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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실학자 우하영과그의 『천일록 千一錄』
김혁(전북대학교 쌀삶문명연구소 학술연구교수)
1. 우하영을 다시 생각한다
우하영(禹夏永, 1741-1812)은 수원부 호매절(好梅折) 어량천면(於良川面: 현재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외촌(外村)에서 1741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자가 대유(大猷), 호는 취석
실(醉石室)이며, 성석당(醒石堂)이라고도 한다. ‘취석실’은 그가 말년에 지은 것으로 보
이는 ‘실(室)’의 이름이기도 한데, 여기에 그의 일생이 잘 집약되어 있다.
취하지 않고도 취하였는데, 취한다는 것은 정신이 맑지 않다는 것이니, 그래서 옹은
성품이 어리석은 것인가? 돌이 아닌 돌인데, 돌은 지각이 없으니, 그래서 옹은 성품
이 완고한 것인가? 어리석고 완고하면 세상과 어긋나니, 이 취석실에서는 과연 편안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옹’은 우하영이 자신을 3인칭화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품이 어리석고
완고하여 세상과 어긋난 것으로 자조하며 ‘취한 돌’에 비유하고 있다.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우하영의 은자적 풍모와, 또한 그의 순탄치 않았던 일생이 고스란히 위 글에 드러
나 있다.
지금 어천리에는 우하영의 생가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우하영의 7대조인 추연 우성전
(禹性傳, 1542-1593)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우성전은 당시 류성룡, 김성일과 더불어 퇴
계 이황의 손꼽히는 제자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경기도의 의병장[추의
사(秋義使)]으로 활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남인의 실질적인 영수였다.1) 아직도 이 마을
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지키고 있다.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우하영의 현실적 처지는 그의 고향인 화성을 포함한 경기도 지역
사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우하영은 경기도 사대부의 삶을 평민들과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었다.
우성전은 본관이 단양(丹陽)이고,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이라고 하였다. 중종 37년(1542) 음력 8월 16일
에 한성부(漢城府) 낙선방(樂善坊)에서 우언겸(禹彦謙)과 현감 김석린(金碩鱗)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시조는 고
려 현종 때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낸 우현(禹玄)이며 고려 말의 애국적인 무장으로 경상도원수(元帥)와 문하시랑찬성사(門下
侍郞贊成事)․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조선 태종 초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우인열(禹仁烈, 1337~1403)을 분파
시조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派)의 17세손이다. 우성전의 직계 선조가 세거(世居)해 오고 또 묘가 있는 수원부 호매절면(好梅
折面) 외촌(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은 바로 그의 선산이 있는 본향(本鄕)으로서, 추연의 증조가 되는 우수(禹樹) 대에 이르러
그동안 세거해 오던 파주군 내포(內浦) 2리에서 이곳으로 이사해온 것이 시초라고 한다. 우성전이 수원현감을 역임하고 정계에
서 물러나 노모를 봉양하며 현재의 매송면 어천리의 주변 일대에 거주하였다. 우성전의 선대는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고 관도(
官途)에 나아가 비교적 현달한 가문이었다. 고조인 우기(禹圻)는 평양판관을, 증조인 우수(禹樹)는 연안부사를 지냈고, 조부 성
훈(成勳)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학문이 깊었으며, 생부 언겸(彦謙, 字 益之, 1509~1573)은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을 거쳐 함종현령(咸從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언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백부인 준겸(俊謙)에게 입양되어 청소년시절과 중년 이후 주로 서울 낙선방, 남산 밑 초정(草亭), 숭례문 밖 등지에 있던 생가와
양가(養家)를 오가며 살았다. 장성해서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대사성․대사간 등을 역임하며 동인(東人)의 영수로 명성이
높던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둘째딸 양천 허씨와 혼인하였다. 우성전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학
문에 힘쓴 결과 20세가 되던 명종 16년(1561),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1564년 성균관 유생들을 거느리고 당시 명종의 모
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비호 아래 정치에 깊이 개입하던 승 보우(普雨)를 참수할 것을 상소, 사림(士林)들의 주목을 받았
다. 그가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21세 때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예안(禮
安, 지금의 안동)에 유학(遊學)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학봉 김성일․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스승의 기대를
모으던 3대 수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27세가 되던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한림원(翰林院)에 들
어가 예문관 검열(檢閱)․봉교(奉敎), 홍문관 정자(正字)․수찬(修撰)을 거쳐 1572년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35세가 되던
1576년(선조 9)에 그는 당시 수원부 호매절면 외촌(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에 계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수원현감(水原縣監
)이 되었다. 재임하는 동안 그는 이 고장의 적페(積弊)를 일소하고 교화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가 이임할 때 당시 주민들이
지방관으로서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이해 5월 청주로 출가한 누님이 별세하였다. 그는 한때 파직되
었다가 1581년 경연(經筵)에 들어가 홍문관 수찬․사헌부 장령(掌令)․사옹원정(司饔院正) 등을 역임한 뒤 1583년(선조 16) 예문
관 응교(應敎)를 거쳐 여러 번 검상(檢詳)․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이해 6월 사간(司諫)․군자감(軍資監) 군자정(軍資正),
7월에는 홍문관 부수찬․부교리, 8월과 10월에는 성균관 사성(司成), 11월에는 사옹정, 그리고 외직으로는 강화부사(江華府使
) 등을 역임하였다. 동인 집권하에 남․북인으로 분당할 때도 그는 유성룡․정구(鄭逑)․정탁(鄭琢)․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남인이
되었다. 남․북인으로 분리 호칭하게 된 연유나 배경은 추연의 집이 당시 남산 밑 초정(草亭)에 있다는 데서 연유, 그 당파를 남인(
南人)으로 호칭하게 되었다고 하니, 그는 남인의 실질적인 영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
의 고향이자 한때 현감으로 재임한 바 있는 연고지 수원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에서 수천 명의 의병(義兵)을 모집, 전성기에는 병
력이 3천여 명에 이를 만큼 경기지역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의병부대 추의군(秋義軍)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나주(羅州)
에서 북상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 휘하의 의병부대와 함께 연합작전을 펴면서 강화에 들어가 도처에서 활약하
며 크게 전공(戰功)을 세우게 된다. 현존하는 추연의 저술은 전란 중에 산실되어 『계갑일록』(『추연선생일기』)을 제외하고는 거
의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 없고, 이 책은 화성시에서 번역 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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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사대부들의 생활은 벼슬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반면에 마을 사람
들은 갖가지 기술과 녹봉이 나오는 자리로부터 요포(料布)ㆍ저인(邸人)ㆍ공인(貢人)
ㆍ좌판을 벌이는 시정의 행상ㆍ막비(幕裨)ㆍ시종꾼 등 여러 가지 직업으로 살아간다. 윗
사람들은 살아가기 각박하지만, 아랫사람들은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대단히 많
다. 그러므로 사족은 과거로 관직을 얻지 못하면, 가난하여 생활하기조차 힘들어져서 끝
내 떨쳐 일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여항의 평민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가 있
다. 빈손으로 일가를 이루기도 하고, 자산이 없는 데서 시작하여 생업을 꾸려나가기도 한
다. 그렇지만 사족이 일단 관록을 잃으면, 알거지가 되어 자칫 여항의 평민만도 못한 생활
을 하는 수가 있다.”2)
조선 후기에 가난한 양반이 적지 않았는데3), 우하영은 이 같은 빈한한 양반의 전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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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일록』 권1 「건도」 <부록: 산천(山川)·풍토(風土)·관액(關扼)>
3) 송준호, 1987 「1750年代 益山地方의 兩班」, 『朝鮮社會史硏究』, 일조각, 263∼26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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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증조이래로 집안에 벼슬아치가 없었고,
그 자신도 몇 차례 과거에 떨어지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냉대와 모멸, 그리고 경제
적 궁핍 등으로 인해 사족으로서의 마지막 품위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로 몰렸다.
다음은 그가 69세 때 지은 자서전인「 취석실주인옹자서(醉石室主人翁自敍)」의 일부다.
옹은 단양丹陽 우씨禹氏이고, 이름은 하영夏永, 대유大猷는 그의 자字다. 시조로부
터 21대까지는 벼슬하여 그 녹봉으로 생활할 수 있었지만, 22대 이후 3대 동안은 벼
슬을 못하여서, 옹에 이르러 더욱 신세가 곤궁해졌다. … 옹이 10살 때에 할아버지
께서 돌아가셨다. 그 뒤로 옹은 의지할 곳이 없었고, 연이어 상喪을 만났으며, 설상
가상으로 집에 화재가 나서 전래되어 오던 서적이 홀랑 다 타 버렸다. 게다가 옹은
세 집안에서 달랑 혼자 남은 아들이었고,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가 없어 절실하게 공
부에 힘 쏟지 않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로부터 서너 해가 지나 15살이 되었을 때,
옹은 비로소 다른 사람들처럼 과거 시험에 힘을 쏟아, 그 해 가을 감시監試에 나아
가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무리를 따라 서울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한
묵장翰墨場에 나아가 노닌지 벌써 50여 년이 흘렀고, 인생이 점점 더 평탄치 못해
조석으로 끼니를 잇지 못하고 굶을 지경이 되니, 이제는 죽어도 유감이 없다 … 한
무리 선비들이 방에 한가득 둘러앉아 좌우에서 저희들끼리 시시덕대고 있을 때, 옹
은 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달갑지 않은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 … 나의 마
음가짐이 이와 같았으므로 평생 세력과 이익을 위해 사람을 사귀는 법이 없었고, 세
상 사람들이 모두 화려함을 추구해도 나 홀로 초췌하였으며, 모두들 의지하는 바가
있는데 나만 의지할 곳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이 모욕
하고 멸시해도, 모욕하고 멸시하는 까닭은 진정 나에게 달려있으니 이런 일을 당해
도 조금도 개의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구차하게 그들을 좇아
살기보다는 차라리 그들과 교유를 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만나는 사
람도 거의 없었고 경조사도 모두 끊었다4).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지만, 내성적인 성품을 타고난 듯하다. 그에게 처음 글을 가르
쳤고 물심양면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할아버지가 그의 소년 시절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는 깊은 좌절을 느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사망 이후 그의 방황이 시작되었고, 여러 번
의 과거 실패가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세상의 냉대와 빈곤이 겹쳐서 밀려왔던 것으로 보
인다. 이러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게끔 한 것으로 보이
는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만의 독특한 사유방식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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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일록』, 제10권 「취석실주인옹자서(醉石室主人翁自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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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우한 상황이 오히려 현실 세계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방
하게끔 한 계기가 된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백성
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세상에 실현하려는
‘광간자(狂簡者)’의 면모를 드러내도록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거의 종교적인 각성에
가까운 실존적인 자각을 거쳐 그의 인생 대부분을 국가 경영과 관련된 정책 연구에 매진
하게 된 계기를 이러한 상황 외에는 달리 찾을 것이 없다5) .
우하영의 이 같은 자기 술회에서 그에 대한 기존 평가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를 발견
할 수 있다. 우하영의 자기 이해 방식, 다시 말해 그의 아이덴티티 형성은 그의 저술을 어
떠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오히려
명문가 자손으로서의 자의식에 가득 차 있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자 은자의 길을 택하
여 방관자의 지위를 자처할 수밖에 없던 인물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하영에 대한 초
기 평가인 ‘농민의 근면을 북돋음으로써 농민의 입장에서 농민경제를 재건하고자 한 실
학자’라는 견해는 근거 없는 평가임에 틀림없다6).
우하영에 관한 초창기 연구는 그를 농업 관련 전문가로 위치 짓고, 그런 관점에서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중 큰 논란이 된 것은 소농경영과 광작의 문제였다. 김용섭은 당시
의 시대적 진전을 소농을 극복하고 광작 경영으로 진전하는 것으로 인식하였으므로, 소
농경영을 광작 이전의 미발달된 농업 경영으로 본다. 한편 미야지마 히로시는 소농경영
을 주장하는 우하영의 광작 비판을 근거로, 19세기 초에 가서나 광작에 집약농법이 가세
한 것으로 보면서 우하영의 시대에 광작은 미성숙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최근 안승택은
이러한 변화를 광작에서의 농법 변화로 보기에는 너무 시기가 짧고, 오히려 광작의 분포
는 지역적 차이와 농법의 적합성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기하는 한편, 소농
경영에서 광작경영으로의 단선적 진전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해해서는 곤란하
고, 오히려 소농경영의 끈질긴 명맥에 유의하여야 한다는 관점을 취한다. 어쨌거나 이것
들은 모두 우하영의 농법이 당시의 사회 성격을 판단하는 도구로 이용된 사례이다.
이와 거의 같은 입장에서 미야지마 히로시는 담배 생산을 반대한 우하영에 대해 그가 더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 생산의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그 결과 이윤을 추구하는 데 철
저한 부르주아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렸다.7) 우하영이 담배 생산을 반대하였
던 것은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실용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뿐이다. 담배가 전혀 쓸모없
고 오히려 해만 되는 물건인데도 돈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막대한 노동력을 집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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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혁, 『화성 사람들 정조를 만나다』, 화성시 화성문화원, 2004.
6) 정창렬, 1986 「우하영의 천일록」, 『실학연구입문』, 일조각.
7) 宮嶋博史, 1977 「李朝後期 農書의 硏究」, 『人文學報』43, 京都大 人文科學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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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기존의 논밭을 갈아엎는 풍조로 인해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우하
영의 우려였다. 8)
미야지마 히로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훌륭한 자본가는 피도 눈
물도 없는 냉혈한이어서 돈 되는 일이라면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전통
적으로 자본가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다. 돈벌이의 도덕성
을 묻는 것은 오늘날로 따지자면 양식 있는 기업가, 예컨대 유일한 박사처럼 사회에 해악
이 있는 상품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도덕이 경제를
억압하거나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활발한 경제 행위를 위해 오히려 도덕적 선택도 함께
고려하는 ‘경제도덕’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보적 분류에 신중해야 한다.
이러한 우하영의 도덕적 태도는 사회적 폐단의 개혁을 주장하는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회적 폐단을 강조할 때 조금은 도덕 지향적인 성향을 띨 수
있으며 이것이 자칫 그를 보수주의자로 몰고 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사실상 우하영이 주목하였던 당시의 사회적 문란은 티모시 블록의 명저 『쾌락의 혼돈』
에서 묘사한 명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9) 그것은 구체적으로 도박, 사치, 구걸, 과거
부정, 나태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동요의 배후 조종자는 다름 아닌 돈이
었다. 발자크가 보수적 귀족인 자신의 눈을 통해서 부르주아 사회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듯이, 우하영의 귀족적인 규범성은 이러한 부패한 현실에 관심을 갖게 하
고 그 모순을 노출시킬 수 있게 하였다.
사실상 돈으로 인한 사회적 부패는 어느 특정 시대나 특정 사회의 특수한 고민거리가 아
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으로 겪는 보편적인 문제이고, 다만 정
도의 차이에 의해 그 사회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10) 우하영이 돈의 문제를 고민하였
던 것은 그것이 국가적 공적 기반을 흔들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하영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도, 돈으로 족보를 사서 환부역조하는 일에
대해서는 분노를 참지 못하였다. 그 이유가 독특하다. 신분을 세탁하는 풍조의 경우, 신분
제의 붕괴를 안타까워하는 양반의 시각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양반 신분을 구매한 그들
이 다시 돈으로 수령 자리를 구매할 것이므로 결국 그것이 국가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결
과를 낳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족보를 변조하여 수령 자리를 구매한 경우, 그들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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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제 위주로 편향된 우하영에 대한 연구ㆍ이해는 아마 그의 자료가 소개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이용의 제약 때문이 아니었나 생
각한다. 북한에서는 일찍이 우하영을 ‘실학자’로 규정하고 『천일록』 중 우하영의 농업 관련이 반영되어 있는 「농가총람」, 「산천
과 풍토」(경기도부터 제주도까지 수록), 「토지제도」를 국역하여 간행하였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 책을 일찍이 일본을 거쳐 수입
하여 복사ㆍ유통하였다. 아마 이 국역본이야말로 우하영 연구의 출발점에 이용된 주대본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자료의 제
한적 이용이 연구의 시각을 제약하였던 것은 아닌가 추정한다. 그런데 그가 농업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농업 문제가 그의 논지의 전부가 아닐 뿐더러 핵심적 주장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고 생각된다.
9) 티모시 블록(이정 외 옮김), 2005 『쾌락의 혼돈』, 이산.
10) Marcel Henaff, 2010 The price of the truth: Gift, Money, and Philosophy, Stan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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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거짓을 행하였으므로 이런 전력만으로도 관료로서의 공정성을 수행하기에 부적당하
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현실 비판 관점은 다른 한편으로 그를 ‘실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최홍규는 그가 조선 후기 사회의 다양한 폐단을 지적하고, 실용적인 대책
을 제시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를 사회의 실용적인 문제에 접근한 또 다른 의미의 “실학
자”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11) 이러한 견해는 그의 사유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그는 기존 견해를 수용하여 우하영의 농업 사상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밖에 그의 각종 구폐책에 주목하여 그를 사회개혁적 실학자
로 새롭게 위치지음으로써, 그에 관한 더 넓은 이해의 지평선 위에 위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다음의 두 가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첫째, 기존의 ‘실학자’라는 개념이 그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서 얼마만큼 적합한 것일까?
이 질문은 그가 실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실학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무화(無化)시
키려는 의도에서 던져진 것이 아니다. 근래에 실학이라는 개념은 어떤 것도 지칭하기 어
려울 만큼 지나치게 넓은 외연을 차지하게 되었거나, 실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리학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으므로, 그에게 실학
자라는 호칭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반론을 극복할 만큼의 설명
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편 그에게서 그 이전이나 당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사유 양식을 발
견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를 실학자라고 부르지 않을 특별한 이유도 없다.
둘째, 농업 사상 위주의 연구는 우하영에게서 농업 사상을 제외한 그 나머지 다양한 사유
들이 고의적으로 배제되거나 무의식적으로 누락시켜 왔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확실
히 그의 유일한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천일록』에는 농업 사상 이외에도 건도(建都), 지리
(地理), 관방(關防), 관직, 병제(兵制), 과거(科擧), 용인(用人), 진휼(賑恤), 각 종 구폐책
(救弊策), 향약(鄕約) 등의 제목으로 분야를 달리하는 다양한 지식들이 즐비하게 배치되
어 있다. 『천일록』을 구성하는 이 같은 항목 간에는 어떤 연관 관계가 있으며, 이 같은 편
집 상의 배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문제가 농업을 경제적 하부구조로, 그리고 그
나머지를 상부구조로 올려놓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해석하는 사회경제
학적 접근법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 없이 우하영의
생각 전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할 뿐만 아니라, 농업을 포함한 각 분야에 대한
그의 생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우하영의 사유는 얼핏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기하고 다중적인 양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하영이 서술한 것의 다기성과 다중성은 그의 저서가 왕을 위한 것이었다
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왕의 존재와 그의 자리는 얽히고설켜 있는 낱낱한 모든
것들을 꿰뚫는 지위로 표상된다. 위에서 공권력과 사회적 실용을 모순 없이 동시에 실행
하도록 종용받는 지위는 사실상 국왕이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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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arcel Henaff, 2010 The price of the truth: Gift, Money, and Philosophy, Stanford University Press.
天 地 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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