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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접주 동학서당
• 일시 : 2016년 6월 5일 오전 11시30분~1시
• 장소 : 동학농민혁명공원 인내천정
• 참석 : 123보은취회 추진접주들, 서강대 동학공부모임 학생들
박맹수 - 화악산에서 수련, 강령체험을 했다. 수운선생의 말씀대로. 말로 논리로 컴 화면으로 보여줘야 사실이고 진리인 것으로 아는데 몸으로 아는 것도 진리이다. 동경대전 수운 선생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머리에서 할 수 있는 동학에서 몸으로 할 수 있는 동학으로 변화. 2006년이다. 처음 현상이 수련을 새벽 오전 저녁에는 법사님 모시고 ***선생, 김춘성 교수도 함께. 저녁에 첫말을 꺼내는데 폭포수 같은 참회의 눈물이 쏟아졌다. 살아오면서 전두환을 너무 미워하고 가족에게 잘못한 것,, 대성통곡을 하니 카타르시스가 되고 수도원 마당에 나왔는데 잡초와 꽃이 한울님 부처님으로 다가왔다. 그 때 변화했다. 머리->몸으로 하는 동학을 고민해 볼 필요하겠다. 동학서당을 연 첫 번째 이유다. 강령체험 해 천도교 입교해라는 뜻 아니다. 주문수련하면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가르침이, 내 안에서 THE는 내면의 영혼의 가르침이 있다. 그런 세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15명의 인권 노동 생평 탈핵 운동판에서 지치고 깨졌던 동지가 함께 들어가 13명이 그 체험을 했다. 그 뒤에 또 들어갔다. 맛을 아니까 권하지 않아도. 2006년 7년 두 번 다녀왔다. 주로 많이 참여한 분이 광주 전남권, 운동판에서 구렸던 동지들, 3명이 담배 술을 끊었다. 놀란 건 아내들이었다. 광주 기독교 운동의 대부, 골수 기독교 쪽, 젊었을 때 김지하 시인의 책을 접하고 그 때 이후 동학에 화두가 걸려 인연이 되어 들어갔다. 박효섭.
나보다 더 강한 체험을 했다. 떨리고 공중부양도 하고. 박씨는 강령과 영부와 강화가 있는데 그는 영부까지 받았다. 붓을 쥐어주니까 부적을 자신도 모르게 그렸다. 본인도 놀랐다. 다음에는 아들 딸 데리고 같이 들어왔다. 천도교로 개종했다. 그 운동가들이 전향을 해서 ***을 만들었다. 참고로 그런 세계도 있다.
그 뒤 깊어진 제 고민이 보수적인 분들은 저보고 ‘종북좌빨’이라고 한다. 동학 자체가 개벽을 지향하니까 진보적이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현실의 문제들, 밀양, 송전탑, 새만금, 그런 문제들이 터지면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직간접으로 같이 해 봤다. 도법스님이 지리산에서 순례를 시작해 전국을 돌 때 지나가면서, 갈등과 상처와 한이 많은 땅을 지나갔다. 끊임없이 만나서 대화하면 해결된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라는 철학이 있다. 군수 시장 시장 오게 하고 운동권과 대화 소통하는데, 동학의 한이 어린 땅도 많다. 전국에. 전화를 하신다. 박선생 나 공주 지나가는데 빨리와. 수시로 기회 시간되면 모시고 자기도 걷기도 이야기 했다. 지역 사람 알게 동학이야기를 하라는 거 였다.
군산 순례 후 익산 들어오는 길목에 저희 집이 있다. 3일 머물고 떠나시면서 등불하나 달아주시고 언제까지 동학을 말로 할꺼야? 생활로 좀 해봐. 삶으로 좀 살아봐 하셨다. 가장 큰 바람은 이제부터 저는 동학을 삶으로 살아 보고 있다. 두 번째 이유다. 동학서당 하는.
세 번째 박달한 이라는 친구가 있다. 보은이 세속적인 계량적 통계는 제정자립도 하위, 다문화 가정도 많다. 초등학교 절반은 넘는다. 평가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100년 전 200년 전에는 안그랬다. 유산이 대단한 땅이다. 2004년 박달한과 대화 중 눈을 떴드라. 그런데
외로워 보이드라. 생각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다른 곳은 관에 의존해 지원받아서 하는 건데, 다른 지역은 과거형이다. 현재와 미래에 강조를 둔 곳은 보은이 유일하다. 보은이 그런 땅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갔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보은에서 제가 새 생명을 얻었다. 80년 7월 보은에 수해가 났다. 회인지역 70여명이 사망? 장내리 앞 부대에서 근무를 했다. 그때는 장래리가 중요한 땅인지, 나중에 동학에 미칠 줄 몰랐다. 수해 나 부대가 1000명이 고립되었다. 3일 동안.
모르면 우면, 알면 필연. 새 생명을 얻은 보은에서 동학을 삶으로 시작하면 좋겠다. 일단 제일 쉽게 이런 고민을 나누는 자리를 19회 보은취회에서 시작해 보자는 생각으로 서당을 열자했다.
서당하면서 머리로 하는 동학에서 몸으로 하는 동학으로의 변화, 말로 하는 동학에서 삶으로 사는 동학을 고민해 보자. 그런 취지로 보은에서 열리는 것이 동학 서당이다. 방향은 두 가지이다. 머리->몸, 말->삶과 실천으로.
몸으로 삶으로 하는 동학을 할 때 무엇이 중요할까?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앎이 잘못된 것임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동학에 대한 이해가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 동학의 동의 의미가 아직도 오해되고 있다. 서의 대립되는 서와 마주서는 동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공부해보니 그런 의미만 있지 않다.
1. 방위로서의 동. 동쪽
2. 동쪽의 나라. 동국
3. 동쪽 나라의 사상 철학 종교 정신
4. 근원, 본질
동국은 고조선부터 있어온 우리 민족의 원형질이 된 사상 철학이 무엇이겠는가. 한사상 이라고 보통 이야기 하는데, 한이 무엇인가. 한의 동쪽 나라 표현이 동학이다. 빛 광명 밝음 살림 하나이면서도 여럿 중심이면서 주변과 어울리고 그것을 부활한 것이 동학이다. 19세기 수운의 동학이 한 사상을 새로운 시대에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그 본질에 생명이 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서구와 유학 불교와 충돌할 이유가 없다. 한 사상의 통일신라적 표현이 유불삼교 포함삼교이다. 드러내주는 바탕, 동학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동학하는 이유가 아닐까. 갑오년 일시적으로 혁명해 쓰러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고민해야 할 것이 아닌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 철학에서 동학을 여전히 비주류로 10%도 안 된다. 5%정도나 될까. 한국 철학을 동학으로 가르치는 것도 10%미만이다. 원주에서 장일순 선생 22주기 있었는데 전호근 교수가 있었는데, 그 때 확 한번 지르려다가. 해월선생이 빠져있다. 전봉준의 철학도 저는 책으로 쓰고 싶다. 이런 관점에서 동학을 새롭게 바라보면 한국 철학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방향성이 보일 것 같다. 그런 고민을 나누는 자리이다.
7-8년 전에 쓴 글 제나라 제 땅에서 제대로 된 생각으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제대로는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지 허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이기적으로 하는게 아니라 하늘이 부여 된 바대로, 키 큰대로, 작은 대로, 머리로 아닌 몸으로 끝내주는 자기가 타고난 개성 특성 개성을 온전히 다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동학이다. 동학의 세계에서는 어떤 존재도 차별 배제 될 수 없다. 제 꼴을 다 존중하는 것이다. 5대 10대 30대 가난한 집안의 미련 방탱이어도 니 안에 하늘이 있다. 어떤 한계 모순이 있더라도 그 안에 이미 하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제대로 이해하고 실현하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세계이다.
제대로 이해하는 마당이 동학서당이 되면 좋겠다.
동학이 운동으로 우리 역사에 섰다. 실패하긴 했으나 운동을 통해 그 정신을 실현하려고 했다. 생각 관념으로 제 결대로 살려고 이론 관념 말로 머리로만 제시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실현 하려고 선조들이 했다. 이것이 우리가 같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그건 동학의 핵심 어디에서 나왔을까. 시. 천주를 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안의 신령함을 이루고 밖으로 그 신령의 외부 대중화 이다. 시대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현실사회에 구현하는 것. 내가 신령하듯이 내 주변을 신령하게 만드는 것이 외유기화이다. 안으로 영성과 밖으로 혁명이다. 영성과 혁명을 통일하는 가르침이 시.이다.
기질에 따라 수양, 실천이 앞서는 사람이 있다. 동학은 균형을 유지하도록 방향을 설정했다. 100여년 전 그것을 구현하려고 했다. 오늘날 5000년 역사에서 30만 명의 생명을 바쳐가며 우리가 꿈꾼 개벽을 지상에 실현하려 한 희생을 치룬 역사가 있는가. 묘청의 난을 일대 사건이라 하는데 사기다. 그 뒤 419 6월 항쟁 있으나 동학과 사회적 조건이 다르다. 논리적 설명가능 한 인프라가 있었다. 동학은 설명 안 되는 때 일어났다.
그 운동을 이해하는 방식이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혁명 운동 실천이 준비 조직 사상 이념 철학 없이 되는가. 전봉준을 이해하는 방식이 준비 사상을 떼어내고 삼례집회에서 지도자로 등장하는데 3년간의 역사만 주장한다. 역사가 운동가들이. 40여년의 생애를 살았으면 다 다뤄야 하는데 3년만 다루고 있다. 전 저작이. 37년이 어디 있는지 없다.
3년은 37년의 바탕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동학혁명이 가능했던 프로세스가 무엇인가. 그 중 조직을 말한다.
동학 농민이 치열했던 곳과 접포조직이 구성되었던 곳과 일치한다. 집강소의 6임이 접포 조직의 임원이다. 그것이 농민혁명으로 간다. 결정적인 시기 아닐때는 공부보직, 운동 조직일때는 혁명조직이 된다. 동학은 접포 조직을 떼어 놓고 불가능하다. 5 10년 조직이 있다. 마당 포덕시대도 있었다. 처남포덕이 있다. 핏줄로 연결된. 내 목숨을 담보해 줄 이가 아니면 포덕 할 수 없었다. 입도 절차에 청수 떠 놓고 제자 절차를 받아야 한다. 21자 주문을 받고. 입도를 하면 그 접주가 스승뻘이 된다. 그가 연원이 된다. 연원제, 연비제라고 한다.
이 절차를 밟지 않으면 입도를 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통지를 해서 어느 날 모여라, 수백명 오면 마당에 청수 떠 놓고 공동으로 주문을 받는다. 1891년-2년.
1860년 때의 접포 조직, 1890-1년 접포조직이 있다. 어느 것이 정통성이 있냐. 급격하게 들어 온 사람들은 마음이 급했다. 현실의 모순이 첨예해서. 급조된 조직들이 서둘러 난리를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접포가 신생 접포를 간섭할 수 없다. 해월에게 지시는 받는데 간섭을 못한다. 선배가 조언 할 정도. 접과 포는 모두 대등하고 자율적인 조직이다.
모두 갑오년에 선봉에 선다. 그동안의 연구자들은 접 포의 갈등으로 이야기 한다.
갑오년에 안한 조직이 갑진개혁운동에 다시 봉기하는 등. 1860년 동학이 생긴이래 한국의 모든 운동에 동학의 접 포 조직이 안 낀데가 없다. 근 100년 동안. 동학이 참여 한한 데가 없다. 사상도 있지만 접 포의 자율적 역량이 있다.
사회운동 생각하는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한다. 결정적 국면에 다 나가야 하는가. 20-30%는 보존을 해 놓고.
길게 보니 그렇다. 개벽은 가까이 오고 있다. 80년대 공부하면 사회적 분위기가 해월 공부하면 나사빠진 놈이었다. 관념주의자 신비주의자. 100주년 되니 갑오농민전쟁-> 동학이름을 썼다. 94년이었다.
2014년에 종합소득세 신고에서 100여만 원을 납부했다. 그럴 정도로 강의 모임이 많았는데 거의가 풀뿌리 모임이었다. 해월, 사상, 수련 이야기 해달라고 했다. 전봉준 요청하는 건은 하나도 없었다. 흐름이 달라진 것이다. 운동은 사상과 준비와 조직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 밑에 숨어 있는 것을 함께 봐야 한다. 겉만 보면 시행착오를 겪는다. 후대의 성질 마음 급한 우리가 실수를 한다. 서당에서 하나하나 바로 잡자.
서당에서 지혜의 실마리를 얻어가자. 개벽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긴 안목으로 봐야 한다. 개벽을 이루는 못자리 역할을 하면 좋겠다. 보은이 그럴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을 갖고 있다. 뒤집으면 역사는 바뀐다.
숫자가 아닌 질로 정신으로 따지는 것으로 세상이 바뀌면 보은이 1등이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주요섭 보은에 짱박지는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근거지는 보은에 둬야겠다고 생각한다. 첫 물방울을 동학서당으로 열려고 한다.
봄길- 해월선생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유는?
박맹수- 이유가 없었다. 논리적 설명이 없다. 전생에 해월 선생 ‘가방모찌’였다. 석사 논문 주제 정할 때 동학연구사 조사하는데 수운, 전봉준, 손병희는 있는데 해월만 석사 논문이 하나도 없었다. 왜 없지? 좀 지나서 자료 찾기 어렵고 숨어 계서 알려진 것도 없고 종교적 수도주의자 보수반동-전봉준의 봉기를 부모 한을 위해 봉기한 자로 낙인찍이자로 낙인-
자료가 없어 고생하다가 표영삼 선생, 대교당에 찾아갔더니 내가 안내해 주겠다고 해서 10년간 해월선생 답사를 다녔다. 장영*선배가 자신이 영해운동 자료를 찾아 온 게 있다.
최초로 석사논문을 썼다. <****> 영해를 서너번 갔다. <신미아변씨 일기> 영해 남씨 집도 유적으로 남아 있다. 표영삼 선생의 특징은 뿌리부터 경주부터 시작을 했다.
전라도에 동학 공부 후 십년이 지나서 이다. 경상도 강원도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 전라도 공부를 했다. 봉사가 문고리 잡은 거다. 1982년 제가 뭘 알아 해월 연구한다고 했겠는가. 황금 문고리 였다.
장일순선생이 회를 차려 놓고 네 시간을 내가 떠들었다. 장일순의 행복한 순간 이었을 것이다. 젊은 놈이 일찍 해월을 연구한다고 했으니. 원주 선배들에게 이쁨을 받았다. 그렇다.
***- 독립운동에서 어떤 부분을 동학의 포접 이라고 볼 수 있나
박-31운동을 지방에서 주도하는데 동학 천도교 교세 포와 접이 있는데로 하달이 된다. 조직단위로 지방 31운동을 조직했다. 80-90%는 천도교 조직이었다. 신자수가 300만 이었다고 한다. 군 면 단위까지 전교실?이 있었다. 손병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 있지만 31운동 만큼은 인정한다. 봉황각에서 49일 정기적으로 공부한다. 지방의 접포조직 자들을.
운동은 말로 이면으로 만 되지 않는다. 돈 물질 밥 먹고 똥 싸면서 운동하는 거다. 성미운동. 아침 저녁으로 숟가락 씩 따로 떠 놓는다.
우리나라가 농업에서 공업으로 박정희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 60년대 이전까지 우리의 경제 규모 소득단위는 쌀 한가마니 두가마니였다.
원불교는 사람이 죽으면 활동한 것을 쌀 몇 가마니로 환산한다. 50년 전까지 우리 삶의 경제의 단위였다. 돈으로 바뀐 게 얼마 안 된다. 성미가 재정자립의 근거가 되었다. 31운동 자금을 준비했다. 처음 기독교 쪽이 뜨뜻미지근했다. 단일 교단 아니다. 장로 감로 등.
기독교에 전도교가 독립자금을 줬다. 협동과 연대를 하게 열려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성미자금으로 모아 기독교 계에 보냈다. 종교계가 하나가 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다시 21세기에 부활해 보자고 준비하고 있다. 천도교의 접포 조직이 잘 되어 있던 지역이 31만세가 세게 일어났다. 만주의 독립 운동도 그렇다.
연오랑 - 성미가 개신교에서 했는데 ,, 동학이전에도 있었는가?
추연창 - 있었다. 아이가 안 오면 밥을 해서 두었다. 기독교에 그 때 5천원 빌려줬다. 지금 55억 된다. 불교는 만원이다. 100억이다. 우리 민초들이 한 숟가락 씩 모은 것이다.
박맹수 - 민중들의 삶에서 실천되어 왔다. 두레가 있었다. 제도화 한 것이 천도교의 성미, 동학에서는 유무상자.
추연창 - 옛 부적계를 보면 쌀, 보리 등 있었다.
박맹수 - 돈은 축적의 수단이 아니었다. 유무상자 정신이 접포 조직에 있었다.
방랑자 - 모든 존재에게 하늘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이명박 박근혜 속에 하늘이 암만해도 안 보인다.
박맹수 - 제가 풀었으면 시원하게 답을 드릴 텐데.
아시반 - 하느님이 대한 상이 있다. 반드시 선해야 한다는. 동학에서 수운 선생이 불택선악.
방랑자 - 이론은 되는데 삶에서 어떻게 발견해 내는가.
박맹수 - ‘불택선악’하는 이가 우리 주변에 있었는가? 장일순이다. 전두환 뒤집겠다고 할 때 하번씩 치사한 사람을 안아주는 사람이 있은 것도 좋다. 그 때 주신 화두가 전두환을 사랑하다. 몇 십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왜 그 말씀을 했나 이해가 된다. 당신이 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전두환 집권 후 국풍 할 무렵 81년. 싹쓸이 하겠다고 리스트 작성을 했다. 일순위가 김지하. 그걸 듣고 봉산동 뒷산에 올라 대성통곡을 하셨다. 이일을 어찌할꼬.
어느 날 측근의 몇 분이 있지만 전혀 안 알려진 비서 박준길?. 드러난 적이 없다. 그를 통해 장선생과 연락을 했다. 그 때 전두환을 보필하는 3허.가 있었다. 허문도가 이론가.
문도에게 다녀 오겠다 묻지 마라. 나중에 들어 보니 난을 몇 개 치셔서 허문도에게 가서 건내 주고 오셨다. 허문도에게 간다고 했으면 말렸을 거다. 나중에 말씀하셨다. 공개적인 글에는 소개 되지 않고 있다. 허문도는 항복의 선언으로 받아 들었다.
원주를 떠나게 만들었다. 최열 등. 있으면 당할 거 같으니까. 그런 실화를 들으면서 저의 디엔에이는 차라리 깨질지언정 굴복은 못한다인데, 세월이 지나 생각하면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살아 남기위한 제스처로 받아야 할지,
장일순의 삶의 자취를 보면 풀 한 포기 하나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상대적이다. 악이 없어지면 선도 없어진다. 저 적도 양심은 있을 거다는 생각은 하신 것 같다. 적 안에도 종자가 있는 거다. 우리는 그 씨앗을 부정해 버린다.
노동조합에서 3개월 파업. 운동을 지원해 보면서 저놈도 불성이 있다고 인정했다가는 회색분자로 더 바쁜 놈으로 스파이로 찍히는 분위기 였다. 우리의 운동이 유연하지 않았다. 지금도 안된다. 저들도 부모가 낳고 미역국 먹었다고는 운동이 안된다. 그걸 어끄는 지도자들 마음에 그게 일어나야 적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적공을 피눈물 나게 해보자는 것이다.
방랑자-진보진영의 홧김은 잘 보인다.
추연창-31운동에 대구의 역사는 어떤가 뒤져 본적이 있다. 기독교 와이엠씨에이가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천도교 대구교구장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런 기록이 하나도 없었다.
대구의 근대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 3년 안에 꼭 발표하겠다.
박맹수- 한국의 학문의 문제가 개벽이 중심이었는데 개화로 바뀌었다. 서양 일본 기독교이다. 동학의 전통이 말살이 되고 있다. 익산도 천도교가 했는데 기독교가 기금 받아 성역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서소문 교도소. 특정 성당이 청주교 성지로 바꾸려다가 걸려 문제가 되고 있다. 주의하고 유념할 것이 특정 종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리가 계승해야 할 지혜와 자산이 말살되는 문제가 있다.
기독교와 천주교도 그러고 있다. 당진에서 온 선생들 있는데 지난해 당진 가보니 합덕 성당을 중심으로 활동이 부각되어 있는데 문화유산을 있는 그대로 해보자고 해서 신부가 의지가 잇어 다행. 동학기념사협회가 움직여서.
연오랑- 역사책을 동창회에서 만들어서 내는데 내용이 왜곡되어 있어서. 천도교내용 빠지고 625 반공 비슷하게 담겨있어서. 흐름이 왜곡되고 보수적이다. 완전히 변질되어 있다. 전체 왜곡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박맹수- 그런 점에서 서당이 중요하다. 국정 교과서만 문제가 아니라 학교에서도 일어난다.
쥐똥나무- 접포가 평소에는 공부조직이었다. 보은에 서당을 연 것이 동학사에 남을 반환점 같다. 저는 대안학교 아이들에게 주목했다. 천도교 판이 31운동 우리가 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없다. 저는 이런 모임이 6월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한 달에 한번 모여 스터디 하는 과정에 청소년들에게 뭘 남길까. 전라 경기 나름 하는데 자기중심적으로 한다. 그게 아프다. 생평도 딱 오면 그들끼리 모였다가 떠난다. 안 섞인다. 왜? 사고틀거리의 유무상자를 어떻게? 아는 사람이 선구자적 역할을 해서 서당을 통해 역할을 해야 한다.
박맹수-열어보니 좋은 생각이 모여진다. 당장 시급하게 보은 읍내 작은 공간 확보해서 서적 자료 갖다 놓고 제가 안 올 때 자율스터디 해야 한다. 분기별로 2박 3일일지, 전반기 하반기 일지. 석달 한번 일지 등. 지리산 백일학교 가서도 할 수 있고. 움직이는 동학서당으로.
서로 소통되는 기회도 되고.
김학래? -동학은 전라도 동학으로만 알았는데 우리 할배 할매들의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 지역은 외부 문명을 쉽게 받아들이는 특징이 있다. 같은 시기 천주교와 동학이 함께 들어왔다. 매포지역은 관원을 죽였다. 당진에는 120여명이 싸워 이긴 곳도 있다.
지형을 이용해 공격해 물리친 곳이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후손들이 무식하다보니 지역의 문제와 화력막강한 일본과 싸워 이긴 곳이 없다. 알려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알려내고 성역화 해 보자고 한다. 고민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동력이 될 만한 세력이 부족하다. 유족이나 사람이 없어 이해 부족한 측면이 많다. 그래서 외부에 관심을 둔다.
박맹수 - 올겨울 동학서당은 당진에서 하자.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챙겨서 오기로 하고. 부러워하신다니까. 형평성의 입장에서 3일간 머물면서 지역의 어른들과 소통도 하고 대학원생들도 오게 하고. 지혜를 나누는 것으로 하자.
<생명의 눈으로 본 동학> 20권을 사서 기증을 했다. 사가라. 지금까지 동학을 보는 눈을 바꾸자. 앞에는 생명사상으로 동학을 봐야하는 이유, 사료, 실천과정을 썼다. 쉽게 쓴 책이다. 보은취회 재정을 돕는 의미로. 만장 강당을 가득 채워 준 분들께 감사. 다음에는 더욱 충실한 서당이 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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