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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환자는 흔히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Y씨는 3개의 회사를 경영해온 60세의 남자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친구가 의사로 있는 어느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친구인 의사의 생각으로는 Y씨가 평소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또 경영하던 회사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잔여수명이 3개월 정도라고 말래 주었다. 잠시 후부터 환자의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온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친구인 의사는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했는데도 별 효과가 없자 마지막으로 호스피스에게 의뢰하였다. 빨리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호스피스 관계자가 병실을 찾아가 보니 환자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무릎을 약간 세운 채 이빨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난 후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더니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으니 죽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지옥의 공포가 몰려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55세의 말기 위암 환자 B씨는 전혀 아픈 곳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화가 잘 안되는 것 같았고 그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기에 병원에 갔더니 여러 가지 검사 끝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하기 위해 막상 열어 보았으나 위 주변의 림프 결절에까지 전이되어 수술도 하지 못하고 그냥 덮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 항암 치료를 두 차례 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어서 퇴원한 뒤 가정 호스피스에 의뢰되었다. 통증이 심해서 호스피스에 가입한 초기에는 통증 조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조용한 성품이어서 호스피스 봉사자가 집을 방문할 경우 부인이 주로 병세를 말했다. 부인이 외출하고 없을 적에만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그는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공자가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유교사상에는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도덕윤리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B씨도 또한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호스피스 봉사자가 물어 보았다. 그는 한숨을 푸욱 쉬면서 “아무런 희망이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병이 나을 수 잇다는 희망이 없어서 우울하고 죽으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음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 이젠 못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난다. 죽음이란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아니냐. 죽으면 모든 게 정지하고 끝나는 것인데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로부터 며칠 지나서 그는 죽었다. B씨처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해 죽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례가 적지 않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죽음이란 모든 권리를 다 써버리는 것이고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소박하면서도 분별 없이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티베트의 한 린포체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종종 죽음을 하찮게 여겨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누구나 죽는다. 그러니까 죽음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지. 죽음은 자연스러운 거야. 나는 괜찮아.?? 그러나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기독교를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전통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전해 주고 있다. 그 비전은 우리가 지금 영위하는 이 삶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에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현재의 삶을 전부로 여길 만큼 영혼이 메말라 있다. 삶 이후의 삶에 대한 어떤 실제적인 또는 근거 있는 신념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서양에서 생사학을 창시한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종교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 사실의 문제라고 말한다. 사후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종교적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해 바른 지식을 통해 제대로 알고 있느냐, 아니면 잘못 알고 있느냐 하는 지식의 문제라는 뜻이다. 퀴블러로스 박사는 어린이들에게 죽음을 설명할 때 자주 나비의 유충인 번데기 모양의 인형을 사용했다. 번데기 모양의 인형은 퀴블러로스 박사가 직접 만든 것이다. 번데기 모양의 지퍼를 열면 속에서 예쁜 나비 인형이 나온다. 소아암으로 인해 죽음에 직면한 어린 아이를 향해 퀴블러로스 박사는 다음같이 말했다. “여러분의 몸은 헝겊으로 만든 번데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에 의해 여러분의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저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은 사후 생명의 존재를 믿는 편이 정신위생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죽음을 지향하는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정신위생상 유익하다. 죽음을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인생의 후반기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불건강하고 병적이라고 믿는다.” 독일의 괴테도 영혼의 불멸을 말한다. “죽음이란 해가 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눈으로부터 벗어나 볼 수 없게 되더라도 태양은 지평선을 향해 조금도 변함없이 빛나고 있다. 우리의 생명 또한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변함없이 계속 존재한다.” “내세에 대한 희망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죽어있는 셈이다.”
글 :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 : http://www.husp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