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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약산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산내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높이는 1,189m이고, 주봉(主峰)은 사자봉이다. 남쪽 5km 부근에 솟아 있는 재약산(주봉은 수미봉 1,018m)과 맥이 이어지며, 천황산을 재약산으로 일컫기도 하는데, 이러한 혼동은 천황산이 일제강점기 때 붙은 이름이라 하여 우리이름 되찾기운동의 일환으로 사자봉을 재약산 주봉으로, 재약산을 수미봉으로 부르면서 생겨났다.
산세가 수려하여 삼남금강(三南金剛)이라 부르며, 인근 일대의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준봉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 산군(山郡)에 속하는 산이다.
산세는 부드러운 편이나 정상 일대에는 거대한 암벽을 갖추고 있다.
수미봉·사자봉·능동산·신불산·취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드넓은 억새평원으로서 사자평 고원지대라고 부르는데, 일대는 해발고도가 800m에 달해 목장으로 개발되어 있다.
서쪽 산기슭에 있는 유명한 대찰(大刹)인 표충사(表忠寺)를 비롯하여 부근에
내원암(內院庵)·서상암(西上庵) 등의 절과, 높이 20m의 폭포 2개가 연이어 있는 층층폭포, 무지개가 걸리는 높이 25m의 금강폭포와 흑룡폭포등 명소가 있다. 천황산의 북쪽 사면에는 가마볼·호박소 등의 명소 외에 단열냉각에 의한 물리적 현상으로 여름에도 골짜기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천연기념물 224)이 있다.
재약8봉
표충사를 중심으로 사방에 펼쳐진 "재약 5봉"은 밀양시와 울산광역시, 양산시의 경계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재약산역에 속하는 5개의 봉우리를 말한다.즉 천황산(사자봉), 재약산(수미봉), 향로봉, 필봉, 재약봉(약무덤)이다.
이 산에다 관음봉, 문수봉, 고암봉을 추가해 '재약 8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자평
천상의 은빛 축제, 사자평원
경남 밀양시 단장면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을 잇는 재약산(載藥山)은 울산, 밀양, 청도 일대 해발 1,000 미터 이상의 산봉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의 하나이다.
표충사를 비롯해 얼음골, 층층폭포, 금강폭포 등 수많은 명소와 함께 능동산, 신불산,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억새풀 능선길은 산악인의 발길을 유혹한다. 산세가 부드러워 접근이 용이할 뿐 아니라 정상 일대에는 거대한 암봉을 갖추고 있어 장관이다. 재약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표충사앞 주차장에서 내원암으로 오르는 길과 흑룡폭포가 있는 표충사 계곡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내원암이 있는 금강폭포 계곡코스로 3곳의 등반로로 나뉜다.
표충사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져 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우중산행에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등산로가 평이해 초행자에게도 부담이 없다. 이 쪽 등반로를 오르면 수량이 많은 계절에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 흑룡폭포와 층층폭포의 장관을 접할 수 있는 즐거움도 덤이다.
계곡 옆 소로를 따라 단풍유람하듯 2시간 30분 정도 천천히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주변 풍광이 변한다. 사자평 초입인 하늘아래 첫 동네 고사리 마을이다. 재약산이라는 이름대로 약초와 산채가 많고 특히 고사리가 많아 마을 이름이 고사리 마을이 되었다. 고사리 마을은 한때 주민들이 82가구에 달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60년대 들어 땅 없는 사람들이 넓은 땅을 일구며 살기 위해 다시 모여들었다.
박정희 정권 때 정부에서는 고사리마을에 집단 정착촌을 만들어줬다.
무장공비 출몰 등에 대비한 안전조치였다. 경비전화가 가설되고 고사리분교도 생겼다. 군용도로가 고원을 지나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산 아랫녘에 일거리가 많아지면서 하나둘 고사리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고사리분교도 폐교되고 민박을 받으며 식사를 팔았던 얼마 남지 않은 주민들도 집이 철거된 채 모두 마을을 떠났다. 지금은 휑한 집의 잔해만 남아있다. 이곳이 옛 문헌에 "광활한 평원의 가을파도와 같다."라고 묘사되고 있는 사자평고원의 초입지대이다.
옛 글에 억새밭은 “廣平秋波”(광평추파 : 광활한 평원의 가을파도 같다)로 묘사되었다. 추파(秋波)의 본뜻은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억새의 일렁이는 모습을 파도에 비유한 것인데 반해 ‘관심을 끌기 위한 여인의 은근한 눈길’이란 세속적인 뜻으로 쓰임은 억새의 은은한 빛깔이 능히 사람들을 은근히 유혹하기 때문이다.가을의 억새평원은 온통 은색의 향연이다.
은백색 억새에 바람이 안기면 억새는 추억의 강물이 되어 가을 하늘을 흐른다. 만추의 단풍이 감히 억새 평원의 감동에 견줄까? 떠도는 영혼을 부르는 억새의 잔잔한 파문이 허공을 가른다.
사자평고원은 재약산의 두 봉우리인 해발 1,108m의 수미봉과 1,189m의 사자봉 사이의 해발 800m 지점부터 완만한 타원형의 언덕이다. 125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분지가 온통 억새로 뒤덮여 있는 재약산 동쪽의 사자평 고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억새벌판이다. 사자평원의 억새밭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표충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이며, 여·순 반란 사건 때 빨치산의 집결지이기도 한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자평원의 억새풀은 가을이 되기도 전에 벌써 고개를 내밀어 가을이 다 지난 초겨울까지 하얀 손짓을 계속한다. 억새군락은 한낮의 반짝이는 햇빛아래서도, 어두움이 잦아드는 노을에도, 새벽 여명이나, 고요한 달빛과도 어울리는 넉넉한 품이 좋다. 수미봉에 서면 드넓은 사자평 너머로 재약산 최고봉인 사자봉이 보이고 그 뒤로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가르며 영남알프스의 북단을 이루고 있는 가지산과 운문산이 병풍처럼 다가온다.
밀양 8경
영남루 야경
영남루(보물 제147호)는 고려 공민왕(1365년)때 부사 김주(金湊)가 신라시대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가 되어 전래해 오던 작고 초라한 누각을 철거한 후, 진주 촉석루의 제도를 취하여 개창(改創)하였는데 이 때부터 규모가 큰 독립된 누각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2층 평면은 내외진(內外陣)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어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루로 일컬어 왔습니다. 영남루는 밀양인들의 서정에 깊이 자리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여행객들의 입에 흔히 오르 내리는 관광명소이며, 특히 맑고 깨끗한 밀양강과 어울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데 강물에 비친 영남루의 아름다운 야경은 최고의 경치로 손 꼽히고 있다.
영남루 소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인 밀양 영남루(密陽嶺南樓)는 신라 경덕왕(742~765년)때 신라의 5대 명사 중에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1365) 밀양부사 김주(金湊)가 규모를 크게 중수하였으며, 현재의 누각은 이인재(李寅在)부사가 1844년에 중건한 것이다.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보물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위에 위치한 영남루는 깨끗한 밀양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높은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 또한 수려하다. 특히 화려한 단청과 다양한 문양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누각에는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문익점 선생 등 당대의 명필가들의 시문현판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1843년 당시 이인재부사의 아들 이증석(11세)과 이현석(7세) 형제가 쓴 영남 제일루(嶺南第一樓)와 영남루(嶺南樓) 현판은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예가 들로부터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지칭되고 있다.그리고 영남루 일원에는 단군을 비롯한 창국 8왕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과 아랑낭자의 전설을 간직한 아랑사당, 영남루 앞뜰에 꽃으로 피어난 석화군락, 530여년을 이어온 밀양읍성, 옛 영남사의 부속 암자였던 천년 고찰 무봉사가 있어 영남루는 밀양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시례호박소
호박소는 영남 알프스로 일컫는 1,189m의 재약산 자락과 1,240m의 가지산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 있는 가운데, 해발 885m의 백운산 자락 계곡에 있습니다. 이 곳 호박소 계곡은 화강암으로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하며, 그 위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른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 같이 생겼다 하여 호박소 또는 구연(臼淵)이라고 합니다. 명주실 한타래가 들어갔을 만큼 깊었다고 하는 설화 같은 얘기도 전해지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호박소는 오랜 가뭄이 계속될때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소(祈雨所)였다고 합니다.
시례 호박소 소개
백옥 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 같이 생겼다하여 호박소 또는 구연(臼淵)이라고 한다.동국여지승람 구연 기우소(臼淵祈雨所)에 따르면, “세상에 전하기를 이곳에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아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 있으며,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가뭄에 범의 머리를 넣으면 물이 뿜어 나와서 곧 비가 되는데, 연못 속에 더러운 것이 들어오면 그것을 씻어 내기 위해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표충사 사계
신라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지금의 극락암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도하는 어느날 아침 재약산 쪽을 바라보니 대밭 속에서 오색서운(五色瑞雲)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가람을 짓고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 하였습니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국사가 1,000여명의 대중을 맞아 불법을 중흥하여 동방 제일선찰(第一禪刹)이 되었으며, 1290년(충렬왕16) 천희국사가 선풍을 관장하니 일국의 명찰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현종때(1839) 월파 천유화상이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을 일으켜 큰 공훈을 세운 서산, 사명, 기허 3대 선사를 모신 표충사(表忠寺)를 이곳으로 이건 하면서 절 이름도 영정사(靈井寺)에서 표충사(表忠寺)라 명명한 절로 주위 산세가 뛰어난 곳이며, 특히 재약산의 사계에 따라 수시로 변화는 주위 풍광이 장관을 이루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습니다.
표충사 소개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밀양 재약산(해발 1,189m)기슭에 자리하는 표충사는 유생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을 제사하는 표충서원이 사찰영역 안에 있어 불교와 유교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특색 있는 사찰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한 것을 신라 흥덕왕 때부터 영정사(靈井寺)라 하였고, 1839년(헌종5)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 사명,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表忠祠堂)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가 되었다.표충사는 신라시대 때부터 고려시대까지 보우국사(889),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국사(1286), 천희국사(1290)가 선풍을 관장하여 일국의 명찰이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사명대사의 8세(世) 법손(法孫)인 월파당 천유(月坡堂天有)화상이 8도 도총섭(八道都摠攝)에 올라 전국사찰(八道寺刹)의 승규(僧規)와 풍기(風紀)를 감찰 단속하는 규정소(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근대에는 조계종 종정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曉峰)선사가 주석하다가 입적한 곳이다.예부터 명산유곡으로 이름이 높았던 표충사 일대에는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남긴 각종 전설들이 전해 온다.
월연정 풍경
월연정(月淵亭)은 본래 월영사(月影寺)가 있던 곳으로 월영연(月影淵)이라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한림학사 등 여러 요직을 지내다가 기묘사화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월연 이태(月淵 李台)선생이 중종 20년(1520년)에 세운 정사(亭舍)로 처음에는 쌍경당(雙鏡堂)이라 편액(扁額)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33년(1757년)에 8대손인 월암(月菴) 이지복(李之復)이 쌍경당을 복원하였습니다. 월연정은 가장 좌측인 남쪽에 있으며, 동향을 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樑)구조로 팔각지붕을 한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입니다. 가장 북측에 위치하고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월연대(月淵臺)는 남동향을 하고 있으며, 월연정 주위에 건립된 제헌(齊軒), 월연대등 모두 풍치 수려한 곳에 무리를 이루어 정자의 기능을 가지며, 놓인 지형에 맞추어 모두 각기 다른 평면을 지니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위앙못 이팝나무
위양못은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의 양양부곡으로 제명(堤名)도 거기에서 연유된듯 하며 양양제(陽良堤)라고 부른다. 현재 안동권씨의 완재정이 있는 제방이었으나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수리구역의 제방으로 바뀌었다. 완재정의 못은 양야지(陽也池) 또는 양양지(陽良池)라 하였는데 둘레가 4, 5리나 되었으며 지중(池中)에는 다섯 개의 작은섬이 있었다. 이 못물로 넓은 들판에 물을 대었고 사방의 제방에다 가목(佳木)과 기화(奇花)를 심어 신라.고려 이래로 생민이택의 근원으로 삼았으며 은자(隱者)들이 소요하는 곳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양양지와 그 제방은 신라와 고려 이래로 농사를 짓기 위한 저수지인 동시에 인위적으로 풍치를 가꾼 명소 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양못은 둘레에 크고 작은 나무로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데 이른 봄에피는 못가의 이팝나무로 유명하다. 나무 전체가 하얀꽃으로 뒤덮여 이밥, 즉 쌀밥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봄비 내리는 위양못가는 걷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위양못(양양지) 소개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로 백성들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양지라고도 한다. 저수지 가운데에 5개의 작은 섬과 완재정 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이팝나무 등 진귀한 나무들을 심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운치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선비와 문인학자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이다. 특히 매년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는 시기가 되면 그 아름다운 절경이 절정을 이룬다.
만어사 운해
삼랑진읍 만어산(674m)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만어사는 갖가지 신비한 현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만어사가 있는 계곡을 따라 수많은 바위들이 일제히 머리를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는 이 바위들은 오랜 옛날(가락국 시대) 이곳에 살던 나찰녀(사람을 잡아먹는 귀녀의 이름) 다섯과 독룡이 사귀면서 횡포를 일삼다가 부처님의 설법으로 돌로 변한 것이라 합니다. 물론 이때 큰 홍수를 따라 동해 바다에서 올라온 수많은 물고기들도 함께 돌(종석)로 변해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바위들을 두드리면 2/3 가량이 종소리와 쇳소리, 옥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새벽녘과 봄비 내리는 날에 피어 오르는 안개는 주위를 바다로 만들어 장관을 이루게 한다.
만어사 소개
해발 674m의 만어산 8부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만어사는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대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해주는 전통사찰로 많은 전설과 갖가지 신비한 현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영험이 있다 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왕의 공불처(供佛處) 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에는 동량 보림이 글을 올렸는데, 금나라 대정 12년 경자년 곧 고려 명종10년(1180)에 처음 건립하고 삼층석탑(보물 제466호)을 세웠다 하였다.
종남산 진달래
종남산은 밀양의 남산으로서 남북 14㎞를 뻗어 밀양들의 서북벽이 되어주며 고향을 떠난 밀양 사람들의 망막속에 영남루와 더불어 영원히 지지않는 망향의 표상이 되고있다. 또한 밀양의 안산이기도 하며 측우정과 봉수대가 있다. 부의 남쪽에 있어 남산이라 부르다가 종남산이 되었다. 옛날 큰 해일때 이 산의 정상이 종지 만큼 남아 종지산이라 하였는데 종지산이 변하여 종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의적 종남이가 숨어 살던 산이라 하여 종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종남산의 정상 부분에는 이른봄 진달래가 만개하여 해마다 산 전체 새옷을 입히고 능선따라 연분홍 꽃길은 장관을 이룬다.
종남산 소개
종남산은 밀양시 중심에 솟아있는 산이다. 동쪽으로는 만어산, 북쪽은 화악산, 서쪽으로는 화왕산과 영취산, 남쪽으로는 덕대산이 병풍처럼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자각산(紫閣山)으로 불렸지만 이후 밀양땅 남쪽에 있어 남산으로 불리다가 다시 종남산으로 변했다고 한다.종남산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다. 종남산 서면 섬마을인 삼무동을 감싸는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유장한 흐름과 너른 들녘, 그리고 영남알프스 산군이 시원하게 펼쳐진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탁월하다.산행을 시작해 3시간 정도 땀 흘려 오르면 밀양 시가지와 낙동강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에 올라선다. 여기서 조금 더 오르면 철쭉 군락지인 정상부다. 봄이면 만발하는 어른 키가 훌쩍 넘는 철쭉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산행을 하다 보면 임도와 만나는 곳이 많아 길 찾기가 쉽고 언제든지 하산할 수 있어 초보자들이 등산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우령산(중봉)으로 가는 길은 암릉 구간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지만 암릉을 우회할 수 있다.
등산정보
종남산1코스 : 덕은암 입구 - 덕은암 - 덕대산 - 정상 - 대동타운아파트(2시간 40분)
종남산2코스 : 초동초등학교 - 덕대산 정상 - 종남산 정상 - 남산저수지 - 평촌리(4시간 30분)
재약산 억새
밀양, 울산, 청도 일대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준봉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 산군중의 하나인 재약산은 산세가 부드러우면서도 정상 일대에는 거대한 암벽을 갖추고 있다. 재약산 동쪽의 사자평 지역은 125만평에 이르는 광할한 분지가 온통 억새풀로 뒤덮혀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넓은 억새벌판이다. 억새풀이 밀집해 있는 곳만도 5만평에 이른다 사자평 고원은 두 봉우리 사이의 해발800m 지점부터 완만한 타원형의 언덕들로 이어진다. 사자평 억새는 어른 가슴정도 밖에 안 올 정도로 키가 작다. 잎새도 가늘고 투박하며 꽃이삭은 거친 산정의 바람에 닳아서인지 뭉툭하고 짧다. 그래서 가는 바람에는 이삭 끝의 낭창 거림을 보기 어렵다.
재약산 소개
영남 밀양 청도 일대 해발 1,000 미터 이상의 준봉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 산군중의 하나인 재약산은 산세가 부드러우면서도 정상 일대 사자봉 주변은 억새지대이다. 얼음골, 표충사, 층층폭포, 금강폭포등 수많은 명소를 지니고 있으며, 재약산 수미봉, 사자봉, 능동산, 신불산, 취서산으로 이어지는 억새풀 능선길은 억새산행의 대표적이다.
등산정보
1코스(4시간 55분 소요)표충사입구 - 작전도로 - 층층폭포 - 사자평 - 재약산 수미봉 - 사자평 - 층층폭포 - 작전도로 - 표충사입구
2코스(5시간 35분 소요)표충사입구 - 표충사 - 흑룡폭포 - 층층폭포 - 사자평 - 재약산 수미봉 - 사자평 - 층층폭포 - 흑룡폭포 - 표충사 - 표충사입구
3코스(5시간 10분 소요)표충사입구 - 표충사 - 갈림길 - 재약산 수미봉 - 천황산 사자봉 - 재약산 수미봉 - 갈림길 - 표충사 - 표충사입구
4코스(6시간 30분 소요)표충사입구 - 내원암 - 갈림길 - 진불사 - 재약산 수미봉 - 천황산 사자봉 - 재약산 수미봉 - 진불사 - 갈림길 - 내원암 - 재약산입구
5코스(5시간 10분 소요)표충사입구 - 내원암 - 갈림길 - 천황산 사자봉 - 갈림길 - 내원암 - 표충사입구
6코스(4시간 50분 소요)표충사입구 - 표충사 - 금강폭포 - 천황산 사자봉 - 금강폭포 - 표충사 - 표충사입구
밀양의 3대 신비
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
해발 1,189m의 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600m지점의 얼음골 계곡은 삼복(三伏)한더위에 얼음이 얼고 처서가 지날 무렵부터 얼음이 녹는 신비로운 이상기온 지대이다. 약 3,000평쯤 되는 이 돌밭에는 해마다 6월중순부터 바위틈새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더위가 심해질수록 얼음이 더욱 많아지는 삼복더위가 한창일 때 그 절정에 이르고 반대로 가을철에 접어들면서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겨울철에는 바위틈에서 얼음대신 더운김이 올라오고 계곡을 흐르는 물도 얼지 않는 이상기온 지대이다.
위치
경상남도 산내면 삼양리 185-1번지(얼음골 관리사무소)산내면 남명리 산95-1, 2번지(결빙지)
얼음골 소개
오랜 옛날부터 시례 빙곡으로 불렸던 얼음골은 재약산(1,189m) 북쪽 중턱 해발600~750m의 노천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대개 7월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오랜 옛날부터 시례 빙곡으로 불렸던 얼음골은 재약산(1,189m) 북쪽 중턱 해발600~750m의 노천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대개 7월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또한 이곳 주변에는 겨울철에도 계곡물이 잘 얼지 않고 오히려 바위틈에서 영상의 더운김이 올라 고사리와 이끼들이 새파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신비한 이상기온 지대이다.4월부터 시작되는 우수기에 맑은 날이 많을수록, 더위가 심할수록 바위 틈새에 얼음이 더 많이 얼고, 더 오래 유지 된다. 근래에 들어 이상기후로 인해 비오는 날이 많아지면서 얼음이 얼어 있는 기간이 예전만큼 길지 않지만 계곡입구에 들어서면 소름이 돋을 듯한 시원한 바람은 크게 변함이 없다.얼음이 어는 바위틈은 여름 평균기온이 섭씨 0.2℃이며, 계곡을 흐르는 물은 평균 4~8℃로 웬만큼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2분 이상 견디기가 어렵다. 얼음골 주변의 지형은 얼음이 어는 돌밭(安山巖)과 계곡을 중심으로 동남·서 3면으로 깎아지른 듯 한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명대사 비석에 흐르는 땀
조선 영조 때(1742년) 사명대사 5대 법손이 당대의 명재상과 명유를 찾아다니며 비문과 글씨를 얻어 경주산의 검은 대리석에 사명대사의 한평생 행적과 임란시 구국의 충렬을 찬양한 내용,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공적과 사적을 새긴 비각이다.국가의 큰 사건이 있을때를 전후하여 땀방울이 맺혀 구슬땀 처럼 흐르는 신비로운 현상을 보이고 있어, 사후에도 나라를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으며, 일명 「땀흘리는 비석」으로 불린다.
표충비각 소개
표충비는 일명“한비(汗碑)”또는“땀 흘리는 비”라고도 하며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있다. 비 전면에는“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라 하여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의 충의와 행장을 새겼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충혼으로 의승병을 창의하고, 임진·정유재란 기간 동안 수많은 전장에 나아가 왜적들을 물리친 사실과 전란이 끝난 후 강화와 탐적사로 일본에 건너가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하여 양국 간 평화를 이끌어 낸 공적 등을 새겼다. 영조 때 정승을 지낸 도곡 이의현(陶谷李宜顯)이 글을 짓고, 퇴어 김진상(退漁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영상을 지낸 지수재 유척기(知守齋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썼다. 후면에는“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으로 청허당 서산대사의 찬연한 공덕과 기허대사(騎虛大師)의 사적을 기린 글을 새겼다. 측면에는“표충사사적기(表忠祠事蹟記)와 이 비를 건립한 사람들의 명단 등을 새겼다.이 비는 영조 18년(1742)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 남붕선사가 경산에서 갖고 온 오석(烏石)으로 세웠다. 좌대석(坐臺石)과 이수는 화강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지상으로부터의 높이 380㎝, 넓이 98㎝, 두께 56㎝나 되는 비석으로 그 모양이 거대하고 장중하다. 표충비는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마치 구슬땀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염려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고 신성시하고 있다.
종소리나는 만어사의 경석
만어사 앞 너들경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고기형상의 돌들이 널려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그 돌들은 부처영상이 어린다는 산정의 불영석을 향하여 일제히 엎드려 있는 듯 한데, 크고 작은 반석들은 모두 경쇠소리가 나며,이는 동해의 고기와 용이 돌로 변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고려 말기의 일연선사도 이 절을 순례하며 영험한 명찰이라고 일컬었을 만큼 유명한 사찰이고 신비스런 경석이다.
만어사 소개
해발 674m의 만어산 8부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만어사는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대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해주는 전통사찰로 많은 전설과 갖가지 신비한 현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영험이 있다 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왕의 공불처(供佛處) 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에는 동량 보림이 글을 올렸는데, 금나라 대정 12년 경자년 곧 고려 명종10년(1180)에 처음 건립하고 삼층석탑(보물 제466호)을 세웠다 하였다
영화촬영지
밀양
영화 "밀양"의 제 60회 칸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 수상기념과 영화의 성공을 기원 함과 동시에 시민과 방문객에게 영화 "밀양"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2007년 8월 30일 준피아노 학원의 실제 촬영지인 밀양시 가곡동 613-4번지 상에 건축면적 96㎡규모로 기존 세트장을 완벽하게 복원하였다. 세트장 내부에는 실제 영화에 등장한 소품으로 피아노, 쇼파, 가재도구, 주연 여배우의 의류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여배우의 브로마이드를 제작, 기념 촬영과 9분 분량의 영화 "밀양"을 상영하는 등 방문객에게 영화 "밀양"의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구
연극 <오구>는 89년 초연된 이후 270만 관객몰이에 성공하며 깊은 감동과 높은 작품성으로 이미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97년부터는 강부자씨가 황노모 역할로 합류하며 대중적인 인기가 극에 달했다. 연극의 연출을 맡았던 이윤택 감독은 연극무대가 가지는 한계에 아쉬움을 느끼고 <오구>를 영화로 만들어냈다.
2003년 부산 국제 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의 공식 상영작이기도 한 <오구>는 영화의 90% 이상이 밀양에서 제작된 만큼 밀양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제작되었다. 지방문화재 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퇴로리의 전통고가 이희문씨댁을 주된 배경으로 할 뿐 아니라 밀양시에 거주하는 실제 인간문화재들도 영화에 출연하여 본인의 재기才氣를 발휘해 주었다.
똥개
경찰 아버지(김갑수)를 둔 지방 소도시의 어리숙하지만 강단 있는 청년(정우성)의 이야기. 곽경택 감독은 영리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어리숙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따끈한 이야기를 밝고 경쾌하게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미남 배우 정우성이 연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청풍명월
<청풍명월>은 의상과 소품은 국제적 규모 (무사-의상 400여벌, 단적비연수-의상 600여벌, 비천무-의상 350벌 수준).권유진씨와 중국 무협 미술계의 1인자 꿔빅(郭碧茵)의 공동작업으로 디자인이 완성되었으며 진검과 가검을 포함하여 약 1000자루의 검이 제작되었다. 또한 칼 외에도 채찍, 도끼, 창, 철퇴, 철편, 사슬, 낫 등 다양한 특수 무기들이 선을 보이게 된다. 400년 전 역사의 복원을 위해 각고의 공을 들인 <청풍명월>. 그 노력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장면이 한국 영화 최초로 시도되는 ‘한강주교어가행렬’의 재현이다. 국가적 행사로 이를 위해 도로가 건설되고 관련 지역의 병력과 백성들이 총 동원되었던 ‘왕의 궁 밖 행차인 어가행렬’은 조선 시대 왕권의 절대적 권력과 위용을 가늠할 수 있는 역사적 사례이다. 특히 영화 <청풍명월>에서는 한강을 도하하는 ‘어가행렬’을 복원함으로써 조선의 도읍 한 복판을 흐르던 한강의 정경과 교각의 스펙터클까지 담아내고 있다. 이 한 장면을 위해 제작진은 전문 학예연구사들의 고증을 거쳐 한강주교를 새롭게 건설했으며 엑스트라 인원 700여 명이 동원되어 말 그대로 ‘역사적인’ 장면이 되었다.
방자전
호박소는 영남 알프스로 일컫는 1,189m의 재약산 자락과 1,240m의 가지산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가운데, 해발 885m의 백운산 자락 계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곳 호박소 계곡은 화강암으로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하며, 그 위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입니다.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른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 같이 생겼다 하여 호박소 또는 구연(臼淵)이라고 합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호박소는 오랜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소(祈雨所)였다고 합니다.
밀양의 국가지정 문화재
국보
표충사 은입사 향로(국보 제75호)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향로로서 1957년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국내외를 통틀어 7좌밖에 없는 동제(銅製) 향로 가운데 하나이다. 향로에 도문(圖文)을 음각하고 그 음각한 홈 속에 은사(銀絲)를 메꾸어 넣어서 장식하는 소위 은상감(銀象嵌)의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완형의 몸체와 둥근 받침을 가진 대좌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향로의 몸체 둘레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있어서 이 향로의 시대와 유래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매우 귀중하다.
"大定十七年丁酉六月八日 法界生亡共增菩提之願以鑄成靑銅含銀香완一副重八斤印棟樑道人孝初通康柱等謹發至誠特造隨喜者射文"(대정17년정유6월8일 법계생망공증보제지원이수성청동함은향완일부중팔근인동량도인효초통강주등발근지성특조수희자사문)
명문에 나타난 대정17년은 금(金)나라의 년호로서 고려 명종7년(1177년)에 해당하고 명문의 호칭을 그대로 따라서 이름을 청동은입사 향완이라고 한 것인데 상부 잎새부위에는 6자의 범자문(梵字文)을 일정한 간격으로 한자씩 상감하고 글자와 글자 사이에는 서운문(瑞雲文)으로 장식하고 있다. 몸체의 바깥 측면에는 역시 같은 간격으로 동심원 속에 4자의 범자(梵字)를 배치하였으며 높은 굽다리 둘레에는 한 마리의 큰 용을 상감해서 주장식으로 삼았고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넣고 굽다리 윗부분에는 여의주문(如意珠文)을 장식해서 상하부의 균형을 얻었으며 크게 번거롭지않은 제한된 의장효과(意匠效果)를 거두고 있다.
보물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이 탑은 표충사(表忠寺) 경내에서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들어서면 만일루(萬日樓) 앞 마당에 있는데, 기본적인 양식이 신라통일시기의 석탑 유래를 따르고 있는 단층(單層) 기단(基壇)의 3층석탑(三層石塔)이다.
조선조 숙종 3년(1677년)에 작성된 『영정사고적기(靈井寺古蹟記)』에 의하면 현재의 표충사가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인도의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창건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의 조성년대도 이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기단(基壇)의 형식은 단층(單層)이나 7매(枚)의 두꺼운 판석(板石)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24cm 정도의 제법 높은 2단의 각형 받침이 마련되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를 형성하므로써 상하층 기단의 효과를 살리고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屋身)은 대체로 높은 형태를 보이고 옥개석(屋蓋石)은 첫층부터 차례로 체감되었으며 추녀밑은 수평(水平)을 이루고 낙수면(落水面)은 우아한 경사를 이루었다. 옥개석(屋蓋石)의 머리에는 풍경(風磬)을 달아 운치를 살렸고, 상륜부(相輪部)에는 1m 남짓한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있고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등이 있으나 그 가운데는 뒤에 보수(補修)된 흔적도 남아 있다. 이 탑(塔) 옆에는 석등(石燈)도 1기(基)가 서 있으나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천황사석불좌상(보물 제1213호)
밀양 얼음골에 있는 천황사(天皇寺)의 석불좌상(石佛坐像)은 광배(光背)만 없을뿐 대좌(臺座)와 신부(身部)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는 오른 다리를 뒤로 올린 향마좌(向魔座)인데 불상(佛像)의 얼굴 부분이 수정되어 있고, 손의 모양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모습으로 수리되어 있으나 우견편단(右肩偏袒) 법의(法衣)의 U자형의 층단식 주름이나 전체적인 형태를 볼 때 본래는 두손을 가슴 앞에서 맞잡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불상의 대좌(臺座)는 우리나라 조각에서는 처음 보이는 독특한 형태인 사자좌(獅子座)인데 상대, 중대, 하대로 구성된 대좌(臺座)의 상대는 둥근 원판형 위부분을 약간 높여 정교한 연주문(蓮柱文)을 새겼으며, 그 아래로 활짝핀 단관 연꽃무늬를 두겹으로 새긴 중엽(中葉) 연화문(蓮花文)을 보여주고 있다. 중대는 7cm 높이의 얇은 것으로 둥근 원형받침형태인데 두줄의 띠를 세기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예이다. 하대는 아랫 부분에 복관연화문을 새겼고 이 위로 사자 11마리를 환조로 새기고 있는데 정면에는 중심을 파낸 받침이 있어 향로 같은 공양구를 끼우던 받침으로 생각되고 사자는 대좌 안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 사자좌(獅子座)는 당대의 최고 일품으로 평가된다.
승진리 삼층석탑(보물 제468호)
이 탑(塔)이 속했던 사찰의 조성년대는 알 수 없으나 수법과 양식으로 보아 고려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층(單層) 기단(基壇) 위에 이루어진 3층석탑(三層石塔)이다.
1966년 문화재지정 신청을 위한 실측조사 당시에만 해도 지면 위에 돌무더기가 쌓여 기단(基壇)의 면석(面石) 이하는 매몰(埋沒) 되어 있었고 3층 옥개석(屋蓋石)은 땅위에 떨어져 팽개쳐져 있었으며 탑(塔)도 북쪽으로 기울어져 보존상태가 매우 나빴으나 지면을 정리하고 해체 복원(復元) 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지대석(地臺石)은 4매로 구성하였고 기단(基壇)의 면석(面石)도 4매의 판석(板石)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특이한 것은 왼쪽 면석의 한 하부 귀퉁이에 석재로 목침형(木枕形) 받침이 끼워져 있는 것이다.
탑신부(塔身部)의 옥신(屋身)에는 장식이 없고, 각층의 높이는 55cm, 20cm, 7cm로 매우 심한 체감비율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각층 모두 3단으로 주각되었고 추녀밑은 직선을 이루었으며 낙수면(落水面)은 비교적 급한 경사를 이루었는데 옥신석(屋身石) 윗면 중앙에는 직경 7cm, 깊이 10cm의 원형 찰주공(刹柱孔)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옥개석(屋蓋石)의 찰주공(刹柱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앙화(仰花), 보륜(寶輪)등의 장엄(莊嚴)을 갖추었던 석탑(石塔)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태리 오층석탑(보물 제312호)
이 5층석탑(五層石塔)은 고려예종 2년(1109년)에 신라 호국사찰인 황룡사(皇龍寺) 출신의 승려 중대사(中大師) 학선(學先)이 이 탑이 속했던 절(확실한 절의 이름은 전하는 바 없고 다만 구전으로 천주사(天柱寺), 천축사(天竺寺), 또는 죽암사(竹岩寺)로 불리워졌다고 함.)의 주지로 있으면서 금당(金堂)과 함께 조성한 것이다.
1919년 3월에 이 탑의 상륜부에서 가로 60cm 세로 40cm의 백지에 반초서로 묵서한 "당탑조성기(堂塔造成記)"가 발견된바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
乾統玖年三月九日記
至今二百六新龍二年良中律業皇龍寺沙門惠照亦 住特爲乎矣亦中同寺依止中大師學先亦至今八 壬午年入寺火香爲只丁亥年元發心爲只金堂一問佛坐 造石塔五 新造鍮銅幷六十二斤 金堂塔名 香盧香盒幷梁捌斤五兩鐵物一千百斤 三實內鍮鏡一入十一斤幷以施行錄由 住特主法 儀中大師學先 玆上辛沖次辛先次應連次元先等亦造成日施行 同寺前住特尙資法護 重大師住特甘年
(건통구년삼월구일기
지금이백육신용이년양중율업황용사사문혜조역 주특위호의역중동사의지중대사학선역지금팔 임오년입사화향위지정해년원발심위지금당일문불좌 조석탑오 신조유동병육십이근 김당탑명 향노향합병양팔근오양철물일천백근 삼실내유경일입십일근병이시행록유 주특주법 의중대사학선 자상신충차신선차응연차원선등역조성일시행 동사전주특상자법호 중대사주특감년) 이라고 이두문자(吏讀文字 : 傍點)를 혼용한 문장형태로 적혀 있는데
이 조성기를 작성한 연대인 건통(乾統) 9년은 중국 요(遼)나라 천조제(天祚帝)의 연호로서 고려 예종4년(1109년)에 해당되며, 이 해에서 206년전 즉 신라 효공왕 8년(신용2년)에 황룡사 사문 혜조가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는 것과 또 황룡사에 있던 중대사 학선이 8년전에 이 절의 주지로 와서 정해년(예종 2년 : 1107년) 정월에 발심하여 금당 1칸과 불좌를 만들고 5층 석탑을 세웠는데 구리와 놋쇠를 아울러 62근을 사용하였으며, 향로와 향합 등 절에 들인 물목(物目)과 재료의 사용량 등을 적고 불사에 참여한 주지이하 스님들의 법계(法階)와 법명(法名)을 열기했다.
밀양 영남루(보물 제147호)
영남루가 최초로 창건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그 전부터 있었던 작은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하여 개창하였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1844년(현종 10년)에 재건한 것으로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3대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다.
영남루는 응천강(凝川江)에 임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이 5칸이요, 측면이 4칸으로서 간격을 넓게 잡은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였으므로 누마루가 매우 높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연결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陵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공포(공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나타낸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안둘레의 높은 기둥위에 이중의 들보(樑)를 가설하고 주위의 외둘레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충량은 용의몸(龍身)을 조각하고 천장은 지붕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주변문화재
무봉사, 천진궁, 아랑각, 시립박물관, 삼문동수변공원, 밀양향교, 예림서원, 추원재
오시는 길
- 경주, 울산방면 * 자가용 이용시 언양IC→석남터널(국도24호선)→긴늪사거리(국도24, 25호선 분기점)→교동 신촌오거리→내일동사무소→밀양시립도서관→영남루 * 시외버스 이용시 경주시외버스터미널→경산→청도→밀양시외버스터미널→영남루(시내버스로 10분&
무봉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
무봉사(舞鳳寺)는 영남루(嶺南樓)의 전신인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암자로 전해오고 있으나 문헌상의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고 다만 이 불상(佛像)과 광배(光背)의 조각수법과 양식이 신라통일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됨에 따라 신라시대의 명찰(名刹)로 전해지고 있는 영남사(嶺南寺)의 유물로 추정된다.
화강석(花崗石)으로 만들어진 이 석불(石佛)은 상호(相好)가 원만한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으로서 나발(螺髮) 위의 육계(肉계)가 큰 편이고 두 눈섭 사이에는 백호(白毫)를 끼웠으며, 길상좌(吉祥坐)로 가부좌를 하고 항마촉지(降魔觸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광배석(光背石)은 불상과 같은 재질의 화강석(花崗石)으로 된 보주형광배(寶珠形光背)인데, 상부가 앞쪽으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구부러져 있고 당초문(唐草文), 연화문(蓮花文), 화염문(火焰文)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다. 광배(光背)의 뒷면에는 연화좌(蓮花坐) 위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을 양각(陽刻)하였는데 소발(素髮)의 머리에 상호(相好)는 원만한 편이나 많이 마멸(磨滅)이 되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인상이 뚜렷하지 못하다.
이 불상(佛像)의 특징으로는 채색(彩色)을 한 흔적이 있어서 연구(硏究)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어사 삼층석탑(보물 제466호)
이 삼층석탑(三層石塔)은 고려 명종 10년(1180년) 경자년(更子年)에 만어사(萬魚寺)가 창건될 때 조성된 단층(單層)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搭身)으로 이루어진 고려시대의 석탑(石塔)이다.
지대석(地臺石)은 4매(枚)로 구성하여 큼직하게 2단으로 각형(角形)의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기단(基檀)의 면석을 받게 하였다. 면석 또한 4매로 이루어져 큼직한 우주(隅柱)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 위에 2매로 구성된 갑석(甲石)이 얹혀있다. 갑석의 두께는 평평하고 엷은 편이며 밑에는 부록(副錄)이 각출(刻出)되어 있고 윗면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그 중앙에 2단으로 각형의 굄으로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屋蓋)가 모두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신(屋身)에는 각층마다 우주형(隅柱形)을 표시하였을 뿐 다른 조각은 없고 비교적 체감율이 안정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각층 받침은 3단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추녀 밑은 수평이고 얇은 편이다. 지붕의 낙수면은 밖으로 볼록한 곡선을 그리면서 급하게 경사를 이룬 다음 추녀에 이르러 거의 수평이 되도록 처리하였으며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은 매우 경미한 편이다. 옥개석(屋蓋石)의 윗면에는 각층마다 각형의 굄이 조각되어 있으나 1.2층에는 1단씩, 3층에는 2단이 있어 각각 옥신(屋身)을 받게 하였다.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모양의 석재가 얹혀 있으나 뒤에 보수된 것으로 짐작이 되고 앙화(仰花)나 보륜(寶輪) 등 다른 장식은 없으며 탑신부(塔身部) 이하는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현상 변경이나 훼손의 흔적은 없다.
사적
밀양 고법리 박익벽화묘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의 밀성박씨 묘역의 능선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는 석인상, 갑석, 호석을 갖춘 방형분으로서, 봉분은 가로 6m, 세로 4.8m, 높이 2.3m이며, 내부 석실(길이 .5m, 폭 1m, 높이 0.8m)의 사방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묘의 축조수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도(隧道)를 갖춘 방형묘라는 점이다. 방형묘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일정 계층에서 유행한 묘제 중 하나이나, 남쪽으로 수도를 설치한 것과 병풍석이 경사지게 설치된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조선전기의 횡구식 석실 중 수도가 확인된 것은 아직 없으며, 묘도와 구(溝)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양식상의 원류에 대한 검토 자료가 된다.
벽화는 화강암 판석 위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먼저 검정선으로 벽화내용을 소묘한 뒤 마르기 전에 주요부위를 적·남·흑색으로 채색하는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부분적으로 퇴락되어 있으나 잔존부분에는 인물, 말, 도구 등 당시의 생활 풍속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1332∼1398)의 휘는 익(翊),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밀성으로 고려말의 문신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소감(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이부중서령(世子貳傅中書令)을 역임하고 한림문학이 되는 등 고려말 팔은(八隱)중 한 분으로,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벽화 발견에 의한 조선초 생활 풍습의 연구 등 고고학적 또는 회화사적 가치 외에 지석(誌石)의 출토로 고려말 문신인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00년도 태풍으로 훼손된 묘역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정밀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명승
밀양 월연대 일원
밀양 월연대(月淵臺) 일원은 조선조 중종 20년(1520년)에 지조와 청명(淸名)으로 빛나는 월연(月淵) 이태(李迨) 선생이 만년에 관직을 물러나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자연으로 귀의하려는 의지로 조성한 별서이다.
월연정내 가장 북측에 위치하고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월연대(月淵臺)는 남동향을 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사방을 돌아가며 대청으로 구성하고 중앙 1칸만 네 면에 2짝 여닫이 문을 둔 방으로 구획하여 정자의 기능을 충실하게 하였다.월연정은 가장 좌측인 남쪽에 있으며 동향을 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樑)구조로 팔작 지붕을 한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이다. 남측으로 대청 2칸을 통문(通門)이 되도록 하였고 우측으로 방을 2칸 다시 통간이 되도록 하고 대청쪽으로 4짝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주위 경관을 조망하기 좋게 개방적인 평면을 하고 있다. 다시 우측에는 전면에 방을, 후면에는 아궁이를 두어 난방을 위한 장치를 하여 사철 두루 기거할 수 있도록 거주성(居住性)을 높혔다.
가구(架構)는 충량(衝樑)이 있는 5량 구조로, 대청과 면한 방 상부 툇간에는 퇴보를 걸지 않고 긴 대들보를 써서 결구하고 있고 대들보위 판대공으로 종보를 받고 도리 방향으로 첨차(첨遮)를 걸치고 소로를 두어 중도리와 장혀를 받고있는 형태이다. 제헌(齊軒)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평면으로, 왼쪽으로부터 대청, 방, 방, 대청 2칸으로 이루어져 대청, 방, 대청으로 된 3칸짜리 정자의 평면형을 확대 시켜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월연정 주위에 건립된 제헌(齊軒), 월연대등 모두 풍치 수려한 곳에 무리를 이루어 정자의 기능을 가지며, 놓여진 지형에 맞추어 모두 각기 다른 평면을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 월연정(85.1.14)이 수려한 경관과 다양한 문화 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 2. 8(수)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87호)인 “밀양 월연대 일원”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천연기념물 제528호)
밀양 만어사 암괴류
만어사(萬魚寺)는 고려 명종 10년(1180년)에 보림(寶林)이라는 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이 절앞 넓은 면적의 너들겅에는 지천으로 깔려있는 고기 형상의 돌들이 늘려 있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지리지(地理誌)에 의하면 여기에 있는 크고 작은 반석들은 모두 경쇠소리가 나며 이는 동해(東海)의 고기와 용(龍)이 돌로 변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만어산 암괴류는 1996년 3월 11일 만어산 어산불영경석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52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만어산 암괴류가 한반도 빙하기가 끝난 후 많은 비가 내려 이곳의 암석들이 양파가 벗겨지듯 침식 및 풍화되어 생성된 암괴류로 700m이상 길게 펼쳐지며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등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크므로 2011년 1월 10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승격되어 지정하였다. 고기 모양의 반석들은 부처의 영상(靈像)이 어린다는 산정(山頂)의 불영석(佛影石)을 향하여 일제히 엎드려 있는 듯 한데, 지금의 양산(梁山)지역에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성질이 사악한 독룡(毒龍)한마리와 만어산에 살며 이곳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을 잡아 먹는 나찰녀(惡鬼)가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어놓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아 가락국 수로왕이 주술로서 그들의 악행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부처님께 설법(說法)을 청하여 이들에게 불법(佛法)의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는데,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도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에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하고,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다. 고려말기의 고승 일연선사(一然禪師:삼국유사를 지음)도 이 절을 순례하며 영험(靈驗)한 명찰(名刹)이라고 일컬을 만큼 유명한 사찰이고 신비스런 경석(輕石)이다.
가지산 철쭉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462호)
가지산(加智山)은 해발 1,240m이며,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낙동정맥(落東正脈)의 영남팔산(嶺南八山)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가지산도립공원(加智山道立公園)의 주산이다. 경상남도 밀양시(密陽市), 울산광역시 울주군(蔚州郡)과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에 걸쳐 있으며 “가지산(加智山) 철쭉나무 군락지(群落地)”는 산정상부에 위치한다. 철쭉나무는 진달래과 진달래속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으로 주로 활엽수림의 관목층을 이루는 철쭉나무는 우리나라 전국의 어느 산에서나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신라 성덕왕(聖德王)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로 부임할 때 그의 부인 수로가 철쭉꽃을 갖고 싶어 하자 지나가던 농부가 꽃을 꺾어 바치고 불렀다는 헌화가(獻花歌)의 전설이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 정서와 친숙한 꽃이다.
철쭉나무 군락지와 주변의 식물상은 4강 35목 81과 225속 3아종 69변종 21품종 총 432종류이다. 까막딱다구리, 검독수리, 붉은배새매, 수리부엉이, 원앙, 하늘다람쥐, 수달 등의 천연기념물이 번식하거나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쭉나무는 주로 활엽수림의 관목층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가지산의 철쭉나무 군락지에는 수고(樹高)가 3.5∼6.5m, 수관폭(樹冠: 나무줄기 윗부분의 가지와 잎이 많이 달려있는 부분)이 6∼10m, 추정 수령이 약 100∼450년의 40여주의 철쭉나무 노거수 및 약 219,000여주의 철쭉나무가 산정상부인 981,850㎡에 집중적으로 군락을 형성하고 있어 학술적이나 경관적 차원에서 가치가 크다.
밀양 남명리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
얼음골은 재약산(載藥山 : 1,189m) 북쪽 중턱인 해발 600m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으며, 밀양시청(密陽市廳)에서 동쪽으로 약 36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삼복(三伏) 더위에 얼음이 얼고 삼동(三冬) 한 겨울에는 얼음이 녹아 물에 더운 김이 오른다는 이 계곡을 사람들은 「밀양(密陽)의 신비(神秘)」라고 불러오고 있다.
여름에 얼음이 어는 지대는 약 3,000평쯤 되는 돌밭으로 해마다 6월 중순부터 바위 틈새에서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더위가 심해질수록 얼음이 더 많아지는데 삼복(三伏) 시기가 되면 그 절정에 이른다. 반대로 가을철에 접어들면서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겨울철에는 바위 틈에서 얼음 대신에 더운 김이 올라오고 계곡을 흐르는 물도 얼지 않는다. 여름에 냉각(冷却)된 찬바람이 이는 이 얼음골 일대의 초목은 늦은 여름이 되어 잎이 피고 채 못다핀 나뭇잎은 가을이 되자마자 단풍(丹楓)이 지는 이상기온지대(異常氣溫地帶)이다. 얼음골 부근에는 가마불협곡(峽谷)과 경암(景巖) 등 경승지(景勝地)가 있으며, 북쪽으로 4km쯤 되는 곳에 호박소(臼淵)도 있어 경향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觀光客)들이 찾아 오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백중놀이(제68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음력 7월 15일을 1년 중의 중원(中元)이라 하고 백종일(百種日)또는 백중일(百衆日)이라는 큰 명절로지켜 왔으며 특히 중간 농사가 끝나고 농군들이 쉴 수 있는 기간 이였으므로 밀양지방에서는 7월 15일을 전후한 용날(辰日)에 머슴들이 주체가 되어 농신(農神)에 대한 고사(告祀)와 "꼰배기참놀이 (세조연:洗鋤宴)"의 여흥으로 시작되는 것이 "밀양백중(密陽百中)놀이"의 특징이며 줄거리를 지닌 구성적인 놀이의 성격을 띠고 있고 총 4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마당(앞놀음) : 농신(農神)에 대한 고사(告祀)를 지내기 위해 오방신장(五方神將)을 불러 일으켜 잡귀막이 굿을 먼저하고, 모정자놀이를 해서 흥을 돋운 다음 덕배기춤으로 한바탕 놀다가 농신에 대한 고사풀이를 하며 그 해의 풍년과 오복(五福)을 빈다.
*둘째마당(놀이마당) : 그 해의 농사 장원이 작두말을 타고 나와서 말놀음을 하고 있을때 별안간 양반이 뛰어 들어 머슴들을 물리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양반춤을 즐기는데 머슴들이 여기저기 나타나 병신춤을 추면서 양반을 놀려댄다. 이윽고 양반이 물러나고 머슴들이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데 양반이 흥에 겨운 듯 다시 범부(凡夫)차림으로 나타나 독특한 몸짓으로 범부춤을 추면서 신나게 논다.
*셋째마당(신풀이마당) : 북잡이들이 큰 북을 메고 나와서 오북(五鼓)놀이를 한다. 다섯개의 북으로 이루어지는 춤으로서 이는 오행(五行)과 오기(五氣)가 순조롭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