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문가의 자녀교육은 어떠했을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만의 자녀교육법은 힐난하며 폄하하기보다 본받을
만한 구석이 많다. 이들의 독특한 자녀교육법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온 수많은 명문가의 사람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삶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실천해온 종가의 자녀교육법을 생활 칼럼니스트 김서령 씨가 글로 담는다. 그 첫 회-.
세상달강~ 세상달강~ / 서울 가서 밤 한 말 사와다가 /
고물게 놔뒀더니 /니겉은 생쥐가 / 다 까먹고 /
한 알이 남았는 걸 / 동솥에 삶아다가 /
껍데기는 벗겨서 니 애비 주고 /
보물은 벗겨서 니 에미 주고 / 알코뱅이는 남겨서 /
니캉 내캉 둘이 먹자 / 세상달강~ 세상달강~/
흔들림은 점점 빨라진다. ‘세상달강~ 세상달강~’ 소리도 빨라진다. 아이는 까르륵 웃는다. 아이를 흔들던 할머니도 쿠룩쿠룩 웃는다. 부엌에 있던 며느리가 들어와 “어멤요, 오늘 저녁은 국시를 한칼 밀까요”라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쥐고 공손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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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야. 야야, 콩가리 낫게 넣고, 무우 쫌 써레넣고, 시원크러 해라. 뜨거운 국싯물 좀 마세보자.”
안동의 어느 종갓집의 저녁나절 풍경이다. 아이는 이제 네 살쯤 됐다. 막 말을 배우는 중이다. ‘세상달강~ 세상달강~’은 할머니가 아이에게 다른 교육을 시도하기 위해 미리 몸을 풀어주기 위한 달콤한 곶감이었다.
할머니가 아이 앞에서 머리에 손을 올린다. 아이가 따라한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으셨고 아이는 앞에 섰다. 할머니와 아이의 눈높이는 똑같다. 아니, 아이가 할머니의 머리를 약간 올려다봐야 하는 위치다.
지나친 자식사랑은 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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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교육의 특징은 격대교육(隔代敎育)에 있었다. 아이가 5세가량 되면 사내아이는 사랑방에 내보내 조부와 함께 생활하도록 했다. 남자아이를 미래 종손으로 키우는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내아이는 할아버지와 함께, 여자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마쳤다. 잠자리도 물론 함께였다. 부모는 아이를 드러내놓고 귀여워할 수도 없었고 꾸짖을 수도 없었다. “지 새끼라고 물고 빨고 하는 꼬라지를 보니 참 눈꼴 시어서 못 보겠드라”가 좌중의 공감을 자아내는 흉거리였다.
자식 사랑이 지나친 것은 유교적 전통에서는 금기 항목이었다. 그러나 조부모에게는 그 ‘물고 빠는 짓’이 얼마든지 허용되었다. 스물 몇의 젊은 부모는 감정의 균형이 선결조건인 교육을 맡기에는 아직 미숙하다는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종가의 젊은 부모는 제 자식에게 사랑 표현을 극도로 억제하고 아꼈다 손자가 생기면 비로소 마음껏 그 애정을 드러냈다. 오래 축적하고 궁리해온 준비된 사랑이고 교육이었다.
조부모는 아이가 잠들기 전에 자연스럽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줬다. 구체적으로 조상에 대해, 종손이 되는 법에 대해,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커리큘럼은 아니더라도, 전해오는 무수한 이야기가 풍성한 학습 교재였다. 잠자리에서 조부모가 들려주는 이야기 안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 원리가 착실하게 담겨 있었다.
‘마음을 착하게 가지면 행복해지고, 악한 마음을 먹으면 그 벌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궁지에 몰리면 침착해져야 한다.’ ‘친구란 인생의 가장 큰 길동무다.’ ‘부모에게 효도하면 하늘이 감동한다.’ 이런 대원칙 말고도 사소한 일상의 교훈들은 더 많았다.
‘쌀 한 톨이라도 음식을 버리지 마라’ ‘밥 먹고 금방 자리에 눕지 마라’ ‘물을 아껴 써라’ ‘뜨거운 물을 땅바닥에 버리지 마라’ ‘밤똥을 누지 마라.’ ‘다리를 흔들지 마라’ ‘문지방을 베고 눕지 마라’ 등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소소한 금기들을 어른들은 이야기로 들려줬다.
비단 종가만의 경우는 아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잠자리에서 격대교육을 통해 이뤄졌다. 몇 해 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로버트 풀컴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선언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부모의 무릎 아래가 훌륭한 유치원이었다. 거기서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교육받았다.
안동군 임하면 의성 김씨 운암파 벽계 종가의 안방으로 다시 가 보자. 아이가 “머리 두”를 정확히 발음하자 할머니는 이번에는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어깨 견(肩)!” 할머니를 따라 꼬마도 어깨를 짚는다. “어깨 견!” 똑바로 서서 팔꿈치를 굽혀 손으로 양어깨를 짚는 동작일 뿐인데도 다섯 살짜리에게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다리의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한다.
다음은 “배 복(腹)!”과 “등 배(背)!” 배와 등을 쓰다듬으며 그 부위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말 이름과 한자를 같이 부른다. 아이는 자기가 머리와 어깨와 등과 배를 가진 사람임을, 방금 손으로 짚은 부위의 명칭이 어깨이고 또 ‘견’이라는 것을 저절로 암기한다.
아기체조가 도인체조의 기초였다니…
다음이 ‘무릎 슬(膝)’과 ‘발 족(足)’이다. 무릎은 허리를 숙이면서 짚어야 하는 부위다. 발은 몸을 더 깊이 굽혀야 한다. “무릎 슬!”과 “발 족!”을 외치면서 아이는 절로 제 몸의 굴신운동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굴신운동을 계속하면서 ‘어깨 견’과 ‘발 족’을 외치는 아이가 바로 필자였다. 나중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때쯤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머~리~ 어깨~ 무릎~ 발’이라는 노래를 배워오던 날 그 동작이 바로 내가 우리 할머니에게서 배웠던 동작과 같다는 것을. 할머니는 자신이 몸을 굽히지는 않고 꼿꼿이 앉으신 채 그 체조를 가르치셨다. 미국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노래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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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몸을 그렇게 크게 한번 어루만지고 나면 다음 커리큘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얼굴이었다. 아이의 학습 정도에 따라 같은 날 진행할 수도 있고 며칠 간격을 둘 수도 있다. ‘터럭 발(髮)’ ‘이마 액(?)’ ‘눈썹 미(眉)’ ‘눈 목(目)’ ‘코 비(鼻)’ ‘입 구(口)’ ‘이 치(齒)’ ‘귀 이(耳)’의 순서였다. 아주 정교했다. 순서도 틀리지 않아야 했다.
‘이마 액’ 할 때는 이마를 손끝으로 다다다닥 두드리고 ‘눈썹 미’에서는 눈썹 숱을 따라 장지로 가로획을 그었다. ‘눈 목’ 할 때는 장지의 볼록한 부분으로 눈머리를 꾹 눌러야 했다. ‘코 비’는 콧방울을 문지르고 ‘이 치’는 치아를 아래 위로 딱딱 마주쳤다. ‘귀 이’는 귓밥을 크게 한번 당겼다 놓았다. 이 또한 나중에 알게 됐다. 이 기본동작은 도인체조의 기초라는 것을!
요가에서도, 국선도에서도 비슷한 동작들이 있다. 할머니는 도인체조를 아셨던 것일까? 아침마다 손자에게 이 터럭 발을 가르치면서 당신 자신도 열심히 얼굴을 쓰다듬고 아이에게도 자그만 손으로 제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게 만드는 이 체조, 우리 집안 아이들은 네댓 살이 되면 누구나 이 동작을 배웠다. 그리고 평생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이마 액’ 하며 제 이마를 두드린다. 이마를 두드리는 것이 기혈 순환에 으뜸이라는 말은 곤지암에서 도자기를 굽고 사는 김기철 선생에게 들었다.
일흔이 훨씬 넘은 그 양반이 늘 만면에 웃음 가득 띤 청년 같은 표정인 것을 보고 비결이 뭐냐고 물었을 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한 10여 분 이마와 미간을 두드려 왔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늘 실천하던, 바로 그 일이었다. 네 살 때 할머니에게 배운 동작이었다.
“작은 애기씨, 총명은 이마에 다 들어 있니더. 이마를 자꾸 두드리면 그 총명이 낱낱이 살아나니더.”
할머니는 내게 하대하지 않았다. ‘작은 애기씨’라고 부르면서 존댓말을 쓰셨다. 따로 존댓말을 배울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 말을 흉내내면 그게 그대로 상대에 대한 극진한 공경이 됐다. 그러나 유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를 낳느라 목숨을 걸었던 어머니에게는 하대가 허용되었다. “엄마, 밥 먹어”였지 “엄마, 진지 드셔요”는 절대로 아니었다. 나는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말버릇을 고칠 수 없었다. 물론 더 정다운 말투라고 강변할 수는 있다. 실제로 더 정답기도 했다.
그러나 말이란 정신의 지도이고, 호칭이란 관계의 바로미터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부부와 ‘여보’ ‘당신’으로 호칭하는 부부가 상대에 대한 개념규정이 달라지듯 ‘~해라’가 가능한 어머니와 깍듯이 존댓말을 사용해야 하는 어머니는 모녀간의 역학구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엄마를 마음속 깊이 존중했던 적은 없었음을 고백한다(그게 할머니의 ‘무릎 아래 학교’에서 교묘하게 조작된 음모였다는 혐의가 짙다는 말이다).
“고추 신!”에 웃음을 터뜨리는 할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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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쯤 할머니의 표정은 짐짓 엄숙했지만 약간 곤혹스러운 듯도 했다. 손자라면 할머니에게 아무런 갈등이 없었을 텐데 그런 것을 구비하지 못한 손녀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탓일 수 있다. 나는 별 결핍감 없이 소리질러 그 말을 외쳤다. 유치원은 배운 것을 여럿 앞에 자랑하는 재롱잔치가 필수다.
‘할머니유치원’이라고 재롱잔치가 없을 리 없었다. 또래의 사촌 육촌이 많은 경우 무대 위가 제법 화려하겠지만, 나처럼 종반 없이 혼자 자란 아이들에게는 재롱잔치 프로그램이 좀 썰렁해진다. 공연자는 하나이고 관객은 여럿이었다. 집안 안어른들은 수시로 종가 안방에 모였다.
잔치 뒤끝이거나 큰제사 파젯날이거나 비록 늙은 호박을 삶아 콩고물을 묻혀가며 먹는 메뉴일지라도 무언가 별식을 앞에 두고 10여 명 둘러앉은 관객 앞에서 한창 재롱잔치가 벌어졌다. 분위기는 훈훈하게 무르익고, 나는 “머리 두” “어깨 견” “무릎 슬” “발 족”을 열연한다.
그것은 아마 거기 모인 대소가의 홑집(종가가 아닌 작은 집들을 말한다) 안어른들에게 집에 돌아가 자기 손자들을 교육하게 만드는 시범수업의 기능이었을 것이다. “귀 이”라고 소리치며 귀를 잡아당기는 부분까지 미소를 담고 지켜보던 할매들은 “고환 낭” “고추 신” 부분에서 와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거의 눈물을 찍어내며 웃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그 웃음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체조를 정확하게 귀엽게 잘했다는 칭찬도 아니었고, 할머니가 훌륭한 교사였다는 추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없는 고환에 대한 선망과 안타까움과 별수없이 ‘2등인간’으로 살아온 ‘치마짜리들’인 자신들 인생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제법 똘똘하게 “고추 신”을 외치는 아이가 고추 없이 살아갈 고단한 삶을 연민하는 웃음이었다. 눈물을 훔칠 일이 아닌데도 눈물을 훔쳐가면서 집안 할매들이 하도 웃어대는 통에 내 재롱잔치는 그쯤에서 어물쩡 마감됐다. 사실은 뒷부분 한 동작이 더 남아 있었건만 나는 발표회(?)에서 끝까지 산뜻하게 마감한 적이 거의 없다. 할매들이 하도 웃어대는 통에 뭔지 머쓱하고 초라해져 대개는 그쯤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 체조의 마무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한번 쓰윽 문지르면서 “몸 신!” 하고, 가슴께에 양손을 모으고 “마음 심(心)”하는 것이었다. “마음 심”이 끝나면 할머니의 마음이 담긴 그 가슴 안으로 와락 달려들어 안기는 것이었다. 발표회 때 나는 체조의 마무리를 정확히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마음이 담긴 가슴 안으로 달려드는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없었다. 대신 할머니의 등 뒤로 돌아가 거기 얼굴을 묻었다. 등에 업혀 뭔가 몹시 미진해 다리를 버둥거렸다.
집안 할매들이 중간에 와그르르 웃어서만은 아니었다. 내게 없는 신체의 어떤 부위, 이 방에 모인 어른들이 모조리 기막힌 결손으로 여기는 그것, 뭔지 모르는 그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동기는 동물적 감각이 아직 살아 있는 시기다. 어른들의 반응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 있다. 아기들이 누가 저를 진심으로 아끼는지 아닌지를 민감하게 감별해 내는 것도 본능의 작용이다.
반면 종손(손자)인 경우에는 전혀 달랐다. 종녀(손녀)가 느끼는 복잡미묘한 상황은 생략돼도 좋았다. 의기양양 체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들 포만감에 겨워 종손을 쓰다듬었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 체조와 발표회 속에서 종손이 종손다워지는 힘과 카리스마를 배양했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종가의 주된 교육 방법은 견문
종가의 주된 교육 방법은 견문이었다. 견문이란 한 번 어렵게 말해 본다면 ‘모델 모방을 통해 지각한 정보를 필요할 때 정확히 인출해 내는 정보처리 방식’이다. 타인들의 행동을 보고 들음으로써 학습하는 관찰학습법이고 자율학습법이다. 내가 어려서 듣기로는 “저 사람 견문이 없어”는 치명적 평가였다. 보고 들어 배운다는 것은 학(學)과 습(習)과 수신(修身)과 함양(涵養)을 스스로 성취해 나갔다는 말이다.
의성 김씨 운암파 벽계 종가의 아기체조는 신체 부위를 스스로 쓰다듬으면서 자기정체성을 자각시키는 놀이였다. 자신의 이목구비와 성기를 스스로 만져 보게 하는 놀이, 몸과 마음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게 하는 놀이였다. 그러면서 아기는 세계 안에 던져진 자신이라는 존재를, 그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생생하고 엄숙하게 감각한다.
대개의 종가에서 신봉하는 유학은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상적 이념을 좇을 뿐이다. 나는 운암파의 아기체조가 구체적으로 몸을 만지면서 제 존재의 가능성과 한계를, 세상이 한 생명에게 허락하는 자유와 굴레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놀이였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얼마든지 오늘날 아이 교육에 응용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