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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갈라디아서 5:22-24
헨리맥스웰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설교를 준비하는데, 그 내용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설명하고 우리도 그 길을 걷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영감 있는 설교문이 작성된 후 그것을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한 초라한 실직자가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에게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짜증이 났습니다. ‘설교 준비하기도 바쁜데 이런 사람이 와서 설교 준비를 방해하다니!’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문전 박대해 돌려보냈습니다. 다음 주일에 맥스웰 목사님은 준비했던 내용으로 설교를 아주 멋지게 마쳤습니다. 설교를 마치려는 순간, 지난 주중에 찾아 왔던 그 초라한 실직자가 교회에 나타나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예배실 문 주위에서 쓰러져 며칠 있다 죽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님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과연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옳았던가, 아니면 설교 준비를 제쳐놓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옳았던 일인가?’
그는 아주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때부터 이 목사님이 회개하는 심정으로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고 자문하면서, ‘이런 식으로 목회해서는 안 되겠다’하는 각오를 다졌다고 합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은 모든 삶에 있어서 ‘만약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화두로 삼고 살았습니다. 또한 자기 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에게도 이 질문을 하며 살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것을 찰스쉘던 목사님이 신앙 소설로 쓰셨는데 이것이 바로, <In His Steps>(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처럼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성령에 속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이고, 하나님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삶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이요, 성령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뜻대로 사는 것, 성령에 속한 삶이란,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세상과 구분된 거룩한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여기서 ‘오직’이라는 단어의 원뜻은 접속사 “그러나”입니다. 즉 본문의 의미는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또는 “이와는 반대로 성령의 열매는”이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의 열매가 (갈 5:16-21)에서 말하고 있는 육체의 소욕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열매를 맺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있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래 육체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저절로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성령과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하지만, 육체의 열매는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육체이기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화단을 망쳐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꽃밭에 불을 지르면 될 것입니다. 물 속에 잠기도록 물을 퍼부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를 하지 않아도 쉽게 망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잡초가 무성해지면 저절로 망쳐집니다. 어떻게 하면 친구간의 우정을 망쳐 버릴 수 있을까요? 돌아다니면서 그 친구를 마구 헐뜯고 다니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것 없습니다.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저절로 망쳐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망쳐 버릴 수 있을까요? 방탕하고, 법을 어기고, 타락해 버리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대로 나를 그냥 편하게 두면 나는 저절로 망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을 망쳐서 멸망에 떨어지게 할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반대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내 영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내버려두고 살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냥 가만있으면 우리는 저절로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 맞이하는 여러 변화의 기회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육체에 속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와 전쟁에 사용되는 다른 무기들을 개발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은 스웨덴의 화학자였습니다. 그의 형이 죽었을 때, 한 신문이 실수로 형의 사망 기사 대신 노벨의 사망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신문은 노벨을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 죽이게 함으로써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노벨은 이러한 평가에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인류에 유익을 끼칠 업적들을 기리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은 재산으로 노벨상을 제정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변화의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변화된 탁월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이런 변화의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우리의 삶과 성품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한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이 즐겨 외우고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여러분! 성령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미리 약속하셨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 위에 내렸고,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여러 은사를 주십니다.
(고전 12-13장)과 (롬 12장)에 보면 성령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말씀 전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믿음, 예언함, 능력 행함, 방언, 영 분별함, 방언 통역함 등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사는 모든 사람이 다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 따라 다르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는 모두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사를 사람들에게 각자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령한 은사를 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힘쓰길 바랍니다.
성령의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 이상을 갖지만, 사람마다 갖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와 있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9가지 열매, 거룩한 자에게 있는 9가지의 요소-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보면, 한결같이 모두 개인의 인격과 성품과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시면서 성품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말씀하시고 계실까요? 그것은 성품이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사역을 결정합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면적인 품성에 따라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행동이 바르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품의 변화입니다. 인격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인격의 변화가 따라 옵니다.
인격이란 통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도, 비록 9가지나 말하고 있지만 성령의 열매라는 용어는 단수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단수인지 복수인지 구별하기 어려운데, 영어 번역을 보면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The Fruit of the Spirit”이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는 여러 종류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은 하나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역시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단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9가지를 언급한 것은 열매의 종류라기보다는 열매의 다양성을 의미합니다. 포도 한 송이에도 수십 알의 포도 알이 달려 있지만, ‘포도들’이라는 복수로 쓰지 않고 ‘포도’라는 단수를 사용하는 것처럼, 인격에도 여러 요소가 있지만 인격은 하나입니다.
(요 15:1-5)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성령님께 속하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불교학자가 기독교에 매력을 느껴서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정말로 놀랍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되새겨 보아야 할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반감을 갖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가운데 참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이 읽는 유일한 성경책이다.”
이 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이 보는 유일한 성경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삶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는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