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배기도는 어떤 내용으로 해야 하나
조기연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예배학)
한국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이다. 매일의 새벽기도와 금요일 심야기도는 한국교회의 독특한 전통이자 세계교회에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이다.
이러한 전통에 힘입어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기도를 참 열심히 한다. 그러나 그 기도라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대부분“무엇 무엇을 주시옵소서.”하는 내용 일색이다. 기도는‘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도의 유구한 전통을 지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보통 간구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안식일에는 쉬셔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시비보다는, 유대인들은 기도를 할 때에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그 구조와 내용을 달리 한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기도만 했다 하면 무엇 무엇을 달라는 내용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거칠게 말하면 그것은 그 동안 성도들에게‘기도를 열심히 하라’고만 가르쳤지, ‘무엇을 기도하라’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공예배기도는 어떠한 구조와 내용으로 해야 하는가?
기독교 기도의 모델은 단연‘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눅 11:2)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에서 충분한 권위를 갖는다.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되는 찬양(praise) 부분과“오늘날 우리에게...”로 시작되는 간구(petition) 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의 구조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기도문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세기 당시의 유대교는 고정된 기도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형식으로 기도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교는 고정된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고, 또 세례요한도 자기의 제자들에게 따로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기도문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이것을 주님에게 요구하였던 것이다(눅 11:1-4).
그렇다면 당시의 유대교 기도문은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가?
유대교 기도의 핵심은 바로‘비르 하 마존’(Birkat-Ha-Mazon)이라고 불리는 식탁기도였다. 현대에 재구성된 1세기 비르-하-마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 주 우리 하나님,
선하심과 은혜와 자비로 온 세상을 먹이시는
우주의 왕 당신을‘찬양’하나이다.
오! 만민을 먹이시는 주님, 당신을 송축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주시고
토라와 생명과 양식을 주심을 인하여 당신께‘감사’를 드리나이다.
이 모든 것들을 인하여 저희가 당신께 감사하고
당신의 이름을 지금부터 영원히 송축하리이다.
오! 주님 땅과 음식을 인하여 당신을 송축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과,
당신의 성전과, 당신께서 거하시는 곳과,
당신의 안식처인 시온성과,
당신의 이름이 불리우는 거룩하고 위대한 성소에 자비를 베푸사,
다윗 왕조의 나라를 우리 세대에 회복하시며,
예루살렘 성전을 속히 건축‘하소서.’
오! 주님, 예루살렘을 건축하시는 당신을 송축하나이다.
그러니까 이 기도문은 찬양과 감사와 간구로 이루어진 3부 구조를 띠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교의‘열여덟 축복기도’(Shemoneh Esreh)도 3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축복기도의 처음 3개는 찬양이고, 마지막 3개의 축복기도는 감사이며, 그 중간의 기도들은 모두 간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간구는 상황과 경우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초기 기독교의 기도문은 이러한 유대교의 기도문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초대교회의 기도문을 담고 있는 최초의 문헌으로서, 주후 100년경 안디옥에서 기록된 디다케(Didache), 즉『열두 사도 교훈집』(The Teachings of the Twelve Apostles)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문서는 유대인이 대다수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의 교회규범인데, 그 기록 연대나 내용으로 보아 초대교회에서는 신약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 증거로서,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는 디다케를 성경 중의 한 책으로 분류하였고,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디다케를 초신자 교육을 위한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 문헌 안에 포함된 기도문 제9장과 제10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성만찬에 관하여: 감사를 드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잔에 관하여: 우리 아버지시여,
저희는 하나님의 종 예수를 통하여 저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아버지께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그 다음 빵을 뗌에 관하여: 우리 아버지시여, 하나님의 종 예수를 통하여 저희에게 알게 하신 생명과 지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이 부서진 빵 조각들이 산들의 꼭대기에 흩어졌다가 함께 모아져 하나가 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땅 끝들에서 모아 하나님의 나라로 들이소서. 영광과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 외에는 누구도 성만찬의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에 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제9장).
“식사가 끝난 후에 다음과 같이 감사기도를 하라: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인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종 예수를 통하여 저희에게 알게 하신 지식과 믿음과 불멸성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전능하신 주재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나이다: 인류에게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음식과 음료를 주시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저희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종을 통하여 영적 음식과 영적 음료를 주시고 영생을 주셨나이다. 모든 만물 앞에서 저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오, 주님, 당신의 교회를 기억하소서.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지켜 주소서. 그리고 사방으로부터 그것을 모으사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께서 예배하신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여 들이소서.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이나이다. 은총은 오고 이 세상은 지나가게 하소서. 다윗의 집에 호산나. 누구든지 거룩한 자는 나아오고, 그렇지 않은 자는 회개하라. 마라나타. 아멘.”(제10장).
제9장은 식전에 하는 기도이고, 제10장은 식후에 하는 기도인데, 그 구조를 가만히 뜯어보면 크게‘찬양-감사-간구’로 이루어진 3부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9장은‘창조’를 인한 찬양, ‘구원’을 인한 감사, 그리고 종말론적 간구로 되어있고, 제 10장은‘구원’을 인한 감사, ‘창조’를 인한 찬양, 종말론적 간구로 되어 있다. 물론 창조는 성부, 구원은 성자, 간구는 성령의 사역으로 연결되어 삼위일체적 구조가 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디다케가 비르 하 마존을 모델로 하여 기독교적으로 재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는 데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삼위일체적 기도문의 중요성은 그 안에 내재된 신학적 충실성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리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인류 구원의 역사 즉 창조와 구속을 인한 것이며, 우리가 드리는 간구는 바로 이 구속사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셨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십사 하고 간구할 때에 비로소 신학적으로 건강한 것이 된다.
3세기 이후 서방교회에서는 구원에 대한 감사가 먼저 나오면서 창조 주제가 다소 약화되는 경향이 있으나, 동방교회에서는 정확하게 유대의 기도를 따라, 창조를 인한 성부께 찬양, 그리스도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기억과 감사, 그리고 교회의
삶에서 교통의 열매를 가져오시는 성령을 인한 간구로 그 형식을 명백히 계승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공예배기도는 어떠한 구조로 해야하는가? 당연히 이러한 구조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저 서두에 감사 한두 마디 해놓고는 내리 무엇 무엇을 주시옵소서 하고 요구하는 기도보다는, 찬양과 감사를 가급적 길게 말하고 그 다음에 필요한 간구를 간
결하게 말하는 것이 좋은 기도가 될 것이다.
한편 현대의 공예배기도를 말함에 있어서 참고해야 할 또 하나의 기독교적 전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5세기에 발달된‘그날의 기도’(collect)이다. 이 기도의 본래 이름이 회중들의 기도내용을‘모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교단(성공회)에서는‘집도’혹은‘집도문’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도의 성격이 그날의 예배를 위한 한두 문장의 간략한 내용으로 된 기도이기 때문에‘그날의 기도’라고 부르는 것이 내용상 더 적절하리라고 본다.
초대교회의‘그날의 기도’는 다음의 5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째, 하나님을 부름.
둘째,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에 관한 간단한 언급.
셋째, 간구.
넷째, 간구하는 이유 또는 바라는 결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결어이다.
현대 미국 장로교 예식서에 나타난‘그날의 기도’는정확하게 이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그 실례는 다음과 같다:
“위대하신 하나님(1),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종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2).
우리의 욕망을 절제시켜 주시고 우리가 가진 헛된 야망을 억제하여 주시옵소서(3).
그래서 저희가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기고 저희의 삶을 충만한 것이 되게 하옵소서(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5).”
그러니까 종합하면, 바람직한 공예배기도문의 구조는,
첫째, 하나님을 부르고,
둘째,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인한 찬양과 감사를 가급적 길게 말한 후에,
셋째, 필요한 간구를 말하고,
넷째, 간구의 이유 또는 바라는 결과를 말하며,
마지막으로 종결을 짓는 형식이 될 것이다.
이렇게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좀더 신학적이고 복음적이며 구속사적인 기도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