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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道詵)국사께서 창건하신 대가람으로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 하시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치셨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5층석탑(보물 제1433호),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월출산 남쪽 도갑산(해발 376m)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도량으로 신라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원의 중창은 1456년(세조2년) 수미(守眉)왕사에 의해서였다.
수미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고,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 대적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원중창은 그 후로도 계속 진행되었는데 '억불숭유'의 열악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대규모
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도갑사가 불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1653년(효종4년)에는 '도선수미비'와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가 세워졌는데, 당시
영의정과 형조판서 등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후로도 사원의 중수는 계속 이어져 1677년(숙종3년)에는 당간석주를 세웠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石槽)를 조성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연담 유일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당시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석전유해'를 편찬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더구나 1977년 참배객들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웅보전과 안에 모셔져
있는 많은 성보들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차츰 옛 가람의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 도갑사 홈페이지-
▲무위사 순례를 마치고 도갑사로 가는 도중 차창 너머로 보이는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국립공원 월출산,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산, 지리산 등 남도의 산들이 대부분
완만한 흙산인데 비해 바위산인 월출산은 차라리 설악산과 비슷하다.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한국에서 가장 긴 빨간색 구름다리가 왼쪽 위에 보일듯 말듯한다.
▲일주문 / '月出山 道岬寺'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일주문 양쪽에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다
歷千劫而不古 (역천겁이불고) 천겁이 지난 데도 옛일 수가 없고
恒萬歲而長今 (항만세이장금) 만세가 흘러도 언제나 오늘일세
▲일주문 안쪽 / 德海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큰 글씨로 선종사찰 중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국중제일선종대찰(國中第一禪宗大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탈문 (국보 제50호 1473년 조선 성종4년 건립)
妄念(망념)만 걷어내면 解脫(해탈)을 얻을 것인데....., 망념을 걷어낼 복을 짓기 위해 우리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원들이 합장 반배하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 서고 있다.
해탈문을 보수중이어서 사진에는 해탈문이라는 현판이 없으나 아래 작년 사진을 보면
'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과 안쪽에 '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조선시대 명필)가 대흥사 해탈문에 쓴 글씨를 그대로 옮겨 편액을 새겼다고 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이며, 좌우 바깥쪽 칸에는 사찰의 양쪽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었고, 안쪽에는 좌우로 각각 목조문수동자상, 보현동자상(보물 제1134호)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부석사 조사당(祖師堂 : 국보 제19호)과 동일한 계통이나 특이한 점은
공포부분이 다포계통(多包系統)의 형태로 되어 있어 주심포(柱心包)집이면서 다포집 양식의
수법(手法)을 혼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주심포집 양식에서 가장 많이, 또 구체적으로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가장 뚜렷한 유구(遺構)로서 흥미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드문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목조문수·보현동자상(보물 제1134호 조선시대)
도선국사 성보관으로 이운하여 봉안하고 있음.(사진은 문화재청에서 다운받음)
▲위 사진은 작년 5월 월출산온천관광호텔에서 1박하면서, 영암군청 옆에 있는 40년 전통과
수차례 남도음식축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문희례 할머니가 직접 밑반찬을 챙기는 <중원회관>
에서 식사하고 도갑사, 무위사, 벌교 꼬막마을, 여수의 간장게장이 유명한 '황소식당'을 둘러볼
때 찍은 도갑사 해탈문입니다.
▲계단의 소맷돌 /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계단 난간머리에 새겨진 태극무늬는 만다라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 대웅보전
1977년 참배객들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웅보전과 안에 모셔져 있는
많은 성보들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차츰 옛 가람의 복원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2005년 주지로 부임한 月佑화상에 의해 "대웅보전"이 중창되어
2009년 4월11일 낙성식을 갖게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복원되었다. 건축형태는
외부중층, 내부통층, 온칸몰림 방식에 건축양식은 조선초기 다포식 팔짝지붕에 막새기와를
얹었다.
▲대웅보전 삼존불 / 주불로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에 아미타부처님 약사부처님
▲대웅보전 주련
佛葉難鳴豈摩能 불엽난명기마능
威光徧照十方中 위광편조시방중
月印千江一體同 월인천강일체동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賁臨法會利郡生 분임법회이군생
華阿方般法涅呪 화아방반법열주
부처님, 가섭, 아란, 마명, 용수, 달마, 혜능 조사님이시여
부처님의 위광(威光)이 시방세계에 가득차고
천 갈래 강에 비친 달은 천 개로 보여도 근본은 하나
사지(四智)에 모두 통달한 모든 보살님도
모두 법회(法會)에 임하시어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네.
그것은 바로 화엄경, 방등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의 呪文이라
*위광(威光) : 감히 범하기 어려운 위엄과 권위
사지(四智) : 부처가 갗추는 4가지 지혜
부연(婦椽) / 한국건축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건물 처마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는 날씬
한 곡선미를 보여주는 부연(婦椽)은 수미왕사가 도갑사를 중창할 때 왕실에서 보내준 80여세의
당대 최고의 도편수가 실수로 서까래 목재를 짧게 잘라버린후 상심하고 있을때, 며느리가 버선
코의 치켜 올려진 모양에서 힌트를 얻어 나무를 덧댈 것을 시아버지께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여
나무를 덧대니 처마가 살짝 들쳐 올라가 오히려 건물이 더 아름다워졌고, 이후 한국건축의 특색
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이후 효성스런 며느리의 슬기를 기리는 의미에서 며느리 부(婦),
서까래 연(椽) 을 써서 부연(婦椽)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층석탑(보물 제1433호)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전체적으로 균제된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석탑이다.
▲미륵전 가는 길목에....
▲하얀 방광이 중생들을 인도하려는 듯 미륵세계로 들어가는 용화문이 저 위에 열려 있다.
▲미륵전 /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아담한 전각이다.
미륵전에 걸려 있는 주련은 마명보살이 지은 대승기신론의 귀경게 입니다.
歸命盡十方 最勝業徧知 귀명진시방 최승업변지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색무애자재 구세대비자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급피신체상 법성진여해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무량공덕장 여실수행등
시방세계 그 어디에서든 최고로 수승하시고 가장 훌륭한 행업을 하시는 분, 그 육신은
어디에나 걸림이 없으셔서 자유자재하시는 분, 그리고 대자대비로 세상을 구제하시는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시방세계 그 어디에서든 그 육신의 체성과 모양이 법성이시며 진여시며 거대한 바다이신
그 법에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시방세계 그 어디에서든 한량없는 공덕을 품으시고 한결같이 진실되게 수행하시는 모든 승가께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조성시기를 10~11세기초로 추정.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도 일부
옷 문양이나 4각 박형의 좌대는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손의 모양은
석가모니불 수인인 항마촉지인이지만 미륵부처님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높이 300cm로서, 광배와 본존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다. 상호는 원만한 모습이며 나발의 머리
에 육계가 솟아 있고 눈과 코, 입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는 주형
(舟形)으로 머리 위와 그 양쪽에 3체의 화불이 의미하게 새겨져 있으며 머리 위에는 8엽의 연화
문이 드러나고 그 주변에 당초문과 화염문이 음양각으로 새겨졌다.
월출산에서 내려오는 기운이 이 자리를 지나 도갑사 대웅보전에 들이치는 형국이기 때문에
이를 누르기 위해 돌부처님을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풍수적으로 기운이 강한 곳이며,
기운이 강한 만큼 정성껏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방향으로 기운이 작용하여 많은 이들이
기도성취를 얻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고찰 순례단원들에게도 미륵전을 필히 참배토록 권유 하였습니다.
▲계곡물이 시원합니다. 여기에 그냥 발 담그고 쉬고 싶은 생각을 누르느라.......
▲오른쪽에 우리 순례단원들 시원하겠습니다. 고찰순례와 피서를 겸했으니 복이 많습니다.
◆용수폭포
미륵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 미륵전을 끼고 돌아 흐르는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였다" 는 전설이 있으며, 그 깊이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 갔다고 한다. 지금은 수심 약 2m 정도이고, 수폭은 5m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쏟아져
산사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 산신각(山神閣)
토속적인 산신을 호랑이와 함께 그려 모신다. 우리나라 특유의 산신숭배사상과 관련이 깊은
전각으로 불교 도입 초기에는 없었으나, 고려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들어오면
서 많이 조성되어 현재 대부분의 사찰에 건립되어 있다.
▲천불전
▲명부전 /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본래 수미대사의 중창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1년에 복원된 것이다.
▲ 국사전(國師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을 봉안한 전각에만 殿을 붙이고, 그 외는 閣 등을 붙이는데, 殿을
붙인 것이 이례적이다.
◆수미왕사비(守眉王師碑)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13세에 출가하였고,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 임금이 그 스승(왕사)으로 모셨다.
선조 14년(1581)에 비가 넘어져 새로 세운 것으로, 인조 7년(1629)에 시작하여 인조 11년(1633)
에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로서는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유행하였던 양식과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 이수에는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구름무늬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 귀부의 거북 머리가 용의 머리처럼 바뀌었으나, 목이 짧다. 앞발과 뒷발의 발톱이 다섯개
씩이다. 거북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이 매우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 석조(石槽)
물을 담아두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였던 일종의 돌그릇이다.
표면에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숙종 8년(1682)에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 15차 2번째 순례 사찰인 도갑사 참배를 마치고 환희심에 차서 해탈문을 향하고 있습니다.
▲ 해탈문 밖 속세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도갑사를 창건하신 도선국사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도선은 15세(841)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낙발(落髮)하고, 동리산 혜철대사(棟裡山 慧撤大師)
로 부터 "무설지설 무법지법(無設之說 無法之法)"의 선리(禪理)를 배우고 환하게 깨달았다.
23세때(849)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후 도선은 37세까지 15년간 일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운수행각의 길에 나선다. 15년간의 두타행(頭陀行)을 끝낸 도선은 37세(863)가
되어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의 옛 절을 고쳐 이절에서 35년간 머물면서 말없이 않아서 수행하니
모여드는 제자가 수백명이 되었다.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도선국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약쑥으로 삼아 병든 산천을
치료하고자 한 것입니다.
산천에 결함이 있는 곳은 불상으로 억제하며, 산천의 기운이 달아나는 곳은 탑을 세워 멈추게
하고, 배역(背逆)의 산천기운은 당간을 세워 불러들이고, 해치려 드는 것은 방지하고, 다투려
하는 것은 화해시키며, 좋은 것은 북돋아 키우고, 길한 것은 선양케 하여, 비로소 천지가 태평
하고 법륜(法輪)이 스스로 굴러가게 된다고 하니,
태조 왕건이 감복하여 모든 주현(州縣)에 칙령을 내려 비보사탑(裨補寺塔)으로 총림과 선원을
건설하고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니 그 수가 3500여 개소(기록에 따라서는 3800여 개소)에 달하였
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산천의 병은 모두 가라앉았고, 후삼국의 전란으로 피폐한 민심은 화순
(和順)하였으며 도적은 사라지고 나쁜 일은 사라져버려 삼한의 내부는 통일되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도선국사의 출생에 관한 전설로 도갑사 순례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겨울에 성기동(聖起洞)의 한 처녀가 통샘에서 빨래를 하다가 오이 하나가 관음천을 따라 떠내려
오자 그것을 건져 먹었는데, 그 후에 처녀가 아이를 배어서 낳게 되자 부모가 부끄럽게 여기고는
아이를 구림의 국사바위 위에 버렸다고 합니다. 처녀가 가서 보니 비둘기가 내려와 아이에게 날개
를 깔아주고 먹이를 갖다 주면서 기르고있었다고 하며, 그 부모들도 신기하게 여겨서 아이를 데려
다 기르니 아주 영특하였다고 합니다. 비둘기숲 즉 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여기
에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참고홈피 : 도갑사 홈페이지)
오후 2시 40분 15차 세번째 순례고찰인 장흥 보림사로 향한다.
첫댓글 더디어 이번 순례를 완성하였습니다. 항상 단장님의 순례기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염치 없지만. ... 너무 자상하시고 정성이 가득한 순례기 그저 감사드립니다. 카메라를 업그레이드 하셔서 그런지 사진도 너무 좋아졌습니다. 전문가 다 되신것 같습니다.
마수리님도 순례기 한번 올리심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