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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1] 1.建都 2.置官
「건도建都」, 「치관置官」
-우하영의 국토관(國土觀)과 ‘풍속의 정치’-
김혁(전북대학교 쌀삶문명연구소 학술연구교수)
1. ‘중앙’ 중시의 사유와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우하영은 총 1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천일록(千一錄)』 중 제1권을 「건도1)(建都)」라는
주제로 시작하고 산천(山川)ㆍ풍토(風土)ㆍ관액(關扼)을 부록으로 붙여 두었고, 이어
「치관(置官; 관직의 설립)」을 두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직 제도 연혁을 소개하였다. 이
러한 배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와 같이 전국을 통치할 수 있는 중심부인 도읍
(都邑)과 관직들을 무엇보다 먼저 거론하고 있는 것은 『천일록』이라는 책의 집필과 편집
의도가 궁극적으로 치국(治國)을 목적으로 작성되어 편집된 책이라는 추정을 강력하게
추동한다.
‘건도’란 ‘도읍을 건립’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우하영은 과거에 수없이 명멸하였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나라들과 도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부록으로 붙여진
산천, 풍토, 관액의 주제는 그의 국토관을 설명하는 것이다. 도읍에 관심을 둔 것이 중앙
정치를 중시하는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면, 부록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 정치의 대
상이 되는 지방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 것이다. 안과 밖, 중심과 주변, 통치와 피치의 관념
이 잘 대비되는 구도이다.
그에게 도읍의 건립이 이처럼 중시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도읍 건립’을 곧 나라를 세
우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것을 옛날 성왕들이 이룬 일 중 가장 큰 공적으로 꼽았다. 천
하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통치를 위한 가장 적소에 도읍을 설립하여야 한다. 그가 중국에
서 도읍이 들어서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로 꼽은 곳은 기주(冀州)였는데, ‘이 세상에서 형
세가 가장 뛰어난 곳’으로서 요(堯)임금이 도읍을 정하였던 평양(平陽), 순(舜)임금의 포
판(蒲阪), 우(禹)임금의 안읍(安邑)이 모두 기(冀) 땅에 속하였고, 주(周)나라가 낙양(洛
陽)으로 천도하였는데, 중원(中原)의 한가운데였다. 그가 역대 중국의 왕들이 정한 도읍
을 개관하면서 역사적으로 주목한 것은 도읍이 국토의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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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일록』 제1권 「건도」 “옛날 성왕(聖王)들이 이룬 일들 중 가장 큰 공적은 도읍을 건립하고 나라를 세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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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도 도읍의 위치는 중앙에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왕건이 한반도를
통일한 뒤 송악에 도읍을 정한 것이나,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
었다. 이 두 곳이 모두 경기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경기 지역을 도읍으로 정한 이유는 다
른 무엇보다 경기 지역이 우리나라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하
영은 경기가 차지하는 정치ㆍ지리적 의미를 중국의 기주와 비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 이래로 대대로 이어 오면서 각각 다른 곳에 도읍을 정하였
다. 평양(平壤)에 도읍하여 서경(西京)이라 하였고, 계림(鷄林)에도 도읍을 정하여
동경(東京)이라 하였다. 이것은 모두 상세(上世) 때이니 천 년 전의 일이다. 지금에
와서 살펴보면 이 도읍들은 서쪽이나 동쪽에 치우쳐 있어 대일통(大一統)의 기상
(氣像)이 없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런데 경기 지역만은 중앙에 있으며 전국을 아
우른다. 백제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양한(兩漢)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왕건이 낙동강에서 무찌르고 압록강을 쳐서 통일한 뒤에 송악(崧岳)에 도읍을 정하
였다. 그때까지 도읍은 모두 기전에 있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평양ㆍ포반ㆍ안읍의
세 도읍이 모두 기주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송악(松嶽)은 오늘날 우리
조선에서 도읍으로 삼은 한양만은 못하다. <제1권「, 건도」>
여기서 우하영의 결론은 현재 조선이 자리 잡은 서울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
앙에 위치한 ‘대일통의 기운’이 있는 가장 좋은 땅[수선지지(首善之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중국의 도읍과 비견할 만하다고 보았다.
우하영의 역사관은 경기 중심, 혹은 중부 지방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삼국의 역
사를 서술하면서 고려의 김부식이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피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백
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그러나 삼국 중 신라가 통일한 것에 대한 그
의 관점은 흥미롭다.
삼국시대에 신라에서 가장 많은 위인들이 태어났다. 신라는 인자하고 문을 숭상하
였고, 백성들이 부유하고 인구가 많았다. 한편 고구려는 명장이 많이 배출되어서 나
라가 강성하였고, 무(武)를 숭상하였으며 땅이 넓고 재물이 풍부하였다. 백제는 문
(文)에서는 신라만 못하고, 무(武)에서는 고구려만 못하였으며, 가장 비옥한 땅에
있었지만 사치스러워서 삼국 중에서 존속 기간이 가장 짧았고, 고구려가 그 다음이
고, 신라가 그 중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이것을 보면 인후함이 무력보다 더 강하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권「, 건도」>
우하영은 백제가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러웠고, 덕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 신라보다 못하였다는 점 때문에 가장 일찍 패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우리나라를 중국과 구별되는 별도의 공간, 즉 또 하나의 역
사를 가진 공간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 비교적 최근 배우성은 우하
영의 소중화주의를 그의 특색 있는 사고로 주목한 바 있다.2) 그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구
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소중화(小中華)로 일컬어진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의 예악문물
(禮樂文物)을 본받고자 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산천과 풍속 그 자체가 중
국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산천은 모두 곤륜산(崑崙山)에서 나와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해(四海)로 둘러싸인 넓디넓은 대륙은 애초에 강역이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 사방의 노래와 풍속, 물산(物産)이 각기 달랐지만 서로 뒤
섞여 있었다. 성인이 땅의 이치에 따라 구분하였고, 구분한 결과 구주(九州)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리나라 산천에서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과 동일한 위치다. 우리
나라 수천 리 강역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얽혀들며 배치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또 하나의 천지인 셈이다. <제1권, 「부록_산
천·풍토·관액」>
위 구절에 따르면 우하영은 우리나라가 소중화로 일컬어지는 까닭을 중국 문화를 그대로
모방했다는 데에서만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지리적 특색이다. 그는 조선의 지리적 구조가 중국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서 백두산을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또 하나의 천지”로 인식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구절이 과연 중국과의 대비를 강조하고자 한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나라 지리를 인식하기 위한 전초적인 것인가? 그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
고 하더라도 비중의 차이는 나는 편이다.
그 뒤의 구절에서 중국의 지역별 특성을 조선의 지역별 특성과 유비한 구절이 있다. 이를
통해 우하영의 의도를 더욱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의 서북 지방에서 무를 숭상하는 것은 우리나라 관서 지방에서 장수를 많이
배출하는 것과 유사하다. 중국의 동남 지방에서 문(文)을 숭상하는 것은 우리나라
의 산동 지방에서 재상을 많이 배출하는 것과 같다. 중국의 기북(冀北) 지방에서
양마(良馬)를 많이 생산하는데 우리나라의 관북 지방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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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우성, 2012 「조선후기 중화 인식의 지리적 맥락」, 『韓國史硏究』 158호, 한국사연구회, 159~19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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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많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중국의 절동은 장요미(長腰米)로 유명한데, 이
것은 우리나라 호남 지방이 벼농사에 적합한 토질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중국의
동노(東魯)는 도서의 관부라고 할 만한데, 이것은 영남 지방이 현송(絃誦)의 고장
인 것과 같다. 중국의 대(岱) 지방에서 마와 모시를 공납하는데, 이것은 호서에서
모시를 주업으로 하는 것과 같다. 그 밖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풍속과 노래, 특
산물, 산천의 험준함, 요지(要地)의 위치가 중국과 비견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소
중화(小中華)라는 말이 어찌 예악과 문물 때문에 붙여진 것이겠는가? <제1권, 「부
록_산천·풍토·관액」>
위 글을 보면 조선에게 소중화를 붙일 수 있는 근거는 중국 문화를 수입하여 추종하였다
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대비는 중화 인식에 초점이
놓여 있기 보다는 조선의 내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로서 사용되었음이 틀
림없다. 중국과의 대비를 활용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본다면, 그의 소중화주의
가 뜻하는 것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팔도론
우하영은 각 지방의 풍토적 특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8도, 여기서는 9도의 특색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의 특성을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되는 정보로 범주화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한나라 재상 소하(蕭何, ?-B.C.193)가 관중(關中)으로 들어오자마자 무엇보다 먼
저 승상부(丞相府)의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들였던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이 지도와 호적을 통해 천하 형세의 강약과 요충지를 상세히 파악하여 대업을 이루
었다. 그는 이를 통해 풍요(風謠)ㆍ민속(民俗)ㆍ산천(山川)ㆍ관액(關扼)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1권,
「부록_산천·풍토·관액」>
그렇다면 우하영은 팔도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은 팔도에 관한
그의 논평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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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주요 특성
함경도
- 모두 산세가 웅장하고 강하고 가파르며 깎아지른 듯하다.
- 토질은 단단하고 조잡하며 약간 찰지다. 물이 차다. 절후는 기전에 비해 꼭 20일이 늦는다.
- 민속(民俗)은 부지런하면서도 검소하고 질박하면서도 인색하며, 어리석으면서도 강직하여 어떤 일
을 세세하고 교묘히 꾀하는 일이 드물다.
- 마을에서는 사치스럽고 즐겨 노는 풍조가 전혀 없다. 그 해 농사가 큰 흉년이 아니면 행인이 양식이
없을 때 음식을 준다. 신용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많아서 거래할 때에 계권(契券)을 작성하지 않는다.
관기나 천인이라도 신용과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 많다.
- 함경도 사람들은 비록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노자가 있는지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머물러 거처하
게 한다. 이처럼 이욕은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습속이 되는 법이다.
평안도
- 평안도의 풍요(風謠)와 토속(土俗)은 골짜기와 들이 다르다.
- 산은 웅장하고 널찍하며 개천이 범람하는 곳이 많다. 이곳 출신 사람들은 장대하고 걸출한 사람들이
많은 반면 순후하지만 조심성 있는 사람은 적다.
- 평안도의 민속(民俗)은 농업과 잠업에 힘쓰고 근면하다.
- 읍저 사람들과 서울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사치하고 놀기 좋아하고, 기(氣)를 숭상하여 분수를 넘어
오직 유세가를 좇는 것만 능사로 여긴다.
- 민심(民心)은 두터운 풍조를 숭상하는 한편, 세력 있는 사람에게 붙는 세태도 많다.
- 평안도를 천향(賤鄕)으로 보고, 문관(文官)은 국자감(國子監)을, 무관은 부천(部薦)을 넘지 못하게
한다.
황해도
- 금천(金川)으로부터 황주(黃州)까지 대로(大路)의 이동(以東)은 모두 산군(山郡)이고, 이서(以西)에
는 야읍(野邑)이 많다.
- 출신인들은 장대하고 둔탁한 사람이 많고 청아한 사람은 적다. 땅이 결함이 많으므로 옛날부터 맹인
이 많이 나온다. 토성이 딱딱하고 비옥하며, 누렇고 검은 것이 서로 섞여 찰기가 있고 미끄럽다. 물맛
이 담박하고 탁하다. 절후(節候)가 기전에 비해 5일 정도 늦다.
- 민속(民俗)은 대로(大路)의 동쪽 지역이 어리석지만 근검하고 또 매우 인색하다. 화전도 하고 수누(水耨)를 하였으며, 노동력에만 의지해서 살아간다. 무리지어 마시고 즐겁게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 대로(大路)의 서쪽 지역은 근면하고 인색하며, 또 어리석어 분을 넘는 습속이 많다. 비록 농사에 힘쓰
는 것으로 일을 삼는다고 하더라도, 상업에 힘쓰는 부류도 많았다.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도 많았고
볼만한 문화도 많았다. 무리지어 술을 마시고 즐겨 노는 것을 좋아하고 서울의 대가들과 인연을 맺어
세력에 의지하여 이익을 좇는 것을 좋아하였다.
- 관장이 법외의 정사로서 그 민정을 거스른다면 참으로 의외의 염려가 있을 것이다. 마땅히 공평으로
자기를 규율하고 충실하고 두텁게 풍속을 이끌어야한다.
강원도
- 강 원도 전체가 큰 골짜기이니 산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곳 출신의 사람들이 우둔한 자가 많다.
- 원 주ㆍ춘천ㆍ강릉ㆍ철원ㆍ홍성ㆍ횡성 등의 읍들만은 산의 기운이 약간 빼어나고 부드러우며, 툭 트
이고 밝아 양반 고을이라고 일컬어진다.
- 영 동(嶺東)은 모든 군들이 바닷가에 있거나 산에 있으며, 그 사이에 넓은 들이 있고 땅은 일출하는 쪽
으로 접해 있으므로, 절후는 영서에 비해 보름쯤 빠르다. 영서 지방은 절기가 기전에 비해 거의 열흘
쯤 늦다.
- 영 서의 절후가 영동보다 더 늦은 이유다. 토성(土性)이 딱딱하고 척박하며 물맛이 가파르고 차다.
- 팔 도 중에서 오직 관동만이 태고의 순박한 풍습이 있어서 교활하게 헤아리거나 임기응변의 태도가
없다. 사람들을 접대하는 데에 질박하며 실질적인 것을 숭상하는 데에 힘쓴다. 다만 어리석기 때문에
혹은 완악하고 혼미한 풍습이 많다.
- 농 사에만 근면하고 힘쓰며 상업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으며, 무리지어 술 마시고 즐겨 노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
- 혼 례ㆍ상례ㆍ장례ㆍ제례 때에만 상하가 한 자리에 모여 술 한잔 먹는 것을 두터운 풍속으로 삼고 등
급을 두지 않는다.
충청도
- 이곳 출신 사람들은 문예가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많으니, 대대로 양반 고을이었다.
- 흙의 성질은 비옥하고 단단하며, 물맛은 평이하고 담박하며 경기 지역에 비해 절기가 5일 빠르다.
- 민속(民俗)은 근면하면서도 화사하여 사치하는 사람과 검소한 사람들이 절반씩이다.
- 명색(名色)과 명분(各分)이 아주 어릴 적부터 풍속이 되고, 입방아 찧는 폐단이 다른 도에 비해 더 심
하며, 문예를 숭상하고 무예를 숭상치 않으므로 무예의 기술이 크게 모자란다.
- 경화(京華)에서 흘러 나와 떠돌다가 정착한 집은 본토 사족들이 서로 사치를 숭상하였으므로 여기에 익
숙해져 소박하고 야한 풍속이 없다.
- 각 당파에 속한 문벌과 지위 고하를 막론한 관리들이 세력 있는 자에게 연줄을 대고 앞 다투어 자리를 청
탁하려는 일이 많았다.
- 또 기전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니, 수로와 육로가 모두 편리하여 경화의 세족과 큰 집안들이 모두 향장
(鄕庄)과 분산(墳山)을 두고 차지하고 있으니, 향읍의 가난하고 세력 없는 부류들은 그 사이에서 버틸
수가 없다.
- 세족(世族)과 마을 사람들은 태반이 놀고먹는 사람들이었고 수령이 폐단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쌓인 폐
단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끝내 낭패하는 데 이르렀다.
경상도
- 이곳 출신 중에는 깊고 중후한 사람이 많아서 신라와 고려로부터 국조(國朝: 조선)에 이르기까지 능력
있는 인재와 큰 그릇들이 모두 영남 출신이다.
- 경상도의 민속(民俗)은 질박하고 검소하며 부지런하며 중후하여 실질에 힘쓰며 화려하고 사치한 것이
적다.
- 농사와 산업에 힘쓰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다. 상도(上道)의 풍속은 더욱 근면하고 검소하며 하도(下道)
는 호남과 유사한 점이 있다. 옛날부터 명분을 지키는 데 대단히 분명하여, 비록 촌부라 하더라도 선현
을 존숭할 줄 알아서 모두들 퇴계(退溪)를 노선생(老先生)이라고 일컫는다. 그 밖에 명현들이 거처하던
곳은 모선생(某先生)의 유허(遺墟)라고 일컫는다.
- 나무꾼이나 목부들조차 관작이 높다고 사족이라 하지 않고, 대사당(大祠堂)의 자손만이 진짜 양반(兩
班)이라고 늘 말한다.
- 경상도는 토질이 굳고 강하며, 두텁고 비옥하다. 그러므로 거름을 얼마나 쓰고 얼마나 부지런히 일하느
냐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진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모두 힘써 경작한다.
- 거부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본도에서 가장 많다.
- 인심이 질박하고 솔직한 사람이 많고 교활함이 적다.
전라도
- 전라도의 안에는 명산과 대천이 가장 많고, 온갖 물길이 나뉘어져 바다로 들어가는데 하나로 모이는 형
상은 없다. … 이 지역 출신들은 재예가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지만, 충성되고 소박한 풍조는 경상도
보다 못하다.
- 전라도의 토지는 비옥하고 의식과 어염, 산해진미들이 후생의 물건이 아님이 없으므로 국내에 거주하
는 낙원으로는 본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 의식(衣食)이 팔도에서 가장 좋으므로 백성들의 물산은 전국에서 제일 풍부하다. 대흉을 만나지만 않는
다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굶주리지 않는다.
- 민속(民俗)은 근면하면서도 문기가 지나쳐서 사치와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며, 소박한 풍조가 적고 기예
로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자못 은근한 태도가 있고 사람을 헤아리고 비교하
는 경우가 많아서 마음속을 터놓고 서로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 유사(儒士)들은 문예를 숭상하고 재주가 많아서, 자애롭고 아량이 있으며 변화를 좋아하지만, 토속(土
俗)에서 벗어난 사람이 적으며 바깥에 나가 입방아 찧기를 좋아한다.
- 향읍(鄕邑)에서는 향전(鄕戰)을 일으키는 사람이 많고, 서울의 유세가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다.
- 관장이 굳건하고 밝고 공적이고 염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마땅
히 염치로 위엄을 삼고 공으로 밝음을 삼아 휘지 않고 바르며 번거롭지 않고 간단히 해야만 풍속을 바로
잡아 다스릴 수 있는 도가 될 수 있다.
제주도
- 제주도는 백성들의 습속이 우둔하면서도 간교하고, 말을 잘하고 영리하며, 성품이 인색하다.
- 풍속이 쩨쩨하기도 하고 성질도 인색하므로 쟁송하기를 좋아한다.
- 양인과 천인을 막론하고 수절하는 여자가 없다.
- 근년 이래로 내지에 있는 육지의 고을들도 아전들과 백성들이 관령을 따르지 않고 수령을 범하는 폐단
이 있는데, 하물며 이처럼 절역의 해도로서 왕의 교화로부터 뚝 떨어진 먼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위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하영은 9도를 자연환경과 산업, 토질, 풍속, 관방 등의 순
서로 서술하고 있다. 풍속의 평가 기준은 주로 ⅰ) ‘근면/나태’, ⅱ) ‘사치/검소’, ⅲ) ‘관대/
인색’, ⅳ) ‘서울 세력가와의 독립성 여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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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은 “하늘이 백성을 낳은 것은 편안히 거주하여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
마 그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기 위해서다.”(제2권, 「전제」 중에서) 라고 할 만큼 근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특히 증오하였던 지역은 개성이었는데, 그 지역은 농업은 전무
하고 순수한 상업 지역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교활하다는 점을 개탄하며 지적하고
있다. 근면을 통한 생활은 사치나 낭비와 먼 삶이라는 뜻으로, ‘사치를 위한 근면’이라는
현대 자본주의적 개념과는 구분된다. 오히려 생산성이 낮은 함경도 사람들에게 점수가
후했다. 이 지역이 생산성이 높지는 않지만 근면하여 그 결과 돈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약
삭빠르지 않아서 관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우하영은 권력을 얻고자 서울의 권세가에게 뇌물 쓰는 행위에 대해 매우 증오하였다. 평
안도와 황해도, 충청도를 이러한 이유로 낮게 평가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상도를 높이 평
가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이는 특히 우하영 개인의 호오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서울 사
람의 일반적인 통념이 반영된 듯싶다.
우하영에 따르면 자연환경은 산업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자연환경이 농사짓기에 편하다
고 해서 그 풍속이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니며(전라도), 자연환경이 나쁘다고 해서 그 풍
속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함경도, 강원도). 그렇지만 좋지 않은 자연환경
에서 좋지 않은 풍속이 나온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제주도). 전라도에 대한 악평은 풍
수의 관념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위에서처럼 우하영의 도별 평가는 당시의 고정적인 통념을 따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특
히 제주도나 전라도, 경상도 등 그의 거주지로부터 먼 지역인 경우 직접 가보았을 리 만무
하므로, 통념에 의한 서술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자기 고향이 속해 있는 경기나 인근인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에 대한 정보는 매우 자세하고, 실제에 기반하고 있는 듯하며, 도내
의 고을 평가는 답사에 의해 채록된 정보를 실은 경우가 대부분인 듯 보인다.
전라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 여부가 사실인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전라도에 대한 위와 같
은 편견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가 더 크다. 현대 한국에서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지역색 망
령뿐 아니라, 조선 후기조차 황윤석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전라도 사람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 폭력적이었다3).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홍경래의 난은 중앙의 지역 차별과 위
와 같은 차별의 담론화가 원인이 된 사건이었다. 도 단위에서의 담론 형성은 매우 이념적
이다. 우하영은 지방 사람들에 대한 서울 사람들의 논평을 폭넓게 반영하여 집대성하고
있다. 그 편견 중에 서울 유세가에 대한 의존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사람들이
형성하였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도 단위의 논평이 고형화된 것이라고 한다면, 도의 하부인 여러 고을에
대한 우하영의 평가는 해당 도에 대한 평가와 배리될 정도로 유연하며, 반드시 서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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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우성, 2012 「조선후기 중화 인식의 지리적 맥락」, 『韓國史硏究』 158호, 한국사연구회, 159~19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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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것도 아니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 경기도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서 그 서술 구조
와 방식에 관해 더욱 면밀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다음의 <표2>는 분석을 위한 도구로
서 내용을 분류한 것이다.
<표 2> 경기도의 서술 구조
1. 경기도 전체에 관한 평가
1-1. 경기도의 위치, 1-2. 자연 지리적 특성, 1-3. 경기도의 인심, 1-4. 생계
2. 도성( 都城) 의 동북쪽 지역
2-1. 자연 지리적 특성, 2-2. 민속과 예속, 2-3. 산업과 생리
3. 도성의 서쪽 지역
3-1. 자연 지리적 특성, 3-2. 민속과 생리, 3-3. 산업
4. 도성의 이남 지역
4-1. 자연 지리적 특성, 4-2. 산업, 4-3. 민속, 4-4. 생리
5. 화성부
5-1. 자연 지리적 특성, 5-2. 민속, 5-3. 농업, 5-4. 생리
6. 강화부
6-1. 자연 지리적 특성, 6-2. 민속, 6-3. 산업, 6-4. 생리
7. 개성부
7-1. 자연 지리적 특성, 7-2. 민속, 7-3. 생리
8. 한강 이북
8-1. 자연 지리적 특성, 8-2. 풍속, 8-3. 산업, 8-4. 생리
9. 한강 이남
9-1. 자연 지리적 특성, 9-2. 산업, 9-3. 생리와 풍속
10. 경기도의 총괄적 평가
10-1 자연 지리적 특성과 농사, 10-2. 농민들의 상황, 10-3. 농사, 10-4. 풍속
11. 경기도의 관액과 형편
11-1. 자연 지리와 노정, 11-2. 병영과 산성을 설치할 위치 비정
위의 분류에서 볼 수 있듯이 우하영의 서술 방식은 대체로 지리, 산업, 민속을 구성 요소
로 하고 있지만, 그 기술 방식은 결코 도식적이지 않다. 지리적 조건은 산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민속이나 풍습, 백성들의 성격은 또 다른 원리로 설명된다. 앞서
도의 성격을 따질 때에도 거론하였듯이 결코 기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지는 않다.
분류의 기준 상 중복되는 경우도 있다. 경기도에 대한 전체 평가를 하고 있고, 다시 경기
도의 읍 별로 나누어 품평하고 있다. 화성부·강화부·개성부는 유수부(留守府)이므로 각
고을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은 독립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나머지는 기준점이
모호하다. 한편으로 도성을 기준으로 동북쪽, 서쪽, 남쪽으로 분류하고, 다른 한편은 한강
의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있다. 분석의 단위는 어디까지나 규모에 관계없이
대개 고을이고, 위의 분류는 고을이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광역적인 범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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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경기도 지역 중 도성 이남의 여러 읍들을 품평한 것을 예로 들어보4자) .
도성 이남의 여러 읍들 중에서 안산(安山)만은 산과 들이 서로 섞여 있다. 토질이
비교적 비옥하다. 목면과 삼에서 이득을 보지 못하지만 보
리ㆍ밀ㆍ콩ㆍ팥ㆍ쌀ㆍ기장을 심기에 적합하며 어염과 땔나무ㆍ감나무에서 이익
을 본다. 사람들은 많지만 선비는 드물다. 농업은 광작하지 않으니 풍년이 들더라
도 쌀 한 톨도 낭비하지 않으므로 흉년을 만나도 유리 도산하는 사람이 적다. 여주
(呂州)ㆍ이천(利川)ㆍ안성(安城)ㆍ죽산(竹山)ㆍ양성(陽城)ㆍ진위(振威) 등의
읍들은 모두 들이다. 토질이 비교적 비옥하며 대체로 논이 많고 밭이 적다. 용인과
광주는 산과 들을 모두 겸하고 있지만 모래와 돌이 많다. 민속은 서울 가까이의 여
러 읍들은 게으르고 무리지어 놀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잡기를 즐긴다. 여러 읍
들은 대체로 부지런하고 재산을 모으기를 좋아한다. 비록 모여 술 먹고 노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만, 일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사회(社會)에서 활쏘기하는 풍속
이 있는데 풍속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전적으로 숭상하는 것은 아니다. <제1권 「부
록_산천·풍토·관액」>
안산ㆍ여주ㆍ이천ㆍ안성ㆍ죽산ㆍ양성ㆍ진위의 예를 들고 있는데 토질로부터 시작하여
농산물과 산업의 상황, 인구, 농경 방식, 풍속을 논하고 있다. 그 중 “서울 가까이의 여러
읍들은 게으르고 무리지어 놀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잡기를 즐긴다.”고 하며 풍속이 순
후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를 서울에 가깝기 때문인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도별 평가에서 서울 중심의 논평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품평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류와 품평의 기준은 우리에게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보인다.
더욱이 경기도에 대한 전체 평가 기준과 그 안에 속한 작은 지역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 별
도로 설정되어 있다. 경기도에 관한 전체 평가는 백두대간에서의 위치 비정으로부터 산
천의 특색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한 풍속과 인심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지역적인 분포에 대한 결정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산천의 흐
름만큼이나 구불구불하고 세부적이다. 사실상 지역을 실제 답사하지 않고는 얻기 어려운
지식이 많으며, 이러한 개별적인 지식은 팔도에 의거한 각 도에 관한 평가와는 별도의 원
리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는 학문 방법뿐 아니라 내용에서 조선시대사 연구자들에게 새롭게 상기시킬 수 있는
면이 매우 많다. 위에서 볼 수 있는 세부적인 생생한 지식도 그렇겠지만, 조선 사회에 대
한 전반적인 접근 방식도 돌아볼 많은 참고점을 준다. 그 한 예로 조선의 양반을 동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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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의 <표 2>에서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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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케 한다. 이 문제는 경기도 양반과
경상도 양반의 차이를 분석한 우하영의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경기도에서 사대부의 생계는 오직 벼슬살이에 달려있을 뿐이다. 반면에 마을 사람
들은 잡기(雜技), 녹과(祿窠)로부터 여러 가지 요포(料布), 저인(邸人), 공인(貢人),
좌판을 벌이는 시정의 행상, 시중드는 비장의 일 등에 의존하여 생활한다…. 사족이
일단 관록을 잃으면 알거지가 되어 자칫 여항의 평민만도 못한 생활을 할 수도 있
다. <제1권 「부록_산천·풍토·관액」>
경기도의 상민들이 다른 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살아갈 거리가 많은 반면, 이곳의 양반은
자신의 생활을 사환의 녹봉에 상당 부분 의지하다보니, 몇 대만 벼슬을 못해도 곧바로 생
활이 곤궁해졌다. 우하영의 농서로 알려진 「농가총람(農家總攬)」만 하더라도 일반 농민
을 위한 책이 아니라, 바로 빈궁한 처지에 빠져 생계가 막연했던 우하영과 같은 몰락한 양
반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책이 작성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지역 양반들의 현실적 처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양반의 처지가 지역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우하영이 같은 책에서 묘사한 경상도 양반의
처지와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하게 대비된다.
사족(士族) 중에서 유업(儒業)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보다 먼저 치산(治産)
에 힘쓰고, 그런 뒤에 문예를 닦으니 가업을 보존할 수 있고, 과거나 벼슬에 급급하
지 않을 수 있다. 경상도의 풍속은 그 집안에 일컬을 만한 현저한 조상이 있다면 비
록 누세토록 집안이 기울어 벼슬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를 쉽게 모욕할 수 없다. <
제1권 「부록_산천·풍토·관액」>
위의 기록대로라면 경상도 양반들이 경기도 양반에 비해 자신의 가업을 유지하는 데 훨
씬 전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일단 치산에 힘썼고 그런 다음 문예를 닦았다. 그
때문에 과거나 벼슬에 나아가는 데 급급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상도 양반의 처
지는 벼슬을 하지 않으면 양반으로서의 위신도 유지하기 힘든 경기도 양반의 처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예를 들어 성호 이익(李瀷)이 경상도의 양반 문화를 선망하여 안동으로
이주하려하였던 것도 이러한 사정이 한 이유였을 것으로 본다.
아마 우하영과 같은 양반이 경상도에 살았더라면 그에 관한 지역사회의 대우나 그것과
직접 맞닿아 있는 그의 자의식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상 그의 딱한 처지가 이 지역
사회의 사회적 특색을 노골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양반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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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 양반을 이상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연구거리다.
지역적 차이에 대한 고려 없는 역사적 표상 만들기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를 여실
히 보여주는 실례이다. 따라서 우하영의 지리적 인식은 조선이 하나의 동질적인 조선이
아니라, 다기하고 다중적이며 이질성이 중첩되어 있는 복합체로서의 조선이 존재하였음
을 보여준다. 이것은 위에서 예로 든 사족 사회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결과적으로 풍속으로 드러나고, 이러한 풍속을 결정하는 요인은 인심인데, 인심은 다만
자연환경이나 그들의 생업이 갖는 특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다
양한 중층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우하영은 보았다. 이것은 이미 팔도에 대한 당시의
편견을 벗어난 ‘관찰’에 의한 구체적인 인식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천일록』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지금까지 팔도론을 통해 지역적 생산 방식에 차이가 있
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이것은 산수[토질, 교통, 소비지(서울)와의 거리 등을 포함한 환
경]의 차이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 연구자들은 이 논의를 좀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생산 방식의 차이를 조선 사회의 특성에 대한 단순한 유형론에 입각
하여 해석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지역에 의거한 복합적인 융합체로서의 조선에
주목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천개의 고원’처럼 수많은 특수성이 얽혀 있는 장소들의
복합체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3. 이중환 『택리지』와의 비교
우하영의 팔도론은 주제 면에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팔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며, 사실상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이 두 책만큼 유사한 책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택
리지』와의 대비는 우하영 팔도론이 갖는 특성을 밝히는 데 여러 가지로 유의미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에 팔도론이 상당히 퍼졌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우하
영의 『천일록』이나 이중환의 『택리지』 외에는 팔도론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찾기 힘들
다. 이 두 사람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만일 영
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면, 두 사람의 매개자는 성호 이익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중환은 성호에게 직접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한편 우하영과 이익
의 관계도 매우 긴밀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증거가 여기저기 있다. 우하영 당시에 증시를
받은 우성전의 신도비문을 찬술한 사람이 바로 이익이었고, 우하영의 거주지는 이익의
원 거주지와 이웃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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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과 이중환의 팔도론은 서술상 유사한 표현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저술 의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중환이 『택리지』를 지었던 까닭
은 자신의 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옛 사람이 ‘예악이 어찌 옥백이나 종고만을 말한 것이랴’ 했다. 나의 이 글도 살 만한
곳을 고르려고 해도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택리지』, 발문 >
이중환은 당시 사족들의 복거(卜居)에 도움을 주고자 이 책을 작성하였다.5)다시 말해 그
의 팔도론은 사족의 복거를 위한 예비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 지역의 역사
적 사실을 많이 도입하며 문화적 소개에 치중하고 있으며, 중앙의 정치 세계를 떠나 거주
할 사족의 거처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풍토에 관한 우하영의 관심은 국가의 관점에서 활용될 만한 정책적 실
용성에 있었다. 그의 팔도론의 이상적인 모델은『 서경』의 〈우공(禹貢)〉이었다.
만일 우공(禹貢)에 실린 구주(九州)의 각 땅에는 각각의 공부 등이 동일하지 않으
니, 삼도(三都)와 팔로(八路), 산천(山川), 민속(民俗), 농업(農業), 생리(生利)에는
저것은 같은 데 이것이 다른 것을 풍요(風謠)를 보고 채집하니, 실제로 풍속에 따라
가르치고 다스리는 교화와 관계가 있다”. <제1권 「총론」>
이 지점에서 『천일록』이 왕에게 바쳐졌던 건의문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
는 데 매우 중요하다.
풍속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하고, 지형에 따라 군대를 배치하는 것은 본디 왕의 정치
에 있어 중차대한 일이다. 내가 보고 들은 일을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하여, 정부가 관
찰하고 채집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제1권「 부록_산천·풍토·관액」>
위의 단락에서 우하영 팔도론의 목적은 분명히 드러난다. ⅰ) ‘풍속에 따라 백성들을 교
화하고’, ⅱ) ‘지형에 따라 군대를 배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왕의 정치’에 봉사한다는 것
이다. 그 결과 왕을 위한 책이었던 우하영의 『천일록』은 소수의 필사본만이 전해지지만,
이중환의 『택리지』는 사족들 사이에서 필사본의 형태로 상당수 유통되었다6).
같은 팔도를 두고 작성된, 두 책의 저술 목적에서 차이가 있다면, 구성이나 서술 방식, 내용
--------------
5) 성호 이익도 이와 동일한 지적을 한다(『성호선생문집』, 권49 〈팔역지서〉).
6) 배우성, 2004 「택리지에 대한 역사학적 독법」, 『한국문화』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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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 차이 중 두드러진 것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술 체계에 차이가 있다. 『택리지』에서는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 총론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 반면, 『천일록』에서는 산천, 풍토, 관액을 9도의 하부에 두어 통합
적으로 서술하고 마지막에 총론을 덧붙인다. 이것은 『천일록』이 서로 연관된 종합적인 설
명을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도의 순서에 차이가 있다. 『택리지』에서는 8도를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
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의 순서를 따라 서술된 반면, 『천일록』에서는 제주도를 포함
시켜 경기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의 순으로 서
술되어 있다. 『택리지』에서는 지리지의 통상적인 순서를 따르고 있는 반면, 『천일록』은
매우 독특한 순서를 보여준다. 이것은 「도읍을 세움[건도(建都)]」에 반영되어 있듯이 도
읍, 4유수부, 8도 순의 수직적 구조를 통한 서울 중심의 서술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셋째, 각 도의 풍속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 『택리지』에서의 지리 평가는 좋은 지리(地
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를 모두 갖추어야 거주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여긴
다. 반면 『천일록』에서 이 기준들이 갖는 의미가 각각 다르다. 『천일록』에 지리를 설명하
는 부분은 국방과 관련되어 설정되어 있다. 산업과 생리는 공납 수취를 위한 정보로 활용
되고, 그 지역의 인심은 그 지역 수령이 고을을 통치하기 위한 정보와 충고를 제공하기 위
한 것이다. 이는 『목민심서』를 포함한 수령심득서의 전통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우하영은
수령이 법에 벗어난 정사로써 그곳 백성들의 마음을 거스른다면 반발을 살 수가 있다고
보았으며, 풍속을 통한 통치를 강조하였다.
<표 3> 『천일록』과 『택리지』의 비교
기준. 천일록. 택리지
서술 체계
산천, 풍토, 관액을 9도의 하부에 두어 통합적으
로 서술하고 마지막에 총론을 덧붙임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 총론으로 나누어
서술
서술 순서
경기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
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
도, 충청도, 경기도
유통 사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 수많은 필사본 현존하며, 광범위하게 유통됨
서술 목적 수령의 통치와 국방 정보 서울을 떠나려는 사족이 거주할 지역 탐색
품평 기준 근면, 검소, 관대, 서울 세력가와의 독립성 지리(地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
이러한 관점의 차이로, 팔도에 대한 평가는 여러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 중에서도 함
경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 앞서 긍정적으로 언급한 『천일록』과는 사뭇
다르게,(<표1>) 『택리지』에서는 함경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함흥 이북은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사나우며, 날씨가 춥고 땅이 메마르다. … 따라서
서북의 함경도와 평안도는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 못된다. 『<택리지』, 「팔도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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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에서는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사나운 곳’으로 가볍게 규정하고, 배출된 사대
부들이 거의 없으므로 “사대부가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택리지』의 기
준인 사족의 복거론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우하영 팔도론의 특성은 이중환의 『택리지』와는 달리 사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의 통
치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도별 평가에서는 당시의 고형적인 평가가 많이 반
영되어 있지만, 세부적인 읍별 평가에서는 서울로부터 벗어난, 오히려 서울의 사치 풍조
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지역 품평이 완전히 서울 중
심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4. 풍속의 정치
이 글에서는 우하영의 지리 사상을 통해 풍토와 결부된 인간론의 또 다른 독특한 측면을
검토함으로써 그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였다. ‘인간과 풍토의 관계’, 즉 ‘사람들은 누
구나 풍토에 깊이 영향을 받으므로 풍속의 교화를 통해 다스릴 수밖에 없다’는 관점은 우
하영 정치론의 출발점이었다.
정치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판단하는 근거는 결국 이 같은 풍속이고, 이 풍속이라는
것도 그곳 사람들의 이 같은 품성에 의해 판단된다. 이 같은 도덕적 품성은 당시에 효행,
충의, 정열, 강직, 인후 등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 같은 품성을 타고 난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결국 풍토론과 팔도론으로 표상되는 우하영의 지리적 관심은 통치를 위한 국가 지식으로
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다. 중앙정부의 관점에서 풍속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시
행할 만한 정책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 지방의 풍토에 적합한 정책을 모색하고 시행하도록
주문하였다. 다시 말해 중앙정부가 모든 지역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으
며, 따라서 ‘순문정치(詢問政治)’가 발생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라면 좋은 정치란 어느 뛰어난 사람이 머릿속으로 좋은 제도를 고안해
내는 것만으로는 극히 부족하며, 무엇보다 피치자의 정서나 도덕적인 수준이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도덕 수준 못지않게 통치자의 자질 또한 매
우 중요한 데, 이들도 백성들로부터 배출되므로 풍속은 돌고 돌기 마련이다. 결국 우하영
이 펼치고자 하는 정치적 구도의 핵심은 풍속의 정치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 역시 풍속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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