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만 교수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설 명절에 길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한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보니 김진만 교수님은 확실히 '옛날 사람'이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교수님을 기억하는 오래된 성공회 신자들'과 '서울교구장으로 치러진 장례에 참석한 서울교구 사제들'이었습니다.
(물론 저처럼 대전교구와 부산교구에서 참석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김진만 교수님은 '성공회 100년사'에도 등장하시는데, 고려대 교수로 계시던 1966년에 성공회에 입교를 하셨고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시면서 동대문교회와 도봉교회(옛 성북교회)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고 세계성공회 협의회(ACC) 위원과 대한성서공회 공동번역 성서 번역위원으로도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제가 태어났을 무렵의 사실들입니다. ^^
그런데 저는 그분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녀님들을 너~~무 좋아하셨던 교수님께서 성가친구회 초대 회장을 지내셨기 때문에 저는 늘 할머니 수녀님들로부터 '베드로 회장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들은 어려웠던 시절에 수녀회를 많이 도와주신 김진만 교수님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제가 만나뵌 김진만 교수님은 몸집이 작고 귀엽게(^^) 생기신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던 제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뜻하지 않게 김진만 교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미문학연구회' 소속 연구자들이 학술진흥재단 사업의 일환으로 '영미고전문학 번역평가사업'이라는 방대한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말하자면 영문학자들이 해방 이후 나온 모든 영미문학 번역물들을 평가한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라는 책 1, 2권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김진만 교수님이 번역하신 '켄터베리 이야기'가 당당히 최고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잠깐 인용하면,
'(중략) 검토 결과 명백하게 부정확하다고 판정된 것은 8개에 불과할 정도로 우수한 번역본이었다. (중략) 이처럼 명확한 오역을 찾기란 매우 힘들고, 또한 부정확하다고 판별된 것들 중 상당수가 원문의 의미를 오해해서라기보다는 원문의 분위기를 우리말로 좀 더 잘 전달하고자 고심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중략) 우리말의 적절한 리듬 구사, 원문의 성격에 따라 어려운 문자나 구어체의 적절히 배합하는 솜씨를 보고 있자면 마치 판소리 한판을 듣고 있듯이 절로 흥이 나서 우리말 번역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문학작품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보기 드문 훌륭한 번역이다'
'켄터베리 이야기'는 켄터베리로 순례가는 30여 명이 런던에서 켄터베리까지의 왕복 길에 한 사람이 두 개씩의 이야기를 한 것을 모은 것으로 이 책을 쓴 제프리 초서는 13세기 후반의 인물입니다. 말하자면 중세영어로 쓰여진 책입니다.
김진만 교수님은 중세영문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였던 것입니다.
'켄터베리 이야기'는 영국문학사를 공부하는 영문학도라면 누구나 마주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같은 책입니다.
이 어려운 중세영어를 마치 '판소리 한판'처럼 번역해 내신 분이 김진만 교수님입니다.
교수님 덕분에 저같은 영문학도들은 중세영어의 복잡한 산을 큰 고생하지 않고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빈소에서 만난 이 화환은 저를 미소짓게 했습니다.
'아.. 정말 이분이 영문학자가 맞구나' 했다는...
이번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받은 은혜가 하도 커서 김진만-2,3까지 글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머지는 사진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영문학자로, 성공회 신자로 다양한 삶을 불꽃처럼 살다가신 분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은총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교수님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평신도회'를 조직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김진만 교수님의 활약을 그려보며, 평안한 안식을 빕니다.
별세저녁기도를 인도하시는 정길섭 신부님
대성당에 교인들보다 먼저 와 계신 베드로 회장님. ^^
여든 여덟번의 타종.
입당순행
교수님의 권유로 사제가 되셨다는 박경조 주교님의 설교
이어지는 애제자 이재정 신부님의 조사,
그리고
교수님이 주축이 되어 창단된 성공회대학교 성미카엘 교수중창단의 특송 '내 평생 가는 길'
폐부를 깊이 찌르던 조인형 교수님의 파이프오르간 연주, 'You raise me up'
저에게 이번 1박 2일 여정은 마치 하나의 순례길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안한 잠자리를 내어 주신 성가수녀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구미 프란시스 수녀회 젬마수녀
첫댓글 수녀님!!
소식 전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장례식에 참석 못하여서
장례식 사진과 교수님 약력을 구해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놓았습니다만 시간이 제법 걸리던차였는데
수녀님께서 이리 올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분이
성공회에 남기신 업적은
필히 재조명 되어서 성공회 역사는 물론
신앙의 후배들에게 영원히 각인되어야될 것입니다.
청봉님, 약력은 제가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더 많은 장례식 사진은 서울주교좌성당 홈페이지 사진첩에 올라와있습니다.
http://www.cathedral.or.kr/front/photos.htm
서울 주교좌교회에서 사진 봉사를 하시며
그 홈페이지에 장례 사진을 올리신 곽동임(앵니스) 교우님이
우리 카페에도 사진을 올려주기로 하셔서
현재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김교수님 약력은 교무원에 의뢰해놓은 상태이지만
수녀님께서 올려주시면 더 감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