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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일록』이라는 책과 구성
우하영의 일생은 그가 남긴 유일한 저서인 『천일록』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제목인 ‘천일록(千一錄)’의 뜻은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줄인 말로, 우하영이 평소 조선
사회를 분석하여 작성한 현실 개혁안을 이 이름에 집약시켜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하
영이 ‘천일록’이란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경우는 총 3차례인데, 문맥에 따라서 다음의 두 가
지 의미가 묘하게 교차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이 제목을 ‘천 번 생각하여 얻은 한 가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하영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였는
지 드러내는 한편, 자신이 건의하고 있는 천 가지 방책 중에서 한 가지라도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면 하는 본인의 소망을 담은 건의서로서의 측면도 동시에 갖는다.
그가 이 같은 천일록이라는 저서를 남기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거듭남과 다름없는 종교
적인 각성 단계를 거친다. 그가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거듭된 실패로 낙
망하고, 많은 사람들의 조소 속에서 가장 바닥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대원
(大願)을 세우게 되는데, 그 내용은 자못 감동적이다. 조금 길지만 그의 자서전에 있는 내
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옹은 일찍이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나는 천지간에 바른 기운을 받고 사람으로 태
어났고, 그 중에서도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다. 이국 만 리는 고사하고, 내가 나고 자
란 이 구석진 나라, 이 수천 리도 안 되는 땅과, 신라, 고려 때부터 따져보아도 2천 년
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역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마치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
와 같고 벽을 마주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산천의 경락
이 시작하는 곳인 북쪽 야인의 돌집이 있는 곳으로부터, 남으로 낙동강의 모라동(毛
羅洞) 몰운대(沒雲臺)의 터까지, 동으로 우산국(于山國) 창해(滄海)의 경계로부터
서쪽으로 황룡(黃龍) 장택(長澤)의 바깥까지, 관문이나 요새가 험한지 막혔는지, 길
의 거리가 어떠한지, 토지가 비옥한지 척박한지, 풍토가 강한지 부드러운지에서부
터 병농이 싸우고 지키는 데 적당한지, 군량미를 둘 요지인지에 마음을 쏟아 세세히
살펴 탐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묵는 방에서 누워 별자리를 보다가 서리와 가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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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심상한 일로 여기지 못하고, 울며불며 떠들썩하게 굴다가도, 문득 “나면서
선비라고 조세도 면제받고, 이름도 군적(軍籍)에 매이지 않았네.[生常免租稅 名不
隷征役]”라는 두보(杜甫)의 시구를 외고 나서는, ‘나의 굶주림과 추위를 돌아보니,
이 팔도 안에서 나와 같이 곤궁하고 역에 힘쓰며 매질의 고통을 겪는 자가 몇 사람
일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나의 일념은 동포를 모두 구제하고자 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볼 때마다 가난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책에 대해
고민하였고, 길에서 사람을 만날 때에도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래서
전국의 물건 값이 언제 올랐다가 언제 떨어지는지, 궁벽진 시골에 이르기까지 그곳
의 요역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매번 스스로 마음 속 깊이 생각하
기를, “사람이 궁박하고 현달한 것은 참으로 천명(天命)이다. 한 마디 말이나 하나의
일로 백성과 나라에 참으로 보탬이 될 수 있고, 후대 정치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삶을 결코 헛되이 보내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 그의 연구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실은 『천일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것은 그가 『천일록』을 일생을 두고 집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 아니라, 그의 구불구
불한 인생 노정이 이 책의 구석구석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뜻한다. 『천
일록』의 경우는 다른 저작과 작가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으레 이용되곤 하는 상투적인
수사가 아니라, 매우 직접적인 연관성이 시사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얼핏 살펴보는 것
만으로도 각 편들이 같은 의도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기에 의해 집필되었
다가 그의 말년 어느 때인가 총체적인 시각에 의해 다시 정리하여 편집되었다는 것을 쉽
게 알 수 있다. 우하영이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처음 드러냈던 것은 1796년(정조 20) 정조
에게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린 때였다. 당시까지도 조선은 천견론(天譴論)이 지배하
던 시대였다. 자연 재해가 있으면, 이것을 하늘이 정사에 소홀히 한 군주를 꾸짖는 것으로
해석하여, 군주는 자신의 정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당시 ‘정조 20년 정월에 혹한
때문에 온갖 나무들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3월에 하얀 무지개가 볕을 구하’는 등의 재이
가 잇따르자 정조는 초야의 선비들에까지 건의를 구하는 구언하교(求言下敎)를 내렸다.
이때 우하영은 자신이 당시까지 연구해 왔던 글에서 주요한 내용을 13가지로 간추려 책
자로 만들어 상소하였다.
이때의 에피소드를 우하영은 자신의 글에 기록하여 두고 있다.12) 당시 이 상소가 날이 어
두워졌을 때에야 정조에게 당도하니 정조가 승지를 책망하였는데, 승지는 오자가 많아서
다시 우하영에게 돌려보내어 고치게 한 뒤에 올리느라 늦었다고 답한 것이다. 일이 매우
황급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이 책자를 매우 상세히 고찰하도록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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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일록』 제10권, 「병진년 4월에 왕의 교지에 응하여 올린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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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러 재상들과 의논한 뒤에 모여서 보고하라고 한 한편, 비변사(備邊司)에게 하교하
여 1본을 비국에 베껴놓으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 정조는 이 책자의 내용을 두고 신하
들과 의논하였다.
29일【곧 그믐날이다.】에 약방(藥房)이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제조 심이지(沈▩
之), 부제조 민태혁(閔台爀)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때 상이 말씀하시기를, “경은
상소를 올린 유생의 책자를 보았소?”라고 물으셨다. 심이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
다만 아뢴 바가 대단히 좋은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상이 말씀하시기를, “아직 보
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대단히 좋다는 것은 어찌 아셨소?”라고 하시자, 심이지
가 대답하기를, “대신들의 칭찬이 끝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아
뢴 여러 조항이 참으로 좋고 좋소. 그리고 이 상소를 올린 유자의 경륜은 일찍이 화
성 성역 때에 취하여 쓴 적이 있소.”라고 하셨다. 그리고서 “이 소를 올린 선비는 어
느 집안사람이오? 일찍이 신미년과 임오년에 사대신과 함께 화를 당한 무변이 있었
다고 하는데, 혹시 그 집안사람인가?”라고 하문하셨다. 심이지가 대답하지 못하자,
민태혁이 대답하기를, “고(故) 대사성(大司成) 우성전(禹性傳)의 후손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지벌이 오히려 사족이구려.”라고 하고는
가상하다는 교지를 내리셨다.
당시 이 책자에서 거론한 내용은 1) 무본(務本), 2) 화속(化俗), 3) 용인(用人), 4) 군제
(軍制), 5) 관방(關防), 6) 적세(糴稅), 7) 화성(華城), 8) 탐라(耽羅), 9) 금도(禁盜), 10)
방간(防奸), 11) 육진승도의(六鎭僧徒議), 12) 화포장약의(火砲藏藥議), 13) 무과수전의
(武科收箭議) 등이다.
정조는 비변사 등 관련 부서로 하여금 우하영의 제안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라
는 조치를 내렸다.13) 현재 이 자료는 규장각에 『수원유생우하영경륜(水原儒生禹夏永經
綸)』이란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14) 그리고 당시에 정조는 “조목마다 500여자로 답변하
고 8폭 시지(試紙)에 큰 글씨를 쓰고 나서, 삼가 받아서 전가(傳家)의 보물로 소중히 여기
라”고 명령하였다.15)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너의 상소를 잘 보았다. 네가 아뢴 13조는 모두 민(民)과 국(國)의 실용에 관한 내용
이었다. 너는 재주가 있음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이겠구나.
너는 무본(務本: 농사에 힘써야 함)에 관한 조항에서 ‘각 도의 고을마다 농관(農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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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정조의 명령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 대에 올린 상소문에서 우하영은 그 점을 거론했다.
14) 규장각 소장번호 규3202
15) 이 8폭 비지는 후손이자 소장자였던 우광성에 의해 화성시향토박물관에 기탁되어 소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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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두고 「경민편(警民編)」을 반포하여 가르쳤던 옛 제도를 거듭 밝혀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비변사로 하여금 네 의견의 타당성 여부를 아뢰도록 명령하였다.
수차제(水車制)에 대해 말한다면, 근래 장용영(壯勇營)에서 많은 수차를 만들었는
데,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들어서 여러 고을에 두루 나눠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농토의 경계에 관한 네 의견은 옳다. 농사가 어느 정도 작황이 좋을 때를 기다렸다
가 차차 권유한다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뽕나무를 심는 일은 안주상공(安州相公)의 고사(故事)를 본받고자 한 것이니, 우선
화성(華城)부터 시작할 것이다. 근년에 수신(守臣)의 보고에 따르면 매년 만 그루
씩 심도록 정하였다고 하니, 잠업(蠶業)은 앞으로 문제없을 것 같다.
화속(化俗: 민속을 교화시킴)의 조항에서 『소학(小學)』을 강론(講論)하자는 논의
는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니니, 내가 고심하던 바이다. 민속(民俗)을 교화하는 데 이보
다 더 영향력 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예조판서에게 즉시 명하여 네 소장의 내
용을 편하고 쉽게 실행할 수 있도록 조례로 만들고, 조목조목 아뢰게 하여, 전국에
즉시 반포하게 할 것이다.
사치의 금지 조항은 당장 시급한 일이니, 어찌 너의 말을 듣고서 알았겠는가? 음식
비용이 의복보다 심하니, 하물며 유밀과의 금령이 엄격한데도 기강이 서지 않아, 그
방탕함이 의복에 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법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금
차(禁差)를 보내서, 백성들을 바로잡을 도리밖에 없다.
큰 변화를 점차 꾀하는 방책은, 대신(大臣), 유사(有司)의 신하들과 경연에서 강구
하여 특히 마음을 쓸 것이다.
『대전통편』의 법 조항 중에서 금령(禁令)과 형법(刑法)에 속한 것을 뽑아 전국에 반
포하자고 한 네 말은 일리가 있다. 형조로 하여금 초기(草記)로 아뢰어 처리토록 할
것이다.
공명첩의 발매는 근래에 비로소 금지하였다. 이 금지법에 따르면 온 도의 진휼이 아
니면 구례에 의거해 허용하지 말도록 되어 있는데, 혹시 너는 이것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는가? 너의 의견도 참조할 만하니 비변사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토록 하였다.
인재 등용에 관한 조항 중에 양전(兩銓)에 채용할 만한 인재가 있으면, 즉시 적어 아
뢰게 하였다.
과거의 폐단을 시정하는 일은 근본으로 돌아가 부지런히 자문하는 것이 제일인데,
지금까지는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넘어갔으니 헤아려야 할 것이 남아 있다.
「군제」와 「관방」등 여러 조항은 비변사에 맡겨, 비변사의 좌기일(坐起日)에 무장
(武將)에게 물어 처리하도록 할 것이다.
「적세조(糴稅條)」정책은 널리 의견을 구해야 하므로, 대신 중에서 건의하는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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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이니, 그 의견이 어떠할 지를 기다려 보고자 한다.
「본부조(本府條)」는 수령에게 맡겨 자신의 의견을 보고토록 하였다.
「탐라조」와 「금도조(禁盜條)」는 비변사로 하여금 초기(草記)를 올리도록 하였다.
「방간조(防奸條)」에 대해서 말한다면, 허다한 조령은 그만두고라도 오가작통제(五
家作統制)를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거주민들의 도둑 근심이 없어질 것이고, 비리로 송사하기를 좋아하
는 습속은 굳이 금지하지 않아도 절로 사라질 것이다. 나머지 3조항 가운데 2조는
반드시 그냥 놓아둘 수 없다. 화포에 쓸 화약을 보관하는 일은 해당 창고의 담당자
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토록 할 것이다.
위의 글을 통해 우하영의 글에 대한 정조의 관심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그리고 무엇
보다 우하영의 지적이 얼마나 세밀한 것인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그로부터 7년 뒤인 1804년(순조 4)에 우하영이 다시 응지상소를 올렸는데,16) 그것
은 첫 번째의 상소 내용과는 사뭇 딴판이었다. 이 상소에는 구폐책뿐 아니라 군주론(君主
論)도 실려 있는데, 이 둘을 묶어 다시 『천일록』이라는 이름으로 올렸다. 이 『천일록』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17)
구폐책은 <현재의 폐단에 관한 10가지 조목>이라는 제하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당
시의 직접적인 실무에 대한 것이다.
1.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방도에 대하여
2.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형법 조항을 뽑아 반포하는 일에 관하여
3. 군포와 대동의 승척(升尺)을 식으로 정하는 일에 대하여
4. 둔전 경계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에 대하여
5. 청상과부의 어두운 우울을 풀어주는 일에 대해서
6. 억울한 옥사를 해결하고 다스리는 일에 대하여
7. 각 도 해안 고을의 솔밭에 대하여
8. 서북 지방 강 연안의 승도들에 대하여
9. 함경도 여러 고을의 폐단에 관하여
10. 화성의 경계를 다시 측량하는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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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최초의 응지상소를 올렸을 당시는 정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채제공을 등용하면서, 경기 남인의 비조인 우성전에 대해 적극
적인 관심을 표명하며 시호를 내린 때이기도 하다. 우하영은 우성전의 직계였으므로 그의 상소에 정조가 보인 이 같은 적극적
인 관심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김혁, 2004 『화성 사람들 정조를 만나다』, 화성시 화성문화원)
17) 규장각 소장번호 규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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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마지막에 화성의 급선무인 세율이 너무 높다는 직언을 하고 있는 점은 매우 눈여겨
볼 점이다.
다음으로 군주론에 해당하는 조목으로 다음의 10가지를 꼽고 있다.
1. 마음[심(心)]
2. 일이 커지기 전에 기미를 살펴야 함[기미(幾微)]
3. 지혜와 인, 용기에 대하여[지ㆍ인ㆍ용(知仁勇)]
4. 인재를 찾아야 함[搜訪人才]
5.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함[卞邪正之分]
6. 풍속의 변화를 꾀해야 함[移風易俗之方]
7. 상벌을 밝혀 아랫사람들을 주의시켜야 함[明賞罰以勵群下]
8. 덕과 법으로 다스리는 방도로 삼아야 함[以德法爲駕御之方]
9. 조목을 세워 가르침의 방도로 삼아야 함[立課條以爲警飭之方]
10. 이 마음을 지켜 만사의 근본으로 삼아야 함[持守此心 爲萬幾之大本]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10가지 조목을 1부터 10까지 글자 수에 맞추는 재치를 발휘하
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러한 생각들이 어느 순간 다급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중
하고 여유 있는 과정을 통해서 준비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군주론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를 연상시킬 만큼 공정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심법(心法)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다.
시기를 달리하는 이 두 상소에 나타나는 불일치는 그의 사유가 모순되기 때문에 나온 결
과는 아닌 듯싶다. 양자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데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 하나가 제기될 수 있다.
그의 실용성에서 공정성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
이 각자 자신의 실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몫을 분배하는 비율
의 문제다. 구성원들이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점은 자신의 몫이고 몫의 증대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실용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이 몫을 마음 놓고 추구하게 하
는 것과 그것을 국가의 공정성을 통해 조절하게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정성은 실용과 배반되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서로 보완하
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이 ‘사회적 실용’과 ‘공권력의 정의’를 동시에 추구
하는 것이 우하영의 사유가 갖는 특성일 수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10권본 『천일록』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18.) 바로 이 책이 이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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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규장각 소장번호 想白古 951.053-C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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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본의 저본이기도 한데, 제11권이 빠져 있는 결본이다19.) 그 내용은 아래 <표 2>와 같다.
<표 1> 『천일록』의 구성
권차 항목 내용 1796년 1803년
『수원유생우하영경륜』 (현재폐단10가지조목
과의 비교 과의 비교)
1
건도(建都) 부록: 산천(山川)·풍
토(風土)·관액(關扼), 치관(置官)
- 도읍의 역사
-9개 도의 지역적 특징
- 관제
2
전제(田制), 병제(兵制)
전세 및 군제
1. 무본(務本)
4. 군제(軍制)
12. 화포장약의
(火砲藏藥議)
13. 무과수전의
(武科收箭議)
3
관방(關防)
외적 방비
부록: 산수
5. 관방(關防)
4
관수만록(觀水漫錄) 상(上)·하
(下)
화성 지역의 상황 소개
와 정책 건의
7. 화성(華城)
5
과제(科制), 용인(用人), 화속(化
俗), 진정(賑政)
- 과거제
- 천거제
- 풍속 교화
- 진휼
2. 화속(化俗)
3. 용인(用人)
8. 탐라(耽羅)
6
곡부(穀簿), 균역(均役), 정전군부
설(井田軍賦說), 어장수세설(漁場
收稅說), 전화(錢貨), 주전이해설
(鑄錢利害說), 채은편부설(採銀便
否說), 채금편부설(採金便否說),
조창변통설(漕倉變通說), 육진승
도설(六鎭僧徒說), 평시혁파의(平
市革罷議), 노방식목설(路傍植木
說), 금도설(禁盜說), 신명법제설
(申明法制說), 양육인재설(養育人
材說)
총 15항 부문에 관해서
각사안 별로 건의한 내
용
6. 적세(糴稅)
9. 금도(禁盜)
10. 방간(防奸)
11. 육진승도의
(六鎭僧徒議)
7
염방(廉防), 보폐(譜弊), 향폐(鄕
弊), 막폐(幕弊), 영리폐(營吏弊),
역속폐(驛屬弊), 경향영읍군교폐
(京鄕營邑軍校弊), 삼폐(蔘弊), 군
목폐(軍木弊), 학교폐(學校弊), 산
지광점폐(山地廣占弊), 노예(奴隸), 충의(忠義), 금개가(禁改嫁)
총 14항 현실의 폐단들
과 대책
총 10항목 중
유관항목 7개
(1, 3, 4, 5, 6, 7, 9)
8
농가총람(農家摠覽) 농서
9
잡록(雜錄) 상: 효행(孝行), 충열
(忠烈), 정열(貞烈), 강직(剛直), 인
후(仁厚), 수재(守宰)
잡록(雜錄) 하
인물 평전
10
병진사월응지소(丙辰四月應旨
疏), 갑자이월응지소(甲子二月應
旨疏), 어초문답(魚樵問答), 취석
실주인옹자서(醉石室主人翁自敍)
응지상소 및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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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총11권 완질은 북한에 소장되어 있다고 전하는데, 그 내용은 확실치 않다. 제11권은 우리나라 길을 보여주는 <도로고>로서-----------------------
위의 책 구성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천일록』은 어느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몇 차례의 계기적 사건을 통해 덧붙여져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앞서 언급하
였듯이 1796년(정조 20)에 첫 번째로 올린 응지상소가 가장 큰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당
시까지 우하영이 연구한 내용을 초록하여 올렸다고 하는 『수원유생우하영경륜(水原儒生
禹夏永經綸)』이 가장 참고가 된다. 위의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내용은 10권본 『천
일록』의 제2권에서 제6권까지 공통된 사항이 걸쳐 있다 이것으로 판단할 때 이 부분이 정
책 건의에 해당하는 중심 항목이라고 할 수 있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 응지상소
당시까지 우하영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제7권의 구폐책은 1803년
구폐책과 많은 부분 겹치며, 제1권, 제8권과 제9권은 후일 책의 체계를 기술하면서 끼워
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제1권이 「건도(建都)」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건도란 ‘도읍을
건립’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우하영은 과거에 수없이 명멸하였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나라들과 도읍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중앙 중심의 그의 사유를 보여 주는 것
이기도 한데, 어쨌든 그의 우리나라 역사관도 중부 중심의 역사, 다시 말해 삼국 중 백제
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점은 기존에 신라로부터 시작하는 역사 서술과는 크게 다른 면모
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중부 지방이 한반도 중앙에 있어서 전체를 아
우르는 균형 잡힌 지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 이래로 대대로 이어 내려오면서, 각기 다른 곳에 도읍을 정
하였다.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여 서경(西京)이라 하였고, 계림(鷄林)에도 도읍
을 정하여 동경(東京)이라 하였다. 이런 일은 모두 상세(上世) 때에 벌어졌으니 천
년 전의 일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 도읍들은 서쪽이나 동쪽에 각각 치우쳐 있어서
대일통(大一統)의 기상(氣像)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런데 경기 지역만은 우리
나라의 중앙에 있어서 전국을 아우를 수 있다. 백제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양한(兩漢)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왕건이 남쪽으로는 낙동강까지 무찌르고,
북쪽으로는 압록강까지 쳐 올라가 통일한 뒤에, 송악(松嶽)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그 때까지 도읍은 모두 이곳 경기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평양ㆍ포반ㆍ안읍의 세 도
읍이 모두 기주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송악(松嶽)은 입지 조건이 오늘
날 우리 조선의 도읍인 한양만은 못하다20.)
여기서 우하영의 결론은 현재 조선이 자리 잡은 서울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앙
에 위치한 ‘대일통의 기운’이 있는 가장 좋은 땅[수선지지(首善之地)]이라는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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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천일록』, 제1권 「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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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이곳을 중국의 도읍과 비견한다.
이처럼 경기 지역을 중앙으로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조선을 중국과는 별도의 독립된
공간으로 여긴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중국과 구별되는 별도의 공
간, 즉 또 하나의 역사를 가진 공간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 비교적 최
근 배우성이 우하영의 소중화주의를 그의 특색 있는 사고로 지적한 바 있다.21) 그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로 일컬어진 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의 예악문물(禮樂
文物)을 본받고자 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산천과 풍속은 그 자체가 중국
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산천은 모두 곤륜산(崑崙山)에서 갈라져 나와 천 갈
래 만 갈래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해(四海)로 둘러싸인 넓디넓은 대륙은 애초에 강
역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아서, 사방의 노래와 풍속, 물산(物産)이 각각 달랐지만
서로 뒤섞여 있었다. 성인은 땅의 이치에 따라 이를 구분하였고, 그 결과 구주(九
州)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리나라 산천에서 백두산은 중국 산천에서 곤륜산이 차
지한 위상과 같다. 우리나라 수천 리 강역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얽혀들
며 배치되어 있으니, 우리나라는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또 하나의 천지인 셈
이다.22)
위의 구절에 따르면 우하영은 우리나라가 소중화로 일컬어지는 까닭을 중국 문화를 그대
로 모방하였다는 데에서만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지
점은 지리적 특색이다. 그는 조선의 지리적 구조가 중국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
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서 백두산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보는, ‘또 하나의 천지’로 인식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들은 부록으로 붙여진 산천, 풍토, 관액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그의 국
토관을 설명하고 있다. 도읍에 관심을 두는 것이 중앙 정치를 중시하는 그의 생각을 반영
한 것이라면, 부록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 정치의 대상이 되는 지방에 관한 관심을 드러
낸 것이다. 안과 밖, 중심과 주변, 통치와 피치의 관념이 잘 대비되는 구도이다. 이와 같은
내부 구조에서의 조응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어 전개되는 관직제 및 그 부록인 형법 분야는 통치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도구를 고찰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건도와 국토에 대한 관심은 직접적으로 국왕 중심의 사유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이 책이 누구를 위한 책인가를 보여주는 한편, 그 학술적 맥락이 국왕 국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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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배우성, 2012 「조선후기 중화 인식의 지리적 맥락」,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158호, 한국사연구회, 159~195쪽.
22) 『천일록』 제1권 「건도」 <부록: 산천(山川) 풍토(風土) 관액(關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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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형법을 중심으로 사유를 전개한 북인계 남인들, 특히 성호 계열 학자들의 사유방
식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3.)
제2권부터 제7권까지는 실무적인 민정(民政) 위주의 정책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제2권에 실린 전제와 병제이다. 전제와 병제를 한 곳에 싣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상식 상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면이 있지만, 일반 농민들을 토지에 긴박시키면서
병사로서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은 농업국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방안
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 고대 정책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제3권의 「관방」은 양난 이후 장기적인 평화기에 돌입해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일반 지
식인은 물론이고, 위정자들조차 해이하게 생각했던 부문이다. 사실상 당시 조정은 안일
하게도 외적에 대비해 군비를 조성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사대외교를 통해 중국에 의지
하는 정책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소극적인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와 같은 뼈아픈 허
점은 중국조차 서양 세력에 의해 굴복 당한 19세기말에 여실히 노출되었다. 이 부분은
『천일록』의 많은 부문들 중 가장 백미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주목되는 지점이다.
제5권, 제6권, 제7권은 주로 사회적 폐단에 대한 내용을 위주로 하고 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하영은 사회적 폐단을 병과 같은 것이어서 영원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사는 한 으레 동행하는 친구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다만 상황마다 경중
이 있을 뿐이므로, 그 상황에서 가장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먼저 없앨 폐단만을
제거하면 그만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폐단은 매우 상대적인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을 뿐
이다.
제5권은 과제(科制), 용인(用人), 화속(化俗), 진정(賑政)으로 묶여져 있다. 이 네 가지 주
제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것이 있다면 풍속(風俗)에 대한 관심이다. 풍속에 대한 관심은
유교문화의 주목할 만한 특성이면서 궁극적인 가치일 수도 있다. 이 같은 관심은 성스러
운 이념이나 이상을 그저 선포하는 데 그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높은 이념
혹은 이상이 일상의 영역으로 내려와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실현되는 양상에 대한 관심으
로 드러났다. 이것은 가까운 곳에서 도의 실현을 주장하는 근사(近思) 정신, 혹은 일종 세
속화 예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하영이 과거제의 문제를 발견하는 지점도 사실상 제도가 실천되는 현장이다. 그가 파
악한 현행의 과거제를 통해 인재를 뽑을 수 없다고 본 가장 큰 이유는 요행을 꿈꾸는 과거
지망생들이 너무 많아서, 과도한 응시 인원이 발생함으로써 인재가 제대로 평가받을 기
회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가 내건 처방책은 천거를 통해 과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시험
을 강화하는 방법인 “과천법(科薦法)”을 제안하고 있다. 설사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하더
라도 권문세가와 적절한 커넥션이 없으면 관직에 나가는 것이 좌절되었으며 사색당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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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호훈, 2004 『조선후기 정치사상 연구 -17세기 北人系 南人을 중심으로-』,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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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이후로 당로자의 당파에서 관직을 독점하여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더욱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화속(化俗)에서는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사치, 거지, 노름, 향약에
대해서 각각 고찰하고 있다. 사실상 이 같은 조항들은 밤과 낮처럼, 혹은 뫼비우스의 띠처
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하영의 눈에 거지가 거리를 가득 메우게 된 것은 누군가가 사치
한 결과이다. 사치함에 따라 국부(國富)가 누수되고 재정이 약화되면 외적의 대비에 필요
한 군비나 자연재해로 인한 소농들의 유리도산에도 수수방관하게 되고, 그 때문에 거지
가 거리에 득실거리게 되는 순환 고리를 갖는 것이다. 노름이 만연하게 된 일 역시 이런
기강 문란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조선의 벼슬아치로부터 사족, 여항의 소민들과 촌구석
의 나무꾼들, 목동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팔목’이라는 도박에
빠져 여기저기서 경제적 파멸과 도덕적 파탄에 이르는 과정이 눈에 잡힐 듯하다. 그는 이
러한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조처는 엄격한 형률의 적용이라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
는 아니었다. 우하영이 앞서 언급하였듯이 족보 위조를 통해 관직을 점유하는 것만이 아
니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직첩을 파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는데, 결국 이것이 명분,
다시 말해 사회적 기강이 약화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휼에 필요한 물자를 기증
하는 사람들이 관직을 매개로 조건부로 기증하기보다는, 명예와 양심에 의한 순수 기부
를 종용할 수 있는 방안을 도모하도록 주장하였다.
제6권에서 우하영의 논의는 구체적인 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런 점에서 그 주제
는 한마디로 소강사회에 이르는 방법이며, 따라서 이 내용은 그의 사유 중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절실하다고 여긴 것을 제일 앞에 배치하기 마련이다. 가장
큰 문제는 수세(收稅) 문제로 집중되어 있다.
“곡부(穀簿)”란 글자 그대로 ‘곡식장부’라는 뜻이지만, 여기서의 주제는 주로 환곡에 관한
것이다. 환곡은 소농들의 불안정한 농업 경영을 돕기 위하여 설정된 국가의 핵심적인 정
치 기술이다. 전근대 국가의 기능 중 가장 큰 핵심적인 것은 결국 전국에 있는 물산을 세
금의 형식으로 중앙에 집중시킨 뒤,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소농민들의 경제적 재
생산이 어렵게 되면 그 경영을 돕기 위해 중앙으로 집중된 재정을 재분배하는 기능에 있
다. 이것이 환곡의 본의이다.
<표 2> 환곡 폐단의 양상과 처방
순번 폐단의 양상 처방 비고
1 각 고을에 환곡의 불공정 배당 해마다 민호(民戶)의 수에 맞추어 환곡의 균등 분배
2 환곡 작전가(作錢價)의 문제
각 고을의 환곡 원수(元數)를 기준으로 평균 분배,
시가(市價)로만 판매
3 관속(官屬)들의 곡식 바꿔치기 문제 형률 강화
4 모곡(耗穀)의 폐단 창고제의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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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균역(均役)에서는 주로 군역에 따른 세금 문제를 다룬다. 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정(軍丁)의 확보뿐 아니라 군량미(軍糧米), 군기(軍器) 등 군수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서 거두는 물량 단위는 주로 포(布)였는데 수납하는 방법이 문
제였다. 결국 그 역사는 호당 1필씩을 거두는 균역법으로 귀결되었지만, 여전히 남는 문
제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어장수세설(漁場收稅說)도 큰 범주에서 균역법과 관련된
논의이다. 여기서는 어살의 폐지와 설립을 편의에 따라 하게 하되 율령을 엄하게 세워 세
금을 숨기지 못하도록 하고, 이미 폐지된 어기(漁基)에서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는 일에
대해서는 엄한 형률을 적용하는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나머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문제와 처방을 직접적으로 대응하여 서술하는 체제를 사용하였다.
제4권 「관수만록」과 제8권 「농가총람」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화성과 농사에
관련된 부문을 각각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관수만록」이 자신의 고향을 집중적으로 다루
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 연구의 훌륭한 귀감이 된다면, 「농가총람」은 기존 농서와 현지 노
련한 농사꾼들의 증언을 토대로 자신의 입장을 자세히 언급한 농서로서 그 가치를 지닌
다. 이 두 편은 단순히 독서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관찰
하고 숙고한 끝에 생산할 수 있는 그만의 독창적인 텍스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제9권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못하였다면 이것이야말로 우하영의 궁극적인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 제9권에서 다룬 효행(孝行), 충열(忠烈),
정열(貞烈), 강직(剛直), 인후(仁厚), 수재(守宰)의 주제로 나누어 기술한 인물 평전은 일
견 범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가 구상한 사회에 대한 실제적 결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수많은 제도 개혁을 주장한 까닭은 다름 아니라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있
었고, 풍속을 교화시킨 결과는 바로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을 배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계(鑑戒)와는 구별되는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가 어떤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는지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천민부터 양반까지, 남녀노소를 차별두지 않고 그들의 행실에 따라서
평가하고 있으며, 자결하거나 수절하는 과부 대신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모범
적인 인물들을 많이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책을 구성하는 여러 편들의 서로 엇갈린 초점은 말년에 이 책을 편집한 우하영에게도
큰 장애였던 것 같다. 이러한 애로는 이 책의 마지막 권인 제10권에 종합적인 네 편의 글이
집약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정조대에 올린 「병진사
월응지소(丙辰四月應旨疏)」와 순조대에 올린 「갑자이월응지소(甲子二月應旨疏)」 등 두
편의 상소, 그 이후에 쓰여 졌던 「어초문답(漁樵問答)」, 「취석실주인옹자서(醉石室主人翁
自敍)」 등 그의 사유를 핵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네 편의 글이 집약되어 있는데, 이 책의
나머지 기술 의도를 이를 통해 총괄할 수 있도록 도모하였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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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천일록』은 국가 경영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하여, 정조에게 올린 응지상소에
서 건의문의 형태로 변조된 뒤, 다시 순조에게 올린 응지상소에서는 군주론이 추가되었
고, 이후 하나의 통일된 의도를 가진 책으로 재편집되어 이 같은 체재가 된 것이다. 더욱
이 종합적인 성격의 글들을 10권의 끝에 몰아서 수록함으로써 그 편집 의도를 보여주는
데, 어부와 나뭇꾼의 대화를 가설한 「어초문답」에서는 앞서 언급한 자신의 다기한 정책들
을 한데 묶어 연관성 있게 설명해내려는 의도가 다분하고, 「취석실주인옹자서(醉石室主
人翁自敍)」에서도 우하영이 자신의 인생과 사유를 종합하려는 의도를 듬뿍 담고 있다.
그는 「어초문답」을 통해 다른 초점에 의해 쓰인 여러 글들을 하나의 실로 엮어 그의 사유
를 총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는 여기서 이 책 9권에 걸쳐 흩어져 있는 국가 경영
방략에 관한 논의들을 드래곤 볼처럼 한데 모아, 연관성 있게 보여주려 하였다. 주인과 손
님으로 가설된 두 사람의 문답 형식은 이 글에서 처음 시도한 방식은 아니지만, 우하영의
의도를 표현하기에는 이 방식이 매우 유용한 형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가 애
초에 가졌던 의도된 기획이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가 거의 죽기 직전에 자신의 의
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려 하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하영의 이 같은 일생 행로를 돌아보면, 그가 보여준 이 같은 정서상의 동요, 광간자로부
터 은자로의 극단적인 변모는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다분히 외부
세계로 확장하려는 자아가 좌절되었을 때 생겨나는 극심한 우울이다. 그런 경우 세상에
대한 희망과 관심이 클 수록 실망과 우울도 큰 법이다. 그 와중에서 『천일록』은 그가 살아
온 인생의 정중앙을 지나간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인생에 『천일록』은 한 궤적을 지나왔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극심한 절망과 희망, 환희, 배신, 낙담, 기대
가 한데 뭉쳐져 있는 것이 그의 삶이었고, 그 무늬가 남겨진 자리가 그의 책인 『천일록』이
었으며, 무엇보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이며 희망도 『천일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우하영에게 갖는 의미는 조선 시대의 어떤 학자를 위해 남겨진
문집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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