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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형왕릉 소고 (傳仇衡王陵 小考)
- 2008년도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으나 사진은 다 날라가버리고 글만 남았다.
- 여기에 다시 옮긴다. 조만간 다시 답사 간다... 꼭....
- 2013년 5월 1일 (수) 3번째 답사 갔다. (2006년, 2008년, 2013년)
- 달라진 모습이 조금 눈에 띈다.
- 전구형왕릉 앞의 전(傳)자는 없엤으면 좋겠다.
- 사진 자료는 맨 아래쪽에 첨부 시켰다.
전구형왕릉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 (055-970-6443) - 사적 제214호
입구에서 바라 본 왕릉 (2008년)
- 머리에
- 금관가야(金官伽倻)
- 금관국왕(金官國王)의 계보(系譜)
- 구형왕(仇衡王)
-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 또 다른 적석총(積石冢) 및 적석탑(積石塔)
- 참고문헌
- 사진자료
◀머리에
2008년 4월 6일 일요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아직은 와 닿는 바람이 약간은 매서운 초봄 아침.
이태 전, 남도여행 후 귀가 길에 산청 국도변의 덕양전(德讓殿)(주1)을 무심코 지나치다 다시 돌아서지 못하고 곧바로 귀가한 후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전 구형왕릉(傳仇衡王陵).
벼르고 또 벼르던 전 구형왕릉을 찾아보기로 하고 일단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구광루 아래 누하진입이 폐쇄되었다.
많은 인파들은 저마다 중정에 그려 놓은 해인도를 밟느라고 바빴다.
해인사에서 유일한 육각형 전각인 대적광전 옆 삼성각은 통째로 들어내 장소를 옮겨 장막을 쳐 놓고 공사 중이다.
곳곳에 철제 비계와 장막과 가설계단이다.
24년 전 해인사를 논문 테마로 잡고 당우(堂宇)들을 실측하며 문헌과 씨름하던 때가 새삼 떠올랐으나 그것도 잠시, 북적이는 인파가 거슬려 곧장 산청으로 향했다.
짧은 하루여정이라 서둘렀는데도 도착하니 벌써 오후 4시.
김유신장군 사대비(射臺碑)(주2)와 왕묘유지비(王廟遺地碑)를 지나 우리나라에 유일한 단형 피라밋 같은 이 경이로운 구조물이 있는 곳에 닿았다.
발굴도 하지 않고 사료의 뒷받침도 부족하여 지금까지 그저 그렇게 전해진다는 뜻으로 '전 구형왕릉'으로 불리고 있는 이 적석(積石) 구조물은 아직도 그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왕릉이냐 불탑이냐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중앙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문무인석(文武人石), 돌짐승(石獸),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도 배치되어 있다.
늦은 시각이라 다가오는 석양에 역광으로 정면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지만 이 놀라운 돌무덤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앞으로, 옆으로, 산기슭에 올라 뒤로 옮겨가며 원하던 전 구형왕릉의 많은 모습들을 앵글에 담았다.
아직은 다소 쌀쌀한 날씨이다.
왜일까?
날씨 탓일까?
인적이 드물어서일까?
이렇게 쓸쓸한 느낌은.......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구할 수 있는 서적은 다 뒤져보았으나 턱없이 부족한 가야역사에 더더욱 구형왕에 대한 기록은 어느 사료에도 서너 줄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가야는 어디로 갔는가?
구형왕의 진실은 무엇일까?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한 번 왕산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왕산사를 찾아보고 추성산성을 밟아 볼 것이며 왕등재에 올라 볼 것이다.
(주1. 문화재자료 제50호. 금관국 제10대 양왕(구형왕)과 왕비, 두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해마다 제사를 올리다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1798년부터 다시 항례를 올렸다.
광무 2년(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0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후 1991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2. 사대비 내용은 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 흥무왕김유신사대비(興武王金庾信射臺碑)이다.)
◀금관가야(金官伽倻)
우리나라 고대사의 제4의 제국.
1∼6세기 동안 낙동강 유역에서 기름진 땅으로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기원(紀元)을 전후해서 뛰어난 철기문화로 한 때 주변국 신라와 백제보다 대등 또는 강대한 국력을 과시하였던 가야.
그 여러 소국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金官伽倻).
금관가야국(金官伽倻國)은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등극한 서기 42년(주3)부터 신라 법흥왕(法興王)에게 멸망당한 532년까지 모두 10대 490년(또는 520년)간 존속하였다.
개국 초기에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가락기(駕洛記) 찬(贊)에 보면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와 다섯 개는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가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나머지는 각기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으니 금관(金官)을 다섯의 숫자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주4)라고 하였으니 다른 가야국들과 비교하여 금관국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의 전래도 비록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금관가야국 시조 수로왕대 부터 벌써 나타나고 있으니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즉위 2년(43) 임시궁궐 남쪽 신답평(新沓坪)에 이르러 "이 곳은 16나한(羅漢)이 머물만한 곳이며 아울러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7성(七聖)(주5)이 거처할만한 곳이다."고 하고 궁궐 공사를 시작하여 갑진년(44) 2월에 완성하였다는 나한과 칠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허황후 황옥(黃玉)을 맞이할 때는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고 하였고(주6), 이 후 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에는 왕후사(王后寺)를 지어 복을 빌었다.(주7)
그리고 장유화상에 대한 기록으로 "화상의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보옥이니 아유타국의 임금의 아들이다. (중략)
만년에 가락의 칠왕자와 함께 방장산으로 들어가 부처가 되었다(주8)고 하였으며 그 외에도 가야사에 불교에 관한 기록들이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초기 금관가야국의 국력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
갑진년(44) 2월 신답평(新沓坪)에 궁궐이 완성된 후 신라의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이 왕위를 빼앗으러 수로왕에게 왔으나 도술로서 이를 물리치니 탈해니사금은 살려준 데 감사하며 절을 하며 항복하였다.
그러나 수로왕은 혹시 돌아가는 길에 모반을 꾸밀까 걱정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하였으나 계림 땅 경계로 도망가 버렸다.(주9)
때로는 신라가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었으니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23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窸直谷國)이 국경을 두고 다툼이 있어 왕이 생각하기를 금관가야국 수로왕이 연로하여 아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여 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한 후 6부에 명하여 함께 수로왕을 대접하게 하였다.
이에 5부는 다 이찬으로써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祈部)만 직위가 낮은 자가 주인이 되게 하였으므로 수로왕이 노하여 한기부 주인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갔다.(주10)
일본서기에도 신라왕이 고구려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가야왕에게 구원을 청하니 가야왕은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주11)
이렇듯 강성했던 금관가야국이 3세기 초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침입(주12)이 있었고 4세기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이 후 약해진 국력으로 차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10대 구형왕(仇衡王)에 이르러 500년에 가까운 역사의 금관가야국은 마침내 신라에 양위되고 말았다.
이제는 그 기록들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강국 가야.
오늘날 산청 왕산(王山) 자락에 확실하지도 않은, 그저 그렇게 전해 내려온다는 금관국의 마지막 왕의 능이라고 여겨지는 돌로 쌓은 전 구형왕릉(傳仇衡王陵)이 있다.
다음은 신라 문무왕이 금관국 조상들의 제사에 소홀함을 책망하는 글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2대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부터 구형왕까지의 종묘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난 후에는 제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이에 신라 제 30대 법민왕(法敏王)(주13)용삭(龍朔)(주14) 원년 신유년(661) 3월에 조서를 내려 "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주15)의 아들 서운(庶云)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원군은 바로 나의15대 시조이다.
그 나라는 이미 망했으나 장례를 지내는 묘는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주3. 이 때 신라는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 백제는 다루왕(多婁王), 고구려는 대무신왕대(大武神王代)이다).
(주4. 삼국유사 가야)
(주5. 바른 지혜로서 진리를 터득한 일곱 사람이니 곧, 수신행,(隨信行), 수법행(隨法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신증(身證),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이다.)
(주6. 삼국유사 탑상(塔像))
(주7. 법흥왕 이전 눌지왕(訥祗王)대의 일이므로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法興王)대 보다 75년이 빠르다.)
(주8. 장유화상기적비(長遊和尙紀蹟碑))
(주9. 삼국유사 가락국기)
(주10.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니사금)
(주11.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8년 2월조)
(주12. 삼국사기 내해니사금(奈解尼師今)14년 포상팔국의 가야침공으로 가야왕이 구원을 청하매 신라왕이 태자 우로(于老)를 시켜 구원하였다.)
(주13. 문무왕(文武王)이다.)
(주14. 당나라 고종의 연호)
(주15. 구형왕은 시조왕의 10대손, 세종은 노종(奴宗)이며 솔우공은 졸지공(卒支公)이라고도 한다.)
◀금관국왕(金官國王)의 계보(系譜)
다음 금관국왕의 계보는 전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수로왕(首露王 42∼199)
후한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 3월 태어나 그 달에 즉위하여 157년 동안 다스렸다.
〈개황력(開皇曆)〉에는 “성은 김씨(金氏)이니 대게 시조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으로 김으로 성을 삼았다.”고 하였다.
-2대 거등왕(居登王, 199∼253)
아버지는 수로왕, 어머니는 허황후이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았다.
건안4년 기묘년(199) 3월 13일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嘉平)5년 계유년(253)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3대 마품왕(麻品王, 253∼291)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인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가평5년 계유년(253)에 즉위, 39년을 다스리고 영평(永平) 원년 신해(291)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4대 거질미왕(居叱彌王, 291∼346)
금물(今勿)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인 아지(阿志)로,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영평 원년에 즉위 56년을 다스리고 영화(永和) 2년 병오(346)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5대 이시품왕(伊尸品王, 346∼407)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으로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영화 2년에 즉위하여 62년을 다스리고 의희(義熙) 3년 정미년 (407)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6대 좌지왕(座知王, 407∼421)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계림(鷄林)이 꾀를 써서 치려 하므로,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했다.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오리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울 것이다.’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卦)를 살피시옵소서.”
이에 왕은 사과하며 옳다고 여겨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의희 3년(407)에 즉위 15년을 다스리고 영초(永初) 2년 신유년(421) 5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7대 취희왕(吹希王, 421∼451)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이며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영초 2년에 즉위 31년을 다스리고 원가(元嘉)28년 신묘년(451) 2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8대 질지왕(銍知王, 451∼492)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즉위한 이듬해에 시조와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하였다.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인 방원(邦媛)으로, 왕자 겸지(鉗知) 낳았다.
원가 28년에 즉위 42년을 다스리고 영명(永明)10년 임신년(491) 10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9대 겸지왕(鉗知王, 492∼521)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으로,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영명 10년에 즉위 30년을 다스리고 정광(正光) 2년 신축년(521) 4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10대 구형왕(仇衡王, 521∼532. 혹은 562)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保定 2년) 임오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자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주16)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주17)이며,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는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년(53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주16.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법흥왕 19년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있다.)
(주17. 무력(茂力)이 아닌가 싶다.)
◀구형왕(仇衡王)
구형왕(주18)은 금관국 제 9대 겸지왕의 아들로서 계봉(桂鳳)(주19)의 딸 계화(桂花)를 왕비로 맞아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노종(奴宗)이고 둘째는 무력(茂力)이며, 셋째는 무득(茂得)이다.
무력의 부인은 법흥왕비 보도부인의 동생 박씨(또는 진흥왕의 딸 아양(阿陽))으로 47세에 장자 서현(舒玄)을 낳고, 579년 62세로 타계했다.
무력의 아들 서현은 진평왕 25년에 출생하여 진흥왕의 질녀이자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이자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과 결혼하여 32세 때 흥무왕 유신(興武王 庾信)을 낳으니 시조 수로왕의 12대 손이다.
구형왕의 재위는 11년 혹은 41년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므로 41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법흥왕 19년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다음 아들 무덕(武德), 끝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자기나라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으므로 왕이 예절을 차려 그를 대우하고 상등위품을 주고 자기나라를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보면 11년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가락국기 말미에는 두 가지를 다 기록하고 있다.(주20)
화랑세기(주21) 유신편에 있는 구형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서현의 아버지는 무력이다.
무력의 아버지는 구형(仇衡)이고 어머니는 계봉(桂鳳)의 딸 계화(桂花)이다.
무력의 할아버지는 겸지(鉗知)인데 겸지가 우리(주22)에게 장가 온 것이다.
겸지가 10살 때 방원(邦媛)(주23)이 죽자 겸지가 세 번씩이나 납수(納水)를 보내어 청혼하였다.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출총(出悤)(주24) 각간의 딸 숙씨(淑氏)를 허락하자 겸지왕은 그 미모를 기뻐하고 후비로 삼아 구형을 낳았다.
구형왕은 계봉(桂鳳)의 딸 계화(桂花)를 왕비로 맞아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이며,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인데 우리나라 조정에서 노닐 적에 모두 예를 갖추어 대우하였다." 라고 하였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구형왕이 방장산의 태왕궁에서 신라에게 나라를 바치고 그 시호를 양왕(讓王)이라 한 뒤 신라에 투항한 뒤에도 30년을 더 살았다고 하고 혹은 신라군과 끝까지 항전하다 죽었다고 하는데 그 때 구형왕은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히겠느냐. 차라리 내 무덤을 돌로 덮어라.' 는 유언을 남겨 현재의 구형왕릉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는 동생 구해(仇亥)에게 양위하고 왜국 왕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주25)
(주18. 신라에 나라를 양위했다하여 양왕(讓王), 이름으로 하여 구해왕(仇亥王), 화랑세기에 구충왕(仇衝王)등으로 기록되어있다.)
(주19. 또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
(주20. "〈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신라에 바치고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 임인년(42)에서 구형왕 말 임자년(532)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땅을 바친 것이 위(魏)나라 보정(保定) 2년 임오(562)가 되므로 30년이 더 있게 되니 모두 520년이 되는데, 지금 두 가지 설을 다 기록한다."
(주21. 〈화랑세기〉는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또는 〈해동고승전〉 등에는 그 기록이 실려 있다.
그런데 1989년 부산에서 재야 사학자 이태길 선생에 의해 [화랑세기]가 공개되었으나 사학자들은 위서(僞書)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그 책에 대해 그 신빙성을 주장하는 학자(1995년 서강대 이종욱 교수 등)가 차츰 늘고 있다.
(주22. 저자 김대문의 입장에서의 우리, 즉 구형-무력-서현-유신에 대해 신라 정통파를 표현)
(주23. 질지왕의 왕비)
(주24. 또는 출충(出忠))
(주25. 일본 메이지 대학 스즈끼(鈴木武樹) 교수)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대부분의 면적을 산이 차지하고 있는 경남 산청.
지리산을 모산으로 굽이치는 경호강을 끼고 함양, 합천, 산청을 아우르는 이 곳 왕산(王山 932m)자락에는 유난히도 금관국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 많다.
가락국의 골짜기를 뜻하는 '국골',
식량을 저장해둔 곳간인 '두지터',
왕이 올랐다는 고개인 '왕등재',
가락국을 상징하는 깃대를 꼽았다는 '깃대봉’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성하였다고 전해지는 '추성산성',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
그리고 빈대궐터.....
그 산청에서도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왕산 아래 확실하지도 않은 채 가락국 제 10대 임금 구형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돌로 쌓아만든 단형 피라미드 같은 무덤 한 기가 있다.
이것이 어떠한 석조물인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저 구형왕릉으로 전해져 온다는 뜻으로 전 구형왕릉으로 불리우고 있다.
사적 제 21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무덤을 왕릉이라는 근거로 왕산사 유물과 〈왕산사기〉를 들고 있다.
1798년(조선 정조 22년) 산청 좌수 민경원이 이 능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 왕산사의 나무 궤짝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 옷, 녹슨 칼, 활 등의 유품과 함께 탄영 스님이 쓴 <왕산사기>를 찾아내었다.
그 <왕산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6년, 서기 676년에 신하를 보내어 구형왕릉과 왕산사를 중수케 했고, 1021년에는 고려 신종이 산음 현감을 시켜 왕산사를 보수케 했다' 고 했으며
또한 '왕산사가 임진왜란에 불탔던 것을 인조 2년, 서기 1624년에 인종 스님이 왕산사를 중수했으나 폐허가 되고 만 것을 효종 1년, 서기 1650년에 법영 스님이 왕산사를 다시 중수하고 구형왕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주26), 〈대동지지〉(주27), 〈한국지명총람〉 등 문헌에 이 내용들이 나타나면서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구형왕릉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석총 앞에 ‘가락국양왕릉’이라 새긴 비석과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돌짐승 등의 석물을 배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또 조선시대 문신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이 지은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주28)에도 "무덤 서쪽에 왕산사가 있고 절 위쪽에는 왕대(王臺)가, 아래쪽에는 왕릉이 있으며 신라에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나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 때 성대중은 〈양왕심릉기〉(讓王尋陵記)에 이르기를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의 침략을 받아 백성이 상할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니, 법흥왕은 구형왕을 금관주도독으로 임명하고 김해지역을 식읍으로 주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이곳의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곳에 장사 지냈는데 돌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우선 돌로써 쌓아 올린 피라밋 형태의 무덤이 남부지역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설령 그 형태가 북방 고구려의 적석총과 많이 닮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런 형태의 무덤이 가야 멸망기에 갑자기 나타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일부에서는 이형탑일 수도 있고 제사를 지냈던 제단일 수도 있다고 본다.
부산외국어대학교의 권덕영 교수는 그의 논문(주29)에서 탑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구형왕릉은 무덤이 아니고 부근에 있는 왕산사지와 관련하여 불탑임이 명백하다고 밝히고 있으며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작설까지 제기하며 ‘만들어진 역사의 전형’이라고 단정지어 말한다.
왕릉 아래 도로변에는 덕양전(德讓殿)이 있고 이곳에서 구형왕과 왕비 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봄(음3.16), 가을(음9.16)에 제향을 올린다.
진실은 무엇일까?
아직도 많은 부분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금관국
전 구형왕릉의 진실이 어둠을 벗고 역사 앞에 나타날 때는 언제인가?
다음은 전 구형왕릉의 안내문 전문(全文)이다.
[가락국(駕洛國, 金官伽倻) 10대 구형왕릉(仇衡王陵)으로 전해지는 특이한 석조물(石造物)이다.
동쪽으로 내려오는 경사면에 피라밋 모양으로 자연석을 쌓아 올렸다.
위로 올라 갈수록 면적을 줄여가며 모나게 일곱 단을 쌓아 올렸는데 전체 높이는 7.15m이다.
각 단 앞부분의 양쪽에는 모서리가 분명하지만, 뒤쪽은 경사면에 붙여 돌을 쌓아 모서리가 없다.
네 번째 단에는 가로 40cm, 세로 40cm, 깊이 68cm 의 감실(龕室)과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감실은 신주(神主)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여기에서의 용도는 알 수 없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긴 비석이 있고 돌담으로 주위를 둘렀다.
문무인석(文武人石), 돌짐승(石獸),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등도 배치되어 있으나,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 구형왕릉(傳仇衡王陵)이라는 명칭은 확증은 없고 그렇게 전해진다는 뜻으로 부쳐졌다.
발굴조사는 아니지만, 신라대학교박물관의 조사에 따르면 왕릉과 같은 고분일 가능성은 아주 적을 것이라 한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아래쪽에 있는 암자 부근에 왕산사(王山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었고,
지역의 전승에서는 약 200년 전에 왕산사에서 활, 칼 등과 함께 왕릉에 대한 기록도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산을 다 내려간 입구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시는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덕양전 경내에는 홍살문, 영정각, 안향각, 정숙당, 추모재 등의 건축물과 연못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에 제향(祭享)이 올려지고 있다.]
(주26. "왕산은 현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이 모두 층계로 돼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27. 1864년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구형왕릉으로 기록)
(주28. <왕산심릉기>는 <왕산사기>를 인용한 2차적 사료이다.)
(주29. 〈대구사학〉 86집에 투고한 논문 '금관가야 '구형왕릉' 전승과 역사화 과정')
◀또 다른 적석총(積石冢) 및 적석탑(積石塔)
삼국시대에 또 다른 적석총이 있었다.
첫째 서울 석촌동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백제초기적석총(百濟初期積石塚)으로 규모는 49,999㎡ 이다.
475년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형성된 백제 전기 고분군이다.
1917년 당시만 해도 60기 이상의 적석총이 남아있는 등, 돌이 많았기 때문에 '돌마리'라고 불리워 왔던 곳이다.
이중에서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어 보수ㆍ정비된 것은 제3ㆍ4호분이며 3호분은 방형(또는 장방형)의 단축적석총(段築積石塚)이고, 3단까지 남아있는 각 단의 높이는 0.7∼0.8m, 폭 4∼4.2m이다.
남북 길이 43.7m, 동서 길이 55.5m, 그리고 높이가 약 4.5m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고분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장군총(將軍塚)보다 규모가 크고, 아울러 고구려 기단식 적석총의 외형과 축조 방법이 흡사하다.(주30)
축조 시기는 초기 백제 성곽 축성시대로 잡고서 A.D. 3세기 중엽의 초대형급 적석총으로서 근초고왕(近肖古王, 346 ∼ 374)의 능(陵)일 가능성이 크다.
제1ㆍ2호분 및 내원외방형분 등 3기는 파괴가 극심하여 하단부의 일부만 남아있어 상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이라고 본다.(주31)
둘째는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銀峴里)에 있는 시도기념물 8호 적석총(積石冢) 이다.
이것은 은현리의 마을 뒷편 야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부분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적석총이다.
형태는 백제 초기의 무덤과 유사하나 현재 대부분이 붕괴되어 확실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남아있는 돌무지무덤의 규모는 길이 19m 내외, 높이 5∼6m 정도이다.
확실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우시산국(주32)의 국읍이었던 검단분지에 마고해미가 쌓았다는 민보유지와 관계되는 유적으로 생각된다. (주33)
셋째로 울릉도 남서리 고분군(주34)이다.
다음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된 고분군의 안내판이다.
[이 일대는 울릉도에서 가장 많이 밀집분포하고 있는 고분군 유적의 하나이다.
무덤은 지형의 제약을 받아 산록경사면에 괴석(塊石)으로서 위가 편평하게 축대 또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체를 안치하는 돌덧널을 만들고 그 위에 돌로써 봉분을 만든 이른바 석총(石冢)이다.
특히 개석(蓋石)으로 큰 장방형의 화강암을 사용했는데 돌덧널 입구의 앞이 수직벽으로 되어 마치 신전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울릉도 고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
김원룡(주35)은 "입구 부분은 원래 돌로 막았던 것 같으나 현재는 돌이 모두 없어져서 속이 들여다 보이고...."라고 보았으나, 이도학(주36)은 고구려 석실적석총(石室積石冢)에 갖추어진 감실(龕室)로 보고 있다.
울릉도 4구역에서 모두 약 87기의 적석총이 확인되고 있는데(주37) 김원룡은 이 고분을 "영남지방 석곽묘의 한 지방 형식"이라 분류했고 이도학은 고구려 적석총의 한 지방으로 양식으로 분류하였다.
그 이전에 이도학은 그의 논문에 산청의 전 구형왕릉을 이형석탑(異形石塔)의 범주에 포함 시켜 고분이 아닌 석탑으로 해석했는데, 울릉도 적석총 답사 후 지금은 전 구형왕릉이 분묘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적석탑으로는 안동과 의성에 서로 유사한 모습을 한 고려시대 이후나 조선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
안동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 (安東石塔里方壇形積石塔)은 경북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 마을에 있는 탑으로 1997.12.19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43호로 지정되었다.
평면은 정방형에 가깝고 층수는 5층인 막돌로 계단식으로 적석탑이다.
축조연대는 알 수가 없으나 신라시대 이후 일반화되어 있는 탑의 정형에서는 벗어난 탑으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비슷한 형태의 탑으로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의 방단형 적석탑이 있다.
의성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 (義城 石塔里 方壇形積石塔)은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208에 위치한 탑으로 1997.12.19.에 유형문화재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지방도 옆 야산 기슭에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막돌을 이용하여 계단모양으로 쌓아 올려 층단을 만들었으며 둘째단 네면의 중앙에는 감실을 두어 불상을 안치한 특이한 형태의 적석탑이다.
안동 북후면 석탑리의 적석탑과 유사하며 시대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주30. 이는 고구려의 유이민이 백제를 건설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주31. 서울문화재에서 옮김)
(주32. 지금의 울산 지역)
(주33. 문화재청 기록에 의함)
(주34. 수량 15기, 면적 52,135㎡, )
(주35. 김원룡<1922-1993>, 고고학자, 평안북도 출신,
1945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1957년 미국 뉴욕대 철학박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로는 〈신라토기의 연구〉,·〈한국고고학개론〉등
(주36. 이도학, 1957년생, 문학박사, 저서 <백제 고대국가 연구>외..)
(주37. 이도학, 〈한국고대사 노트〉, 일지사, P.223)
◀참고문헌
김태식,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김영사, 1979
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시민을 위한 가야사〉, 집문당, 1996
이도학, 〈한국고대사 노트〉, 일지사, 1996
윤석효, 〈신편가야사〉, 혜안, 1997
김대문(조기영역), 〈화랑세기〉, 장락, 1997
이성주, 〈신라. 가야사회의 기원과 성장〉, 학연문화사, 1999
이점호, 〈잊혀진 왕국 가야〉, 선우미디어, 1999
김부식(고전연구실역), 〈신편 삼국사기 상하〉, 신서원, 2000
김경복. 이희근, 〈이야기 가야사〉, 청아출판사, 2001
일연(김원중역),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
〈일본서기〉
◀사진자료
이정표.... 이제 다 왔다.
대진고속도로에 올라 산청IC에서 빠졌는데... 잘 못했다. 생초IC에서 빠지는게 훨씬 가깝다.
도로변에 있는 덕양전
양왕(구형왕) 제를 지내는 곳이다.
덕양전 담 너머 보았다.
덕양전(德讓殿)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371번지(경남문화재자료 제50호)
왕릉 올라가는 길목 오른편에 있는 망경루(望京樓)
역시 오르는 길목 오른편에 있는 조그만 사찰
김유신장군 사대비
김유신장군께서 활을 쏘았다는 곳인데....근래에 세운 것 같다.
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 흥무왕김유신사대비(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 興武王金庾信射臺碑)라고 되어있다.
왕묘유지비
오르는 길목의 왼편에 있다.
앞면에는 가락국기라고 되어있는 것 같고....
뒷면에는 왕묘유지라고 되어있는 것 같은데....
이건 좀 오래된 것 같다.
이런 안내판도 있다.
오르는 길
구형왕릉 앞 홍살문
왼편은 해태인 것 같고...
오른편은 사자인 것 같다.
전 구형왕릉이다.
구형왕릉 앞의 전(傳)자는 왕릉이 확실하지 않고 그렇게 전해온다는 뜻이다.
왕릉 앞 솟을대문
왕릉 전경
가락국양왕릉비
양왕은 구형왕의 또 다른 이름으로, 신라에 양위했다하여 그렇게 불린다.
왕릉 좌우의 문무인석상
모두 근래에 만든 것이다.
7단 중 4단째에 있는 감실(龕室)
왕릉 옆 호릉각 (護陵閣)
뭐...능을 지킨다는 그런 뜻이다.
호릉각 담너머 홍예가 아름답다.
왕릉의 여러 모습들....
구형왕 표준영정
표준영정지정년도: 1997
제작작가: 김종섭
영정크기: 98 X 153(가로X세로cm표시)
소장지및소장인: 덕양전
울주군 은현리 적석총 (문화재청 사진)
안동 석탑리 방단형적석탑 (문화재청 사진)
의성 석탑리 방단형적석탑
서울 석촌동 고분군 (김경숙님 카페 사진)
울릉도 서면 남서리 고분군 (예닮님의 블로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