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절)
신앙 상담을 하다보면 그 사람의 뜻에 따르든지 아니면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든지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을 맞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순간에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피상담자이기에 어중간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나를 봅니다. 앞으로 당할 고난을 줄여주기 위해 단호한 말을 해 주고 싶으나 그만 사람의 호감을 얻으려 어물쩍 덮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가려운 귀를 긁어 줄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얼굴은 알아도 모르는 척, 봐도 못 본 척하는 포커페이스를 만들 수밖에 없나 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일단 자신의 사욕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 때에 바른 복음을 증거하고 진리로 예언해야 함에도 교회는 개인의 사욕을 추구하는 육적 신앙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그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을 해 주라고 하시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게 실용적인 세상의 일반적인 신앙관이기 때문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교회의 존립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하고 가려운 귀의 감성에 호소하기도 하고, 더 강력하게 ‘영혼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수 있다’는 슬로건을 교회 밖에 내 걸기도 했습니다. 신학교의 설교학은 철저하게 사람들의 호감에 맞추는 방법으로 정렬이 이미 끝났습니다. 십자가의 도, 성령의 내적 역사를 위한 자기 부인, 진리 안에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기 위한 처절한 싸움, 인간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위한 육체의 고난 등은 비호감 설교로 분류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구원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도입하여 회중들을 웃기고 울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개척교회일 수록 더 어렵습니다. 자아를 실현하고자하는 욕구를 따라 가려운 귀를 달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하는 모습을 묵인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젠 총체적으로 귀를 긁어주는 설교기법으로 통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구원, 세례, 십자가, 부활, 생명, 거룩, 영광, 사랑이라는 어휘는 설교 속의 하나의 구색일 뿐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자아와 욕심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 큰일입니다.
첫댓글 육화(肉化)된 인간이~영화(靈化)되기 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속으로 스며들기 까지,,,그래서 우리의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변화되기 까지,,,그 자료는 구원과 세례ㅡ십자가,부활,생명,거룩,영광,사랑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