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엄마의 24시 대치동 엄마가 본 대치동 엄마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오후 10시. 교통 체증, 주차 전쟁이 시작된다. 차를 타고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가기도 힘들어진다. 아파트 앞 학원마다 아이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의 차량이 북새통을 이루기 때문이다. 열성 교육의 대명사, 대한민국 교육의 부정적 이미지는 모조리 다 가지고 있는 듯한 곳, 그러면서도 자원 없는 대한민국을 이 정도로 올려놓은 것은 교육의 힘이라고 얘기할 땐 꼭 거론되는 곳…. 내가 사는 이곳은 ‘대치동’이다.
‘엄마의 노트’를 확보하다
지난 주말. 동네에서 가깝게 지내는 은경(가명·42) 언니를 만나러 갔다. 언니의 아이들이 과외 중인 시간이라 내가 언니 집 쪽으로 가야 했다.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거 아무나 보여 주는 것 아닌데….” 언니가 자신의 노트를 나에게 열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엄마의 노트’를 연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엄청난 신뢰, 공들여 모은 정보를 공유하고 싶을 정도의 친근함, 앞으로 함께 길을 걸어갈 동지애가 그 속엔 깔려 있다. 은경 언니는 7세 된 우리 아들 시원이의 유치원 친구 엄마로 만났다. 언니와 서로의 집도 오가고, 주말엔 미술전시회장에서 같이 보내며 친분을 다졌다. 그녀에겐 외고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 아들 둘과 초등학교 1학년 딸이 있다. 내년에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에게 언니의 노트는 보물상자나 다름없다. 이곳에서 정보는 곧 보석이다.
언니를 통해 ‘대치동 맘’의 전형적인 생활을 읽을 수 있었다. 일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가 더 바쁘다. 세 아이의 반 모임, 정확히 말하면 엄마들의 모임이 줄줄이 있다. 주로 브런치를 먹는데, 직장맘들을 배려해 한 달에 한 번은 주말 오전 10시에 반 모임을 한다고 한다. 엄마들 중 1~2명만 빠질 정도로 출석률이 높다. 타워팰리스 지하 ‘스타 수퍼’의 스타벅스 커피숍 야외 공터가 모임 장소일 때도 있다. 인원이 많아서다.
특히 남자아이의 엄마들은 꼭 출석한다. 언니도 마찬가지다. 남자아이들은 집에서 말이 없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엄마가 알기 힘들다. 그래서 모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엄마는 반에서 ‘똑’ 소리 나는 여자아이의 엄마다. ‘똑’ 소리 나는 여자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똑’ 소리 나게 전해 주는 학교 일을 남자아이 엄마가 반드시 들어야 자기 아들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은경 언니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입학 및 학원 정보, 과외선생님 정보는 친한 엄마들로부터 얻는다”고 했다. 커피숍에서 핵심 정보가 나오진 않는다는 얘기다. 언니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한 뒤에는 이를 노트에 적어 가며 스스로도 학습 내용을 ‘공부’한다고 했다. 학원 설명회를 찾아다니며 학급의 윤곽을 잡고,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해 공부한다. 우리 집 앞 상가인 ‘대치 퍼스트 빌딩’ 지하에 있는 대형 서점 ‘북스 갤러리’는 낮 시간 동안 언니 같은 엄마들의 열공 도서관이 돼 버린다.
아들들이 집으로 오면 언니는 아이들의 과외선생님과 친밀한 관계를 쌓기 위해 노력한다. 학원보다는 아이들의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생님 과외를 선호한다. 아들과 선생님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몇 년을 맡긴다. 선생님과 식사도 같이하며 아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책을 고르러 서점으로 가기도 한다. 내가 언니를 얻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언니는 선생님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TV 드라마 속 ‘미실’만 부르짖는 얘기가 아니다. 현재 대치동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사람을 얻어야 그가 가진 정보를 얻는다. 엄마들을, 선생님을, 친구를 얻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외아들인 시원이의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집을 오픈했다. 아이 친구들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 그림을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자 친구들이 하나 둘 늘더니 친구들의 누나·형들까지 우리 집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의 친구를 얻는 일은 성공적이었다. 친구를 얻으니 친구의 엄마를 만나는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나의 미술 이야기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민선이(가명·10).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하고, 과학 글짓기도 최우수상을 받는 아이다. 게다가 1분기 반장이다. 대치초등학교는 분기별로 반장과 부반장을 뽑아 많은 아이에게 기회를 부여한다. 그중에 1분기 반장을 최고로 친다. 민선이 엄마와 친해지고 싶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어머~ 어머니. 토요일에 시간 좀 내 주세요.” 집 앞 ‘북스 갤러리’ 서점 부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비결 좀 가르쳐주세요~.” 자기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며 이야기를 이어 가는 민선이 엄마(38)는 ‘1분기 반장 어머니’다웠다.
민선이에겐 국제중을 준비하는 6학년생 언니가 있는데 대치초등학교에선 유명 인사다. 국제중 입시를 준비하는 이유는 단지 목표를 정해주기 위해서였고, 떨어져도 좋은 학교로 배정받을 것이어서 입시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선이 엄마는 아이들이 유치원생일 때 인터넷으로 만난 엄마들과 3년 동안 영어 품앗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6명의 엄마가 각각 영어 스토리텔링, 영어 게임, 영어 노래 등 분야를 정해 준비한 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모아 놓고 50분 동안 가르치는 방식이다. 민선이 엄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간 낮 시간을 이용해 시내 어느 대학에서 운영하는 교육원에서 문화해설사 코스까지 밟았다.
‘놀토(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에 아이들 친구 20명을 전세버스에 태우고 서울시내와 경기도권의 문화유적 답사를 4개월 동안 진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춘기에 접어드는 큰딸을 위해 지난 겨울방학 동안 서울시 교육청에서 심리상담사 과정을 끝냈다. 주변 학교로 심리상담을 해 주러 다닌다. 아이가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엄마는 더 열심히 공부를 한 것이다.
민선이네 교육 현장에 엄마를 뛰어넘는 분이 있었다. 민선이 아빠다. 아이도, 엄마도 풀지 못하는 문제는 아빠가 퇴근하면 함께 해결한다고 한다. 대학에서 문과를 전공한 민선이 엄마는 역사와 사회 쪽을, 공학 박사인 아빠는 수학을 담당하는 것이다. 민선이 엄마는 “가족 간의 화목이 아이에게 가장 큰 요소인데 아빠의 공부 참여는 상상 이상의 효과를 낸다”고 했다. 주말엔 가족 모두 신앙 생활을 함께하면서 정서적 안정을 도모한다. 공부를 즐기는 엄마 밑에서 공부를 즐기는 아이가 나오는 건 맞는 말인 듯하다.
'경쟁력 갖춘 시민'되기 바라는 孟母들
내 남편은 ‘대치동 1세대’다. 1980년대 후반 이곳에서 중·고교를 다녔다. 흔히 말하는 ‘SKY대’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거쳐 연세대 연구교수까지 지낸 공학 박사다. 마흔이 다 된 지금에 와서 뜬금없이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무작정 공부만 잘하면 다 된다는 말만 들어 진정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어디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고 살아온 터였다. 공부만 잘하면 다 된다는 교육을 받은 세대에게 찾아온 늦은 사춘기다. 대치동 엄마들이 나에게 하는 말들이 있다. “나를, 부모를 넘어서는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정 행복해지길 바란다.” 대치동 엄마·아빠가 바라는 것은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많이 가지길 바란다.
대한민국 과열 교육열의 아이콘이 된 ‘대치동’, 그 비난을 이곳 엄마들은 의식한다. 엄마들은 얘기한다. 한국 교육의 주어진 환경 안에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적어도 나의 ‘언니’들은 아이들을 무조건 공부로만 내몰아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제한하려는 것 같진 않다. 어떻게 보면 대치동 엄마들은 성실한 자기 계발을 통해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아이들이 경쟁력을 갖춘 시민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21세기 맹자 엄마 또는 한석봉의 엄마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박주연(31). 홍익대 미술대·대학원 판화과를 나왔다. KBS 미술 다큐멘터리 ‘디지털 미술관’ 작가로 일했고, 포르쉐 초청 개인전 등 다수 전시회를 열었다.‘대치동 화가 엄마’로 통한다. 7세 시원이를 키우며 미술교육 책을 집필 중이다. www.artzoo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