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의 용면이 발원지인 영산강은 광주, 나주, 영암을 지나며 350리 길을 굽이쳐 흐르며 넓고 푸른 들판과 마을을 풍요롭게 살찌울 것이다. 그리고 영산강 주변을 지자체가 창의적으로 유적지와 향토 음식, 유채밭을 관광 테마공원으로 만들면 관광의 보고가 되어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전남도민이 모두가 잘 사는 꿈과 행복을 만들어 내는 영산강이 될 것이다.
특히 영산강의 수문은 전국 16개 보 가운데 유람선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뱃길이 열려 있어 언제든지 목포에서 영산강으로 배를 띄울 수가 있다. 목포에서 죽산보를 거쳐, 영산포, 승촌보까지 70㎞ 구간은 유람선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고 앞으로 왕건호(100t규모)와 황포돛배 운항을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아,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가 있어 누구나 가보고 싶은 관광지가 될 것이다.
노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나주에 이르러 진산(鎭山)인 금성산(錦城山)을 이루고 그 줄기가 신걸산, 백룡산이 되고 또 한가닥이 동남쪽 다도ㆍ봉황쪽으로 흘러 덕룡산의 줄기가 되어 남평의 월현대산이 되고, 한줄기는 영산포로 뻗어 가야산을 형성하고 또 한줄기는 반남의 자미산, 동강의 백련산을 이룬다. 그리고 그 안에 나주평야가 자리하고 노령의 골짜기 마다에서 흘러 내린 열두 고랑의 맑은 물이 영산강을 이룬다.
나주는 진산인 금성산(錦城山)의 정기를 한껏 호흡하여 영산강가에 광활하고 비옥한 나주평야를 뽑아내었다. 예로부터 곡창 호남의 상징이며 교통ㆍ군사ㆍ행정의 중심지였던 나주는 그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어느 곳에 비할 바 없이 유구하다. 나주는 선사시대부터 영산강유역에 인류가 거주하며 독특한 형태의 문화를 생성시켜 왔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미지국(不彌之國)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으로 발라(發羅)ㆍ통의(通義)라 불리웠다. 통일신라에 이르러 금산(錦山)ㆍ금성(錦城)으로 개칭되었으며 후백제시대에 와서 비로소 나주(羅州)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함에 있어 그 발판으로 삼았던 만큼 고려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부상하기에 이른다. 나주는 왕건과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잡고자 공방전을 벌였을때 왕건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역사의 중앙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나주오씨와 인연을 맺었고 또한 아들을 낳았다. 이가 장화왕후와ㆍ고려 제 2대왕 혜종이다. 고려시대인 983년(성종 2) 전국 12牧의 하나로서 나주목이 되어 5개군과 11개현을 다스렸으며, 고려 현종때 현 전남지방에 유일하게 나주만이 목이 되어 이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거란의 2차 침입 때는 현종이 나주로 몽진와 10여일 머무르며 지금의 심향사(금성산기슭)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는 전라도 지역에서 고려정부를 상징하는 거점으로서의 나주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나주에 진을 두었다가 후에 전라우영이 설치되었다. 그 후 1896년 나주관찰부가 폐지될때까지 약 천년간 306명의 목사가 부임하여 호남을 다스렸던 호남의 웅도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반란사건으로 비화된 기축옥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으며, 영조조의 이인좌난이나 서원조직을 둘러싼 남인과 노론세력간의 끈질긴 경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상인ㆍ향리세력의 성장이 가장 활발하였고, 구한말 보수와 개혁의 다양한 양상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갑오농민전쟁동안 나주는 끝내 동학군들에 대항하여 읍성을 지켰으며 단발령사건ㆍ한말호남의병항쟁ㆍ궁삼면토지회수투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ㆍ나주농업보습학교생들의 만세시위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주무대이기도 하였다. 특히 나주의 금성산과 서울의 삼각산, 한강과 영산강, 남산 등 그 지세가 꼭 서울을 닮았다 하여 예부터 ‘小京' 즉 작은 서울이라 불러 왔다. 전라도라는 명칭이 나주와 전주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나주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영산포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때 조운제도에 의해 영산포에 진(津)이 설치되었다가 한때 왜구의 약탈로 쇠퇴하였다. 당시 왜구들이 현 서해안일대의 섬들을 노략질하여 사람들을 괴롭힐 때마다 피난민들은 영산강을 따라 영산포까지 올라와 머무르곤 하였다. 그러는 사이 섬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조창제도가 부활되면서 세곡을 거둬 저장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국영창고로서 영산창(榮山倉)이 설치되었다. 영산창이 한창 붐볐을때는 나주ㆍ순천ㆍ강진ㆍ광산ㆍ진도ㆍ낙안ㆍ과양ㆍ화순ㆍ동복ㆍ고흥ㆍ무안ㆍ능성ㆍ영암ㆍ보성ㆍ장흥ㆍ해남ㆍ진원 등 17고을의 세곡을 저장하였고, 5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1512년 영산창의 수로가 험난해 해상사고가 많다 하여 영광의 법성창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1960년대까지도 영산포는 포구의 역할을 가장 활발히 수행하여 고깃배며 소금배와 옹기배, 젓갈배들이 몰때마다 드나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현 영산동 40번지 일대가 당시의 선창거리 중심지로서 밤에도 대낮처럼 불이 환할 정도였다. 이와 함께 구한말 목포개항과 더불어 개화기를 거치면서 영산포는 여러 방면에서 전라도의 중심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들이 영산포를 전라도통치의 기반으로 삼고 각종 시설을 설립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교육과 상업시설적인 면에서는 그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해방후 영산강 상류에 4개의 댐이 건설되고 하구언이 만들어지면서 수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또한 육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영산강을 무대로 발전했던 영산포는 영산강의 중심포구로서의 역할을 잃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를 23관찰부로 개혁할 때 16군을 관할하는 나주관찰부가 설치되면서 나주목은 나주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896년 지도군과 완도군을 창설할 때 나주군에 속했던 52개 섬이 떨어져 나갔고, 관찰부가 광주로 이전되었다. 1906년 지방구역정리때 금마ㆍ원정ㆍ종남ㆍ비음면은 영암군에, 삼향ㆍ망운면은 무안군에, 대화ㆍ장본ㆍ적량ㆍ여황ㆍ오산면은 함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관할구역정리때 남평군이 폐군되어 편입되고, 함평군의 장본ㆍ적량ㆍ여황면이 다시 편입되어 왔다. 1929년 나주면과 나신면을 합쳐 나주면이 되었고, 1931년과 1937년에 나주면과 영산면이 나주읍과 영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 평동ㆍ삼도ㆍ본양면이 광산군에 편입되고, 나주와 영산포는 1981년 통합되어 금성시로 승격되었으며, 1986년 유서깊은 이름인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나주시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하나가 되었으며, 1998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1邑 12面 6洞으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산강 세월
고려시대 이후 수운제도가 발달하면서 천년이상의 영화를 간직한 영산포구가 이제는 배가 드나들지 않는 이름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산강을 무대로 발전한 영산포는 나주읍성과는 전혀 다른 맛을 풍기는 도시입니다. 우선 일본인들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들어와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고 또 우리들을 어떻게 수탈해 갔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다리의 이름은 영산교입니다. 지금의 모습은 2001년에 준공된 새로운 다리입니다. 영산포는 포구였기 때문에 포구가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다리가 어떻게 설치되었느냐가 결정되기도 하였습니다. 1910년대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많은 배들이 드나들게 되는데 이때의 포구는 저 위쪽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다리는 나무다리로서 부산 영도다리처럼 배가 통할 수 있도록 다리 일부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다닐 때에는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다리는 홍수가 나면 부서지고 해서 다시 튼튼한 나무다리를 가설하였지만 이 또한 홍수를 이겨내지 못하게 되자 일본인들의 주도로 1930년대 초반에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가설하게 됩니다. 이 다리는 바로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되어 수탈창구의 역할도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건너 다녔던 애환의 다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다리가 생김으로써 영산포구는 지금의 위치에 확정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하여 영산포 도시는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거리가 바로 그 시대 서정(西町)이라고 불렀던 거리입니다. 아직도 일본식 건축물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지역이 뱃길이 끊어지고 선창이 폐쇄하여 경제가 침체되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건물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건물은 그 당시 우체국이었고, 이 건물은 그 당시 십팔은행 영산포지점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보고 계시는 이 거리가 바로 원정(元町)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일본인들이 거주를 시작하여 서쪽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영화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군의 아들'이었고, 드라마는 70년대 시골을 무대로 한 ‘죽도록 사랑해'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시 나주에서 제일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입 니다. 1935년경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청기와는 물론이고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해서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구로즈미는 일본 후쿠야마(福山) 출신입니다.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영산포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농지를 구입하여 임차농업을 시작한 지주입니다. 그는 조선농회에 가입하여 농지확보에 나섰으며, 가마니회사, 창고 금융회사를 운영하여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무려 1,100여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되는데, 이후로도 조선가마니주식회사, 전남전기주식회사, 조선식산주식회사, 영산포운수창고회사를 경영하면서 나주지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1933년에는 다시면에 수리조합을 결성하여 백룡저수지를 축조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영산포구가 번성했을 때의 선창이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비릿한 홍어 내음과 젓갈 비린내가 나는 듯 합니다. 이곳은 동양척식회사 영산포출장소가 있었던 곳으로서 현재는 개인 소유의 별장이 되었습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제가 식민지의 토지를 수탈하고자 만든 대표적인 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영산강변의 하천답이었던 궁삼면의 토지를 매수하면서 1910년대 동양척식회사 영산포출장소를 설치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들어와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920년대 목포로 사무실이 옮겨가지 전까지 사용되었던 사무실 터에는 현재 문서고와 숙직실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쉽게도 문서고는 원형이 손상되어 개인 별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숙직실도 개조되어 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터의 규모로 보면 동척 사무실이 대단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등대 모형의 건축물은 흔히 ‘영산포 등대'라 고 불리어 왔습니다만, 실제로는 1915년에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시설입니다. 지금까지는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라고 하였지만 영산포지역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25년경이므로 등대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않기 때문에 수위를 측정할 필요도 없어졌지만 저녁이면 불을 밝혀 영산포구의 역사를 음미하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영산포로 들어오는 돛단배와 통통배의 모습이 보입니다.
나주는 영산강 고대문화의 신비에서부터 근대의 아픈 역사까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타임머신의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