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21대 개로왕은 친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내려 하자 곤지는 개로왕의 왕비를 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에 개로왕은 곤지와 왕비를 결혼시키고 '왕비는 지금 임신하여 만삭이 다되었으니 만약 가는 길에 아이를 낳는다면 백제로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붙인다.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에 각라도(覺羅島)라는 일본의 한 작은 섬에서 훗날의 무령왕이 될 아이를 낳는다. 곤지는 아기 무령왕이 태어나자 개로왕과의 약속대로 모자를 배에 태워 백제로 돌려보낸다. (일본서기 내용)
(공주무령왕릉 내부)
이런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것과 그가 어느 정도까지 일본에 있다가 백제에 와서 40살 때에 즉위한 것은 사실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는 왕위에 있는 기간 동안 오경박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등 일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무령왕은 40세 때인 서기 501년에 즉위하여 2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62살 때인 서기 523년에 돌아가셨다. 1971년 발굴된 그의 무덤에서 무령왕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나무관속에 안치된 상태로 발견됐는데, 발굴 당시에는 그 관을 만든 목재에 대해 그다지 주목을 하지 못하고 그저 이 지방에 흔한 밤나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년 후인 1991년 목재학 전문가인 경북대 박상진 교수가 무령왕의 관재 조각을 우연히 입수해 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뜻밖에도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무라고 자랑하는 금송(金松)의 특징적인 세포배열이 드러났다. 즉 무령왕을 담은 관은 한국산이 아닌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것이었다.
금송이란 이름은 우연히 학술적으로 붙은 것이고 원래 일본인들은 고우야마끼(コウヤマキ)라고 부른단다. 그들 말로 마끼란 큰 나무를 뜻하니 이름을 풀어보면 ‘고야(高野)라는 산에 자라는 큰 나무’란 뜻이다. 고야산은 한때 일본의 수도로서 백제와 관련이 깊은‘나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도 금송은 고야산을 중심으로 일본 남부에 자라고 있는 나무이다. 고야의 한자 읽기가 일본식인‘다카노’가 아니고 우리발음 그대로인 고야란 점도 백제와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왜 무령왕 관재가 일본 특산 금송으로 만들어졌을까?
정확한 사연은 현재까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금송은, 일본 측에서 보냈거나 아니면 백제 측에서 수입했거나 그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금송이 백제로 보내진 것이라면 일본 측에서 왜 보냈을까가 관심이다.
무령왕의 생존시 백제는 오경박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등 문물을 전해주었다. 백제는 또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는 백제와 일본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기에 선진국 백제로부터 문물을 전해 받고 은혜의 보답으로 일본이 자진하여 금송 관재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추정은 무령왕이 일본에 살던 기간 동안 금송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연이 있어서 평소 금송을 좋아했기에 사후세계를 위해 좋은 관재를 수입하여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일본산 나무가 또 튀어나왔다. 지난해 10월 경남 창녕군 창년읍 송현리 고분군에서 많은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길이 3.4m×폭 1.2m x 높이 40cm의 '구유형(통나무형) 목관'의 목재가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녹나무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구유형 통나무 관재)
송현동 고분군 발굴조사 기관인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 의뢰로 7호분 출토 구유형 목관의 수종 분석을 맡고 있는 경북대 박상진(65) 교수는 `이 목관이 한자로 예장목(豫樟木)으로 표기하는 녹나무일 것이라고 밝혔다.
녹나무는 아열대 수목으로, 중국 남부와 일본열도에서 대량으로 자생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에 좀 있고, 이외에 남해안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하고 있는 수종이다. 박 교수는 `송현동 고분군이 축조되던 그 당시 식생대가 현재와 그다지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므로 송현동 목관 재료인 녹나무가 한반도 생산품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 송현동 고분은, 출토된 토기와 금제 귀거리 등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유물들의 성격으로 보아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야시대 무덤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덤의 목관이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녹나무로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중국 남부 지역이나 일본열도 둘 중 한 곳에서 수입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무령왕릉 목관이라든가, 창녕 일대에 자리잡았던 가야 제국(諸國)과 왜국(倭國)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할 때 일본열도에서 들여왔을 가능성이 더욱 큰 것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목재를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이 무덤(7호분)과 바로 맞대고 있는 6호분에 대한 지난해 조사결과 돌을 쌓아 만든 무덤방(현실<玄室>) 벽면이 온통 주칠(朱漆)돼 있다는 점인데, 이 주칠수법은, 고분시대 일본열도 고분의 매장풍습에서 전형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있는 녹나무)
공주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시기는 왕이 죽은(서기 523년) 뒤 몇 년 후이므로 6세기 초가 된다. 그렇다면 창녕의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와 얼추 비슷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백제의 수도 공주와 가야국의 한 수도 창녕에서 무덤의 관을 일본산 목재로 썼다. 아직까지 출토된 예는 이 두 가지이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관계는 알기 어렵지만, 분명히 일본과의 관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밀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2007.8'우포가 있는 풍경 아름다운 창녕'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