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모든 순간은 아름답다
그래서 사랑하고 마음에서 놓지 못한다
옛날집 처마에 흐르는 곡선, 툇마루에 쭈그리고 앉아 듣는 빗소리, 학교로 이어지는 논둑길
우회, 뒤로 걷기, 비켜서기, 맴돌기, 서성거리기, 방황, 관조, 사색, 배회 ...
축음기, 엘피 음반, 필름 카메라, 구식타자기, 만연필, 자전거
그리고 모든 간이역과 인사하는 비둘기호 열차...
행여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지나친 고답주의라고 놀릴지라도
휘황한 조명과 요란한 음악소리에 수상한 상점들로 무성한
청주의 마지막 단관, 중앙극장이 사라진 거리에서 문득 상상했다
그야말로 옛날식 그 영화관 하나쯤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어야 했다고
영화관 앞 격자창에 하얗게 김 서리는 선술집 풍경을 그리워 하는 마음들은 지금 어디에
속도강박증과 시장제일주의에 길들여져 빠릿하게 사는 삶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이들에게도
아름다운 세상, 저마다의 추억이 허락되기를
고전파를 완성하고 낭만파 음악시대를
멋지게 열어제친 베토벤형님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감상하는 침묵과도 같은
사람들은 모든 게 완전하게 떠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추억할 곳이 없어 허망하다고...
대개 그렇다
이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삶의 기억을 상실하는 일이며 지친 영혼이
잠시 머물 곳조차 남기지 않는 일이다
나도 너도 그 끝을 모르는 삶을 위해
얼마를 더 살아야 이 도시와 친해질까.
사, 오년 마다 바뀌는 각종 정치인의 이름을 기억하기 힘든 것처럼 나의 고향의 서정을
가슴에 고이 간직할 길이 묘연한 무한난감이여
사방이 온통 낯설은 벽 투성이다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이방인이 된 듯
중앙극장이 있던 옛 사진을 바라보며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호명해 본다
동아극장, 청주극장, 현대극장, 청도극장, 자유극장, 도도소극장, 꽃다리소극장, 사직소극장(?), 공단소극장(?)...
또 뭐가 있었는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외 추억은 옛날 청주를 잊지 못하는 분들이 채워주기를
명절 날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설레던 그 뜨거웠던 마음들에 다시 불 지펴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 2013년 9월 19일 한가위 날, 마한의 옛땅 상당현 탑골에서.
* 상당현 : 청주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상당현이라 불린 군사적 요충지였다.
시민관(현 중앙공원)
현대극장(철당간 옆, 현 일선문고 자리)
간판엔 대한극장이라고 붙어있는데, 사진 설명에는 청도극장이라는 얘기도 있고 남주동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내 기억으로 청도극장은 우암동 청주대학 앞이었는데 남주동이라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엇이 맞는 것이지 그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의 설명을 청해야 할 듯하다.
La Ragazza De Bube(부베의 연인)-Cario Rustichel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