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조용한 혁명
거짓과 혼돈이 난무하는 세상, 참
꽃으로 뿌리내린 비슬산
사월의 민심은
아래서부터 위로
붉게 붉게 번져
천심을 사로잡았다
보이지 않는 손들의
참, 조용한 혁명이다
긴급 뉴스
2016년 9월 12일 저녁 8시 32분 54초
우리는 또 다른 분단 위기를 맞았다
지하 12킬로미터 아래서 뒤흔든 경주 강진
대한민국 땅은 벌벌 떨었다
북한 핵실험이니 사드 배치니
대기업 부도니 판검사 비리니 하는 것들은
한낱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그토록 열 받던 여름
편 가르기 하는 세상 밖으로
일제히 뛰쳐나온 떨림의 목소리
새 판을 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다보탑은 잠든 돌부처를 흔들어 깨웠고
첨성대는 사바세계의 고통을 뼈저리게 전했다
땅 위에선 남북과 영호남이 힘겨루기를 하고
땅 밑에선 유라시아판과 태평양판이 으르렁거리는 한반도
소통 부재는 지신까지 노하게 한 걸까
쩍쩍 갈라진 땅과 맞닿은 민심
하늘의 뜻임을
부글부글 끓어오른 기운 식히고 지나가는
추석 보름달이 둥글게 웃으며 전했다
등나무
등 돌리고 달아나는
봄기운 불끈 잡아당기다
낭패를 본 나무는 안다
속 얼마나 썩어야 등이 휘는지를
양지의 등쌀에 떠밀려
찬밥 신세가 되어본 사람은 안다
속 얼마나 비워야 등 굽힐 수 있는지를
거센 비바람 치는 날
허리 삐끗해본 나무는 안다
등나무의 등이 얼마나 유연한 지를
등성이 한 뼘 먼저 오른 등이
아등바등 뒤따라오는 등 묵을 방 비워주고
한평생 등 굽히며 살아온 등나무
누군가에게
등 한 번 돌린 적 없는 사람은 안다
올곧게 사는 길이 얼마나 고단한 지를
그놈의 나․1
버릇없이
나도 아닌 것이
나처럼 달라붙어
나를 먹는 놈
곰살갑게 굴 때는 귀엽더니
이제는 나를 먹잇감으로 넘보기까지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기도 뭐하고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나
더부살이하는 나를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물어본다
나 먹는다는 건
꼭꼭 숨은 나를 찾는 일
때로는
깜빡깜빡 까먹고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하는
그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환승
구지 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종착역인 대곡을 빠져나가려던 참
구순 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
지하 2층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더니
B2 버튼을 꾹 누른다, 지금 머물고 있는
여기가 오직 이승일 뿐이라는 생각
금세 저승까지 번지고 번져
열린 문 스르르 닫혔다
할아버지 눈치 보며
이승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베이터
침 한번 꿀꺽 삼키더니
저승도 마다않고 쏜살같이 달려갈 태세다
할아버지는 거듭 B2 버튼을 꾹꾹 눌렀다
닫힌 문이 열렸다 다시 닫혔다
이승에서 발 꽁꽁 묶인 엘리베이터
긴급호출 버튼에 빨간 불이 켜졌다
저승이 코앞에 닿은 그 할아버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환생하는 기차 어디서 타느냐고
다급히 내게 물었다
접붙이다
좌익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고욤나무에다 감나무 접붙였다
감나무 눈을 떼다
억지로 고욤나무 눈에다 흙을 바르고 붙였으니
둘 다 눈앞이 캄캄하고 어리둥절했겠다
눈과 눈 경계 허물어진 봄이 되자
고욤나무에서 감나무 이파리 돋았다는
소문이 온 동네 파릇파릇 퍼졌다
눈 떼 붙이고 재미를 본 할아버지
비알 밭에다 면소 다니는 아버지 눈마저 접붙였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좌익으로 몰려
하루가 멀다 않고 감시의 눈초리 피해 다녀야만 했던 아버지
부득이 왼 눈을 떼다 오른 눈에 다급히 접붙였다
서로 다른 두 눈 만나 한 뿌리 내리고 사는 길 틔우며
밭떼기 머슴 노릇하던 아버지
그 이듬해 된서리 맞고 말문 닫더니 눈 감으셨다
고욤나무에 아버지 주먹 같은 먹감 주렁주렁 달렸다
일찌감치 좌우익 바람 스쳐지나간 고향 마을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마흔일곱 먹은 아버지 먹감나무 앞에서
어린 고욤나무 눈물 닦아주고 서계신 아버지, 먹먹하다
기도발
바람 잘 날 없이 잔병치레 잦은 아들놈
그저 몸이나 성케 해달라고
명당이라는 명당 다 찾아다니며
자나 깨나 합장하고 엎드려 절만 하시던 어머니
명당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셨는지
해만 뜨면 비슬산 문필봉 빤히 내려다보는
양리 한복판 경로당 가서 기웃거리십니다
팔순 반고개 훌쩍 넘어서야
기도발 제대로 받으시는지
경로당 고스톱 판만 벌어지면
명당자리 차고앉아
싸 붙인 똥은 소리실댁이 다 주워 먹는다네요
그 끗발로 한 푼 두 푼 노잣돈 모으시는 어머니
밤마다 십 원짜리 동전 세는 재미 솔솔하시답니다
한두레마을 염소 이야기
초등학교 때 나는 염소 동아리 반장을 한 적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로 장학생인 셈이다
가정 형편 어려운 나는
장학금 턱으로 어린 암염소 한 마리를 받았다
소 키우는 집이 엄청 부러웠던 그 시절
학교만 갔다 오면
나는 염소 고삐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 염소가 자라 이듬해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중 수놈은 팔아 중학교 입학금 마련하고
암놈은 건넛집 할머니랑 사는 여자아이에게 분양했다
희망 사다리 오른 그 아이도
어미 염소 되도록 길러 새끼 낳으면
릴레이식으로 건네주는 염소 동아리
염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새끼 낳고 낳아
육십여 호 되는 한두레마을은
어느새 염소 한 마리 없는 집이 없었다
뿔 맞대고 티격태격하던 이웃들
염소 교배시킨 인연으로 부부 되고 사돈 맺는
고삐 풀린 그런 날 더러 있었는데
외박 나온 염소들도 마냥
하늘땅 치받으며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봄날은 갔다
안지랑 역에서
지팡이 짚은 꼬부랑 할머니가 전철 안으로 들어서자
노약자 석에 앉아있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자리를 양보한다
멀찌감치 유리창에 찍힌 두 노인의 초상이
나의 뇌리 속으로 들어와 잽싸게 앉는다
할머니는 맞은 편 창 위에 붙은
결혼 광고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그 앞에 서있는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 사이 봄날은
안지랑 곱창골목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나무, 의두疑頭
등 돌리고 앉은 도반
여럿 궁리 끝에
앞서가는 등이 뒤따라오는 등 업고
S자 걸음으로 등을 오른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적마다
혹 불룩불룩 튀어나온다
나무가 묻는다
저 혹은 누구의 혹이요?
풀리지 않는 의혹
주장자 삼아 짚고
등성이 한 구비 한 구비 오르는 등
나무는 다시 묻는다
저 등을 업고 가는 등은
아등이요?
무영등이요?
첫댓글 축하 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반갑게 시 잘 읽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변변찮은 시편들 읽어주시고 축하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늦었네요. 축하드려요.
안지랑 곱창골목을 빠져나간 봄날은 속이 참 든든했겠습니다. 김욱진선생님 축하합니다. (김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