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0) 브니엘과 숙곳 |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형 에서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일로 인해 형을 피해 도망쳐 하란에서 20년을 지낸 후 많은 가족과 재물을 소유하여 귀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귀향 여정은 그의 생애만큼이나 평탄하지 못했다. 그중에서 천사와 씨름한 브니엘(Penuel)과 우릿간을 지은 숙곳(Succoth)을 찾기 위해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택시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요르단 지역에 있는 성서 도시들을 찾기 위해서는 대중교통과 차를 빌리는 것보다는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비용면이나 시간 절약면에서 좋다.
브니엘은 요단강 동쪽 얍복강 중류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은 브누엘로 표기되기도 한다. 나는 이곳이 오늘날 제르카 강(성경의 얍복강) 중류에 있고 현재 지명이 ‘텔 에드 다합’이라는 기초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출발했다. 요단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제르카 강을 만나는 곳에서 상류로 얼마쯤 올라가면 큰 길이 나오고 계속해서 2∼3㎞를 더 올라가면 브니엘이 나온다. 초행길이고 특별한 유적이 있는 곳이 아니라서 여러 번 주위를 왕복한 후에야 어렵게 브니엘을 찾았으나 지금은 텔(언덕) 형태로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우기를 맞은 얍복강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만큼 많은 양은 아니고 그저 우리나라 개울물 정도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형으로 보면 그 옛날 야곱이 건넜던 얍복강도 지금의 개울 정도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야곱은 밧단 아람(Paddan Aram)에서 돌아오는 도중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을 지낼 때 천사와 날이 새도록 씨름하게 되었고 날이 새려 할 때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을 브니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뜻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이다(창 32:24∼ 32).
또한 이곳은 숙곳과 함께 기드온이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미디안 사람들을 패퇴시킨 후에 그들을 뒤쫓아갈 때 음식 제공을 거절한 이곳 사람들에게 징벌을 가하고 브니엘 망대를 헐며 성읍 사람들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삿 8:8∼9·17). 이후 2세기 동안 브니엘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폐허가 된 것 같다. 열왕기상 12장 25절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가 브니엘을 건축했는데 그것은 여로보암이 브니엘을 확장하고 요새화한 것을 말한다. 이 성읍은 또 애굽의 시삭(셰숑크)이 점령했던 성읍의 명단 중 53번째로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애굽에 정복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산 사이에 있는 계곡임에도 불구하고 하류로 내려올수록 계곡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게 펼쳐지는 비옥한 토지가 있다. 농산물도 많이 나고 목축업도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강 주위의 토지에서는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올라간 길로 다시 내려와 요단계곡과 평행하게 조성된 포장도로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3.2㎞ 정도 달려가면 도로 바로 옆에 큰 언덕이 왼쪽으로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브니엘을 떠난 야곱이 도착하여 우릿간을 지은 숙곳이다.
숙곳(Succoth)은 오늘날 와디 라예브(Wadi Rajeb)와 제르카강(얍복강) 사이에 있는 고르아브 오베이테(Chor Abu Obeideh)로 알려진 매우 비옥한 지역이다. 요단강 동쪽,얍복강 북쪽 지점에 있는 성읍인 숙곳(수 13:27)에는 동쪽으로는 언덕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요단강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다. 이곳이 바로 시편에서 언급되고 있는 숙곳 골짜기이다.
이 성읍의 이름은 야곱이 밧단 아람(Paddan-aram)에서 그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자기집과 가축 우릿간을 만든 일로 인해 붙여졌다(창 33:17). 그래서 숙곳은 ‘천막’ ‘오두막’ 또는 ‘작은 양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성읍은 헤스본 왕 시혼(Sihon)의 영토 일부분으로 갓 지파에게 주어졌다(수 13 :27). 후에 이곳 주민들은 브니엘 주민과 마찬가지로 기드온 병사들에게 음식 제공을 거절,기드온에게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다(삿 8:5∼9,14∼16). 그리고 솔로몬 당시에는 성전에서 쓸 놋그릇들이 이곳 근처에서 주조되었다(왕상 7:46,대하 4:17). 오늘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은 브니엘과 우릿간을 지은 숙곳을 찾았다. 하나님 나라로 향하여 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여정 속에도 야곱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축복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브니엘에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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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산(이스라엘)
벧산 스키토 폴리스 유적지
벧산 폴리스, 원형극장이 보인다
벧산 (Beth Shean)
벧산 성읍
고대도시 벧산은 하롯계곡과 요단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단계곡을 지나가는 남북교통로와, 이스르엘과 요단동편 지역을 지나가는 동서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벧산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 시대의 역사자료에 이미 언급이 되고 있다. 벧산은 다낙, 므깃도, 이블레암 등과 더불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에 점령되지 못한 가나안의 도시들이었다.(삿 1:27) 사울 시대 이 도시는 블레셋의 통치아래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매었다.(삼상 31: 10,12)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하면서 이 도시를 점령한 것 같고, 그 후 솔로몬은 벧산을 자신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포함시켰다.(왕상 4:12) 벧산은 주변의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원지, 그리고 온화한 날씨로 인하여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하였던 지역이다. 이스라엘의 랍비 중 한사람은 벧산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만약 에덴동산이 이스라엘 땅 안에 있다면, 벧산은 그 문이 될 것이다.” 전략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벧산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방치된 폐허가 되었다. 헬라시대에 이곳은 ‘스키토 폴리스’ (Scythopolis)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스키토인들의 도시’라는 의미의 이 도시명은 아마도 프톨레미 2세 (기원전 285-246년) 통치 때에 용병으로 있었던 스키토인들과 관련된 것 같다. 당시 스키토인들은 프톨레미왕조의 용병으로 이곳 벧산에 주둔하였다. 벧산이 최대의 번영기를 누린 것은 기원전 63년 폼페이가 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이다. 이 도시는 데가볼리 도시들 중 요단강 서편지역에 위치한 유일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데가볼리 도시연맹의 중심적 수도가 되었다. 벧산에는 발굴된 대표적 유물로는 보존 상태가 좋은 로마시대의 대규모 원형극장이다. 기원 2세기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형극장은 약 5000여명 정도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갖추어져 있다. function realImgView(img) { var winObj = window.open("http://blog.daum.net/_blog/goOrgImage.do?url="+img, "", "scrolling=no, resize=no"); winObj.focus(); }
바울의 전도여행과 섬
미항
로마로 압송돼 가던 바울이 무라에서 갈아탄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으로 인해 그레데 섬 동쪽 살모네 앞을 지나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간신히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미항에 도착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행선하기가 위태함을 알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달리야(이탈리아)로 가기를 백부장에게 권했다(행 27:6∼11) 미항(Fair Havens)은 잘 정돈되지 않은 채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명이 의미하는 ‘아름다운 항구’ ‘좋은 항구’라는 뜻 그대로 경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리더노스곶의 동쪽에 있는 하나의 만과 동일시되는 미항의 항구는 동쪽과 남동쪽으로 열려있다. 라새아의 유적지를 발견했던 스프레트 선장은 1853년에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바울에게 드렸던 한 교회의 유적을 발견했다(행 27:8). 성경에 보면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이곳 미항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바울은 이곳에서 겨울을 지나기를 백부장에게 권했으나 그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행 27:7∼15)고 기록하고 있다. 뵈닉스는 미항에서는 배로 3∼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다면 선장과 선주가 말한 대로 몇 시간만 가면 겨울을 안전하고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뵈닉스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시간의 항해만 하면 겨울을 편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데 구태여 불편한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는 바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울의 태도를 더 기뻐하시는 것을 미항을 떠나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 지경에 이른 사건에서 깨닫게 하셨다(행 27:9∼26) 바울이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바울동굴은 항구 언덕 위에 나무십자가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모드로게섬
사모드라게 섬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렀던 곳으로 성경에서 꼭 한번 언급된 곳이다(행 16:11). 사모드라게(Samothrace: 트라키아의 사모스라는 뜻) 섬은 트라키아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그리스 군도상의 섬으로 에게해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그리스로부터 흑해로 들어가는 굽은 뱃길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에는 여행자들과 식민지 개척자들,그리고 상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였다. 이 섬에는 4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펩가리산은 해발 1650m로 에게해의 선원들에게 등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섬에는 BC 8세기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트라키아인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섬을 트라키아의 사모스라고 명명했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이 섬의 꼭대기에 서서 트로이 전쟁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전성기에는 해군기지의 역할도 한 곳이다. 19세기 중엽 ‘사모드라게의 승리’로 알려진 배의 유물이 발견된 후 시작된 발굴작업이 1938년 이후 재개돼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 시대에 건축된 12개의 건물 잔해를 포함하는 ‘위대한 신들의 사원’의 유적을 발굴해냈다. 이 위대한 신들에 대한 예배는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아리스토파네스의 글에도 언급돼 있다. 그 예배의 제사에는 각 도시의 사절과 순례자들이 그리스 전국과 소아시아 지역에서까지 모여들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네압볼리로 가는 도중 이곳을 방문했다(행 16:11). 바울이 탔던 배는 일단 사모드라게 섬에 기항했는데 아마 기항한 곳은 현재 이 섬의 북서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인 카마리오티사 항구였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1938년 이 항구의 변두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바울이 마을 상륙을 기념해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터키의 드로아에서 이곳 사모드라게를 거쳐 유럽의 첫 입항지인 네압볼리로 갔다. 항구에서 6㎞쯤 떨어진 유적지에는 아직도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특별히 니케(Nike) 신의 신전 기둥이 있다.
사모스섬 바티항구
사모스 섬은 터키 트로길라온곶에서 1.6㎞ 지점에 있으며 에게해 동남부 이오니아 제도 중의 한 섬으로 에베소 남서쪽, 밀레도의 북서쪽에 있다. 이 섬은 동서의 길이가 43㎞,가장 넓은 곳은 24㎞ 정도이다. 흰 모래 해안과 마을,그리고 고기잡이 항구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곳을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사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섬의 주요 도시들은 바울 시대에는 자유시였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기오 섬을 떠나서 사모스 섬에 들렀다가 다음날 밀레도로 갔다(행 20:15). 특히 피타고리온 항구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으로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그래서 이 항구 부두에는 삼각형 형태의 피타고라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항구 옆에는 해수욕장,언덕 위에는 교회와 옛 성채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11세기께 이오니아인들로 이들은 일찍부터 무역에 나서서 기원전 620년께에는 지브롤터 해협 밖에까지 진출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폴리크라테스라의 통치로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문학 예술 철학 등 다방면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도가 건설되고 항구와 헤라 신전도 건조되었는데 피타고리온 항구 산중턱에는 당시 바위를 파서 건설한 수로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아테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남쪽에 있는 로도스 섬(행 21:1)의 번영과 함께 쇠퇴하였다. 그후 기원전 133년 오랜 기간 로마의 속주로 있다가 15세기 이후에는 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1923년에 로잔 조약에 의해 그리스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모스 섬의 동남쪽 해안에는 평야지대가 있어 포도 올리브 목화 등이 생산되는데 이곳의 포도는 예부터 맛이 좋기로 유명했으며 오늘날에도 이곳의 포도주는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섬지역치고는 나무가 많아 조선업이 발달했는데 빌린 차로 섬을 가로지르자 지금도 산중턱에서 나무로 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서 가장 큰 도시는 북쪽에 있는 바티항으로 천혜의 입지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해변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는 공공도서관을 비롯해 은행 여행사 영국?독일?프랑스영사관들이 들어서 있고 일렬로 늘어선 쇼핑점과 카페,레스토랑들이 아름다운 해안과 잘 어우려져 바티항의 독특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4만여명이 거주하는 이 섬의 중앙에는 해발 1433m나 되는 케르케테우스 산이 있다. 헤라 신전은 사모스 섬의 예배장소였으며 문화적으로 자랑할 만한 건축물이다. 이곳의 신전은 사모스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기원전 2000년초에 헤라 신전은 투박한 헤라상을 가진 단순한 은신처에 불과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길이 100ft의 헤라 신전이 건축되었고 이후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기원전 7세기에는 더욱 화려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러다가 100년후인 기원전 6세기께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 중 가장 큰 신전이 되었다. 독재자 폴리크라테스가 지배할 당시에는 길이가 108.7m나 되는 이오니아식의 장엄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헤라 신전에는 기둥 1개만 외롭게 우뚝 솟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부서지고 무너진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신전에서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사모스파의 작품인 여성 입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원주를 연상시키는 원통형의 직립상으로 오른손은 겨드랑이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세로로 섬세하게 주름이 새겨진 키톤(chitoon:그리스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남녀가 함께 입었던 옷)을 입고 있다. 이 여성 직립 입상 중에서 잘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현재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케라뮤에스 봉납의 부인상’이다. 이러한 엄청한 규모의 헤라 신전이 있었던 사모스 섬에 오늘날 도시 뿐 아니라 산중턱과 꼭대기까지 쥬도코스 피기 수도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이 이곳에 최초로 뿌린 복음의 씨앗 때문이다
기오섬
기오 섬은 에게해의 동부 중앙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터키 본토에서 직선거리로 8㎞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기오 섬은 남북이 51.2㎞,동서가 12.8∼28.8㎞에 이른다. 이 섬의 가장 큰 항구는 섬 이름과 같은 기오 항으로 오늘날의 명칭은 시오(Chio) 또는 히오스(Hios)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고스 섬에서 레스보스(성경의 미둘레네)로 가려던 헤롯왕이 북풍에 의해 기오 섬에 밀려와 그 도시의 기둥들을 재건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바울 시대에 기오 섬은 아시아의 로마 영토에 있는 자유도시 중의 하나였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노정에서 미둘레네로부터 남으로 항해하여 밤새도록 기오 맞은편 본토에 정박하였다가 다음날 보다 더 넓은 바다를 건너 사모에 도착하였다(행 20:14∼15). 그러나 나는 바울과는 반대 방향인 남쪽의 사모스 섬에서 이곳 기오 섬으로 들어왔다. 이 섬의 최초의 주민은 크레타인과 가리아인들이었으나 이오니아인에게 정복되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이곳을 번창시켰다. 현재 이 섬의 가장 큰 기오 항은 비잔틴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답게 아직까지도 당시의 모습들이 남아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1210년 터키 시대에 세워진 성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조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청색의 대리석이 유명한데 지금도 많은 양의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비단은 프랑스 리옹으로 수출될 만큼 질이 좋으며 그 외에 오렌지 아먼드 유향수지 피혁 등도 수출 품목들이다. 항구의 서쪽에는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인 이 수도원은 1045년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건물 중심부는 기둥이 없는 15.5m 높이의 둥근 지붕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당시의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있다. 그러나 1822년 터키인들에 파괴돼 지금은 모자이크 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기오 섬에는 호메로스를 비롯하여 유명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가우다섬 가브도스항
가우다 섬은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났을 때 간신히 피난했던 곳이다(행 27:14∼16). 가우다섬은 오늘날의 그리스어로는 ‘가브도스’라고 하며 이탈리아어로는 ‘고조’(Gozzo)라고 한다. 이 섬은 그리스 최남단에 있는 작은 섬이다.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항해 중 풍랑을 만나 그레데 남쪽 해안을 따라 표류하다가 이곳 가우다 남쪽 아래쯤 왔을 때 간신히 피난할 수 있었다(행27:15∼16)
로도섬 아크로린도스
로도섬 아크로린도스 바울 도칙기념교회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들른 로도(Rhodes) 섬은 고스 섬 남쪽으로 85㎞쯤, 터키 소아시아의 해협으로부터는 약 17㎞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작은 섬이다. 에게해 대부분의 섬과 마찬가지로 로도 섬도 터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그리스에 속해 있다. ‘로도’는 섬 이름인 동시에 항구 이름이기도 하며 그 이름의 뜻은 ‘장미꽃’이다. 섬의 크기는 에게해에서 그레데 다음으로 크며 너비 67.2㎞,길이 27.2㎞가 된다. 이 섬은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숲이 무성하고 농산물과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도중 고스를 떠나 이곳을 거쳐 바다라로 갔다(행 21:1). 바울의 배가 정박한 곳은 공항 근처의 로도 항구가 아니라 남쪽에 있는 린도스라는 항구이다. 아크로린도스는 북쪽 로도스시에서 동해안을 따라 약 55㎞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아크로린도스는 마을의 정상에 있다. 아크로린도스에느 바울의 정박을 기념하는 교회가 항구 남쪽 해안에 세워져 있다. 로도 섬의 옛 항구인 만드라키 항구(로도 항구 바로 옆)는 고대 7대 불가사의인 태양신 헬리오스 거상이 있는 곳이다.
고스섬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사도행전 21장 1절에 언급되고 있는 고스 섬은 터키의 밀레도 항구에서 남쪽으로 68㎞ 거리에 있는 비옥한 작은 섬이다. 3만여명이 사는 작은 이 섬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도중 일박하고 이튿날 로도 섬으로 향한 곳이다(행 21:1). 로마 제국이 통치할 때는 자치도시였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는 주치의인 고안의 간언에 따라 모든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오스만제국과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947년 그리스령이 되었다. 오늘날 섬 사람들은 대부분 중심도시인 고스시에 살고 있으며 섬 중앙에는 해발875m의 오로메돈 산이 있다. 지중해성 기후인 이곳은 옛날에는 고운 직물과 포도주가 명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어업은 물론 밀 감귤류 포도 채소류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와 철 등 광산물도 많이 나오고 있다. 고스 섬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출생지이다. 또한 이곳은 화가 아펠테스(Apeltes), 시인 필레테스(Pilletes) 등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5세기께 히포크라테스는 이곳에 의학교를 세웠다. 현재 이 섬의 코스(고스)시에는 2400년전 히포크라테스가 그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그래서 이 섬 서쪽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유적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유적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에 대신전터임을 보여주는 7개의 기둥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2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 또 다른 작은 신전터가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아폴론 신전의 제단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항구 옆에는 바울 도착을 기념하는 그리스정교회가 있다.
멜리데섬 발렛타 항구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다가 도착한 멜리데(Melth) 섬은 오늘날 몰타공화국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남쪽에 위치해 있다. 멜리데 섬은 이탈리아 남부의 시실리 섬 남쪽 약 100㎞,아프리카까지는 약 340㎞ 지점에 있는 작은 섬이다. 현재는 몰타(Malta)라고 불린다. 섬의 길이는 약 29㎞,너비는 13㎞,높은 곳은 해발 258m 정도이다. 남서쪽은 바다와 급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절벽이고 북동쪽 해안에는 크고작은 만이 많이 있다. 멜리데는 지중해를 동서로 횡단하는 여행자나 북쪽에서 남쪽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여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조선소 폐쇄와 수출입 저조로 경제 사정이 매우 나쁜 상황이다. 바울이 이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를 만난 곳에는 기념교회만 세워져 바울이 보블리오를 만났다는 것만을 전해주고 있다. 바울과 일행은 이곳에 도착하여 보블리오를 만나 사흘 동안 그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바울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는 보블리오의 부친을 기도와 안수로 고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병자도 고쳐주었다(행 28:1∼10). 그래서 이 섬의 가장 큰 항구 발레타시 언덕에는 보블리오를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는 보블리오가 바울과 일행 276명을 잘 대접해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 앞에는 보블리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표류하던 바울이 처음 도착했다는 곳은 발레타에서 북서쪽으로 12.9㎞쯤 떨어져 있다. 바울은 금식 절기가 지난 뒤 그레데의 미항을 떠나 항해하다 난파돼 표류하였고 이곳 멜리데 북서쪽에 상륙하였다(행 28:1). 오늘날 이곳 해안을 사람들은 바울만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겨울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춥자 원주민들은 불을 피워 따뜻하게 바울 일행을 접대했다. 그때 뜨거움을 참지 못한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자 원주민들은 ‘저가 살인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했다’(행 28:4)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이 붓거나 쓰러져 죽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신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뱀에게 물린 바울이 죽지 않은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곳 멜리데 섬은 이외에도 중앙의 라바트에 바울 기념교회와 카타콤 등 바울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으며 모스타에는 유명한 모스타돔이 있다.
요나의 무덤(니느웨)
성경상의 니느웨 사건들
모술 전경
요나의 무덤이 있는 에살핫돈 모습
니느웨 유적지
니느웨 성읍 입구
니느웨성에서 멸망을 선포하는 요나 선지자
니느웨(니네베·Nineveh)가 성경에 처음 소개된 것은 창세기이다. 노아홍수 이후 노아와 그 자손들이 세상에 흩어져 살 때 노아의 둘째아들인 함의 계통에서 니므롯이란 영걸이 출생한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곳에 큰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당시 세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니느웨이다(창 10:8∼12).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이며 이라크 전쟁으로 일반인은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모술에서 곧바로 티그리스 강을 건너면 니느웨이다. 니느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세워진 고도로서 이곳의 유적지는 2개의 커다란 쿠윤지크(Quyunjiq·많은 양무리) 언덕과 네비 유누스(Nebi Yunus·선지자 요나) 언덕으로 나눠져 있다. 약 13㎞에 이르는 정방형의 성벽이 에워싸고 있다. 니느웨 성벽의 높이는 30m에 달하며 성벽 위에는 6대의 쌍두마차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그리고 성은 매우 깊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성 내부에는 병영과 무기고,군량창고 등이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니느웨성을 한번 도는데 3일이 걸린다고 요나서 3장 2절에 기록돼 있을 만큼 매우 넓어서 220만평에 달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과 성문을 보면 당시 니느웨의 규모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컸음을 실감할 수 있다. 열왕기하 19장 35∼37절에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18만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치러왔으나 하룻밤에 몰살되었고 산헤립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귀국하여 니느웨로 돌아가 그들이 섬기는 우상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 피살됐다. 니느웨성은 상업이 번창하여 생활이 윤택해지자 범죄가 극심해져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했으나 요나는 이방인의 구원을 달갑지 않게 여겨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치게 된다. 이에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며 회개한 후 니느웨로 가 멸망을 경고,왕 이하 온 국민이 회개함으로써 멸망이 보류되었다(욘 3:4∼10). 그후 BC 606년에 바벨론에 멸망되었는데 이것은 선지자 나훔과 스바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나 3:7,습 2:13). 오늘날 요나의 무덤은 시내 언덕 위에 세워진 에살핫돈 왕궁에 있다.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아들로 피살된 부친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위에 오른 자이다(왕하 19:37). 1845∼50년 발굴로 니느웨의 도서관 규모가 밝혀지고 점토로 만든 서판들과 설형문자 비문도 발굴되었다. 도서관에는 언어학,천문학,점성술,종교적 문헌,법전,과학 서적과 기구,문학과 예술,역사서와 연대표,상업서,각종 서간 등 서판이 무려 2만6000개나 소장돼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니느웨는 이라크의 다른 도시들보다 사원이 많고 고대 앗수르의 수도답게 많은 유적이 있다. 에밀 보타의 발굴에 의해 당시 규모가 많이 드러났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오늘날 모술에는 57만여명이 살고 있으며 시민 대부분은 쿠르드족이다. 기후는 자그로스 산맥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영하까지 내려간다. 연평균 강수량은 400㎜로 남부에 비해 비가 많이 온다. 산업은 중세부터 직물로 유명했으며 바그다드 다음 가는 대도시로 이라크 경제의 중심지이다. 특히 1939년 북쪽 교외에서 유전이 발견된 후 석유채굴기지와 교통요지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 쇠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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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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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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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 하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