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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벗하다 발견한 검은 파편에 반해 재현한 '고려 흑자'
도자기 생각을 하게 되면 청자도 있고 백자도 있으니 흑자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도자기 하면 누구나 쉽게 이조백자나 고려청자를 떠올릴 것이고 좀 더 도자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청사기라든가 또는 흔히 항아리라 부르는 옹기류 정도를 생각하겠지만, 분명 흑자도 있다. 그것도 고려 때부터 전해 오는 고려흑자가 있다. 흑유, 또는 흑유자기라고도 불리는 도자기다.
흑유라는 이름조차 비범하고 생소한 도자기는 통일신라 말부터 전성기를 이루다가 고려시대 이후 자취를 감춘 전통자기의 한 종류이다. 흑유란 유약은 다량의 철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구운 후 표면의 색이 흑갈색, 또는 암갈색을 띠기 때문에 흑자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흑유 자기는 흑색, 갈색, 감색 등 다양한 색깔을 보였으며, 형태 또한, 병이나 항아리, 그리고 편병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고려청자에 버금간다는 명성을 가진 흑유자기는 긴 세월에 걸쳐 제작되어 왔음에도 그 수가 적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려흑자 작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말선초까지 전성기를 누렸지만 유교적 선비정신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서서히 그 맥이 끊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초기의 백자나 분청사기가 출토된 곳에서 흑유가 발견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아무튼 조선시대까지는 각지에서 흑유 도기가 만들어졌지만 서서히 귀족적 도자기에서 특수용 도자기로 바뀌었다가 명맥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계룡산 일대에서는 절에서 사용했었던 흑유다완이 발견되었고 제주도에서도 흑유의 편호(扁壺)가 발견되었으며, 전라도 지방에서는 석회석을 사용한 검은 엿 색깔의 병이나 호등의 파편들도 발견 되었다. 지금 전하는 흑유 자기들은 주로 16세기에 들어 호남지방의 가마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조차도 수가 적어서 다른 도자기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조를 거치면서 고려흑자의 기품을 잃어버린 채 명맥만 유지해온 탓에 보통 흑유 자기는 그다지 예쁘지 않지만 그 와중에도 흑유 주전자는 무척 예쁘다. 짙은 초콜릿 색깔을 띠고 있는 사진 속 흑유 주전자도 조선시대 초기 전라도 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사진과 같은 주전자 형태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흑유는 태토나 유약에 신화 제2철을 첨가해 산화소성 또는 환원소성한 것으로 흑, 갈색, 감색 등의 여러 가지 색을 보이고, 흑유 표면의 결정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여졌다. 그 외에 지명(地名), 문양등에 따라 명명(命名)된 경우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天目釉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흑유의 주산지인 중국의 복건성에서 수학한 일본 승려가 천목산에서 흑유다완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에서 천목다완이라는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흑자는 일본에서 오히려 그 전통이 왕성하게 이어져왔고, 중국도 계승 움직임이 활발한 편이다. 그간 국내에서도 흑자를 재현하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지만 흑자를 재현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흑유자기는 과정도 어렵고 보는 이들이 아직 많지 않아 작가들의 기피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흑자는 철분이 함유된 흙으로 만든 유약과 1천3백도 이상의 고온 소성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평생에 걸쳐 고려흑자를 재현해오고 있는 흑유장인을 통해 고려흑자인 흑유의 명맥이 되살아났다. 가평 토박이로 1990년에 고향인 가평에 가평요를 만든 청곡 김시영(淸谷 金時泳·52)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0년 조선시대 노체가마터가 발견되기도 한 가평에 흑유도자기 전문가마를 만들고 흑유 재현 작업에 몰두했다.
“검은색은 북쪽의 색입니다. 청와대도 남산의 기준으로 북쪽에 해당되므로 청와를 얹은 것입니다. 검은색은 빨강과 파랑, 노랑이 합쳐진 색입니다. 그 안에는 검은색뿐 아니라 삼라만상의 모든 색이 다 들어 있어요. 그 무궁무진한 색을 구현해내는 데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어져 내려온 전통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후대에 물려줄 새로운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신념이 있으면 좋겠어요. 창의력도 필요하지만 헝그리 정신도 필요하다고 봐요.” 흑유자기는 과정도 어렵고 보는 이들이 아직 많지 않아 작가들의 기피대상이었던 만큼 흑자만을 고집하는 청곡의 장인정신과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경기도 가평 대금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가평요는 1990년에 만들어져 1993년에 허가를 받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웬만한 가마는 경기도 이천이나 여주에 몰려 있기 때문에 당시의 가평요는 이 지역 첫 가마였지만 지금은 두 곳 정도 더 생겨났다고 한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1999년 6월 그는 도자기공예부문 최초로 경기도가 선정하는 ‘경기 으뜸이’로 뽑히기도 했다. 20년의 축적된 노하우와 섬세한 손길로 가평요 흑유자기를 만들어온 도예작가 청곡 김시영은 국내 유일의 고려흑자 작가로 알려졌고, 흑자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오직 고려흑자만을 고집하는 청곡은 특히 흑유다완(말차를 마시는 그릇. 천목다완)으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항아리 작품 시리즈에서 더 나아가 도판과 도편을 이용한 회화작업을 시도해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인 청곡은 지난해 개인전에 이어 올봄에도 2010년 개인전 <화염을 칠하다>(3월 17일~23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 1실)를 연 바 있다.
청곡 김시영(淸谷 金時泳·52)은 청자와 함께 고려시대를 화려하게 치장했던 흑유(黑釉)를 만드는 도공(陶工)이다. 여러 청자 장인들 가운데 흑유를 덤으로 만드는 사람은 더러 있지만, 오로지 흑유에 매달리는 장인은 그 하나밖에 없으며 그의 두 딸도 그에 이어 2대째 흑유장인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청곡이 초지일관 도자기만 만든 도공의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가평읍내에서 태어난 김시영은 일곱 살 때 서울로 유학을 갔다. 청곡 김시영의 아버지는 저명한 재일교포 출신 서예가 두남 이원영(2008년 작고)이었다. 어린 시절, 재가한 어머니를 따라 낯선 집에 가보니 그곳이 새아버지의 집이었다. 아버지가 붓을 들 때면 옆에서 먹을 갈았다. 어린 눈으로 봐도 아버지의 작품은 명필에 명문이었다. 이원영은 그에게 먹을 갈게 하고 "너는 커서 예술가가 되거라"는 인생 덕담을 들려줬다고 한다.
아마도 그 영향으로 지금 도예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에 다녀올 때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손에는 아이에게 줄 각종 도구와 장비 보따리가 쥐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커서 장인(匠人)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청곡은 그때를 회상한다. 그러나 꿈 많은 청소년 시절 청곡은 도공을 꿈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시면 드라이버나 끌, 렌치 같은 공구를 하나둘씩 사와 저에게 주셨습니다. 당시엔 기술이 최고인 시대였으니 일찍부터 기술을 손에 익히라는 뜻이었겠죠. 아버지가 그러니까 또래들보다 일찍 ‘커서 뭘 할까’를 많이 고민하게 됐어요. 복싱 금메달리스트도 되고 싶었고 세계적인 산악인도 되고 싶었죠.”
청곡은 1974년 용산공고 금속과에 진학했다. 예술가와는 전혀 다른 길인 공고의 금속과를 갔다는 것이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게다가 고교시절 김시영의 상상력은 도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곳으로 튀었다. 용광로가 그나마 도자기를 만드는 화로와의 인연을 이어주긴 했지만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하고, 가평에서 씨름으로 이름 날린 큰형을 비롯해 집안에는 장사가 가득했던 집안내력 탓인지 “모스크바올림픽에서 복싱 금메달을 따리라”는 결심을 하고 복싱훈련을 했다. 낮에는 불과 책을 만났고 밤에는 샌드백을 두드렸다. 훗날 고교 은사 한 사람은 자서전에 “문제아 하나가 고려 흑자를 재현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고려흑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길이었다.
청곡 김시영이 예술가를 꿈꾸었을지 모르겠으나 그에게 예술가의 꿈을 꾸게 한 아버지 두남이 서예가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처음부터 도공을 꿈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집안의 뜻과 현실적인 판단에 따라 공대에 진학했던 것으로 볼 때 그런 꿈을 이어간 것도 아닌 듯했다. 하지만 도자기와의 질긴 악연은 끊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진학한 고등학교에 작은 용광로가 있었고 거기에서 김시영은 불을 알게 됐다고 한다. 불세례를 받은 금속이 전혀 다른 질감과 소재로 환생하는 장면을 보면서 “연금술사를 꿈꾸게 됐다”는 그였고, 잠시 그렇게 방황하던 고교생활을 끝낸 김시영은 연금술사의 목표를 다시 찾아 1977년 연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청곡이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도공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그 대신 산악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됐다. 대학 3학년 때 산악회에 들어갔던 그는 성격대로 완전히 미쳐버렸다. 산은 그에게 평생 반려자인 배우자와 함께 도자기를 점지해줬다. 철저하게 입회 기수 중심의 군대와도 같았던 산악회에서 홍옥주(洪玉珠)라는 홍일점의 동갑내기 전입 고참을 만났고, 그녀의 빳다 아래 산을 배우다 결국 결혼했다. 그리고 홍옥주와 산을 다니며 화전민 터를 지날 때, 그는 흑유 파편을 여러 번 봤다. 사금파리를 만날 때마다 "어떻게 도자기가 까맣지" 하는 궁금증만 커갔던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천에서 만난 老도공들은 그에게 창작욕을 심어줬고, 도자기의 곡선, 흙과 유약과 불이 만드는 오묘한 색과 무늬, 질감이 그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청자 가마터에 가면 어김없이 까만 파편이 나온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 대학시절 산에 다니면서 보았던 흑유 파편이 머릿속에서 부활했다. 그런데 아버지 두남은 작고할 때 청곡에게 흑유를 하라고 권했다. “88년쯤인가 아버님께서 갑자기 안 하던 말씀을 툭 던지더군요. ‘일본에서는 흑자가 활발히 번성하던데 우리는 왜 그런 걸 안 살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요. 순간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제 갈 길을 예언하신 거나 다름없죠.” 어린 시절 꿈꾸던 예술가의 길도 생각났다. 그는 연세대 대학원 세라믹공학과에 들어가 재료부터 연구했다. 석사과정을 마친 뒤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 실험실과 세라믹 회사에서 공장장도 해봤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밤에는 재료를 연구하던 그는 1990년 석사를 마치고 1년 뒤에 아예 직장을 때려치우고 고향 가평으로 내려와 가평요(加平窯)를 차렸다.
태백산맥을 종주하는 동안 보았던 이 나라의 산과 흙, 그리고 월급쟁이였지만 업으로 삼던 세라믹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가 자기를 만들게 된 시점은 바로 거기부터였다. 처음엔 신소재를 만드는 공학도의 호기심 정도였지만, 잊혀진 두남 선생의 권유와 맞물린 호기심은 훗날 김시영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그는 금속을 대체할 수도 있는 세라믹 연구를 위해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시험소 연구원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칼 같은, 그런 첨단 소재를 만들고 싶었다”는 여전히 연금술사 수준의 꿈이었던 그의 목표는 훗날 그를 세라믹공장의 공장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 불 피우는 장난을 자주 해서 어머니한테 타박을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살려고 미리 연습해두었던 모양입니다.”라고 농담처럼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요모조모 따져 봐도 그가 서예가 두남이 권유한 흑유의 길로 다시 돌아온 것 자체가 우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들락날락 이어온 도자 예술의 꿈은 김시영으로 하여금 옛 선조들처럼 감(感)에 의존하는 작업과 사뭇 방식이 다른 접근을 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공예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쉽다. 그렇게 연구를 하면 나중에는 정말 감(感)이 생긴다”는 믿음으로 그때부터 10년 동안 불길과 흙을 연구했다. 1270도일 때는 어떻고, 1300도일 때는 어떻고, 그릇을 어디에 넣으면 어떻게 되고 기타 등등 모든 데이터를 다 기록했고 그것이 재료공학적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됐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숫자를 보지 않는다. 불길의 색을 보고 온도를 알게 됐고, 흙을 몇 번 두드려야 그릇이 될 정도가 되는지 손으로 알게 됐다.
“청자와 달리, 흑유는 불길의 성격에 따라 그 색과 무늬가 크게 달라진다. 요변(窯變)이라고 하는데, 유약과 흙이 화염 속에서 변성이 되면서 삼라만상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거 몇 번 맛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김시영은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흑유가 부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구현해낸 색감은 빙산의 일각이다. 약토의 철분 함량에 따라 무한한 색을 낼 수 있는 흑자의 성정 앞에 작가의 존재는 아직 한없이 작다고 그는 말한다. 어느 산 어떤 흙인가 하는 것과 함께 불도 중요하다. 화염의 온도와 외부의 기운에 따라 색의 향연은 달라진다. 청곡은 “우주의 별자리가 무수히 많지만 저마다 빛이 다르듯 흑유자기를 통해 발견하는 빛은 참으로 다양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시골에 은둔해 그릇을 만드는 가난한 도공을 천주교 춘천교구 장익 주교가 알아봤다. 1997년 주교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도공을 소개했고, 그리하여 흑유 도공 청곡 김시영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이후 콜렉터들이 대거 생겨나 작품들이 팔려나갔다. 일본에도 콜렉터들이 생겨났다. 2009년 일본미술구락부가 펴낸 ‘미술가명감(美術家名鑑)’에는 김시영의 말차다완(抹茶茶碗) 감정 기준가격이 97만 엔이라고 적혀 있다. 미술가명감은 일본 경매회사들이 기본적으로 참고하는 예술가들의 리스트다. 중국, 한국, 일본 3국에서 드물게 작업하는 흑유(黑釉) 대가(大家)의 반열에 그가 올랐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작품을 보며 ‘검은색’이라는 빛이 얼마나 무궁무진하고 오묘한지 알게 됐다. 블랙홀처럼 주위를 흡수할 듯한 흑색, 세상 모든 것을 반사할 듯 빛나는 검은색, 그리고 불길이 닿은 곳에 요변이 생겨 그려진 매화, 설산(雪山), 바다가 그 검은 우주에 있다.
“내가 흑유를 만든 게 아닌 거 같다. 흑유가 자생력이 있어서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게 틀림없다. 10년 됐다, 그런 느낌 드는 거.”라고 말하며 김시영은 웃는다. 연금술에 복싱에, 산에 미쳤던 사내가 먼 길을 돌아 도자기, 그것도 흑자에 정주(定住)한 것이다. 그러나 강산도 변한다는 그 10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고, 사내가 인생을 흑자에 매진하는 사이 평생 반려자이자 흑유의 길로 그를 이끈 아내는 하늘로 갔다. 11년 신장병을 앓다가 2008년 4월 별이 되었다. 그 해 김시영은 '설산(雪山), 그들이 사랑을 한 곳'이라는 주제의 아내를 그리는 작품전을 가졌다.
아내를 앞세운 도공을 이제 두 딸이 함께 한다. 쉰이 넘도록 화염(火焰)과 흙을 바라보고 살아온 인생을 이제 딸들이 이어받으려 한다. 부녀가 사제가 되고 선후배가 되어 흑자의 미래를 여는 것이다. 때로는 제 엄마처럼, 때로는 귀여운 딸처럼, 때로는 제자로, 때로는 냉혹한 혹평을 던지는 동료 예술가로 그를 보듬는다. “좋은 도자기는 대를 이어야 나오는 법인데, 아이들이 알아서 해주니 기분이 좋다”고 대를 이을 딸을 둘이나 가진 부유한 아버지임을 자랑하는 그는 영락없는 팔불출인 셈이다.
2009년 9월 예송갤러리에서 열린 흑자전에서 김시영은 봉황흑유다완, 해수흑유다관, 서가흑유다기세트, 화목흑유홍차잔세트, 오리형은채흑유탕기, 적서가흑유화로, 찻잔, 접시 등 150여점의 다기를 선보였는데, 은은한 빛과 아름다운 형태미와 불꽃과 흑색유약이 어우러지면서 결정이 생겨 밤하늘의 은하수 같기도 하고 무지개 색 같은 황홀함을 느끼게 한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3월 20여 년간 매진해온 흑자에 대한 탐구와 시연을 체계적으로 알리고 보급하는 원년을 기념하는 전시를 열었다.
2010년을 맞아 집과 가마를 오가는 작업생활에만 그치던 은둔에 가까운 작품활동에서 세상과 소통하기로 한 그는 서울-춘천 고속도로 청평 IC에서 5분 거리인 명장에다 흑유자기 갤러리와 카페를 열고, 집 근처 노변에 학생들을 위한 도예 체험장도 오픈하기로 했다. 이제 청곡 김시영의 존재감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그의 3월 전시에 즈음하여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정양모 선생은 ‘가평요 흑유자기에 바라는 마음’이라는 글에서 “도자기 중에서도 흑자만을 고집하고 있는 그의 학구적이고 수도승 같은 접근이 아름답고 어떤 기대감을 갖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당장은 흑유자기의 매력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 빛을 보아야 그의 가마를 상상할 수 있고, 그가 주방에서 흘린 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곡 김시영 선생의 가평요는 오롯이 흑유자기의 전통을 되살려내고 있는 곳이다. 중국과 일본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도자기 가운데 '천목다완(天目茶碗)'이라 부르는 흑유 계열의 자기가 있는데, 천목다완은 검은 빛 속에 담겨진 은하수와 같은 화려함을 뽐내는 찻잔으로 이름나 있으며 다완 가운데서도 일품으로 친다. 백자와 청자에 익숙했던 시선으로 접하는 흑자는 유현미 그 자체다.
크기도 그다지 크지 않고, 귀 모양의 손잡이와 칠각형으로 깎은 주둥이를 동그란 몸통에 앙증맞게 붙인 모습을 보면 이 주전자를 만든 도공의 예술적 감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도공이 말차를 빚어 스스로 만든 흑유 주전자에 담아 방문객들에 제공하기라도 하면 그런 호사가 따로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유현미 자체일 것이다. 가평요 한 켠에 마련된 전시장 안의 다실이 흑유 주전자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제대로 다도를 배운 자인이 정갈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를 굽는 정성으로 빚어내는 말차가 그 흑유의 유현미에 맛을 더해준다.
찻상 건너 손님자리에 앉은 청곡과 경인이 두 손으로 흑자다완을 들고 차를 마신다. 그들은 “마음을 성숙하게 하고, 조신하기 위하여 이렇게 함께 차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기본을 지키자고 하는데, 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앞서나가려 해서 자주 다툰다. 뭔가 거꾸로 된 거 아닌가”라는 자인의 말처럼 부녀자매를 떠나 마치 라이벌 도공처럼 서로에게 혹평이 오간다. 그 자리에 단 한 번이라도 끼어들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은 어느 별 아래 태어난 행운을 지녔을까.
우리의 전통자기 중 하나로 귀품이 고려청자에 못지않았다는 고려흑자가 조선조를 거치면서 어느 샌가 그런 귀품을 잃다보니 일본이나 중국에 귀티 나는 자기의 지위를 빼앗긴 감이 있기는 하지만, 김시영을 통해 다시금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보통 흑유라 하면 투박하고 볼품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도 사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흑자는 흑유란 이름 그대로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바르고 구워 검은색을 띠는 자기를 말하는데, 태토는 일반적으로 분청사기에 쓰는 흙을 사용하지만 분청사기와는 달리 유약을 검은색이 나는 것을 쓴다는 게 다르다. 그러다 보니 흑유 자기는 검은색 단색을 띠게 되며 이런 검은색 바탕에는 다른 문양을 새겨 넣을 여지가 없으므로 그만큼 단조로워 보이는 도자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별다른 장식도 없는 단조로운 그릇인 흑유 자기는 주로 일반서민들이 사용하였던 것이며, 조선조에서 이런 서민용 자기로서 명맥을 유지해온 탓에 귀품있는 고려흑자의 전통이 잠들어버렸던 셈이다. 하지만 그릇 색깔이 검은 탓인지는 몰라도 그리 많이 만들어지지도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흑유의 이런 단순함에서 오히려 더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흑유자기는 한편으로는 고려흑자 본래의 귀티나는 명품자기로서 고급수요를 창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흑유의 현대화를 통한 실용형 자기로서 일반 수요를 창출하여 고급화와 대중화를 동시에 지향할 수 있는 컨텐츠다. 고려흑자의 귀품있는 유현미에 현대적 세련미만 올곳이 얹어낼 수 있다면 세계적 명품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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