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이야기이며, 우리의 존재에 지속성과 의미를 부여해준다'(로렌 슬레이터)는 글귀가 근자엔 거듭 강렬한 자의식으로 다가온다.
길을 떠나 마을을 그려본 시간. 그러나 미처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마을. 그 중의 하나가 경주의 양동 민속마을이다. 벌써 11년 전의 일. 아니 그전에도 답사객들과 우루루 버스에서 내려 마을길을 기웃거리긴 했지만, 홀로 경주 터미널에서 안강행 버스를 타고 내려 마을에서 머문 기억 속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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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단이 보이는 가을풍경 (1995년 작). |
“애초 양동마을을 향한 애모는 언젠가 ‘대지를 어머니의 품으로 보라’(최창조)는 일갈에 크게 고무되어 옛 마을의 형성에 관심을 가져온 데서 비롯되었다. 양동마을에서 오늘날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도시 건축의 비자연적, 비환경적 현상을 비교 성찰해 보고 자연속의 주거환경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동의 설창산 자락에 형성된 마을을 맞은편 성주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마치 숲속에서 숨바꼭질 하듯 드러나는 백여 채의 고가(古家)가 둥지를 틀고 있다. 마을의 형국이 말 물(勿) 자인데 각기 뼈를 이루는 산 능선 아래로 기와집과 초가가 총총하다.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런 길목이 활등처럼 휘고, 흰 뱀이 기어오르는 듯한 산길이 정겨워만 보인다. 마을 산 너머로 펼쳐지는 안강벌은 그 옛날 풍요로웠던 마을의 영화를 웅변해 주고, 마을 경계의 안락천은 형산강으로 합수되어 흐른다.
양동마을은 실제로 조선시대 전통한옥의 원형을 잘 보여 주는 곳이다. 경주시내 주변이 신라 때 영화를 누렸다면 양동은 조선시대 때 번성을 알 수 있게 한다.” (졸저 <길에서 쓴 그림일기> 중에서)
사실 천년고도 경주의 불교문화와 함께 숨쉬는 유교문화의 양대 산맥으로 안강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독락당(獨樂堂), 그리고 양동마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시공간인 수직개념으로 유교문화의 보고(寶庫)요, 수평적 개념인 현실속에 전통건축의 뛰어난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외국인이 가장 한국적인 역사와 전통의 숨결이 살아있는 마을(주거공간)을 찾는다면 서슴지 않고 나는 양동마을을 소개하겠다. 사실 산마을에 둥지를 튼 입향조의 긍지와 마을 내력이 누대로 회자되는 특별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마을 입향조는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신, 월성손씨(月城孫氏)인 손소(孫昭)다. 그리고 그의 딸이 여강이씨(驪江李氏) 이번(李蕃)에게 출가해 낳은 성리학 오현의 한 분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으로부터 마을의 양가를 이루는 뿌리가 된다.
봄바람의 설렘 속에 다시 찾은 양동마을. 이언적의 13대손 며느리라던 마을 입구 가겟집 아주머니는 그새 주름이 깊었다. 보관해온 마을 관계 책과 중요한 건축들의 위치를 살펴주던 그 날의 고마움이 새록하다. 당시에 만났던 이장 손덕익씨(孫德翼·손소의 16대손)는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 다시 이장을 맡고 있다 한다. 관가정(觀稼亭) 아래 600년 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사는 그는 현실의 어려움을 길손에게 토로했었다.
농촌 실정으로 복합영농이 절실한데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축사와 창고를 짓지 못하고, 관리당국에서 양기와를 초가로 개조할 것을 권고하나 예산과 인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99회 졸업생을 낸 양동초교는 당시 전교생이 53명이었는데 현재 60명이라고 하니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이후 농촌 정보화마을이 되고 주민의 노력과 당국의 지원이 있었는지 초가가 많이 늘었고 담장이 새롭게 보인다.
인연은 간절함으로도 오는가. 뜻있는 곳의 길인가. 이번엔 한 주간을 마을에서 묵으며 작업할 계획인데, 마침 홀로 머물 숙소가 생겼다. 신라문화원의 진병길 원장이 마련해 놓은 문화유산 탐방객을 위한 집이 그것이다. 향단(香壇·보물 제412호)의 부속건물로 고가옥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쾌적한 집인데, 평소 친분 있는 그는 작업이 될 때까지 이용하라고 한다. 마치 진 원장이 나를 위해 사전에 준비해 놓은 듯, 착각은 자유롭고 의욕은 충만하다. 사실 차 없이 숙소도 어려운 곳에서 버티기 난감한데, 민속식당도 보이니 주저함이 한꺼번에 해결된 것이다.
늦은 여장을 풀고 난 이튿날 아침, 창호에 햇살이 드는 봄날의 생기가 화첩을 챙기게 한다. 먼저 지난해 가을, 영양 두들문화마을(안동장씨부인기념관 개막식)에서 인사를 나눈 이지락씨(李址洛·17대 종손)를 찾으나 출강 관계로 사촌인 이지휴씨(李址烋)를 소개하며 안내를 받으라 한다.
이 선생은 시를 쓰는 경주 문화유산 해설사로 잠시 타지에 살다가 노모를 모시려고 홀로 가족을 두고 내려왔다. 열변을 토하는 자긍심 속에 건축구조는 물론 풍수와 조경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그를 만나기 전 아침을 먹은 거림식당의 장세주 할머니(71). 양동에 시집 온 후 평생을 이곳에서 보낸 이에게 물은즉 마을 소개로는 지휴씨 만한 이가 없을 것이라는 정보를 이미 접수한 터였다.
이 선생과 헤어진 후 향단 마루에서 건너다보이는 성주산 아래의 가옥(이향정, 강학당, 심수정, 마을회관, 민속식당 등)을 그리는데 강학당 뜰의 살구꽃이 봄빛에 터졌다. 보는 이가 마음 설레니 이것이 응현(應現)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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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마을 1(192*56cm. 1995년 작). |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향정(二香亭)을 다시 찾자 담장 아래 매화 향기 가득하다.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만발하다는 정자 뒷산의 거대한 향나무 한 그루. 그 대숲 오솔길을 따라가자 살구꽃 터진 강학당(講學堂)이 봄기운에 초가와 함께 졸고 있다.
그리고 이웃한 심수정(心水亭). 네 그루의 고목이 정자의 담장과 함께 사는데 산 언덕에서 내려보는 건축구조도 멋스럽거니와 담장에서 보는 앞마을의 정경도 좋다. 이어 뜨락의 매화를 완상함에 화첩을 펴고 붓을 들었다.
이튿날 아침, 마을 전경을 살피기 위해 산을 오르기로 하고 이 선생을 앞세워 그의 동료인 윤영희씨(문화유산 해설가)와 함께 성주산으로 오른다. 공사 중인 안락정(安樂亭)을 끼고 돌아 오르는 산길이다. 어제 본 강학당이 이씨의 서당이라면 안락정은 손씨의 서당인데, 이곳에 오르면 초등학교와 안강벌이 아스라이 보인다. 꽃샘바람이 스치는 산길. 노오란 산수유와 개나리가 만개하고 솔바람 속에 연분홍 진달래가 번져있다.
마침내 설창산 아래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드러나는 곳. 11년 전 이곳에 홀로 올라와 가슴 조이며 스케치를 하던 곳이 예 아니냐. 벅찬 감회에 아예 주저앉고 싶지만 일행에 누가 될세라 다음날을 기약하며 세세히 눈길을 주고 사진을 찍은 다음 산을 내려왔다.
내친김에 이 선생은 설창산 정상으로 오르자고 한다. 서백당(書百堂) 길목으로 올라 이양길(李良吉·72) 선생의 송지댁에서 차 한 잔을 대접받고 창은정사(蒼隱精舍)를 거쳐 산 중에서 가장 높고 깊은 내곡정(內谷亭)으로 가는 산길. 그윽하고 정겨운 흙길에 발걸음이 행복하다.
T자형 내곡정은 난간 청판에 꽃무늬를, 기둥 위에도 꽃살이 화려하게 조각되었고 천장도 우아하다. 담장안의 양쪽 반송 또한 명품으로 어느 풍류객인들 이곳에서 회포를 풀지 않으랴.
한편으로 툭 터진 산길에서 돌아보고 내려다보는 산과 마을. 그 풍광은 또 다르고도 새롭다. 이제는 설창산 능선을 타고 앉은 정자를 집중적으로 찾기로 하여 산을 가로질러 암반 위의 수운정(水雲亭)에 이른다. 깍아지른 강기슭이 그대로 토성이 되었다는 벼랑의 산길은 거슬러 불어오는 강바람에 진달래 꽃잎이 나부끼고 솔바람은 세속을 잊게 한다. 해묵은 참나무 낙엽이 수북한 산길. 미끄럼을 타듯 내려가다 만난 설천정사(雪川精舍)와 영귀정(詠歸亭). 모두 안강평야와 형산강의 경관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했으니 옛사람의 체취가 뭉클하다.
다음날 아침, 미룬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재 선생의 종손 이지락씨를 무첨당(無添堂)에서 만났다. ‘조상에 욕됨이 없게 한다’는 당호처럼 젊은 종손은 매우 겸손한 인상이다. 그러나 나의 마을그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스케치북 양면에 물(勿) 자형 산마을 구조를 직접 그려준다.
즉 관가정, 향단, 무첨당, 서백당이 양동마을의 중심으로 뼈대를 형성한 다음 다른 건축물이 둥지를 틀게 되었다는 요지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니 눈으로만 확인하려던 마을 지세가 확연하다. 즉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산길은 사실 골짜기로 이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해하려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역시 주인으로 사는 사람의 안목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 산마을 그림이다.
이제 마을 전체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한 만큼 차분히 중요한 건축물과 마을길을 돌며 하나씩 화첩에 담기로 한다. 다시 관가정에서 향단으로, 그리고 무첨당 길목의 대성헌(對聖軒), 육위정(六?亭), 이동건 가옥에 딸린 등평댁, 수동댁에 이른다. 무첨당의 위상은 뒤에 사당을 모신 것과 앞으로 터진 시야에 가문의 서당(강학당)과 정자(심수정)가 직시되는 공간이다.
다음으로 대숲이 우거진 양졸정(養拙亭)을 지나 수졸당(守拙堂)으로 오른다. 반달형 정원이 축대를 끼고 사당으로 돌아가는데 꽃나무가 빛을 다투고 있다. 매화, 살구, 목련, 개나리가 천지간에 환하니 이곳에 사는 주인이 마냥 부럽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자신의 집 당호를 이곳 수졸당에서 쓴 것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담장의 은둔 속에 자족하려는 안목의 건축과 조경이다.
수졸당 뒤로는 솔숲이 무성한데 길은 육위정 사잇길로 경산서당(景山書堂)이 이어진다. 그 아래로 숨은 듯이 모여 있는 수십 채 가옥들. 반대편 산에서도 보이지 않는 둥지들이 월성손씨 대종가인 서백당(書百堂)을 마주보며 자리 잡았다. 먼저 내곡정으로 가던 길목 위의 낙선당(樂善堂)에 머물다가 서백당에 이른다.
입향조인 손소공 때(1454년) 지었다는 이곳에서 이언적이 태어났으니 회재의 외가이자 복지로 칭송받는 터전이다. 당호는 ‘하루에 참을 인(忍) 자를 백 번이나 쓴다’는 뜻으로 역시 조상과 이웃에 누가되지 않으려는 선인(先人)의 뜻이 담겨있다.
대문에서 보이는 난간과 사당이 보이는 열린 공간의 동선. 5백년 수령의 거대한 향나무, 그리고 무엇보다 머물고 싶은 대청마루의 구조는 압권이다. 하루쯤 이곳에서 머물고 싶어 종손 손성훈씨(孫成熏)를 찾으나 외지에 나가 있어 통화만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아늑한 뜨락을 서성이다 뒤란의 디딜방아채 초가까지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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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마을의 봄(402*167cm) |
서백당의 가랍집(집주인을 모시고 관리하던 곳)으로 내려와 이웃한 길목의 이형동 가옥, 사호당(沙湖堂), 그리고 상춘헌(賞春軒)과 근암고택(謹庵古宅)을 살피며 그 구조를 화첩에 담는다. 그런데 방위와 건축공간이 제각기 다르고 변화가 심하다.
뿌리 깊은 느티나무와 대문이 없는 담장. 사랑채와 행랑채의 결합을 보여주는 사호당. 계단식 정원이 아름다운 상춘헌, 그리고 근암고택의 후원은 뒷동산의 추억이 생각나는 곳이다. 향나무가 가리고 있는 사당은 언뜻 보기에 상춘헌에 속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근암고택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주요 옛 건축은 건너편 산 아래의 두곡고택(杜谷古宅)과 영당(影堂), 그리고 산 중턱의 동호정(東湖亭)이다.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의 영정을 모신 영당과 넉넉한 살림을 보여주는 고간채들. 이 풍요를 굽어보는 동호정의 경관을 끝으로 마을길은 안계 저수지로 돌아가는 동선이다. 문화재 사이사이의 집들은 마을 총무 이명환씨를 따라다니며 밑그림을 그렸고 현지에서 사진 현상은 정보화마을 인터넷의 이풍우 선생 도움이 있었다.
또 하루, 다시 한번 앞산(성주산)에 올라 화첩을 펼친 후 만난 가옥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마을 전경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마을 중심에 자리한 교회는 곧 학교 뒤 솔밭으로 옮긴다는 소식이다.
봄바람과 꽃 소식에 피어나는 산마을 둥지들. 현실은 어려워도 바라보는 풍광은 그림 같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소정(小亭), ’길에서 무릉도원을 보다’(2006.2~2006.5)가 연상되는 진경(眞景)이 오버랩 되는 까닭이다. 어쩌면 현실과 이상세계란 손바닥의 앞 뒤,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은 아닐까.
마을일 봄나들이로 분주하여 몇 차례 전화에도 소식이 없던 이장을 이제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하는 시간. 희미한 옛 기억을 되살리는데, 11년 전에 모시던 노모가 이듬해 돌아가셨다 한다. 또한 나를 안내해준 이지락 선생도 가족을 두고 홀로 노모를 모시듯 양동마을은 효(孝)의 근본이 뿌리 깊은 마을이다.
즉 손소 선생이 성주, 진주, 안동 등의 외관직을 택한 것은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특지(特旨)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한편 향단은 이언적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임금이 그의 모친 병환을 돌보게 배려해준 데서 지은 집이라는 내력이 그러하다. 이렇듯 효는 만고의 진리요, 삶의 원천이다.
이제 내일 아침 기차로 상경하기 위해 배낭을 챙겨 시내로 떠나려고 숙소에 이르자 향단을 관리하는 부부(송길준-김해미)가 반색하며 길손을 맞아준다. 집을 비울 때 청소까지 해준 부인은 그 동안 그린 마을 화첩이 궁금하여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때마침 포항에서 온 부부(임문갑-박은해)와 함께 화첩을 펼치자 그림 본 값에 나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하며 즉석에서 부침개를 굽고 동동주를 사와 이별잔치가 벌어졌다.
한 주간 봄볕에 그을리며 산마을을 오르내린 시간. 11년만의 해후가 뜻 깊었던 나날들. 그러나 솔직히 양동마을의 작업은 이제부터일 듯싶다. 수없이 놓치고만 가옥과 경관의 조화. 대숲바람과 사계의 꽃들이 수놓는 흙길. 돌담 속 초가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는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므로.
내 이 아쉬움을 토로하며 인척도 아닌 임 선생이 어찌하여 향단에 사느냐고 묻자 “제가 전생에 아마도 회재 선생님 머슴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붓을 든 길손은 무엇이냐. 어쩌면 그 옛날 개나리 봇짐 매고 정자에 올라 음풍농월하며 묵객 노릇으로 마을에 크게 신세진 일이 있었나 보다. 그 마음빚과 그리움이 오늘의 인연인가.
글·그림= 이호신 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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