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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 있으면서 한 가지 고민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교회 운영, 예배 방식 등이 나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인가 하는 것이다. 단일 민족으로
또한 정주 문화를 가진 민족인 한국인으로써 선교사로 나와서 문화에 대한 적응력과 이해도를 갖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내가 선교사로서 계속해서 주의하며 살피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옳다고 배워온 방식이 선교지에서 내가 섬겨야 할 영혼들에게도 가장 적합한 것이며 하나님도 옳다고 보시는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여쭙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붙잡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가장 옳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자신의 방식을 확산하고 싶어했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그들이야말로 복음의 가장 큰 방해 세력이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문화권에서 비롯된 전통을
타문화권에 확산시키려 할 때 그것이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번에 다루었던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이어 타문화권에서의 복음 전도를 위한 토착화 내지는 상황화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필자가 대학원 재학 시절인 1991년 겨울 이제 막 개방되기 시작했던 중국을 방문하여 여러 성을 돌며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80일간 중국을 일주하며 공산 체제하의 중국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여행 중간의 어느 시점에 필자는 내몽골의
따퉁(大同)이라는 도시에 들러서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예배당 안에는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갈라져서 양쪽에 마루가 있었다. 한쪽 마루에는 남성들이 다른 쪽 마루에는 여성들이 앉도록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복도 양쪽에 몇 명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들이 빗자루 막대기를 들고 서 있었다. 예배를 드리던 중 설교 시간이 되었는데 개중에 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 내 눈을 의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리더로 보이는 자들은 조는 사람들 가까이 가서 빗자루 막대기로 등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나를 더 의아하게 만들었던 것은 등을 맞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왜 때리느냐고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그러한 반응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재미있어 했다. 만약 한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맞은 사람들은 교회를 욕하고 뛰쳐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그런 상황을 경험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사랑의 모습과 행실이 보이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비방했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의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하는 영업소처럼 교역자들이 교인들을 맞이하는 것을
옳게 본다. 미국 교회의 트랜드에 맞추어 구도자들이 쉽게 교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문턱을 낮춰놓기 위해 노력한다. 교역자나 장로가 교인이 예배 시간에 졸고 있다고 몽둥이로 다스리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길을 가다 보면 교회의 입구에
“이곳에는 행복이 있습니다”라고 적혀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대부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과 연단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바로
드러내 놓는 것을 어렵게 느낀다.
“예수님이 여러분 인생의 해답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성공을 위해 필요합니다”가 주요 모토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새로 나온 지체들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해 줄 뿐, 직접 “당신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쉽지 않다.
반면 90년대 초반의 중국에서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인생을 거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사찰에서 제자들이 수행을 하고 훈련을 받을 때, 졸거나 나태한 것에 대해 스승이 막대기로 훈육하는 것은 제자로써는 감사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비장함이 당시와 그 이후 중국에서의 크리스천 인구의 폭발적인 성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음 주간 충칭의 어느 교회를 방문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를 본당 안에서 드리기 위해서는 두 시간 전에
교회에 가야 했다. 예배 30분전부터는 본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인파들이 복도와 심지어는 교회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렸다. 중국
정부가 예배당 확장 공사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나 교회 나오는 숫자는 계속 늘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한국에서는 교회 건물을 키워야 사람들이 는다고 생각하지만 충칭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달랐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영혼에 빈 공간을 느끼게 하시고 진리에 대한 갈증을 주실 때 그 백성들이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무조건 고난 속에 성장한 중국 교회가가진 방식을 본받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가진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 요지는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체제와 문화 그리고 사유 구조에 따라서 교회의 운영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방식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 땅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도 시행착오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배워갔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가 1900년대 초반에 건립된 ㄱ자형 교회 건물들이다. 이것은 당시 남녀칠세 부동석 사상을 가지고 있던 한국에서 남녀가 같이 예배드리기 위해 고안된 건축방식이다. 기역자의 꺽쇠 부분에 해당하는 위치에 설교단을 두고 그 왼편에는 여성석, 우편에는 남성석이 위치한다. 여성석 앞에는 커튼을 쳐서 심지어 설교자조차도 여성 칸을 볼 수 없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로 선정된 금산 교회이다. 이 교회는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테이트(한국명 최의덕•1862∼1929)가 전도한 조덕삼(1867∼1919)의 도움을 받아 세운 교회이다. 그 건축 양식은 전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옥의 양식을 딴 것으로 보인다. 테이트 선교사와 그를 돕는 한국인 영수들은 지혜롭게도 미국식 건물을 짓기 보다는 한국인의 관념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한국인에게 익숙한 예배 공간을 창조해 낸 것이다. 그 상량문에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는데 남자칸에는 한문, 여성칸에는 한글이 사용되었는데 고린도전서 3장 16절이 당시 언어로 적혀 있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 구절을 본 나는 그 의미에 감탄하고 말았다. 이 구절은 당시 교회 리더들의 교회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건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모인 성도들이 교회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테이트 선교사에게 있어서 문화와 생활 관습에 따라 교회의 건물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성결과 변화였다.
그의 가르침은 결국 결실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실례를 그 교회 지도자의 하나였던 조덕삼의 삶의 변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조덕삼은 그의 마부였던 이자익과 함께 금산 교회를 섬기던 중 장로 선택 과정에서 같이 나오게 되었다. 투표 결과 마부 이자익이
당선되자 조덕삼은 그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이며 자신의 마부가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말해 주었다. 주일이 되면 이자익이 강대상에서 설교할 때, 조덕삼은 바닥에 꿇어 앉으며 설교를 들었다. 한편 주중에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 후에 조덕삼과 금산 교회 교인들은 이자익을 평양 신학교에 보내고 목사가 되도록 후원했다. 이자익은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인물로 성장한다.
이 이야기에서 보여지듯이 조선의 유교 질서와 관습을 존중해 주었던 선교사의 섬김 속에서 그 교회 공동체 내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교회 건물은 지극히 조선적인 질서와 세계관을 보였지만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은 봉건적 유교 신분 질서를 넘어서서
섬김과 사랑과 평등이라는 복음의 가치를 삶 속에서 구현해 낸 것이다.
이는 마치 로마 시대에 살았던 바울이 디도서에서 보듯이 노예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가르친 가르침으로 인해 영국이 노예 무역을 법으로 금지하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금산 교회의 예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홍콩의 따오펑산(道風山: 도풍산)에 조각된 연꽃 위에 핀 십자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십자가의 주인공 노르웨이의 루터란 선교사 라이헬트(Karl Ludvig Reichelt)의 이야기는 타문화권 선교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시해 준다.
홍콩의 신계지의 중심인 샤틴에 위치한 도풍산에 도풍사라는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사원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기독교의 성지가 되어 있다. 영국의 여왕이 이 산 전체를 라이헬트 선교사(1877-1952)를 기념하며 기독교 선교를 위해 스칸디나비아 미션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 산에는 루터란 신학교가 있다. 이 신학교는 동남아 불교권과 이슬람권 선교지에서 온 수많은 신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 신학교와 주변 건축물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일반 서구 신학교와는 달리 이곳 건물들은 중국 남방의 한 불교 사원으로 보일 정도로 전통적인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울러 흰 색 벽에 기와 지붕이 산세와 어우러져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라이헬트 선교사가 의뢰해서 요하네스 프립 몰러(Johannes Prip-Moller)라는 덴마크 건축가가 디자인한 것이다. 이러한 신학교 건물 건축 뒤에는 아시아권의 문화 속에 피어나는 복음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이 학교의 교육 이념은 그 산 위에 우뚝 세워진 큰 십자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십자가는 연꽃 위에 피어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 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일, 이것이 바로 이 신학교가 바라보는 아시아 선교의 실체를 상징화한 것이다. 원래
불교 사원이 위치하던 장소가 기독교의 성지로 바뀐 것이야말로 진흙 속에 아름다운 연꽃이 자라는 것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 연꽃 위에 피어난 십자가는 모든 질곡과 아픔과 죄의 문제를 수용해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복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도풍산의 불교 사원이 기독교 성지로 바뀌는 중심에는 노르웨이 출신의 루터란 선교사 칼 라이헬트가 있었다. 그는 1904년 중국 하남성에 선교사로 파견된 이래 지속적으로 불교도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다. 그의 글을 보면 그가 그는 불교의 표현 방식뿐 아니라 문화적인 상징이 어떻게 실체에 대해서 해석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볼
수 있다. 1930년에 홍콩으로 사역지를 옮긴 그는 도풍산을 근거로 해서 그곳에서 승려들과 같이 생활했다. 그는 불교 승려의 복장을 하고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경전을 배우고 또 성경에 대해서 가르치는 일과를 시작했다.
이 일은 당시 중국인과 분리된 선교사 주거 지역에서 살면서 하루의 정해진 시간 동안만 중국인들과 사역을 했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눈에는 이상한 행위였다. 급기야 몇 차례에 걸쳐 노르웨이의 루터란 선교부로부터 세 차례나 호출을 받고 파문 당할 위기를 넘어야 했다. 그의 사역은 오랜 시간 아무런 열매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전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선교부로부터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불교도들과 사역한지 어언 32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도풍사 내의 70여명의 승려들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는 결실이 맺히게 되었다. 절 전체가 변화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1926년에서 36년까지 그가 세례를 준 숫자는 총 82명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개종된 숫자로만 선교의 성공을 본다면 라이헬트의 사역은 실패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역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결과 도풍사의 대웅전은 예배를 위한 채플이 되고 승려가 자던 방은 게스트 하우스가 되었고 수양회와 각종 집회와 기독교 박물관으로 변모된 것이다.
유럽의 교회에서 보는 희랍화된 모습의 성화와는 달리 이곳에서 보이는 성화는 수묵화와 같은 동양화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가 중국 전통과 삶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들 모두 중국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주변 풍경은 중국의 산수를 빼 닮은 것이었다.
라이헬트는 기독교의 진리를 불교도들에게 설명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기독교가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온전하게 완성해 줄 수 있는 길로써 설명해 냈다. 그는 계속해서 직접 불교도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을 도풍산으로 초대해서 불교도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제시하곤
했다. 그 결과 약 1200여명의 불교 승려들이 개종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 들어온 서구 선교사들이 모두 자신의 문화에 대한 우월감 속에서와 자기 방식을 현지인들에게 주입하고자 했을 때 라이헬트는
당시 선교사들의 관심 밖에 위치했던 불교 승려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살며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진리에 대해서 먼저 배우고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들의 사고 방식에 맞춰서 그들과 복음을 가지고 대화했던 것이다. 그는 1946년에 노르웨이로 은퇴했지만 결국 다시 홍콩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그의 사역을 도풍산에서 그가 죽은 해인 1952년까지 멈추지 않았다.
도풍산의 산책로를 따라서 길을 가다보면 작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나온다. 그 벽에 작은 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성경구절이 있다. 그 안에 들어가서 뒤돌아 서면 문 위에 중국의 국부인 손문의 글이 나온다. 자신의 소원은 자신의 민족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위대한 국부 손문의 성장 배경에는 광동성과 홍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을 품고 좁은 길을 간 선교사들의 노고와 눈물과 중보가 있었다. 그 좁은 길을 걸었던 결과가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한 손문이라는 중국이 가장 존경하는 리더의 모범으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에 대해서 자신이 없을 때 물질이나 우리가 가진 매력적인 것들을 내세울 때가 있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선교를 위한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보다도 그런 주변적인 것들에 의존적이 될 때 문제가
생긴다.
몽골에서 보면 이단들은 선교할 때 돈을 내세우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작년에 통일교에서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몽골 정치의 핵심부인 수흐바타르 광장 한 복판에서 평화통일 대행진을 벌였다. 몰몬에서는 큰 돈을 들여서 여러 개의 교당을 지었다. 대체로 보면 이단들이 선교에 돈을 아끼지 않고 쓰는 것을 본다. 그들이 돈을 주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는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심지어는 교회가 그런 방식에 대해서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자칫 재정적인 힘이 있으면 더 활발하게 사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부러워하게 되기 쉽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돈을 받고 그곳에 가는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경우를 본다. “돈을 주는 데는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 것 같아요. 나는 그냥 돈이 필요해서 가줄 뿐이지요.”
돈을 받고 이단들의 교회로 가는 그들도 무엇이 진짜인지는 아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스스로 알고 있다. 우리는 이단과 돈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와 그것을 현지에서 담아내는 삶의 모습이 실은 관건인 것이다.
주일에 기도하면서 초신자들은 보르항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자기 집에 두고 온 우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전도팀이 전도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보르항’을 자신들도 믿는다고 생각한다. ‘보르항’을 믿겠다고 영접 기도를
하지만 그들의 세계관에는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더 나아가 현지인들과 말씀 안에서 삶을 나누고 교제하면서 그들이 스스로가 복음을 수용하고 또 다른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전도팀이 전하는 하나님은 현지인들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보르항’ 중의 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현지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와 사유 구조를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빛도 없고 보람도 없어 보이는 오랜 시간 동안 뼈를 깎는 인내의 과정을 요구하는 일이다.
브루스 올슨의 “밀림 속의 십자가” (현재 “인디오의 친구 브루츠코”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되어 나옴)는 그의 남미 모틸론
인디오 사역의 경험을 통해서 복음을 현지인의 사유 구조 속에서 이해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현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또 그들의 사고 방식과 전통에 관심을 가질수록 우리는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어떻게 복음을 이해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그 문화 속에 깊이 들어감과 동시에 성령의 섬세한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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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용규 선교사님께서 "복음의 토착화와 상황화"라는 제목으로 세편의 글을 쓰신 것을, 제가 읽으시는 분들이 편하시도록 하나의 글로 합쳐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본문의 내용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지만, 내용들의 순서를 읽기 수월하시도록 약간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서 생기는 모든 문제점(예: 매끄럽지 못한 전개 등)은 제 책임이란 것을 밝혀둡니다. 원문은 http://www.nomadlove.org/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Dum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