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낮은 구릉이나 하천을 낀 평야지대에 있고, 한 곳에 수 기(基)에서 수십 기가 모여 있는데, 임천면 두곡리에는 백여 기의 고분들이 몰려 있다. 고분들은 북쪽으로는 백마강 건너편의 구릉지대와 장암리, 성흥산성(聖興山城) 남쪽 일대, 동쪽의 능산리 등 대체로 산성 주변에 분포해 있고, 염창리 ·현북리 ·상금리 ·정동리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규암면의 신리, 온산면의 신성리, 홍산면의 무정리 ·조현리 ·흥량리, 옥산면의 학산리 ·흥연리, 임천면의 옥곡리 ·가신리, 제암면의 상황리, 조촌면의 연화리 ·초평리 ·소사리 ·추앙리 ·용평리 ·세탑리 ·화암리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분들이 발견되고 있다.
무덤구조는 돌방무덤이 대부분으로, 할석(割石)이나 판석(板石)을 사용하여 쌓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의 고분들로서, 1915~1937년까지 수차례 조사되었다. 특히 이들 고분의 널길 부분은 평양지방 고구려 돌방무덤의 것과 유사하여 주목된다. 또한 능산리 1호분 네 벽의 돌 위에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 지역의 강서삼묘(江西三墓)나 퉁거우[通溝] 사신총(四神塚)과 유사한 면이 많다. 이같은 돌방구조와 벽화의 존재는 고구려 문화와 백제 문화의 상관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돌방무덤 이외에도 신리 ·능산리 ·중정리 등 일부지역에서는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호관(壺棺), 그리고 화장용 뼈항아리[骨壺] 등이 나왔다. 이중 화장묘는 불교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독무덤과 호관은 서민들의 무덤으로 세골장(洗骨葬)과 같은 이차장(二次葬)의 존재를 나타내 주고 있다. 초기 한성(漢城)시대의 백제 무덤들이 석촌동 돌무지 무덤들과 같이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데 비하여, 공주시대를 거친 부여시대에는 거의 백제화된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