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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 종류 | 시험단계 | 한자 | 내용 |
1 | 소과 | 초시 | 初試 | 소과 1차 시험 |
2 | 복시 | 複試 | 소과 최종 시험 | |
성균관 입학 (생원, 진사) | ||||
3 | 대과 | 초시 | 初試 | 대과 1차 시험 |
4 | 복시 | 複試 | 대과 2차 시험 | |
5 | 전시 | 殿試 | 대과 최종 시험 | |
문과 급제 |
소과 (생진과)
1. 소과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한다. 초시, 복시의 2단계로 나뉘었다.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2. 생원과는 중국의 경적(經籍)으로 치렀으며, 합격한 자를 ‘생원’이라 했다. 생원과는 대체로 과거의 예비고사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원은 선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았으며, 진사와 더불어 하급관료에 취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실시한 과거이다.
3. 진사과는 소과초시(小科初試)의 한 분과로서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시(詩), 부(賦), 표(表), 전(箋), 책문(策問) 등이다. 합격한 자는 ‘진사’라 하여 초급 문관에 임명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계속하여 중급 관리 등용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4. 생원은 성헌들의 유교경전에 대힌 지식을 진사는 시와 문장의 창작능력 정치적문제등 선비로서 실용적인 공부를 하여 급제한 사람이다.
대과 (문과)
1. 초시는 복시에 응시할 사람을 선발하는 과거의 제1차 시험이다. 향시(鄕試), 초시는 복시, 전시를 치기 전해의 가을에 각 지방에서 실시하였는데, 식년시 외에 증광시, 알성시 등도 초시가 있었다.
2. 복시는 초시 합격자 중에서 33명을 선발하였으며, 이들은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전시는 임금이 참석하여 보던 시험으로 과거의 최종 시험이었다.
3. 법전에 규정된 전시의 종류를 보면, 식년문과전시, 증광문과전시, 별시문과전시, 정시문과전시 등과 이 밖에 무과에도 전시가 있었다.
4. 식년문과전시는 대과의 복시 합격자 33명을 그대로 급제케 하되, 대책(對策), 표(表), 전(箋), 잠(箴), 송(頌), 제(制), 조(詔), 논(論), 부(賦), 명(銘) 중 1편(篇)의 제술(製述)로써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7명, 병과(丙科) 23명의 등급을 정하였다.
5. 증광문과 전시의 액수는 식년문과전시와 같이 33명이었고, 대증광(大增廣)에는 7명을 더 뽑았다. 별시문과전시·정시문과전시의 액수는 일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정하였다. 그러나 시험과목과 시험관은 모두 식년문과전시와 같았다.
6. 무과전시에는 임금이 친림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7. 갑과 제1인자로 합격하는 자를 장원(壯元)이라고 했으며 참상관(종6품)에 기용하였다. 기성의 관리가 장원 급제를 한 경우 4등급을 진급시켰다.
무과
무과는 소과와 대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로서,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가 있었으며 장원을 선출하지 않았다. 무과의 복시는 28명을 선출하였으며, 전시는 복시 합격자 28명을 그대로 급제케 하되,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의 등급을 정하였다. 시험의 실시는 병조에서 담당하였다.
잡과
잡과(雜科)는 직업적인 기술관의 등용시험이었으므로 일정한 신분계급에 의한 세습 독점됨으로써 이들에 의해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층이 형성되었다. 잡과에는 역(譯), 의(醫), 음양(陰陽), 율과(律科)의 4과가 있었다. 사역원(司譯院) 전의감(典醫監) 관상감(觀象監) 형조 등 각 관서의 기술관원을 채용하기 위해 실시되었고 여기에는 초시 복시의 두 단계가 있었다. 시험의 실시는 해당 관청에서 담당하였다.
특별 채용 제도
1. 문과, 무과, 잡과 이외에 관리를 선출할 수 있는 특별 채용 제도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천거, 문음(음서), 취재, 이과 등이 있다.
2. 천거는 기존의 관리를 요직에 추천하는 제도였다.
3. 이과는 서리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4. 음서(蔭敍)는 본인의 학덕이나 선조의 특수한 공훈으로 말미암아 관리에 등용되는 제도이다. 2품 이상 관리의 자제로 그 제한을 엄격히 하였다. 또한 음서로 등용된 관리는 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5. 취재(取才)는 과거와 달리 하급 관리를 뽑는 특별 시험이었다. 양반의 자손 친척이나 경아전(京衙前)인 녹사(錄事) 서리(書吏) 등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실시되었는데, 과거와 다른 점은 일정한 관계(官階)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제한한 데 있었다. 또 녹사 서리도 처음에는 취재에 의해 선발하였으며, 하급 수령이나 외직의 교수(敎授), 훈도(訓導), 역승(驛丞), 도승(渡丞) 등을 임용하기 위한 취재도 있었다. 무과 계통에도 취재의 제도가 있어 무과의 합격자로서 아직 관직이 없는 사람을 등용하거나 해직된 사람을 다시 임명할 필요 등이 있을 때에 실시하였으며, 이 밖에 선전관(宣傳官), 내금위(內禁衛), 친군위(親軍衛), 갑사(甲士), 대정(隊正), 파적위(破敵衛) 등에서도 필요에 따라 그 요원(要員)을 시취(試取)하였다.
문제점
조선시대 후대에 과거 시험장에는 남의 글을 표절하거나 책을 끼고 들어가거나, 시험문제를 미리 알아내는 등, 온갖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함으로써 뇌물과 정실, 문벌의 고하,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니,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균관 입학 자격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 기회가 주어졌고, 그 외에 선발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은 200명이었으나 유동적이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을 학생 또는 성균관 학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대개 정원은 200명으로 여기에 미달하면 사학생도, 유음적자(有蔭嫡子), 소과초시 입격자(小科初試入格者), 조관(朝官) 등에서 보충하였다. 학생은 기숙사 '재(齋)'에 반드시 머물며 학령(學令)의 교칙을 엄수해야 한다.
국조방목
국조방목은 고려 충렬왕에서 조선 정조 때까지 수록한 것이 있다. 그리고 조선 태조에서 영조 때까지만 기록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이 때에 편찬된 것을 그 뒤 계속 추가해 19세기초까지 수록한 것도 있으며, 19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이 편찬된 것도 있다.
문과 방목 무과방목 잡과방목 사마방목(생원 진사 급제자)이 있다.
첫댓글 저의 소문에서 임란이후 과거 급제 선조에 대하여 말이 많아 조선시대 과거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젊었을 때 과거 급제 사실이 없었는데 환갑이 넘고 어느날 갑자기 문과에 급제했다고하니 의심하는 구전이 내려 왔을 것이고 후손들은 당시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급제한지는 아는데 어느해 소과인지 또는 기로과인지 모르고 그냥 문과 무과 급제라고 족보에 올리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급제를 했는데 관직을 하지 않는 수많은 선조들을 의심하는 후손들이 있어 죄송합니다. 사마시라는 과거명이 없는데 족보에 사마시급제라고 나오는 것은 후손들이 생원시인지 진사시인지 모르기에 사마방목에 있어 사마시급제라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