어부들조차 상품가치도 없고, 그렇다고 먹거리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해변이 그냥 버리는 작은 물고기를 말합니다. 그러면 당시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은 그 버린 물고기, 옵사리온을 소금에 절여서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을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제자들처럼 계산해보고 ‘예수님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너무 작은 것 같아서 우리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서 알아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 선생님은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계산만 앞세우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당시 제자들의 모습처럼 보여집니다. 로마라는 거대한 나라가 자신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마치 오천 명 앞에 놓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거대한 나라 로마를 제자들을 통해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같은 제자들이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오늘 우리 중에서도 이런 상황 앞에 서 있는 성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문제는 너무 큽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오천 명 같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그 초라하고 아무 것을 주님께 드렸더니 주님께서 그것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내가 움켜쥐고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놓치고 내가 할 수 없다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절망에 빠져있는 한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 “얘야, 밖에는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널 지켜주실 거야.” “정말 밖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그분은 어디에든 계신단다. 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뒷문을 살짝 열고 틈새로 말했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실래요?”
어쩌면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아이와 비슷합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은 ‘너희에게 무엇이 있는지 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기적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것을 내어놓는 헌신을 통해 일어납니다. 내 것을 나눌 때 기적이 나타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은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기적의 주인공입니다. 주님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전능하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움 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기적의 파트너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의 사람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한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기적을 알고 계십니까? 열왕기상17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이 명령으로 땅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자 온 땅에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그마치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의 시기에 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냅니다. 그곳에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할 사람으로 한 과부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는 어떻게 사르밧의 한 과부가 자기를 공궤할 사람이라고 알아 보았을까요? 하나님은 그 과부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용모도 알려주지 않았고, 핸드폰 번호도,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혹시 서로 알아볼 사인을 정했을까요? “저는 텁수룩한 머리에 투박한 가방을 메고 있습니다~. 저는 빨간 스웨트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났을까요?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3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기적의 파트너는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순종과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가서 보니까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가서 물을 좀 가져오고, 네 손에 떡 한조각도 같이 가지고 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이런 대답을 하지요.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너무 무정하게도 또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그것을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여인의 그 말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년 육 개월 동안 그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였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순종과 헌신이 하나님의 기적을 가능케 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본문에 보면 그들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3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자들은 순종하여 사람들을 혹 백 명, 혹 오십 명씩 앉힙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과 사람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앉히고 나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에 있는 떡을 떼어 주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광주리 하나 가득 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인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 떡을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도 동일하게 그렇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는데 그 떡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또 생기고 또 생깁니다.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이 떼어주는 것을 받아가지고 사람들에게로 뛰어갑니다. 사람들은 맛있게 떡을 먹습니다. 보십시오, 기적은 예수님의 손에서 일어났습니다. 떡을 떼는 가운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제자들에 의해 사람들에게로 전달되어집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기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그 기적의 전달자 제자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기적의 파트너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41절을 한번 더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여기에 보면 “가지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라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을 자세히 보면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식의 용어들입니다. 유명한 예배신학자인 그레고리 딕스는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 예수님이 "떡을 들었다"(took), "축사하시고"(blessed) , "떼어"(broke), 제자들에게 "주셨다"(gave) 라는 것들이 바로 "유카리스트의 액션"이라고 했습니다. 성만찬의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는 거룩한 희생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생명의 떡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단순히 "떡"이나 "오천 명"이라는 현상적 사실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의 ‘인류 구원’이라는 궁극적 목적에로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도식을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굶주린 수많은 무리들,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있는 불쌍한 인간들과 구원자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둘을 연결하는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에서 나오는 떡을 굶주린 무리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죄와 죽음아래 있는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생명의 떡을 먹은 사람들이 다 배부르고 다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리는 비밀중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누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까? 제자들처럼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도 여러분, 저는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겐 하나님의 compassion이 있습니까? 세상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 하나님 모르는 사람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합니다. 또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가진 것이 보잘것없어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은 계산하지 않고 단지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생명의 떡을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기적의 전달자가 필요합니다. 누가 기적의 전달자입니까? 누가 오병이어의 기적의 파트너가 되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주님이 찾는 그 기적의 파트너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