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학교(교장 최창남)의 <백두대간걸작선> 6월 산행(제32강)은 <지리산 구간> 1박2일입니다. 출발일은 6월 21일(금) 오후 11시입니다. 무박으로 버스에서 잠을 자며 이동하고 산행일은 6월 22~23일 이틀간입니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이자 또다른 출발점입니다. 하늘의 지혜 깃들어 있으나 수많은 아픔을 품고 있는 장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어머니의 산 지리산으로 들어갑니다.
▲ 지리산...산...산 ⓒ지리산국립공원
산행은 중산리에서 시작하여 법계사를 지나 개천문을 통과해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을 오릅니다. 지리산의 장엄한 기운을 담뿍 담고 천왕봉을 오르는 또 하나의 하늘과 통하는 문인 통천문을 지나 제석봉의 고사목과 야생화를 만나고 내려서면 장터목대피소입니다. 연하봉의 선경은 여름 지리의 백미이며 황홀한 아름다움입니다.
촛대봉에 오르면 드넓은 세석고원이 싱그럽게 펼쳐집니다. 철쭉 울창한 세석대피소에서 1박을 합니다. 함께 한 도반들과 지리산의 달빛과 구상나무가 들려주는 산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연과 하나 되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둘째 날 산행은 낙남정맥 능선길을 걷습니다. 낙남정맥은 세석고원의 영신봉에서 가지 뻗어 지리산 남부능선인 삼신능선을 따라 경남 김해 고암나루터까지의 도상 232km 이르는 정맥 능선길입니다. 바위의 양쪽에서 샘이 솟는 음양수를 지나 지리산 남부능선인 삼신능선을 걷습니다. 석문을 지나고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 도인촌을 지나며 산행을 마감합니다.
▲ 천왕봉 표지석 ⓒ백두대간학교
최창남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산행지 설명을 듣습니다. 이 땅 모든 산줄기들의 시작이며 강의 시원이고 생명의 요람인 백두대간-. 그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백두산(白頭山)이 흐르고 흘러 된 산이 바로 지리산(智異山)입니다. 백두대간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태백산, 소백산, 지리산 등 수많은 산들이 모여 이루어진 산줄기가 아니라 백두가 흘러내리며 금강도 되고, 설악과 오대도 되고, 태백과 소백도 되고, 지리도 된 것입니다.
그 모두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산이고 하나의 산줄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지리산을 '백두산이 흘러 내려 이루어진 산'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흐르고, 지리에서 백두까지 이어진 약 1,625km의 장엄한 산줄기가 바로 백두대간입니다. 백두가 흘러 지리가 된 것이니 백두가 지리를 닮고 지리가 백두를 닮아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백두산(白頭山)이 '지혜의 머리가 되는 산'이니 지리산(智異山) 또한 '머물면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지혜의 산'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백두대간은 지혜에서 시작하여 지혜로 끝나는 산줄기입니다. 모든 산줄기와 강줄기들 품어 흐르게 함으로써 이 땅에서 수많은 생명 살아가게 한 생명을 주관하는 하늘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산줄기입니다. 이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한 신성한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두산의 연못은 하늘의 못인 '천지'(天池)이어야만 하고 지리산의 최고봉은 하늘의 봉우리인 '천왕봉'(天王峰)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천문(開天門)과 통천문(通天門)을 지나야만 천왕봉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 운해 ⓒ지리산국립공원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지리산(智利山)입니다. 이것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가져온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현신한 문수보살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가 계승되고 재해석되어지는 가운데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지리산(智理山)이라고 불리게도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가득 품은 산이건만 인간을 품은 지리의 역사는 험난하기만 합니다. 헤아리기 쉽지 않은 아픔과 주검들이 담겨 있습니다. 멀리 삼한시대까지 이야기가 올라갑니다. 당시 마한 왕조는 지금의 달궁 계곡으로 쫓겨 들어왔다가 최후를 맞았습니다. 당시의 상황들을 지리의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의 험준한 산세를 지키기 위해 수비군을 배치했습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의 이름은 '팔랑치'가 되었습니다. 서쪽에는 정장군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령치'이며, 동쪽은 황장군이 있었으므로 '황령'입니다. 남쪽은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성삼(姓三)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때 쌓은 성의 흔적들 또한 고리봉에서 정령치,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아직도 남아 그 옛날의 이야기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지리산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높은 산줄기로 인해 국경의 접경지대였기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고려 때는 몽고군과의 항전과 왜구와의 전쟁 그리고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근대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아픔이 깃들어 있고, 현대에 들어서는 1948년 여순반란으로부터 1955년까지 계속된 치열한 좌우 대립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봄바람에 진달래 꽃잎 떨어지듯 그렇게 스러져가기도 한 곳입니다.
지리산의 이러한 험난한 역사는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라는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산은 바다에 인접해 있어 외국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로서 새로운 문화적의 발상지 역할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토의 남쪽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변방에 머물러 있게 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변방성은 다른 의미에서 보면 중심지에 대한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장터목에서 바라보다. ⓒ지리산국립공원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유입되는 곳이면서 중심지와 멀리 떨어져 어느 정도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조건 등이 지리산을 험난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만드는데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의 속성이 있었던 땅이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었던 것입니다. 통일 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을 주도한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와 같은 선종의 구산산문 중 2개 산문이 일어난 곳도 지리산이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동이 일어난 곳도 지리산이었습니다.
지리산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을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이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난 배경 역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으로 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천왕봉 ⓒ지리산국립공원
지리산에는 역사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기에 때로 반역의 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지혜 품고 있는, 생명의 땅 지리산에는 주검의 역사 또한 드리워져 있습니다. 멀리 삼한 시대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해방 정국만을 보더라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지리산에서 죽어 갔습니다.
6월은 그 길들을 따라 걷습니다. 중산리에서 백두대간의 끝이며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한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을 향합니다. 장엄한 천왕봉에서 제석봉과 장터목을 거쳐 연하봉을 지나 걸으면 세석고원입니다. 세석에서 지리의 품에 안겨 하룻밤 머물며 세석의 철쭉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후련하게 씻겨줍니다.
백두대간은 세석고원을 지나 영신봉을 거쳐 벽소령, 삼신봉, 노고단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리산 종주의 대표적인 구간입니다. 이번 지리산 산행은 세석고원에서 청학동을 향해 걷습니다. 세석고원의 서쪽 봉우리인 영신봉에서 줄기 이어가는 낙남정맥을 따라 청학동으로 내려오는 코스입니다.
세석을 출발하여 석간수인 음양수로 목을 축이고 빨치산 이현상 부대가 최후를 맞이한 대성골 갈림길을 지납니다. 김해 고암나루에서 이어진 낙남정맥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석문을 지나면 지리산 남부능선인 삼신능선이 장쾌하게 이어집니다. 삼신능선은 동쪽의 산청군 시천면과 서쪽의 하동군 화개면을 가릅니다. 삼신봉에 올라서면 장엄한 지리산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천왕봉, 장터목, 세석고원, 벽소령, 삼도봉, 노고단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웅혼한 지리산의 주능선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삼신봉을 지나 외삼신봉을 지나는 능선은 232km의 남남정맥으로 흐릅니다. 발걸음을 오른편으로 옮겨 내려서면 도인촌 청학동입니다.
▲ 개천문 ⓒ백두대간학교
청학이 날고 도인인 살았다는 이상향 청학동-. 민초들이 꿈에서라도 꼭 한번 가고 싶어 하던 이상향, 아직도 댕기 땋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낭낭하게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청학동을 향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청학동입니다. 옛 선인들의 지혜를 지키고 이어가는 청학동을 거쳐 지혜의 땅에서 나옵니다. 이상향 청학동에서 걷기를 마칩니다. 그 길들, 그 장엄하고 아픈 지리산이 거기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길 따라 걸으시기 바랍니다.
▶구간소개
*1일차(6월 22일 토요일) -산행코스 : 중산리-칼바위-망바위-법계사-천왕봉-제석봉-장터목-영신봉-세석대피소(1박) -산행거리 : 약 10.2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9시간 -난 이 도 : 상하(★★★)
*2일차(6월 23일 일요일) -산행코스 : 세석대피소-음양수-석문-삼신능선-삼신봉-갓거리재-청학동 -산행거리 : 약 9.8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5시간 -난 이 도 : 중하(★★)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경력 30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엄재용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3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번입니다.
<6월 21일(금)>
1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11:3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서초구청 앞) 11:45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 버스 승차장 11:55 경부고속도로(하행) 신갈 버스 승차장
04:00 기상 아침식사/ 스트레칭 05:30 세석 출발 - 산행 시작 06:20 음양수 07:20 석문 08:30 한벗샘 09:30 삼신봉 09:40 갓거리재 10:30 청학동 - 산행 마감 11:00 포란정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식사(도인촌 첫 번째 집) 식사 후 삼성궁 등 도인촌 탐방 13:30 청학동 출발 중간 기착 19: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식단 : 22일 조식 - 매식/중산리 - 해장국 중식 - 조리식/장터목대피소 - 라면 외 석식 - 조리식/세석대피소 - 오리고기 외 23일 조식 - 조리식/세석대피소 - 누룽지 외 중식 - 매식/청학동 - 산채비빔밥 외 산행 보충 설명 : 지리산에서는 식수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곳곳에 샘들이 있어 식수를 충분히 보충할 수 있습니다.
세석대피소(숙소) 현황 안내 현재 국립공원에서 비박을 집중 단속하고 있습니다. 세석대피소는 인터넷으로만 예약을 할 수 있습니다. 예약 인원을 벗어난 인원은 잠자리가 매우 불편할 수 있습니다. 대피소 예약에 적극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석대피소 예약일은 6월 7일 오전 10시입니다.
▲ 양털구름 ⓒ지리산국립공원
<백두대간걸작선> 제32강 <지리산 구간> 참가비는 2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5회 식사와 뒤풀이, 가이드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금감원의 보험사 개인정보 보안강화 규정으로 여행자보험 단체가입이 어렵고, 다른 보험에 가입한 경우 중복보장이 안 되는 등 실익이 크지 않아 여행자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은 개인 가입을 하시고, 이동시 '안전'에 특히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는 보험 가입이 돼있습니다.
[7월 산행 안내] *7월 산행은 백두대간 조침령에서 단목령 구간입니다. 7월 산행일은 셋째 주 토요일(20일)입니다. 여름 휴가철과 겹쳐 한 주 앞당겨 산행을 실시합니다. 참고하시고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산행일 : 7월 20일(토요일) -산행지 : 조침령 ~단목령 백두대간 -산행코스 : 조침령-943봉-상부댐-1138봉-북암령-단목령(박달령)-오색초등학교 -출발시각 : 토요일 오전 6시 덕수궁 출발 -참가비 : 9만원
[특집-10월 제주도 산행] *가을맞이 특별산행이 10월 제주도에서 2박3일간 열릴 예정입니다. 제주도까지는 각자 항공편(또는 배편)으로 이동해서 제주공항에서 모일 계획입니다. 특히 항공편으로 참가하실 분은 지금부터 예약을 서둘러주시기 바랍니다. 예약은 빠를수록 편리하고 이점이 많다고 합니다. 10월 말 주말편은 특히 예약이 어려우니 서둘러주십시오. 제주도 특별산행 참가자는 먼저 반드시 항공편을 예약하시고 참가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주도 산행일은 10월 25(금)~27(일)일(2박3일)이며 10월 25일 김포에서 제주로 출발하는 항공편은 오전 6시 15분에서 8시 사이에 50여 편이 있고, 27일 제주에서 김포로 귀항하는 항공편도 오후 6시 이후에 50여 편이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 달에 공지하겠습니다. -산행일 : 10월 25(금)~27(일)일(2박3일) -주요일정 : 1일차 : 윗세오름 산행(영실-윗세오름-남벽-윗세오름-어리목) 2일차 : 한라산 산행(성판악-백록담-관음사) 3일차 : 사려니 숲길, 북촌 돌하르방 탐방 -참가비 : 33만원(2박7식비, 가이드비, 강의비, 운영비 등, 도내 교통비 등 포함, 항공료는 불포함) -집결시각/장소 : 10월 25일 오전 9시 30분 제주공항 -해산시각/장소 : 10월 27일 오후 5시 30분 제주공항
▲ 여름 빛깔 ⓒ지리산국립공원
[산행자료]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 법계사 ⓒ백두대간학교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속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운동,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 원추리 ⓒ지리산국립공원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지리산과 역사적 인물 지리산은 경남의 산청, 함양, 하동군과 전북의 남원시, 전남의 구례군에 걸쳐 있으면서 오만 가지 삶을 아우르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 20여 개가 펼치는 산자락 둘레만도 800여 리에 이르는 산답게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작품을 낳기도 했다. 고운 최치원을 시작으로 고려 때는 이인로, 조선시대에는 서경덕,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남명, 서산대사 등이 지리산에 올랐다가 느낀 바를 작품으로 남겼다. 고운은 지리산 곳곳에 글과 글씨를 남기고 가야산에서 영원히 입산하며 "스님이여 산 좋다 말씀마오/이렇게 좋은 산을 낸들 어이 떠나겠소/뒷날 내 자취 찾아 보시구려/한번 들면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니"를 읊고는 약속대로 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이인로는 고려 무신정권 아래서 참담한 생활을 하다 이상세계를 찾아 지리산에 들어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구나/천암(千巖)이 다투어 솟아 있고/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데/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복숭화꽃 살구꽃에 어리어/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 하구나"라고 노래했다. 화담은 반야봉에 올랐다가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라는 시를 읊고는 즐거워 했다고 <화담집>에 기록하고 있다. 점필재와 그의 제자 김일손은 각각 17년의 간격으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점필재는 <유두류록(流頭流錄)>을,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천왕봉 일출을 보면서 "햇살에 비친 계곡과 하늘이 온통 구리쇠를 갈아 뿌린 것 같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차츰 눈에 들어오는데 대지의 모든 산이 개미집이요/지렁이가 흙을 물어 쌓은 듯하다"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천왕일출 감상을 적고 있다. "흰 구름이 산골짜기에 자욱하니 푸른 바다 물결은 포구를 이루었고, 흰 파도가 눈을 몰아내니 산뜻한 섬이 되어 점점이 깔린 듯하다. 돌담에 몸을 기대고 위아래를 바라보니 정신도 마음도 한가지로 막막하여 몸이 태초의 공간에 안긴 채 하늘과 땅과 더불어 흘러가는 듯 했다."
-지리십경(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옛 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자락에서 내려 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 능선 ⓒ지리산국립공원
[칼바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곤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망바위] 해발 1068m.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법계사] 1450m.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5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 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버린 것이라 한다.
[개천문(개선문)]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1800m. 남강댐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 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 물.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다.
[천왕봉] 1915.4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천왕봉의 성모상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 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아진 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수십 여성상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
[제석봉] 1808m. 천왕봉 서쪽에 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 부근은 느슨하고 봉긋한 형태다. 과거에는 고사목이 즐비하여 별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수도 많이 줄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의미지만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으므로 어울리는 이름 같지는 않다.
[장터목]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 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연하봉] 1730m. 장터목의 남서쪽 봉우리로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건너다볼 수 있는 위치다. 정상은 암장으로 형성되어있다. '지리8경' 중 '연하봉 선경'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연기(煙연기연)가 노니는(霞놀하) 선경'이니 매우 아름답다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연기는 당연히 구름을 지칭하며 선경이라 함은 좁게는 바로 건너다보이는 천왕봉이고, 넓게는 천왕봉은 물론 중산리계곡과 거림계곡, 백무동계곡 그리고 겹겹이 둘러져 꿈틀대는 능선 등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촛대봉] 1703.7m. 옛날에 연진이라는 여인이 남편 호야와 대성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녀가 없어 고민하던 중 흑곰에게 세석고원에 있는 신비의 샘물을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남편과 상의 없이 산신령이 금기시킨 영신봉 음양수를 마셨다. 평소 흑곰과 앙숙이던 호랑이가 산신령에게 일러바쳐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 남편과 생이별한 채 철쭉밭을 가꿔야 하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연진 여인이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고 천왕봉 산신령에게 용서를 빌다가 돌로 굳어버렸고 촛대봉 바위는 연진 여인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평생 손끝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철쭉꽃을 가꾼 여인의 슬픔과 피가 이곳의 철쭉꽃을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사람들은 믿었다 한다.
[세석고원] 오래전에는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 표현으로 바꾸어 세석평전이라고도 했는데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는 의견이 있어 일반적으로 세석고원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세석의 철쭉은 연한 빛으로 창백하기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설가와 문장가들이 자극적인 붉은빛으로 묘사한 이유는 과거 빨치산 투쟁 때 이곳에 김일성대학이 있었고, 또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라서 이들의 흘린 피와 절규가 한(恨)의 꽃으로, 즉 과거 이데올로기의 비극의 채색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현상의 남부군 주둔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남부군의 군중대회와 연극공연 등이 열렸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토벌대에 포위되어 몰살을 당했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경남 산청,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 등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지리산의 중심지. 세석고원(細石高原, 1400m~1703m)은 약 30만평에 달하는 드넓은 면적과 남향으로 15도 경사를 이루며 완만하게 펼쳐진 지형이다. 이로 인해 남녘의 개마고원으로 불릴 정도로 지리산에서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지형을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자생하는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세석고원에는 200여 종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 세석의 철쭉은 '지리산 십경'의 하나로 '세석척촉'으로 유명하다.
[영신봉] 1651.9m.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이라 하는데, 정맥의 시작되는 곳이 영신봉이다. 300~800m의 산들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 되고, 영신봉에서 옥산에 이르는 구간의 남쪽은 서쪽의 섬진강으로 물을 보낸다. 그러나 낙남정맥이 동쪽으로 방향을 정한 뒤로는 남쪽의 바닷가로 물이 흐른다.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익산을 지나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동신어산에서 끝나는 낙남정맥은 내륙과 남부 해안지방과의 경계로 작용한다.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靈神峰, 1,651m)에서 낙동강 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신어산(631.1m) 지나 고암나루터까지 약 도상 232km에 이르는 산줄기.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삼신봉, 봉대산, 무량산, 무학산, 천주산, 금음산 등으로 이어져 신어산에 이른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대체로 경남 남서의 해안지방, 즉 하동·사천·삼천포·고성·마산·창원·김해가 위치한다.
[삼신봉] 1284.5m. 삼신봉은 어미의 품처럼 넓은 지리산 자락에 흩어진 수십 개 봉우리 중의 하나로 영신봉(1652m)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상의 최고봉이다. 또한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로서 참다운 가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악양으로 흘러내린 형제봉 능선과 멀리 남해 바다의 일망무제, 탁트인 전경을 선사해준다. 특히 인적 드문 비경의 남부능선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동으로는 묵계치를, 서쪽으로 생불재, 남으로는 청학동을, 북쪽으로는 수곡재와 세석고원을 이어주는 사통팔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지리산 하동지역은 쌍계사, 칠불사 등의 절을 비롯하여 불일폭포, 화계계곡, 청학동, 도인촌 등의 볼거리도 많다. 청학동 마을에서 삼신봉을 바라보면 왼쪽부터 쇠통바위, 가운데는 내삼신봉, 오른쪽이 외삼신봉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특히 삼신봉은 봄의 벚꽃 산행지로 이름 나 있다. 하동-쌍계사 십리 벚꽃길, 섬진강 60리 벚꽃길이 매년 4월 초순이면 장관을 이룬다. 수령 60년이 넘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활짝 필 때 벚꽃 산행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10리 벚꽃길은 젊은 남녀들이 걸으며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혼례길목'으로 불린다. 섬진강 벚꽃길 60리는 섬진강 꽃길 따라 60리를 간다. 구례에서부터 따라붙은 섬진강은 지리산에서 거친 숨결로 내려온 화개천과 만나 물줄기가 굵어진다. 이곳이 바로 화개장터로 불리는 탑리이다.
[청학동] 해발 800m의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삼신봉 남쪽 자락에 그림처럼 펼쳐진 지리산 마을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거하기도 했던 곳이다. 전설로는 청학이 많이 노닐던 곳이라는 유래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묵객들이 삼신봉을 중심으로 한 살기 좋은 곳, 즉 이상향을 찾아 나섰던 곳이란 느낌이 들게 하는 산세와 물줄기를 가지고 있다. 청학이란 '푸른 학'이라는 뜻으로 전설에 의하면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면서 도술부리는 새로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儒佛仙三道合一更正儒道會>라는 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 불교, 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큰 도를 크게 밝혀 유도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도'라는 뜻이다. 이들 대부분은 논밭에서 식량을 자급하고 양봉과 축산, 약초, 산나물 등을 캐다 팔고 하동 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쓰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언젠가는 그 이상의 세상이 여기에 올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청학 마을의 서당에서는 청소년에게 한학과 예절 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곳엔 또 다른 설화가 있다. 옛날에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나무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쫓아가다 어떤 굴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곳은 캄캄한 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 나무꾼이 한사람을 붙들고 이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 사람이 옛날에 세상의 난을 피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무꾼은 푸짐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나무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한다.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백두대간을 걸어야 하나요?"
백두대간이 아니더라도 산은 지천이고 발 닿는 곳마다 길인데 굳이 힘들게 백두대간을 걸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본래 산길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길 따라 걷는 것이니 굳이 백두대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백두대간이 한반도를 하나로 잇는 큰 산줄기이기 때문에 굳이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길 따라 걷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백두대간이 부르고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백두대간 1,625km, 남한 구간 684km의 깊은 산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백두대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품어 키운 생명의 땅입니다. 생명을 품어 키운 자비심과 지혜가 깃든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신성하고 거룩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의 이름이 백두산이어야만 하고, 남쪽 끝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인 산의 이름은 지리산이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백두산(白頭山)은 '지혜의 머리가 되는 산'이라는 의미이고, 지리산(智異山)은 '머물면 사람 사는 세속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백두대간은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길입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진 신심과 평화의 길 '산티아고'를 걷는 것처럼 제각기 마음에 담긴 신심으로 걷는 하늘길이다. 평화를 얻고 누리고 지키는 생명길입니다. 그러니 어찌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품고 걷는 자만이 백두대간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고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백두대간의 속살을 보며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를 시작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도반들과 함께 산길 걸어 온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백두대간 남한구간 약 684km 중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비법정탐방로로 지정하고 있는 79.9km를 제외하면 걸을 수 있는 구간은 약 604km 정도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제법 많이 걸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3기를 마치면, 비법정탐방로와 험난하고 힘든 코스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걷지 못한 다른 구간들을 걷고 싶으신 분들은 대간 종주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 3기의 산행 코스를 정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초보자 코스와 중상급자 코스를 철저히 분리하였습니다. 둘째, 초보자들을 위한 산행을 늘렸습니다. 산행거리도 이전보다 짧게 조정하였고 상대적으로 쉬운 코스를 선택하였습니다. 트레킹 여행의 의미를 담아 겨울의 끝인 2월에는 초급자들을 위한 1박2일 산행도 계획하였습니다. 셋째, 중상급자들을 위해 1박2일 산행을 3회로 늘렸습니다. 평소에 혼자서는 산행하기 쉽 지 않은 종주 산행을 포함했습니다.(설악산, 덕유산, 지리산 종주 등) 넷째, 산행 구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구간별 난이도 표시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