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아르누보 작가 - 가우디
스페인 건축가, Antonio Gaudi y Cornet 1852∼1926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출생, 어릴 때부터 관절염을 앓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어울리기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관찰"을 하며 보냈다고 한다.
관절염에 수업을 자주 빼먹어 성적도 좋지 못했다. 사실 공부에 뛰어난 머리도 아니어서 학교 생활에 애를 먹기도 했다.
어머니는 대학 시절 돌아가셨고, 그는 이후 아버지와 여조카와 함께 살게 된다. 그는 이후 평생 결혼도 교제도 하지 않으며 이들과 생을 함께 한다. 아버지는 가우디의 대학비를 보태기 위해 가산을 팔아야 했다.
1868년 바르셀로나에서 건축을 전공, 대학에 와서도 가우디는 여전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그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그는 이미 어린 시절 관절염으로 집에 누워있을 때부터 위대한 건축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가우디는 중세, 르네상스, 서남 아시아의 건축물들을 보며 자신의 창작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특히 19세기와 함께 시작된 아르 누보 운동에 발 맞추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몇몇 프로페셔널 건축가들과 일하면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78년 파리 국제 박람회에 출품한 그의 건축 프로젝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줄 인물을 만난다. 에우제비 구엘이었다.
에우제비 구엘. 건축가 구엘 스스로도 가우디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긴 했지만, 그보다도 구엘은 가우디가 만들어 낸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보호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구엘은 가우디가 천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평생 그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 수 있도록 그의 굳건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그리고 가우디는 이런 구엘을 위해 그의 구엘 공원을 만든다.
19세기 말부터 바르셀로나는 전례없는 건축 경기의 붐을 맞는다. 부자들은 "멋"을 위해 예술에 탐닉하기 시작했고, 창의적인 건축가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가우디는 이 당시 부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젊은 건축가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 될 작업들을 맡기 시작한다. "세라믹으로 만든 집" "까사 밀라" "구엘 공원" 그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까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원래 자신이 조수로 일하던 유명 건축가에게 떨어진 작업이었는데, 이것을 우여곡절 끝에 가우디가 맡으면서 그의 필생의 역작으로 남는다. 그는 이 성당에만 43년의 세월을 쏟아 부었고, 그가 죽을 때까지도 완성을 못해 아직도 세계 여러곳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어지고 있다. (아직도 이 성당이 언제 완공될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
가우디는 성격이 좋질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인정하듯 평생 자신의 거친, 폭발하는 성격을 제대로 다스린 적이 없었다. 그 반면에 자신과 함께 일하는 인부들의 어려운 삶에는 진심으로 동정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외모에 상당히 신경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건축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그는 최신 유행 패션을 걸쳐 입었으며, 명품을 사 모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수염을 미장원에서 다듬거나 명함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일 정도였다.
그의 명성은 1910년 절정에 달한다. 그는 구엘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개최했고, 이때 그의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진다. 그는 뉴욕의 호텔 건축 디자인을 의뢰받을 정도로 세계 제일의 건축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자마자, 그의 삶은 어두워진다. 1911년 열병으로 죽다 살아난 가우디는 이듬해 여조카의 죽음, 그리고 구엘을 비롯한 수많은 후원자들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사그라다 파밀라아 성당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가우디는 이 건축물에 평소 어마어마한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몇번의 금전적 문제로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이 중단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가우디는 더욱더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에 미친듯이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외부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완전히 거지와 다름없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는 기자들의 접근을 철저히 거부한 채 일에만 몰두했다. 파밀리아 성당의 인부들과 함께 먹고 자고, 차림새는 오히려 인부들보다 훨씬 남루한 꼴이 돼 갔다. 그는 끝없이 일을 하다 지치면 길바닥에 누워서 잤고, 깨어나면 다시 일에 매달렸다. 가우디는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아 그가 말년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1926년, 그는 한밤중에 길을 건너다 전동차에 치어 사경을 헤매게 된다. 사람들은 노숙자가 누워 자는구나 생각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어느 한 사람이 그가 죽어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택시에 태우려 했으나, 택시는 거지 꼴이 완연한 가우디를 보고 승차 거부해 버린다. 결국 가우디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이때의 부상으로 사망하고 만다.
가우디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통곡했다. 그의 장례식날 바르셀로나 시민의 절반이 검은 옷을 입었으며, 그의 몸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필생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안에 묻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까사 밀라
구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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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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