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64년 서경보 스님이 미국에 오신 해부터 한국불교가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 후 삼우스님(1967), 박성배교수와 삼보사 설립자인 이한상거사님(1969), 그리고 10 년 후인 1979년쯤에 숭산스님, 도안스님, 법안스님, 대원스님이 미국에 들어오시면서 한국 불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고 전했다. 현재 백여 개가 되는 사찰의 신도수는 대부분 이삼십 여명의 수준이고 백 명이 넘는 사찰은 몇 개에 불과 한 실정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과거의 기복불교에서 벗어나 불교 수행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이 늘어나고 있어 뉴욕에서도 8월에 비파사나 전문이신 성오스님을 모시고 원적사가 문을 열 예정이라고 하였다. 또 LA에 있는 미주 법사회, 포교사단, 달마회, 해인회, 뉴욕의 불교진흥재단과 불교상조회, 시카고의 불교신행회 같은 불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여러 신행 단체들도 소개하였다.
사찰의 신도수를 늘이는 방법으로 무엇보다도 법회 방법을 개선해서 처음 절을 찾는 사람들이 거부감이 없이 들어와서 즐겁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예를 들면 1985년 그가 뉴욕 원각사에 살았을 적에 법안스님께서 붓글씨와 동양사상을 가르치니 많은 사람들이 절에 와서 불교에 접근할 수 있는 동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LA의 관음사에서는 신도들이 편하게 참여하도록 두 가지 형태의 일요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1부에서는 염불기도, 2부에서는 찬불가와 설법 위주로 하기 때문에 신도들이 마음대로 일요 법회를 선택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도 좋아 보인다고 했다.
또 뉴욕의 불광선원에서는 불교 교양대학을 3개월 단위로 마련해서 새신도를 맞이하며 꾸준하게 신도수가 늘어가고 있는 예로 소개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불교신자 중에 자녀들을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글 학교에 보내다가 온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해 버리는 경우, 또 한국 사람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불자들은 교민들 사이에서 종교 때문에 때때로 왕따를 당하는 경우를 볼 때 김 발행인이나 우리 불자들 모두가 몹시 마음 아픈 일임에 동감을 하였다.
또한 일부의 사찰들이 안고 있는 스님과 신도들과의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스님들의 적극적이며 인간적인 대화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우리 함께 젊은 불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선과 연구를 해 나가야 할 일이 시급하다고 그는 조언을 하였다.
세 번째 연사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남가주 국제 문화대학에서 종교사회학과 한국사상을 강의했던 김재범(불명 금당)박사가 한국 선불교의 특징과 미국에서의 포교과제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다. 김박사는 먼저 한국 불교의 문제점으로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한국의 간화선(看話禪) 전통에 대한 오해,
둘째, 승단의 문중중심주의,
셋째, 불교신자들의 기복 신앙적 행태.
김박사는 1986년에 열반하신 수덕사의 혜암 방장스님과의 인연으로 그의 문중 제자들과 간화선에 대하여 공부를 하여서인지 한국불교의 간화선에 대한 모순에 대하여 확실한 문제점들을 제시하여 주었다. 간화선 전통에 대한 오해라는 것은 한국 선불교의 주류인 간화선이 일반인들은 물론 심지어 간화선을 수행한다고 하는 승려들마저도 상당수가 잘못 알고 있으며,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중중심주의는 조계종의 종지와 무관하게 그 문중의 수장의 뜻이 승려들이나 신도들의 신행에 영향을 미쳤고, 또 때로는 종단의 세력 다툼에 연루되어 폭력사태를 낳기도 하였다. 기복 신앙적 행태는 자각각타(自覺覺他)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의타적(依他的)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일부 승려들은 그런 신도들을 일깨우고 지도하기보다는 신도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기도 위주의 기복불교로 안주하는 경향이 많다고 지적을 하였다.
그는 염불, 기도, 독경, 좌선, 화두 참구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생각 생각마다 깨어있으려는 노력과 수행이 될 때 선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부처님은 당시에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 바로 그들의 일상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근기에 맞게 당사자들의 삶의 문제를 상담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아 자기 삶의 문제를 헤쳐나가도록 하는 지혜를 일깨워주었었고, 어떤 복잡한 이론이나 의례 형식을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니 간화선의 서로 다른 해석이나 이론에 우리 불자들은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하고 ‘평상심이 도’라고 하듯이 우리들의 일상생활 모두가 선이며 수행이라는 말을 거듭 들으며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뜻이 같은 반가운 법우님을 만나는 기쁨을 만끽하였다. 김박사는 화두 역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깨달음으로 어떻게 마음을 돌리느냐는 과정이기에 우리들 각자의 삶에 따른 다양한 화두가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끝으로 김박사는 미주의 한국 사찰들과 뜻이 있는 불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한인 동포는 물론 미국인과 우리 2세들에 어울리는 현실에 맞는 포교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그를 위해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미국 현지에서도 출가 수행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제 삼보사를 비롯하여 삼십 년을 맞이하는 미주 한국불교는 이제 본국에 의존하지말고 홀로 서야할 ‘이입(而立)’의 나이라며 말을 맺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글을 준비하며 전화로 대화를 나누다가 또 기쁜 소식을 하나를 접하였다. 그의 저서『주역사회학(예문서원, 1991)』이 지난 7월에 대한민국 학술원이 최근 3년 간 출판된 학술도서 가운데서 뽑은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법당에 앉아 두시간이 넘는 자리였는데도 모두 진지한 얼굴이였다. 삼보사의 신도들이 밤늦도록 정성스럽게 준비한 마늘과 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채식 점심을 우리 참가자들은 정말로 감사하게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의 첫연사로 서울대에서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버클리대학교에서 불교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친 홍일점 조은수박사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현재 미시간 대학에서 한국문화와 불교를 가르치고 있다. 1992년 샌프린시스코에서 강청화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오늘 행사를 주관하는 일도 조교수가 중심이 되어 준비를 하였다고 사회자이신 김홍영교수님이 귀뜸해 주었다. <전통을 넘어서 미래의 불교로>라는 주제였는데, 시간이 넉넉지 않아 그녀는 써온 원고를 읽어 가는 형식으로 진행해 나갔다. 미국불교의 출발점은 1853년 샌프란시스코 중국타운에 세운 절이 미국 최초의 사찰이며, 1893년 열린 세계종교대회에서 뉴욕의 한 실업가가 스리랑카의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으며 불교가 미국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은수교수는 미국의 불교를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하였다. 동양사람들이 자기 민족 전통을 지켜가기 위한 동양불교(중국, 베트남, 티벳, 한국)와 미국의 백인 중류층 사람들이 동양의 불교 중에서 얻은 것들을 백년 동안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들의 독특한 색깔로 만들어낸 미국불교이다.
조교수는 사찰과 승려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미국에서 성직자들은 도네이션에만 의지하지 않고 봉사하며 포교를 하고 있다. 일본의 비구니 스님들도 꽃꽂이와 요리 등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조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한국사찰의 승려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한국 절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 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미국에서는 여성 불교 지도자가 많이 있고, 미국불교의 사원에서는 남녀가 동등하게 수행하며 성직자가 아니라 신도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대사회적 봉사를 하는데 비하여 한국 사찰과 불자들은 소극적이고 많이 부족한 점도 지적되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달라이 라마가 지금은 사찰중심이 아니라 가족 중심으로 가정에서 함께 살아가며 불교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미국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들려준 말들을 그녀는 인용하였다. 즉 부모와 자녀가 어떻게 잘 조화롭게 살아가느냐라는 말은 불자인 우리들이 바로 생활불교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달라이라마스님은 말해준 것이라고 나는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전통을 지키는 일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기에 미국에서의 한국불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제시하여 미국 사회에 어울리는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그녀는 지적하였다. 그리고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려 공동목표를 두고 포교를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오후 3시경부터는 삼보자 주지 범휴스님이 연사로 나와 <바람직한 수도원을 위한 출가승과 재가 불자의 역할 분담론>이라는 주제로 말씀이 있었다. 먼저 범휴스님은 1979년 강청화 큰스님을 친견한 날 밤 절에서 얇은 이불 하나 받아서 잘려니 추워서 잠은 오지 않았고 도대체 청화 큰스님이라는 분은 무엇 때문에 하루 한끼만 드시며 겨울 찬방에서 저렇게 묵언 정진을 하시는가? 라는 화두를 들고 충격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지난날의 인연으로 입산을 하셨다고 자신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를 하셨다. 그 후 미얀마 중국 등 스승이 있는 곳을 찾아 공부를 해오신 분이다. 이제 전문 직업인 승려로 성직자로 수행을 통하여 주지 소임을 하시겠다고 하신다. 지금 삼보사가 처한 어려움은 말할 수가 없이 힘든 상황이지만 소신껏 뜻을 밀고 나가실 각오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삼보사를 사부대중의 센터라 부를 수 있도록 참선공부를 하는 선원으로, 불교를 가르치는 강원으로, 포교를 하는 곳, 또 청화 큰스님의 말사(branch)로 늘 신도와 함께 서로 주고받는 후원관계를 유지하며 사찰을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알리셨다.
그리고 절이란 스님이 복을 대신 빌어주는 곳이 되서는 안되며 공부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며 미래의 꿈을 말하셨다. 또 불교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으니 언제든지 오시면 대화의 준비가 되어있다며 삼보사는 누구에게나 열린 사찰이라고 안내를 하셨다. 그리고 스님 자신도 부처님의 말씀처럼 수행자가 세상에 나가되 세상에 몰입되면 수행자인 자신은 끝이 난다며 청정한 수도인의 계율을 늘 지키시는 스님이 되시겠다는 굳은 각오를 보여주셨다.
지금 신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삼보사 법당의 연등에는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의 이름들은 따로 커다란 연꽃의 품속에 들어 있었다. 스님의 창의력은 훌륭하셨다. 나 역시 지난번 소식을 듣고 박수를 보내드렸었다. 그런데 심포지움 날 법당의 천장을 쳐다보니 전과 다른 생각들이 일어났다. 내가 어린 시절 빽빽이 걸린 연등 사이로 우리가족 이름을 찾는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허전함, 바로 그 추억이였다. 이름을 달고 안달고가 문제가 아니라 복을 빌고 안 빌고는 각자의 마음 속의 문제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년부터 스님은 신도들이 이름의 꼬리표를 달되 마음만은 기복에서 떠납시다라고 법문으로 가르치시면 어떠실까? 하고 이 지면을 통해 나의 개인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우리들은 근기가 약한 속물 근성에서 당장 벗어날 수가 없지만 결국은 기다리고 함께 인내하며 생활불교인으로 탈바꿈 할 것이 틀림없다. 신도 한집마다 연등불을 밝혀 보시하려는 그 마음을 가르치는 게 스님의 귀중한 역할일거라는 생각이다. 남녀노소 우리 모두에게 절은 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하니까 맹목적인 기복신앙과 사치스러움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부처님 품에서 쉬어가고 공부 할 수 장소로 존재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스님이 자질이 있고 훌륭해도 신도가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신도들이 모여서 떠들어 봤자 청정한 지도자가 없으면 늘 시끄러운 장터 같은 절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보사의 신도들도 일부는 구식을 또 다른 일부는 신식을 원하듯이 중도를 가는 일은 참 어려운 과정이다. 요즈음 깨어나고 있는 우리 신도들은 범휴스님처럼 진정으로 용감하게 기복불교에서 벗어나자고 앞장서는 분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범휴스님께서는 홈레스들에게 식사를 주며 신도들과 보살행을 실천하고 계시다고 들었다.(봉사와 실천불교를 함께 나누실 분 대환영입니다…)
다음은 LA의 동산불교대학에서 상임지도교수로 있는 박동기박사의 <삼보사 건립자 이한상거사님을 추모하는 특별한 이야기와 전진불교>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박교수가 대학원생 때 지금 고인이 되신 이한상회장님(박교수는 그렇게 불렀다)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며 알게된 특별한 인연들과 그분의 훌륭하신 업적들을 소개 하셨다. 나도 지난 학창시절 대학도서관에서 “대한불교신문”을 발견하고 이한상발행인을 향해 얼마나 마음으로 깊은 감사를 올렸는지 모른다. 한문 투성이인 어려운 경전 속에서 쉬운 불교를 배우기란 하늘에 별따기 같은 과거시절이였다. 요즈음 쉽게 한글로 번역이 되어 나온 많은 경전들이며 듣기 좋은 카셋테이프들 또 비디오테이프들 또 신식 스님들까지 배출되어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든지 불교를 만날 수 있는 정말 좋은 세상이다.
박교수가 요약한 덕산거사님의 업적들은 다음과 같다.
1960년대(이승만 정권) 비구대처승과의 싸움 후에 태고종과 조계종이 탄생하던 혼란기의 불교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청담, 경산큰스님 등과 많은 대덕스님들을 후원하신 분. 삼보장학회를 만들어 미래의 많은 젊은 불자를 길러내신 분(요즈음 불교계에 대부분 활약하시는 분들임). 대한불교신문을 주간발행으로 하며 포교에 앞장을 서신 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 후원자. 팔당댐을 막아 한강수위를 조절하신 건설 사업으로 활약하신 불자 사업가.
이조의 배불 정책과 왜정 때부터 타락 된 불교를 회복하시려고 무진장 애를 쓰신 분이었다. 한국의 전통불교와 100년의 역사(지난 호에 랑커스박사님의 회고문에서 실었음)를 찾아 피나는 노력을 하셨던 분으로 불교 역사에 영원히 이한상거사님의 공로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1970년 초 갑자기 미국에 오셔서 한국불교를 알리시겠다고 시작을 하셨으나 여기서도 한을 못 풀고 가셨다며 박교수는 통탄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은혜를 입었고 불교포교에 앞장서신 이회장님의 투철한 정신을 이어받은 박교수는 현재 W.F.B. 한국본부가 펼치는 오계파지운동(오계에 시작하는 한문의 ‘아니 불(不)’자를 뒤집어서 긍적적으로 해석하여 실천해나가는 운동)의 서울 본부장으로 봉사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살생 하지 말자를 생명 있는 것들은 다 하도록 도와주자로 해석하여 실천한다.
W.F.B.(World Fellowship of Buddhist): 1950년 5월 창립. 본부는 태국 방콕에 있다. 2002년부터 U.N.의 승인을 받아 '세계평화를 위한 명상시간'을 제정하였다. 2002년은 5월 26일 (일요일) 오후 6시부터 5분간 명상을 실시하였다.
박교수는 창건주 이한상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불교의 전통 맥을 찾고 또 현대화에 삼보사가 앞장을 서달라고 당부하였다. 또한 강청화 큰스님의 원을 실현하고 그분의 정통선과 순선의 수행본부가 되도록 우리함께 뜻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연사들의 발표가 끝나고 잠시 휴식을 한 후에 남아 있는 참가자들은 둥그렇게 앉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토론을 하였다. 시카고에서 오신 선련사의 주지로 계시는 삼우스님이 답변을 하셨다.
삼우스님은 위엄 있는 스타 같은 스님(예를 들면 강청화스님처럼)이 사찰에 계시기를 바라는 어느 참가자의 질문에 숭산스님의 제자가 미국에 많이 포교가 된 일은 참 자랑스럽지만, 지금은 옛날처럼 큰스님이 주장자치면 감복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본다고 말하셨다. 그래서 이제 요리하는 스님, 노래부르는 스님,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스님들이 나와야 하는 시대(이미 나와 계시지만)라고 말 하셨다. 서양사람들 신도가 대부분인 삼우스님은 절에서 불교 결혼식을 정성껏 올려주고 봉사불교를 원하는 미국사람들에 부응하여 이끄신다고 전했다. 예를 들면 불교 장례식에서 고인들의 경력을 잘 이야기 해주며 유가족들에게도 발표를 하게 하여 죽음이 꼭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도 한다는 것이었다. 요즈음 미국 사회는 부유할수록 고통을 받는 세상이고 우울증, 고혈압 등의 병으로 괴로운 사람들은 절에 와서 Peace of Mind를 얻으려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신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스님은 늘 연구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서양사람들도 돈 가지고 절에 오라면 안나오니깐 혹 그들이 절을 방문 할 때나 전화로 상담 할 때 변함 없이 따뜻하게 정성으로 대하여 주면 불교가 무슨 종교인지 알고 싶어져 편안한 마음으로 절에 나오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삼우스님은 미국에 오래 사시면서 신도관리 하는 방법을 꾸준히 연구하시는 분이라고 느껴졌다.
다른 종교에 나가시는 분도 참석을 하였고 다른 나라의 불교 사찰에 다니시는 분, 교수님, 박사님들, 부부, 비교적 중장년층의 참기자들이 많이 보여서 나는 기뻤다. 미국인 랑커스터 교수 덕분인지 몇몇 대학생들이 보였지만 더 많은 청년들이 모여 힘들었던 삶의 체험을 발표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였다.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수준 높은 지성인들과 불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즐거운 학술회의 날이였다.
연사자와 참가자 대부분의 의견이 기복불교에서 벗어나 불교의 현대화를 위하여 사찰의 스님들과 신도들이 자주 만나 함께 연구해 나가야 한다는 뜻에 마음을 모았다.
(지면상 참가자 여러분들의 토론 내용을 모두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 또 나의 표현력 부족으로 모든 분들의 의사를 백퍼센트 여기에 전달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참가자들과 독자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리고 싶다. 삼보사에서 일요일까지 남아 열띤 토론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 그리고 부엌에서 비지땀을 흘리시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며칠동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보시하신 보살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삼보사와 범휴스님께 축복이 내리소서.
첫댓글 _()()()_
필요하신 인연 불자님들을 위하여 옮겨 갈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