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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예배(멀티미디어 예배)의 예배학적 이해
-울산감리교회를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의 강단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예배당의 전면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는 것이 교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예배당이 커서 예배인도자나 설교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대형교회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2층 교회'나 '지하실 교회' 등 개척교회들까지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으니 가히 '열풍'이라 불릴 만 하다.
그렇다면 교회들이 이처럼 대형 스크린을 예배당에 설치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소위 '영상예배'(Multi-media worship)라고 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정보화시대가 도래하면서 교회들은 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여야만 하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것이 영상예배라고 하는 새로운 종류의 예배형태와 만나면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본 연구는 이처럼 최근에 폭발적 수요를 얻고 있는 영상예배를 예배학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성을 따져 봄으로써, 교회들로 하여금 영상예배에 대한 이해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이를 효과적으로 실천할 것인가 하는 방안에 대한 암시까지도 얻게 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으려 한다. 교회는, 다른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영상예배를 도입함에 있어서도 무조건 그 편리함과 효과만을 생각해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학적 관점에서 숙고해 보고, 그 예배학적 정당성을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I. 영상예배의 이해
영상예배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영상예배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영상예배의 이해를 위해 영상예배의 개념과 정의 그리고 영상예배의 형식과 구조에 관해 알아 본 후에, 영상예배가 실제로 어떻게 드려지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1. 영상예배의 정의
영상예배 즉 멀티미디어 예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계방송식 예배'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중계방송식 예배란 예배당이 커서 설교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예배실황을 중계함으로써 예배인도자나 설교자의 얼굴이 어느 곳에서나 잘 보이게 하는 방식을 말한다. 스크린으로 예배실황을 중계하는 방식은 본당에 모든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육관이나 부속 예배당에 앉아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예배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공간적 확장을 꾀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며, 또 같은 예배당 안에 있기는 하지만 사각지대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서 구석구석에 모니터를 설치하는 것도 건물의 단점을 보완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러한 방식들은 모두 예배의 실황을 그대로 중계하여 건물의 외진 곳이나 부속 건물 또는 큰 예배당 안의 먼 거리나 심지어 멀리 떨어진 도시에 위치한 예배당(일명 지성전)으로 그 화면을 보냄으로써 건물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공간의 확장을 꾀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소위 '중계방송식 예배'라고 부른다.
그러나, 영상예배 또는 멀티미디어 예배는 이러한 중계방송식 예배와는 차원이 다르다. 멀티미디어 예배란 글자 그대로 멀티미디어를 사용하는 예배를 말하는데, 멀티미디어란 다중 멀티미디어 또는 복합멀티미디어로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기존의 미디어들 즉 음성, 문자, 영상, 데이터 등의 복합적인 정보 데이터를 컴퓨터와 같은 하나의 환경 아래서 소프트웨어적으로 결합하여 분석, 가공, 저장, 전송할 수 있는 미디어를 말한다." 멀티미디어를 좀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자. 백과사전에서 '개구리'라는 검색어를 찾으면 개구리에 대한 설명이 사진과 함께 나온다. 이 설명 속에는 개구리의 일생, 개구리의 종류, 개구리의 해부도, 개구리와 관련된 이야기나 예술작품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검색어를 CD-ROM 백과사전에서 찾으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서는 이러한 모든 설명과 사진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개구리의 움직임을 동화상으로 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개구리의 울음소리까지도 직접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자료를 프로젝터를 통해 대형스크린에 쏘면 한번에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있으며, 또한 개인의 PC에 다운로드 받아서 개인 학습에 이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미디어를 융합하여 말과 글과 그림을 통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매체를 멀티미디어라고 한다. 박영근에 의하면 이러한 멀티미디어가 제 궤도에 오르면, 인간의 시각과 청각은 물론 후각과 미각과 촉각까지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효과까지도 거둘 수 있다고 한다.
멀티미디어 예배는 이처럼 멀티미디어 기술을 활용하는 예배를 말한다. 멀티미디어 예배를 주도하고 있는 울산 감리교회도 멀티미디어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멀티미디어 예배는 기존의 예배형식을 고수하면서 설교자와 회중을 중계 카메라를 통하여 대형 화면으로 중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방법은 중계예배일 뿐이다. 멀티미디어(복합매체)란 메시지를 전하는 매체를 기존의 음성미디어로만 하던 전달 방법에서 음성, 음향, 그림, 문자, 영상, 미디, 조명등의 미디어들이 복합적으로 사용되어져서 메시지를 표현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예배란 설교 메시지가 멀티미디어로 표현되고 전달되는 예배이다. 이러한 멀티미디어는 성도들로 하여금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전 감각기관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나타냄으로 메시지 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멀티미디어를 예배에 활용하려고 할까? 그것은 단순히 예배의 실황을 전송함으로써 예배공간을 확대하거나 보완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울산감리교회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감각의 차원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예배가 주로 '설교를 듣는 것'을 중심한 청각 의존적 예배라면, 멀티미디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시각적 차원을 확보하고 심지어는 촉각, 후각, 미각의 차원까지도 예배에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보화 사회의 도래에 따른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발맞추려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2. 영상예배의 구조와 형식
그렇다면 영상예배를 실시하고 있는 교회의 예배를 들여다보자. 모든 예배에는 내용과 형식이 있게 마련이다. 예배의 내용이란 기도와 찬송과 설교 등을 통해서 예배하는 공동체가 뭐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 예배공동체의 신관, 세계관, 인간관, 교회관, 재물관 등 신학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예배학 연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예배의 형식이란 기도, 찬송, 설교 등의 구체적인 예배의 요소들을 어떠한 순서로 배열하여 어떻게 예배에서 진행하느냐 하는 것으로서, 이 역시 예배공동체의 생각과 예배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우선 본 연구가 텍스트로 삼고 있는 울산 감리교회의 주일 낮 예배를 분석하여 보기로 하자. 울산감리교회의 주일 낮 예배는 다음의 요소와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1) 찬양
2) 기도
3) 목회기도
4) 찬양
5) 성경봉독
6) 신앙고백
7) 성가대 찬양
8) 화답찬양
9) 설교
10) 결단기도
11) 결단찬송
12) 봉헌 및 축도
13) 친교의 시간
14) 퇴장 찬양
위 예배순서를 볼 때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우선 예배인도자의 문제이다. 첫 번째 순서인 '찬양'과 두 번째 순서인 '기도'는 찬양인도자가 진행하며, 세 번째 순서인 '목회기도'부터는 담임목사가 인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되면 찬양 인도자가 진행한 처음 두 가지의 순서는 과연 정식 예배순서인가 아니면 그저 예배를 준비하는 순서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관심을 끄는 두 번째 순서는 '목회기도'이다. 목회기도란 목회자가 목사로서 책임지고 있는 회중들 개개인과 공동체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특별한 필요들을 매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기도로서,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목회기도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설교 후에 헌금기도와 함께 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에 반해 '개회기도' 혹은 '그날의 기도'(Collect)는 그날의 예배를 위해 드리는 짧은 기도로서 예배의 시작 부분에 위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한국교회는 통상 '대표기도'라는 이름으로 평신도 대표 즉 장로가 설교 전에 기도하는데, 이는 목회기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특이한 점은 울산 감리교회의 예배에서 목사가 설교 전에 하는 기도가 그 위치상의 성격은 '예배기도' 내지는 '그날의 기도'인데 그 이름은 '목회기도'이고 그 내용은 통상적인 간구의 기도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친교의 시간'이다. 성도 상호간의 친교가 예배 순서 중에 오느냐 아니면 예배의 밖에 위치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전통적으로 초대교회에서는 '주님의 평화'를 서로에게 선포하고 빌어주는 형식으로 된 성도의 교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신약에 기록된 '거룩한 입맞춤'(롬 16:6)이나 '사랑의 입맞춤'(벧전 5:14)등에 근거하고 있는 '평화의 키스'는 일반적으로 성찬성례전 바로 앞에서 집례자에 의해서 주도되며 예배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동참하는 상호 인사의 한 방법이다. 이는 주후 4-5세기 초대교회에서는 동 서방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지던 예배의식의 한 순서였다. 그러나 이것이 새신자 소개나 교회 소식 알리기 등으로 사용될 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은 예배시간에 하는 것보다는 예배시간 밖에서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 이유는 광고가 예배의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 교회의 친교 시간이 '축도' 이후에 온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배순서들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맨 먼저는 '찬양과 고백'으로서 약 30분을 차지하며, 그 다음 부분은 '봉독과 설교'로서 약 40분,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은 '친교'로서 약 20분을 차지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예배의 구조가 현대 한국교회의 예배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9세기 미국의 '개척자 예배'(Frontier Worship)와 너무나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개척자 예배는 여러 순서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크게 보아 '긴 찬양'과 '긴 설교' 그리고 '초청'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영상예배는 '긴 찬양'과 '긴 설교' 그리고 '친교'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에 울산감리교회의 영상예배는 19세기 미국의 개척자 예배와 그 구조가 신기할 정도로 닮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은 개척자 예배가 강력한 복음전도 설교 후에 '초청'으로 마무리되는 반면에 영상예배는 '친교'로 마무리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3. 영상예배의 실제
실제로 울산감리교회의 영상예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교회가 제작한 비데오 테잎을 분석하면서 살펴보기로 하자. 맨 먼저 예배의 시작은 '찬양'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에 성가대, 오케스트라, 율동팀, 찬양 인도자 등 다수의 사람들이 강단에 나와서 율동과 함께 찬양을 함으로써 분위기를 돋군다. 강단 위에는 찬양대가 회중을 마주보고 서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찬양대 보다 앞에서 회중을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며, 율동팀은 강단 위와 회중석 앞 그리고 회중석 복도 부분에까지 서서 율동을 한다. 분위기는 매우 흥겨워 보이고 축제적이지만 한편으론 매우 어수선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찬송은 약 20분 동안 7-8곡이 불려지며, 찬송의 역할은 "예배를 여는" 기능이다. 찬송들은 대개 그날 설교의 주제와 맞추어진다.
그 다음은 '고백기도'로서, 회중 각자가 자신의 삶을 회개하는 기도,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한 기도를 2-3분 동안 드린다. 통성으로 하지만, 기도인도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너무 크게 들리기 때문에 회중들이 자신의 기도에 몰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교회의 특별 행사인 '총력 선교대회'를 위한 간구의 기도가 포함되었는데 '고백의 기도' 시간에 왜 '간구의 기도'가 들어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마이크를 통해 들리는 기도 인도자의 큰 음성은 거의 광고 내지는 격문처럼 들린다.
다음은 '목회 기도'로서, 울산감리교회는 이것을 예배의 '대표기도'라고 정의하였다. 이 때에도 총력 선교대회를 위한 기도가 드려졌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예배를 위한 기도 즉 '개회기도'의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교회의 관심사를 구하는 '간구의 기도'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이한 점은 이 때부터는 담임목사가 나와서 인도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때부터 비로소 예배가 시작된다는 뜻인지, 아니면 예배 중간에 예배 인도자가 바뀔 수 있다는 뜻인지 의문이 생긴다.
다음은 '교독송'으로서, 이는 종래의 교독문을 노래의 형태로 바꾸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때에 부르는 노래가 기존의 교독문처럼 시편이나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직접 따온 것이 아니라 보통 찬송가라는 점에서 과연 '교독'에 해당하는가 하는 의문을 던져 준다. 다만 찬송가를 성가대가 한번 부르면, 회중이 일어서서 또 한번 부르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교창'(antiphon)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여지며, 이러한 찬송의 기법은 초대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매우 권장할 만한 찬송방식이다.
성경봉독은 봉독되는 성경을 회중이 일어서서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는 현대 예배운동을 통해서 회복된 초대교회의 봉독방식이며, 따라서 아주 바람직한 형식이라고 여겨진다. 예컨대 미 연합 감리교회의 예식서는 복음서 봉독 때에 회중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의미로서 기립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다만 영상예배와 관련해서 지적할 것은 성경봉독 중에 제공되는 자막처리이다. 그날 봉독된 성경은 고린도전서 11장 51절-58절이었는데,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성경 본문과 함께 자막과 음악을 곁들여 내보내 주었는데, 움직이는 그림이 회중으로 하여금 봉독되는 성경 본문을 깊이 생각하면서 듣는 것을 방해하는 역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자료인 화면이 오히려 청각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신앙고백도 사도신경의 내용이 영상과 함께 제공되는데, 이 역시 움직이는 그림을 보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신앙고백의 내용을 깊이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찬양대의 찬양은 회중이 자리에 앉고 찬양대가 회중을 바라보며 부르는 형식으로서, 찬양대가 '누구에게'(To Whom) 찬양을 하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이는 많은 한국교회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찬양대의 위치와 배열은 찬양대의 찬양목적과 대상을 암시하기 때문에 예배학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뒤이어 나오는 '화답찬양'이라는 제목으로 인해 더욱 강한 신빙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제목만 보아서는 찬양대가 부르는 찬송은 회중을 위한 것이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 회중이 찬양대를 위해 찬송을 하나 부르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울산 감리교회가 화답찬송을 "성가대의 찬양에 회중이 동참하는 뜻에서" 드린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렇다면 '화답찬양'이라는 이름보다는 다른 적당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찬양대가 부른 찬송이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라는 찬송인데, 화답찬송은 276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라는 찬송으로, 이 두 개의 찬송이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는 신앙 안에 있는 가정의 화목함이 주제라면, "하나님의 진리등대"는 선교를 고취하는 내용의 찬송으로서 서로 주제가 맞지 않는다. 더욱이 이날 읽은 성경말씀과 설교는 '부활'에 관한 내용이었으므로 찬양대 찬양과 회중의 화답 찬양, 그리고 설교는 제각각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예배의 일관성이 전혀 없다. 이렇게 되면 회중은 그날 예배의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화답찬송을 부름에 있어서 담임목사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너무 크게 들리기 때문에 회중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데 이렇게 되면 회중은 찬송을 부를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강단 위에서 회중을 마주보고 서 있던 성가대가 화답 찬양 시간에 퇴장하여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또한 예배를 산만하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본래의 목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예배시작부터 강단 위에 서 있던 성가대가 회중석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화답찬양이라는 순서를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회중의 화답찬송 때에도 연신 화면을 내 보내 주는데 이 때에 나오는 화면들이 교회의 전경 등 찬송의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이어서 오히려 회중의 시선과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여겨진다.
설교시간에 제목을 포함한 설교의 모든 내용이 음성, 그림(사진, 지도), 문자, 영상, 음향, 조명등의 수단을 통해 멀티미디어로 보여지는 것은 여러모로 설교를 돕는 효과가 있다. 어쨌든 청각 한 가지에만 의존하여 메시지를 듣는 것보다는 시청각을 이용한 감각의 다차원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에 천국의 풍성함, 그리스도의 은총, 하나님의 자비 등 영적 실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제한된 그림이나 영상이 깊은 상징적 효과를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만을 가져오지 않나 하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하겠다. 더욱이 설교 중에 제공되는 화면 중에는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의 모습도 있고, 심지어 회중석에 앉은 특정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 듣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단기도는 설교 후에 하는 설교자의 기도로서 설교의 내용에 따라 살도록 해달라는 기존의 기도에 결단기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단 찬송 역시 설교와 주제가 맞는 내용의 찬송을 골라 일어서서 부르는 형식이다. 여기에서는 167장,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라는 찬송을 하였으므로 설교와 주제가 일치된다.
봉헌 및 축도는 교회당에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바친 헌금을 결단찬송과 함께 헌금위원이 앞으로 들고 나와 바치는 형식으로서 성서적인 방식이라고 여겨진다. 헌금기도에 이어서 곧바로 축도가 행해짐으로써 예배가 마감된다.
축도 후에 이어서 나오는 친교의 시간은 새 가족 소개, 세례예식, 교회소식, 성도의 교제 및 축하 등으로 10-20분 정도 이어진다. 광고시간에는 "전도합시다" 하는 격려를 서로 교환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이 정규 예배순서에 들어가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매우 긍정적이다. 다만 세례예식이 왜 친교의 시간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예배학적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다. 친교의 시간 이후에 나오는 퇴장 찬양은 예배가 축도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퇴장찬양으로 끝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한다.
II. 영상예배의 가능성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영상예배는 기존의 예배가 주지 못하는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찬송가 가사를 대형 화면에 쏘아 줌으로써 회중들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지 않고 찬송을 부를 수 있게 하고, 또 손을 자유롭게 해 줌으로써 박수를 치거나 몸을 움직이면서 찬송을 부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좋은 점이다. 또한 예배의 모든 순서들을 화면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주보가 필요 없게 된다. 주보에 인쇄된 작은 글씨들을 읽으면서 예배드리는 것은 눈을 바쁘게 하고 고개를 떨구게 하기 때문에 예배의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멀티미디어 예배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해 주기 때문에 분명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영상예배는 설교에 있어서도 강점을 가지고 있다. 성경지도, 성경본문, 소제목 등 여러 가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또한 설교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보조화면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들려주기만 하는' 기존의 설교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근은 이것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멀티미디어 예배의 핵심은 말로만 듣던 복음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훨씬 실감을 더함으로써 확신에 이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영상예배가 지닌 이러한 장점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한국교회의 예배가 대부분 '앉아서 듣기만 하는' 예배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 한국교회의 예배는 예배 시간의 절반 이상이 설교이고, 그 설교는 듣기만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회중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수동적인 참여를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매우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 이외의 요소를 살펴보아도 회중 대표(장로)의 긴 기도, 성가대의 긴 특별찬송 등의 순서에서 회중이 할 일이란 단지 듣기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회중의 능동적 참여가 지극히 절실한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멀티미디어예배는 회중에게 감각의 다차원성을 확보해 준다는 장점을 지닌다. 앉아서 듣기만 하던 회중들이 멀티미디어를 통해서 나오는 음향과 휙휙 돌아가는 화면을 보면서 매우 신기해하고 무엇보다도 예배를 지루하지 않게 느낀다는 점이 영상예배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영상예배의 장점이자 곧 한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영상예배는 기존의 '듣는 예배'에서 '보고 듣는 예배'로의 전환 즉 '청각위주의 예배'에서 '시청각 위주의 예배'로 진전되었을 뿐, 미각이나 후각 또는 촉각을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초래된 변화가 감각의 한 차원을 높였을 뿐 더 발전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영상예배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그냥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한 번의 예배를 위해서 수많은 영상 자료를 준비하고 그것들을 순서에 맞추어 배열하고 편집하여 예배시간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영상을 띄워보내는 일은 참으로 많은 준비를 요하는 일이다. 그 준비성만 보아도 벌써 예배의 절반은 이미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영상예배는 시대적 흐름을 잘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다. 시대가 변하여 아날로그시대는 가고 디지털 시대가 왔으며, 논리와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감성과 직관에 호소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정보화 시대이며, 젊은 세대는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구어(口語)보다는 느낌을 제공하는 아이콘(icon)에 더 의존한다. 이제 의사소통은 말이 아닌 그림과 이미지가 더 효과적인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잘 부합하는 것이 바로 영상예배이다. 영상예배는 모든 것을 디지털화한 그림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신세대들에게는 아주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영상예배가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초신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찬송이 무엇인지 교독문은 무엇이고 사도신경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그들에게 화면을 통해서 텍스트를 제공해주고 영상을 통해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줌으로써 예배의 내용을 알게 하고 예배에 쉽게 적응하게 하는 것은 초신자들을 교회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III. 영상예배의 한계성
영상예배가 이렇듯 분명한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예배를 위한 대안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서, 예배의 성성(聖性) 즉 신비감이다.
예배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정점으로 하는 '부활절의 신비'를 중심적으로 표현하여야 한다. 이는 예배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며,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 경외감과 그리스도 중심성, 종말론적 성격 등의 개념들과 함께 기독교 예배를 규정짓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이러한 개념들을 잘 표현하고 반영하여야 한다. 그러나 영상예배는 이러한 예배신학적 개념들을 잘 담아내지 못한다. 아무리 멀티미디어라 하더라도 이러한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들을 영상으로 담아내기에는 본질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초월성을 화면에 어떻게 담을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어떻게 영상으로 담을 수 있겠는가? 인위적으로 이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어색함과 부작용만을 가져올 뿐이다.
두 번째로, 설교의 문제이다.
확실히 멀티미디어를 동원한 설교는 효과적이다. 설교의 요점, 성서지도, 관련 그림 등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현대는 미디어의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과거처럼 단순히 음성만이 아닌 멀티미디어를 통해 들려져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예배는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이라는 사실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도 원거리 만남에서야 전화나 화상 등의 '미디어'를 필요로 하겠지만, 진정한 만남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나는 것이요, 또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이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만나는데 굳이 미디어를 필요로 할까 하는 근원적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예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진정한 합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미디어가 중간에 개입함으로써 진실한 인격적 만남이 오히려 방해를 받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점에 관한 최인식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장 멀티미디어적인 예배는 매체가 배제되고 인격과 인격 사이의 간주체적인 만남이 주어지는 때에 가능하다... 교회는 본래적으로 간접 경험의 공동체가 아니라, 직접 경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미디어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만남의 직접성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행위는 가능한 한 탈 미디어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나와 너, 나와 우리의 만남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다 직접적이며, 인격적이며, 전체적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멀티미디어 예배에서도 설교는 여전히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된다. 어차피 설교는 설교자가 말하고 회중은 듣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쌍방향 의사소통으로서의 설교는 그다지 실현되는 것 같지 않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사항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해야 하고 회중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다만 멀티미디어 설교가 지니는 장점은 전술한 바대로 그림과 지도, 도표 등을 곁들임으로써 전하는 메시지를 회중으로 하여금 잘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영상예배의 장점은 이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셋째로, 영상예배는 기존의 한국교회 예배가 안고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인 '회중의 수동적 참여'를 그다지 개선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예배의 시작 부분에 율동팀과 함께 하는 활기찬 찬양의 시간에도 회중은 율동팀이 '신나게' 하는 율동을 보기만 할 뿐 따라하거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회중은 여전히 좁고 긴 터널같이 생긴 장의자 속에 '갇혀' 앉아 있으며, 예배시간 내내 회중이 할 일이라고는 '들리는 소리'를 듣고 '보이는 영상'을 보는 일이다. 더욱이 모든 내용을 화면에 쏘아주기 때문에 성경찬송이 필요 없는 아주 '편리한' 예배인지는 모르나 이점이 오히려 회중을 더욱 더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회중은 예배시간 내내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넷째로, 화면의 정당성 문제이다.
영상예배는 예배의 '모든 것'을 화면으로 보여주려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예배시간 내내' 화면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하다보니까 부작용이 따르게 된다. 전술한 바대로 성경봉독 때나 성가대의 찬송 시간 등에서 내용과 상관없는 화면을 보여줌으로써 초점을 흐리게 하거나, 설교 시간에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의 모습을 보여준다든지 심지어 특정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일 등을 함으로써 오히려 설교를 방해하는 일, 자막에 신경을 씀으로써 오히려 청각을 등한히 하게 하는 일 등이 영상예배의 부작용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은 이미 최인식 교수가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적합하지 않은 그림 자료가 성경의 본래 의미를 왜곡시키기 때문에 동영상이나 정지화상을 보조자료로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충분한 신학적 검토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 하다가는 오히려 부작용만 커지고 예배를 망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멀티미디어 예배라고 해서 예배 시간 내내 화면을 내보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꼭 필요한 시간에만, 그리고 신학적으로 적합한 내용만을 화면으로 제공하겠다는 방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섯째로, 영상의 오용과 남용에 대한 문제이다.
고정된 그림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그림(동영상)은 보는 사람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며, 심지어 보는 사람을 화면이 주는 의미나 또는 제작자의 의도 속으로 밀어넣는 힘이 있기 때문에 회중은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에서 밀려오는 화면의 의미나 제작자의 의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회중이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켜야만 하는 회중 참여의 수동성과는 약간 성격이 다른 것으로서 영상의 '일방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중은 거대 화면을 통해 자신에게로 밀려오는 영상을 보아야만 하며, 그 영상이 주는 의미에 의해 강요당하고 지배당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제작자가 회중의 감정을 조종하거나 조작할 수 있게 되고 회중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만민성결교회가 성도들을 속이기 위해 영상을 조작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므로 영상예배를 위해 영상을 제작함에 있어서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된다.
또 하나는 상징성의 문제이다.
종교와 예배는 상징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기독교가 지닌 최대의 상징이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서 있다. 그래서 교회는 대대로 십자가를 강단 벽의 중앙에 걸어놓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영상예배가 도입되면서 십자가가 강단 벽의 한쪽으로 밀려나거나 심지어 제거되기까지 하고 그 자리를 대형 스크린이 대신 차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분명 좋은 모습이 아니다. 십자가가 치워진 교회당, 바퀴 달린 강대상 등은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도 주님의 말씀인 설교도 일시적이고 편의적 이유로 인해 한쪽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암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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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사항은 멀티미디어가 지니는 기술문명에 대한 예배의 의존성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행위이다. 멀티미디어는 어디까지나 보조수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멀티미디어를 사용하게 되면 예배가 완전히 기술에 의존하게 된다. 특히 전기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증거는 바로 정전시의 상황이다. 필자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멀티미디어를 사용하였었다. 주일 예배 때에 찬송가는 물론 교독문과 사도신경, 성경본문 등을 모두 화면에 보내 주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는 사태가 있었다. 한참 찬송이 진행되던 중이었는데 정전이 되자 화면이 꺼졌고, 사람들은 찬송가 가사를 외우지 못해 입만 벙긋대고 있었다. 물론 당황해 하는 담임목사님과 우왕좌왕 하는 부교역자들의 모습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예배가 완전히 전기시스템에 의존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냥 인간들끼리 하는 행사라면 그런 일을 한 날의 해프닝으로 치부한다지만 예배는 어디까지나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는 인간의 최고의 행위이다. 추호의 빈틈이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에 예배가 기계에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냐 하는 것을 재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예산과 인력이 막대하게 든다든지 화면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조명을 꺼야 하다보니까 설교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지엽적인 문제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가는 말
멀티미디어를 예배에 활용하는 문제는 신학적이고 예배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단순히 그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또는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가볍고 피상적인 발상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영적인 행위이며, 또한 예배는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에 영상예배는 기존의 '청각 중심'의 예배에서 '시청각 중심'의 예배에로 감각의 차원을 한층 확대하였다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배에서 손을 자유롭게 하고 주보나 찬송 또는 성경읽기 등을 위해 떨구어야만 했던 고개를 들게 하였다는 장점을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들은 멀티미디어가 가지는 한계성 내지는 위험성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보면 멀티미디어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분명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의사소통도 매체도 변하고 있다. 언제까지 옛날의 방식을 고집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대 기술문명을 과감히 수용하여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수용하느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멀티미디어를 예배 외에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기독교 교육, 전도와 선교, 친교, 상담, 봉사 등 모든 면에서 멀티미디어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쌍방향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 수단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시대를 분별하고 문명을 비판하여 교회의 삶과 목회에 활용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교회는 창의적이며 선도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입장을 굳게 견지해 나가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참 뜻을 옳게 받들어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