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우주관
1. 궁극적인 물음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종교를 '신과 인간의 재결합'이라고 보던 종래의 기독교 신학적 정의를 반성하고, 보다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시도 중에서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바는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라고 보려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폴 틸리히( Paul Tillich)와 같은 저명한 종교학자는 '종교란 한 사회의 궁극적인 관심에 지향된 신념과 실천의 체계'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일본 태생의 종교학자 키시모도(Kishimoto)는 '종교가 다른 문화적 활동으로부터 확연하게 구별되는 가장 특질적인 것은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생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한 사회의 궁극적 관심' 또는 '생의 궁극적 의미와 해결' 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만나게 되는 문제들은 의식주에 관한 것이다.
의식주의 해결없이는 인간의 생존은 지속될 수 없으므로 가장 시급하게 그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와 경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의식주 생활을 보다 평화롭고 공평한 질서 위에 안정시키려는데에 목적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도 물질생활을 보다 윤택케 하려는데 뜻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라는 것도 의식주의 보다 안전한 확보를 위한 투쟁사라고 볼 만한다. 짐승을 사냥하여 고기와 가죽을 얻던 때가 수렵시대이며, 농사에 착안하여 보다 안정된 생활에 정착하게 된 때가 농경시대이다. 종족간의 치열한 물자 쟁탈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힘의 결속을 꾀한 곳에 고대 국가의 형성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 형성은 현대에도 그 기본 성격을 조금도 달리하고 있지는 않다. 국제간의 정치 경제적 이해타산이 충돌할 때는 언제라도 무력 충돌이 발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세계 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외치고 있는 강대국들이 한편으로는 무서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의식주에 관한 것이며, 이것이 모든 인간 문화의 바탕이 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학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문제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식주에 관한 문제에 속한 것일까. 종교라는 현상도 애초에 인간 사회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그러한 문제와 전혀 무관한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종교는 다른 문화적 활동과는 전혀 각도를 달리하고 있다.
종교에서 관심하는 바는 인간의 생존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에서 지속해 갈 것인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 속에 던져진 덧없는 인간의 생존 그 자체에 눈을 돌려, 그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의식주의 확보를 위한 인류의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에도 그것은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을까?
살아보려는 인간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결국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생존은 도대체 어떤 의의를 갖고 있단 말인가. 우주의 배후에는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수수께끼가 깃들여 있는 듯하다. 덧없는 인간의 생존 그 자체에 눈을 돌려 종교적 성찰은 이리하여 우주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문제로까지 심화된다.
현대 종교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궁극적 물음'이란 바로 이러한 물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는 데에 그 특질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독일의 종교학자 요아킴 바하(Joachim Wach)는 종교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궁극적 본질에 관한 것, 우주와 세계에 관한 것, 세계 속의 인간이라고 말하고, 신학(神學).우주론(宇宙論).인간론(人間論)의 셋이 모든 종교적 사유의 중심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도 종교라면 인간의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 답변은 어떤 내용을 어떤 방법으로 베풀어 주고 있을까. 이 소 책자는 인간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불교의 그러한 답변을 우주론.인생론.생활론의 3장으로 갈라 간단히 소개하려는 것이다. 먼저 불교의 우주론 부터 살펴보자.
2. 불교의 침묵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는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아주 명확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 제 1 장 창세기 첫머리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나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우주의 근원은 신(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이 신의 기본 성격을 기독교 신학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은 창조하고 그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이고, 최고의 윤리성을 지닌 신성한 인격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오늘날과 같은 비참한 괴로움을 겪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통해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순수 무구한 성품을 지녀 엔덴 동산의 지극한 즐거움 속에 창조되었다.
그러나 선악의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먹음으로써 저주받은 지상에 떨어져 분노와 증오에 싸인 자손을 낳으면서 죄의 댓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자신이 죄인임을 의식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하고 그 구원을 받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동양 민족의 생활윤리를 지배해 온 유교도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아주 간결한 해명을 해 주고 있다. 유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심화하고 체계화한 것은 송(宋)대의 주자(朱子)인데, 그가 저술한 유교 철학의 입문서인 근사록(近思錄) 첫머리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극(極)이 없음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을 낳고 움직임은 극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고요해짐은 음(陰)을 낳고 고요해짐이 극에 이르러 다시 움직인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양이 결합하여 수.화.목.금.토의 五행(行)을 발생하고, 음양 五행이 결합하여 천지 만물을 발생시켜 무궁한 변화를 계속 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우주의 근원을 '신'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유교는 그것을 '역(易)'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일한 우주에 대해서 기독교와 유교는 그 견해를 이렇게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유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오직 인간은 그 중에서 빼어남을 얻어 가장 신령스럽다. 형체가 생하여서는 정신이 발하여 인식을 한다. 五상(仁義禮智信)이 감동하고 선.악이 갈려져 만사가 나온다." 인간의 본성을 착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우주론에 상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이 왜 오늘날과 같은 비참한 현실로 전락해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유교는 기독교나 불교처럼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에 대한 묘사가 강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인은 그것을 정하되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하여 고요함을 위주로 인극(人極)을 세우고, 군자는 그것을 닦아 길(吉)하며 소인은 그것을 패(悖)하여 흉(兇)하나니라." 인간의 현실상황을 '흉'으로 파악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닦을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유교는 이렇게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떤가. 이런 각도에서 불교경전을 볼 때 뜻밖에도 불교는 기독교나 유교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기독교의 창세기는 구약성서의 제일 처음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교철학의 태극설도 근사록의 제일 처음에 위치하고 있다. 종교의 궁극적인 문제에서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것이 가장 근본이 되므로 그러한 서술 순서는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어떤가. 불교의 원시경전은 아함경이며, 그 중에서도 장아함이 제일 앞에 위치한다. 그런데 이 장아함을 볼 때 그 제일 처음에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거 일곱 부처님의 탄생.출가.수도.항마.성도.전법륜.열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종교에서는 우주론이 설해질 장소에 불교는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론적 신화에 해당시킬 수 있는 것은 세기경(世紀經)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경은 장아함의 제일 끝에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세기경은 남방불교의 불전에는 수록되어 있지도 않으니 이것은 그 경전의 성립이 매우 늦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만큼 불교에서는 중요시되지 않았던 내용이라는 뜻이기도 한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처님은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어의 해설을 좀처럼 베풀려고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처님 당시에 만동자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불만을 갖고 있었다.
1)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한가,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2)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가.
3)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4) 여래는 사후에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이 열 네가지 문제는 분명히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관련된 것들임을 볼 수가 있다. 1)과 2)는 세계의 시간적.공간적 성질에 관한 것으로서 종교의 우주론에 관련되며, 3)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론에 관련되고, 4)는 그러한 인간이 깨달음을 열었을 때의 소식을 묻고 있는 것으로서 생활론에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동자는 이러한 문제를 내걸고 만일 부처님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답변을 해주시지 않으면 수도 생활을 버리고 부처님 곁을 떠나겠노라고 다그쳤다. 그는 분명히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번민하고 있었으며 그 해결을 부처님에게서 구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떤 답변을 해주시고 계실까. 뜻밖에도 부처님은 만동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실 뿐이다.
"만동자여, 내가 일찍이 너에게 그런 문제를 답변해 주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너 또한 내게 그런 답변을 듣겠다는 조건 아래 내게 출가했던 것인가.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네 이제 내게 그런 부질없는 항변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네가 제기한 그런 문제를 내가 설명해 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그것을 너에게 설명해 주고 있노라면 너는 그것을 다 듣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비유하건데 여기 어떤 사람이 독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이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화살을 뽑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고집하여 말하되, 화살을 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주소는 어디인지 등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고 하자. 또는 그 화살이 나무로 만들었는지 대로 만들었는지 뿔로 만들었는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고 하자.
또는 화살촉이 쇠로 되었는지 돌로 되었는지 뼈로 되었는지 등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뽑지 않겠다고 하자. 그 사람은 그것을 채 듣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니라.너의 질문 또한 그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너의 깨달음과 지혜와 해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나니, 네가 성급하게 알고 행해야 할 바는 너의 현 존재가 괴로움이라는 사실과 나아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이니라." 중아함(권 60)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에 대해서 부처님은 답변을 회피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네가지 질문을 불교에서는 '무기(無記)'라고 한다. 그러한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부처님은 언제나 침묵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3. 종교의 진리성
부처님은 이렇게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언어에 의한 답변을 피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으셨던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기독교나 유교처럼 명케하게 설해 주시지 않으시는 것일까.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이 점은 매우 불만스럽게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그러한 곳에 종교적 진리에 대한 부처님 자신의 진지한 태도가 엿보이고 있다.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과 같이 그렇게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그것을 덮어 놓고 제시하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해명을 하였느냐에 뜻이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각기 독자적인 우주론을 제시하고 그에 입각해서 교리를 전개시키고, 그의 절대적인 진리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우주론의 내용이 왜 서로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을까. 기독교와 유교만 보더라도 전자의 신학적 우주창조설과 후자의 역학적(易學的) 우주변역설(宇宙變易說)은 결코 동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쪽의 해명을 우리는 진리라고 해애 할 것인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이질적인 두 개의 진리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 진리라면 다른 한 쪽은 허위일 것이다. 또는 둘다 허위일지도 모르고,
또는 그들은 진리의 전체가 아니라 어는 일부분만을 파악하여 그것을 전체로 착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의 우주론이 허위이거나 또는 미진(未盡)한 것이라면, 궁극적 물음에 대한 우리들의 탐구는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종교의 진리성에 대한 이러한 회의는 여러 종교가 난립하여 각자의 진리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회의가 일어 났다면 덮어놓고 신앙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신의 제시에 의한 것이라거나 성경에 씌여 있다거나, 또는 깨친 사람의 교시라는 종교적 권위만으로는 진리라고 받아 들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종교의 개창자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궁극적인 문제를 탐구하여 해답을 얻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한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수준으로 내려오게 된다. 동시에 그들도 인간이 이상 오류를 범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그들의 주장이 과연 참다운 것인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부처님은 단시 인도의 여러 종교사상의 우주론에 대해서 그러한 비판적 검토를 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이런 부처님의 비판적인 검토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당시 인도의 각 종교 사상이 어떤 우주론을 전개시키고 있었던가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가 일어나던 당시의 인도 사상계는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베다.범서.삼립서.우파니샤드라는 일련의 문헌의 성립 속에 전개된 전통적인 바라문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바라문 사상에 도전한 새로운 사상가들, 다시 말하면 불교 경전에 소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불리우는 사문(沙門)들의 사상이다. 이 두 계통 중에서 먼저 정통적인 바라문의 우주론을 살펴보자.
베다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리그 베다인데 여기에는 벌써 신학적인 우주창조설이 나타나고 있다. 즉 우주를 창조한 것은 '조일체신(造一切神)'으로서 그는 마치 목수가 나무로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 우주창조설은, 만일 그렇다면 그 재료는 애초에 어떻게 있게 되었느냐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리그 베다에 나오는 우주출산설(宇宙出産說)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에 의하면 우주는 '생주신(生主神)'에 의해서 마치 부모가 애를 낳는 것처럼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아기의 출산에는 재료가 따로 필요치 않으므로 문제의 우주창조설의 재료문제가 일단 해결된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능생자(能生者)와 소생자(所生者)의 차별은 타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개벽설의 이러한 문제를 태개하기 시잣한 것은 범서(梵書)와 우파니샤드 문헌에 나타나는 범신론적(梵神論的)인 우주전변설(宇宙轉變說)이다. 먼저 범서의 전변설부터 간단히 소개하면, 생주신이 열을 일으켜 천.공.지의 삼계를 발생하고 이들은 다시 일체를 발생한 다음 생주신은 그 일체 속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주신의 열을 동력인으로 하고, 생주신의 몸을 질료인으로 하여 우주가 전개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능생자와 소생자의 차별문제는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생주신'이라는 이름도 바뀌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리하여 '범(梵)'이라는 이름이 채택되는데, 이 낱말은 인격신으로서의 성격(男性)과 중성원리(中性原理)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어 알맞는 것이다.
범서의 이러한 우주전변설은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철학적으로 완성된다. 즉 태초에 유일자(唯一者)인 '유(有)'가 있어, 이것이 많아지려는 욕심을 일으켜 화(火)를 발생하고 화는 다시 욕심을 일으켜 수(水)를 발생하고 수는 또 욕심을 일으켜 지(地)를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이 화.수.지의 셋이 복합물을 만들고 '유'는 그 속에 '목숨의 자아(命我)' 형태로 들어갔다. 그래서 명색(名色)을 발생하고 명색에서 일체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우주론에 의하면 인간은 욕심을 바탕으로 목숨을 지닌 개아적(個我的) 존재로서 생사에 윤회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괴로운 생사윤회를 해탈하려면 '범'과 '나'가 동일하다는 알음(智)에 의해 범행(梵行)과 선정(禪定)을 닦아 범계(梵界)에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 인도의 정통사상은 적어도 이 정도의 종교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문들은 어떤 사상적 도전을 하고 있었던가. 사문들의 사상 계보는 복잡하고 자료가 빈곤하여 확실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바라문의 우주전변설이 자기네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 유지하기 위한 독단론이라고 단정하고, 종교적 교설에 대한 회의론을 펴거나, 또는 확실한 논거위해서 궁극적 문제를 해명코저 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우주의 근원을 몇개의 요소로 보고 그런 요소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에 의해 세계와 인간의 생성.소멸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하였다. 예를 들면 아지타는 우리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우주의 근원은 지.수.화.풍의 네가지 요소라고 하였다. 파구다는 아지타의 이러한 四대설에 목숨.괴로움.즐거움의 셋을 추가한 칠신설(七身說)을 주장하였는가 하면 고사라는 여기에 다시 허공.얻음.잃음.생.사의 다섯을 추가하여 12요소설을 내놓았다.
생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사문들은 바라문의 해탈 사상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아지타의 4대설에 의하면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그는 현세의 쾌락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가치라고 주장하였다.(順世派).
한편 파구다는 7신설과 고사라의 12요설에는 목숨과 고.락.생.사 등이 불변의 요소로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삶은 싫든 좋든간에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그것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 뚜렸하다. 그들이 생활파(生活派)라고 불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라문의 종교적 이념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인 것이다.
한편 자이나교의 개조 니간타는 사문계통에 속하면서도 그와는 달리 해탈사상을 편 곳에 그의 독특한 입장이 있다. 니간타는 우주의 근원적 구설 요소는 목숨(命)과 목숨 아닌 것(非命)의 둘이라고 하고 전자에게는 의지(意志)와 상승성(上昇性)이 있다고 하였다. 후자는 법(운동의 조건). 법 아닌 것(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의 넷으로 세분되는데 물질은 업(業)을 일으켜 괴로운 생사의 원인을 지으며 하강성(下降性)을 띠고 있다고 한다. 니간타의 이러한 오실체설(五實體說)에 읳면 인간의 실존(實存)은 영혼(목숨)이 육체(물질)에 계박되어 생사에 윤회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따라서 그는 육체의 계박을 멸할 극렬한 고행을 통한 영혼의 순화를 해탈의 요체라고 설하고 있었다.
인류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우주론이 당시에 출현했던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여러가지 우주론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계셨을까. 그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일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이미 종교적 진리에 대한 회의론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그래서 우선 당시의 우주론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 범주 속에 모두 포섭된다고 보고 계신다.
1)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 (참고 신 중심사상이라고도 함)
2) 숙작인설(宿作因說) (참고 운명론 사상이라고도 함)
3)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 (참고 우연론 사상이라고도 함)
첫째의 존우화작인설은 우주의 창조는 물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원인이 신(尊祐)에게 있다는 견해로서, 정통 바라문의 우주론이 여기에 포섭될 것이다.
둘째의 숙작인설은 그러한 원인은 과거에 지은 바에 있다고 보는 견해로서, 니간타를 여기에 포섭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니간타의 五실체설에서, 목숨은 의지적 생명성이 있고 물질은 업을 일으키는 활동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불변의 요소로 보고 있는 한 그러한 작용들은 기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의 무인무연설은 모든 현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우연론(偶然論)으로서, 니간타 이외의 사문들은 이곳에 포섭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요소들의 이합집산에 대한 이유나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부처님은 이 세가지 우주론에 대한 진리성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고 계신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났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ㅇ디 나쁜 업을 짓는 것도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 권 3 ).
다시 말하면 위의 세가지 우주론은 인간의 죄악이라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니, 죄악이란 범한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을 때에 한해 성립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와 그에 입각한 노력이 있다는 엄연한 현실적 사실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가지 우주론은 진리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왜 그러냐면 종교의 우주론이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의 배후에서 그것을 지배.조종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리.본질 또는 원인에 대해 해명이므로, 만일 그것으로써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진리라고는 말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당시 종교의 우주론을 이렇게 비판하고 계시는 것이다.
4. 업설에 의한 불교 우주론
궁극적 물음에 대한 종래의 종교에 이렇게 문제성이 있다면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바는 무엇일까. 궁극적 원리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고타마 싯다타가 일찌기 처자와 왕궁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맹렬한 구도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동기가 이런곳에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진리 탐구의 방법론은 현상 세계의 정확한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궁극적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 그로부터 다 현상세계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보는 방법이어야 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고타마 싯다타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은 바로 이 길이었고, 그가 부처님이 된 다음 전 인류에게 제시한 것도 바로 이 길이었다. 원시 경전에 설해진 부처님의 깨달음은 십이연기설을 내용으로 하는데, "모든 부처님은 12연기를 생사(현실세계)로부터 시작하여 무명에 이르고 무명(현실세계의 원인)으로부터 다시 생사에 이르는 순서로 관찰하신다"고 설하고 있는데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앞서 살펴 보았던 세가지 우주론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죄악과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진리탐구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확정하고 이로부터 그 배후의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의 교설을 볼 때 거기 나오는 십이처설은 우리들의 깊은 관심을 끈다.
어느날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일체(一切)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은 일이 있다. 그랬더니 부처님은 서슴없이 "일체는 十二에 들어가나니, 소위 눈.귀.코.혀.몸.의지(意)와 색.소리.냄새.맛.촉감.법(法)이니라"고 답하고 계신다. 이것이 12처설의 내용이다. 불교의 중측적(重層的)인 교리 조직에서 가장 기초적인 교설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포섭된다는 그 12 처를 보라. 인간의 여섯 감각 기관과 그에 대한 여섯 인식 대상으로 이뤄졌음을 볼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이 의지해야 할 바는 인식 가능한 현실 세계이며, 진리탐구는 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세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인데, 그 주체를 의지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의지의 존재를 엄연한 현실적 사실로 받아들인 것을 엿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을 이렇게 의지로 파악하고 이런 견지에서 이제 그를 둘러싼 자연 환경을 살펴보자. 그것은 어떤 대상물을 나타나는가. 인간이 의지적인 작용을 가하면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는 성질을 띤 것으로 나타난다. 가령 여기 어떤 물체에 5[kgf]의 힘을 가하면 그것은 그 역량 만큼의 반응을 반드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들이 현실세계에서 직접 보는 명백한 현상, 또는 사실이라고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은 12처설에서 '의지' 즉 인간의 대상을 '법'이라고 규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법이라는 말은 법률이라는 개념으로 흔히 쓰이지만 인도에서는 그 밖에 자연 법칙, 필연적인 것, 의지가 없는 것, 자연물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대상을 이렇게 통틀어 법이라고 규정함을 보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는 자연물이 주가 되어야 하지만,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를 가지고 있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이쪽에서 작용을 가하면 일차적으로는 자연물과 같은 반응을 수행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밀었을 경우, 그가 의지적으로 버틴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는 자연물처럼 밀려나가기 때문이다. 12처설에서 의도하는 바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대상의 이러한 일차적인 반응의 성격을 명백히 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는 말로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도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업은 원인이고 보(報)는 결과이므로 업인(業因).과보(果報)로 표현하기도 한다.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를 것이고 그들의 성질은 상응할 것이다. 선업에는 좋은 보가, 악업에는 나쁜 보가 따른다는 말이다.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 이런 업.보의 인과율에 의함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인과율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연 과학은 성립 근거를 잃을 것이고, 노동과 보상 또한 업.보의 관계이며,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잘 살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업과 보의 필연적 관계는 우리 현실 세계의 엄연한 법칙이며, 모든 현상 또한 그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지에서 우리 현실세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볼 때 우리는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한다. 모든 현상은 반드시 업.보의 법칙으로 설명되어야 할 텐데 그것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보기 때문이다. 가령 우주의 생성 소멸은 너무나도 신비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까운 주변을 돌아 볼 때도 어떤 사람은 악업을 지었는데도 잘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착하고 착한데도 왜 그렇게 고생만 하고 있는지,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한 현상은 신의 힘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또는 숙세에 지은 원인에 의해, 또는 아무런 원인 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만일 그런 방법로 이해한다면 그 견해는 앞서 살펴보았던 존우화작인설.숙작인설.무인무연설로 전개될 것이고, 결국은 부처님의 그에 대한 비판에서 본바와 같은 문제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문제는 매우 복잡해졌지만, 그러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이 세계에는 분명히 의지와 법, 업과 보의 관계가 엄연한 사실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양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일체는 12처에 들어가나니라"고 못박은 뜻을 이해함직하다.
그럴 경우, 다시 말하면 업.보의 현실적 사실을 양보하지 않을 경우, 문제의 현상도 일단 그런 업보적 현상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경우, 업.보의 관계는 이제 숙세(宿世).현세.내세(來世)의 三세에 걸쳐 전개된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문제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업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인식되지 않을 경우와, 업인은 있는데 그 과보라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의 둘이다. 이런 두 현상을 업보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첫째 경우는 그 원인을 현세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세 이전에는 숙세가 되고 현세 이후에는 내세가 될 것은 물론이다.
결국 우리들의 현실 관찰과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일종의 가설에 도달한 셈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사물의 배후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가설을 세워 그 정당성을 검토해 본다. 종교의 진리탐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방법을 굳이 꺼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종교의 우주론이라는 것도 비관적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가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가설의 진리성에 있을 것이다. 종교적 가설의 진리성은 그것으로써 현실세계의 현상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는 길밖에 없다.
이런 견지에서 이제 앞서 우리들이 도달한 '업.보이 三세 전개'라는 가설을 검토해 보자. 존우화작인설이나 숙작인설 또는 무인무연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현실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업.보가 三세에 걸쳐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는 현세상에는 그 '의아로운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으며 또 이러한 현상의 존재는 업.보가 삼세에 걸처 전개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만일 고의(故意)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하나니라. 그러나 고의로 짓는 업이 없으면 보를 받지 않나니라"<중아함 권 3 思經>. 이것이 불교에서 설하는 업설의 원리적인 내용이다. 업과 보의 종류와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미룬다.
불교의 이러한 업설에 의할 때, 인간의 현실 상황은 그가 짓고 있는 업에 대한 보의 총화(總和)가 바야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은 동시에 그의 새로운 업이 작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눈앞에 불행이 닥쳤다면 책임은 오로지 자기에게 있는 것이지, 남이나 운명이나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태개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자기 힘이며, 남이나 운이나 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해 진다. 불교의 업설을 흔히 숙명론과 혼돈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니간타의 업설을 숙명론으로 본다면 몰라도, 불교의 업설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업보다는 현실을 태개해 나갈 현재의 인간 의지와 그 노력에 커다란 비중이 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래서 불교의 업설은 강력한 인생관이 될 수가 있다. 업.보의 필연적인 존재를 확실하게 이해한 사람은 악업을 지을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은 건전한 사회 윤리가 될 수가 있다.
업설은 또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의 답변이기도 하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우주의 근원을 '신'으로 보고, 유교는 '역'으로 본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 인도의 정통파 바라문교에서는 '범(梵)'으로 보고, 이에 맞선 사문들은 물질적인 '요소'로 보았다.
이제 불교는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불교의 업설에 의할 때,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은 바로 중생들 자신의 '업력(業力)'인 것이다. 불교학에서는 우주안에 있는 전 중생들의 이러한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세계는 공업의 소성(所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우주론 중에서 이제 어떤 것이 정당한가는 독자들의 비판적인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중생들의 업력은 우주를 능히 파괴할 수 있는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커다란 우주를 바라볼 때 인간을 포함한 중생들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다. 이렇게 미약한 존재들이 어떻게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 인간을 보라. 가공할 만한 핵폭탄을 개발해 내었으며, 이것이 만일 잘못 사용되면 그 연쇄반응은 전 우주의 조화를 파괴할 원인이 충분히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업설은 불교의 우주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경전에는 실제로 그것을 우주론에 적용시킨 예까지 발견된다. 장아함 끝(권 18~22)의 세기경이나 또는 그 별행경이라고 볼 수 있는 기세경.기세인본경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종교에서는 대개 우주론적 신화를 발생시키고 있다.
기독교의 구약성서 첫머리에 나오는 창세기에는 그런 종류의 신화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시 말하면 우주의 구조.생성.소멸 등에 관한 신화 비슷한 이야기가 세기경.기세경.기세본경 등에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는 상당히 길어 간단히 소개할 수가 없다. 아함경의 교리를 체계화한 구사론이란 문헌이 있는데 이것에 의하면 그 요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풍륜(風輪)이 생긴다.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다시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水輪)을 생하고, 업력에 의해 다시 수륜에 의해 바람이 일어나 수면을 때리고 응결시켜 금륜(金輪)을 생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이것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일곱 산이 생하고, 그 최외각에 철위산이 둘러 앉는다. 그리하여 각산 사이에 물이 고여 여덟 바다가 생하는데, 수미산 부근의 일곱산 사이에 생긴 바다를 내해(內海)라 하고, 그들과 철위산 사이에 생긴 바다를 외해(外海)라고 하고, 이 외해 속에 사대주(四大州)가 있어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수미산 남쪽의 섬부주(贍部州)이며, 이 밑에 염라왕국(閻羅王國)이 있고, 그 아래 다시 八 대지옥이 차례로 위치한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은 수미산을 둘러싸고 공중에서 돌아간다. 이것이 중생들이 몸 담게될 세계(器世間)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최초의 풍륜으로부터 이러한 세계가 완성되는데 1 소겁의 시간(1590만 8년)이 걸린다고 한다.
세계가 생긴 다음에 이곳에 중생이 생기는데, 그 순서를 살피기 전에 먼저 그들의 경계(衆生世間)부터 소개해 줄 필요가 있다. 중생의 경계는 크게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계로 갈라진다. 욕계는 욕심이 있는 경계로써 그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통의 정도에 따라 지옥.축생.아귀.수라.인간.천신의 육취(六趣)가 식별되고, 특히 천신은 다시 六천으로 세별되고 있다. 색계는 선정을 닦아 욕심을 멸하지만 형색은 남아 있는 경계로서 사선천(四禪天)으로 나누기도 하고 18천으로 세별하기도 한다. 무색계는 색계의 형색마져 사라진 정(定)의 경계로서 사처(四處)를 헤아림이 보통이다.
중생들의 경계는 이와 같거니와, 이제 이들은 세계가 생긴 다음 그곳에 어떤 순서로 생하는가. 먼저 범천(색계의 최하위)이 하생하고, 계속해서 육계 六천에 해당되는 타화자재천.화락천.도솔천.야마천이 하생하여 수미산 위의 하늘에 머물고, 도리천.四천왕이 생하여 수미산의 봉우리와 허리에 각각 머문다.
그리고 또 인간이 생하여 四대주에 머물고 축생은 바다에 생하여 육지와 공중에도 살게되며 아귀는 염라왕국에 생하여 떠돌아 다니고 지옥취는 지옥에 생한다. 이밖에 다시 아수라가 있는데 이들은 수미산을 본거지로 하여 도리천과 항상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 해서 천.인.아수라.아귀.축생.지옥취의 여섯갈래 중생이 생하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19소겁이 걸린다는 것이다. 세계와 중생이 편성되는 이러한 시기를 성겁(成겁)이라고 부른다.
성겁 다음에는 주겁(住겁)이라는 세대가 온다 그 기간도 20소겁이다. 이때 세계는 별로 변동이 없지만, 중생의 과보에는 많은 변동이 나타난다. 초기의 중생은 형색이 아름답고 빛을 내며 하늘을 날을 수도 있으며 수명도 장구하다. 그러나 좋은 맛에 탐착하여 물질적인 음식을 취하게 됨에 차츰 몸이 더러워지고 남.녀의 구별이 생하며, 음식에 대한 욕심이 일어나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자 이것을 다스릴 국왕을 뽑게되고 형벌이 제정된다. 중생의 악업은 더욱 심해지고, 동시에 수명이 짧아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10새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도병(刀兵).질역(疾疫).기근(饑饉)의 三재(災)가 발생하여 살아 남는자 겨우 1만명을 헤아리게 된다.(제 1소겁). 3재의 괴로움을 겪는 중생들은 자신의 죄업을 뉘우치고 다시 선업을 행하게 된다. 동시에 수명도 증가하여 8만세에 이르게 되고 풍요한 사회가 된다. 그러자 다시 욕심과 악업이 심해져 수명이 10세로 감소된다.(제2소겁). 인간 수명의 이러한 증감이 그 뒤에도 19번 반복된 다음 다시 10세에서 8만세에 증가하게 된다(20소겁) .
이 때 우주가 파괴되는 괴겁(壞겁)이 시작되는데 여기에도 20 소겁이 있다. 먼저 중생이 파괴되는데 그 순서는 지옥취부터 시작하여 최후에 천신이 파괴된다.(19소겁이 소요됨). 그런 뒤 화.수.풍의 三재가 발생하여 풍륜으로부터 색계 제 三선천에 이르는 세계를 모조리 멸해 버린다.(제20 소겁). 괴겁이 지나면 허공만이 존재하는 공겁(空겁)이 오는데 이 기간도 20소겁이다. 공겁 다음에는 다시 중생들이 업력에 의해 성.주.괴.공겁이 반복하여 세계는 끝없이 생성.소멸한다는 것이다. 20소겁을 1중겁이라 하고 4중겁을 1대겁이라고 하므로 결국 한 세계는 1대겁을 시간적 단위로 하여 생성. 소멸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성주괴공을 되풀이하고 있는 이러한 세계는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는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1천 세계를 합한 것을 1소천(小千) 세계라 하고, 이 1소천 세계를 1천배한 것을 1중천 세계라고 하며, 1중천을 다시 1천배한 것을 1대천(大千)세계라 한다. 이 소천.중천.대천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 부처님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실로 무량하여 허공과 양과 같다는 것이다.
이상이 세기경.구사론 등에 설해진 등에 설해진 불교의 우주론적 설화의 대강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바는 세계의 생성을 중새의 업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변천.소멸 그리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업력에 의한다는 입장이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신학적인 우주론이나 또는 성주괴공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보는 우주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앞서살펴 보았던 불교의 三세업보설을 우주의 동력인으로 보고 그런 입장에서 전개시킨 우주론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5. 우주의 실상과 깨달음
불교 교리는 12처설과 3세업보설로 다한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미묘한 교리가 그 뒤에 다시 중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3세업보설은 그러한 중층적 교리 조직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정확한 관찰과 그에 입각한 합리적인 가설의 수립 및 검토라는 방법론은 새로운 교리가 나올 때마다 한결같이 응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우주의 본질에 대한 보다 올발른 이해에 착실하게 접근해 가고 있다.
그러한 교리조직을 여기서 독자들에게 납득시킬 만큼 설명할 수는 없다. 필자는 앞서 업설 뒤의 교리 조직은 그보다도 훨씬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은 독자들의 연구에 맡겨두고, 중요한 교리들의 항목과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만을 해 두고자 한다.
1) 六식(識)설 2) 十八계(界)설 3) 4대(大)설 4) 六계(界)설 5) 五온(蘊)설 6) 四제(諸)설 7)十二연기(緣起)설 8) 六바라밀설 9) 一불승(佛乘)설
불교는 현실 세게의 모든 것이 12처에 포섭된다고 봄은 앞서 소개한 바이지만, 이러한 12처는 하나도 항구불변하는 것이 없다. 덦없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생하려면 반드시 인(因)과 연(緣)이라는 두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말한다면 '6식(識)은 6근(根)을 인으로 하고 6경(境)을 연으로 하여 일어난다.'고 할 수가 있다(6식설). 18계는 12처의 세계관에 6식이 발생하므로써 띠게 된 입체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한편 6근과 6경은 모두 지.수.화.풍의 四대 요소로 분석된다. 그렇게 되면 18계는 6계(지.수.화.풍.허공.식)로 파악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6식설에서 6계설에 이르는 교리들은 12처의 세계로부터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탐구해 들어가 그 근원적인 모습을 밝히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불교 흥기 당시의 사문들이 과학적인 물질분석을 통해 우주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간 작업과 일맥 상통함이 있는 것이다.
5온설은 이러한 요소설에 입각해서 인간 존재의 구성 형태를 해명한 것이다. 5온은 색.수.상.행.식의 다섯을 가리키는데, 그 바탕이 되고 있는 색은 4대요소를 '나'라고 집착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대 요소가 결합한 일시적인 형체(色)을 항구 불변적인 나로 집착하면 이로부터 개체를 형성하는 수.상.행.식이 발생하여 인간 존재의 근간부(蘊)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4제설은 5온설의 이러한 인간관에 입각해서 삶의 가치를 제시한 교설이다. 5온으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는 그 자체가 괴로움(苦)이다. 이 괴로움은 5온이 집기(集起)한 때문이다. 따라서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멸(滅)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를 갖고 종교적인 길(道)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 4제는 이러한 고.집.멸.도의 네가지 뚜렷한 사실(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4제를 닦으면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의 4과(果)를 차례로 얻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6식설에서 6계설에 이르는 교설들은 분석적인 관찰로 우주의 근본을 탐구해 들어간 일종의 우주론이라고 보겠고, 5온설은 그에 입각한 인간론이요, 4제설은 생의 가치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업설에 비할 때 이 교리 조직은 우주의 근원과 생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는, 보다 심화적인 교설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에 업설의 해명은 우주의 근본 요소에 대한 의식에는 아직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뜻하는 생의 가치 또한 안락한 과보(生天)를 얻는데에 머물러, 생사의 근본적인 해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제를 닦으면 차례로 4과를 얻게 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하였는데, 이러한 길을 완성하였을 때 명(明)이 발생한다고 한다. '명'이라는 말은 '실재(實在)하는 것, 발견되는 것'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에 대한 무지가 무명(無明)이며 이러한 무명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을 때 이것에 연(緣)하여 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소위 12연기설이다.
그렇다면 '명'은 불교의 요소설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 우주의 본질을 밝힌 것이며, 12연기는 이에 입각해서 인간의 생사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밝혀 준 인간론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는 새삼 논할 필요가 없다. 무명에서 연기한 인간의 생사 현실은 실체가 없다. 따라서 공(空)이다. 그러나 허무와는 다르다.
헛된 세계의 괴로움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멸진 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는 유(有)라고도 못하고 무(無)라고도 못한다. 따라서 중도(中道)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의 12연기를 깨달은 사람을 벽지불이라고 부른다.
대승불교의 6바라밀은 우주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한 탐구를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것이다. 4제나, 12연기설에 의하면 생사와 열반, 무명과 무며의 멸진과 같은 두 법은 엄연히 분별된다. 그리고 생의 가치는 후자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분별과 집착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열반이나 무명의 멸진이 있게 된 성립근거를 생각해 보자. 이들은 생사나 무명의 연(緣)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한 법이요, 연기한 것이라면 실체가 공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우주의 본질은 분별.집착을 초월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한 본질은 이제 어떤 개념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언설과 사유를 초월해 버렸기 때문이다.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그런 것(如)'이라고 할까.
우주의 긍극적 본질에 대한 이러한 지혜를 '반야(般若)'라고 한다. 반야는 무분별지(無分別智)요, 평등지요, 공지(空智)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야의 실천을 통해 분별망념의 괴로운 존재형태에서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한다. 반야바라밀다에 행하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데, 일체의 분별과 집착을 떠난 그의 무한한 자아 부정적 실천은 남과 사회를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 보살이 반야와 더불어 보시.지게.인욕.정진.선정을 포함한 6바라밀을 닦음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 교리는 업설에서 6바라밀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인간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답변이 아닌 것이 없다. 우주의 근원적 힘.요소.본질이 무엇이며, 인강느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괴로운 생사에 전락케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층적으로 해명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우주론을 거론한다는 것 부터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는다. 이보다도 더 간결한 우주론이 있을까? 육조대사가 이르되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는 땅을 받친다. 밝기가 해와 같고 검기가 칠흙과 같다. 항상 움직이고 사용하는 속에 있지만 거둬 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였을 때, 이보다 더한 우주론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이러한 유심설(唯心說)에 입각해서 우주론적 신화 비슷한 이야기까지 설해진 예를 볼 수가 있으니 능엄경의 우주론이 그 한 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한 어떤 해명이 참다운 진리성을 띠면서 신의 계시에 의했다든가, 성인의 말이기 때문이라든가, 가설의 정당성이 현실적으로 검토되었다든가 또는 냉철한 이지적 사유에 의했다든가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갓이다. 실제로 그것이 체험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뜻에서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끝으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우주(諸法)의 실상(實相)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 받나니 소위 그러한 상(相).성(性).체(體).힘(力).작용(作).인(因).연(緣).과(果).보(報).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니라."
우주의 실상은 깨달음을 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우주의 본질적 실상에 대한 언설적 해명은 불교에서는 다시금 없다는 말이 된다. 불교의 우주론을 듣고자 했던 우리들의 기대가 다시금 어그러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해답을 영원히 깨달음 속에 묻혀 두시라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세상에 출현함은 모든 중생에게 부처와 똑같은 지견(知見)을 갖게 하고자 함이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계신다. 궁극적인 진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라도 중생들께 열어보여 주려고 계신다.
그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정성들여 시설(施設)해 놓으셨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살펴왔던 중층적(方便) 교리 조직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이 있을 뿐, 제2승. 제3승은 없나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제설(아라한승).12연기설(벽지불승).6바라밀(보살승)은 한결같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아르는 길이다.
"3승은 오직 하나의 불승에서 분별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불교는 우주의 궁극적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 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안이하게 궁극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지워진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은 그것을 쉽게 제시하여?ㅆ다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답게 제시되었느냐 하는 곳에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진지하게 진리를 구하려는 사람들께 불교는 결코 실망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알림 글] ; 앞서 우주론에서 살펴보았드시 3계의 세계는 법상으로 다음과 같은 부분이니, 우주론과 연계시켜 아함부를공부 하실때 참조 하시길 바랍니다.
욕계 : 12처.업설의 세계 (수행방법 : 자비희상의 4무량심으로 많은 착한 업을 짓는 것)
색계 : 18계의 세계
(수행방법 : 18계에 미혹한 중생의 모습인 6.6법의 우리들의 모습에서 18계에 계합되기 위하여는 4선을 닦아야 함)
무색계 : 6계의 세계
(수행방법 : 6계에 미혹한 중생의 모습인 오온(오취온)을 석공관 또는 부정관을 통해 4처,4과에 이르러 이때 최고의 경지를 아라한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