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지난 7월 11일부터 21일까지 열흘간 중앙아시아의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코카사스3국(아제르바이잔·조지아·아르메니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경유,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둘러보고 마지막 나라인 아르메니아를 끝으로 귀국하였다. 코카사스산맥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세 나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지만 제각각 특색이 있는 나리들이다. 그 중에서 마지막에 들른 아르메니아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기독교 국가로서, 여러 유적지와 수도원을 둘러보면서 많은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 감동을 느낀 곳이다. 나라 안의 여러 곳을 탐방하면서 기독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에의 매진을 다짐하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는 AD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나라이며, 우리나라가 세종대왕 때(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기 약 1천 년 전인 AD 4세기에 이미 문자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 대륙 중간에 끼어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동안 그리스·로마·페르시아·몽골·오스만 제국·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끊임없이 받아왔다. 특히 1915년 4월 24일 터키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로 남겨져 있다. 이스라엘이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가 있었다면 아르메니아에는 오스만 터키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있었다. 2001년 9월 26일 요한 바오르Ⅱ세가 친선우호 차원에서 다녀간 후, 금년 6월 25일에는 대학살 100주년을 기념해서 프란치스코 현 교황이 이곳을 다녀갔다. 터키가 지니고 있는 국가 위상 때문에 세계의 어느 나라도 대놓고 ‘대학살’ 운운하는 비난성명을 내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학살을 추모하는 박물관 참관은 퍽 인상적이었다. 넓디넓은 광장 정면에는 300만 내국인과 700만 해외동포들 이름으로 높이 44m의 삼각형 기념탑이 서 있었다. 하늘에 사무치는 한이 가슴을 찌르듯이 날카로운 첨탑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서 있었다. 어디선가 음산한 운율의 멜로디가 스피커를 통해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 앞에 당도하였다. ‘물망초’(꽃말 ‘나를 잊지 말아요’) 한 송이를 바치면서 경건한 마음과 비통한 마음으로 숱한 희생자 영령 앞에 머리 숙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전에 이스라엘의 야드바셈을 방문했을 때, 조용한 실내에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며 대학살을 추모하던 때의 비통함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박물관 전시장은 오스만 터키에 의해 자행된 혹독한 학살 현장을 똑똑히 보여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기독교 대 회교도 간의 종교 전쟁으로 파급된 잔악한 집단학살은 남녀노유 없이 행해졌고, 학살당한 현장이 사진으로 기록영화로 고스란히 공개되고 있었다. 당시 대학살로 희생된 사람이 무려 150여 만 명이고, 해외로 피신한 사람들이 700만 명이라 하니 히틀러에 의해 저질러진 유태인의 종족말살에 버금가는 만행이 아닐 수 없었다. 추모의 언덕을 내려오면서, 힘이 없어 당한 약소국가 아르메니아 민족의 비통함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닌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지금도 이슬람국가 IS와 공산국가는 기독교를 말살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곳곳에서 테러를 일삼고 있으니, 종교도 국가의 주권이 강화되어 있을 때만 존속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르메니아만큼 기구하고 지난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아르메니아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동서양의 길목,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힘깨나 쓰는 제국치고 아르메니아를 짓밟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는 AD 404년에 만들어진 문자와 언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였다. 거의 1,600년 동안 독립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항상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상황에서 고유한 문자와 언어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크로드 교역 당시 카라반(대상)들의 공용어로 사용된 언어가 바로 아르메니아어인데, 잦은 전란 속에서도 문자와 언어를 지켜내는 힘의 중심에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와 수도원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아르메니아의 네 번째 큰 도시이자 최고의 문화유산을 만나기 위해 수도 예레반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홀리시티의 에치메니아진 마더교회를 찾았을 때 그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교회로 AD 301년부터 303년까지 3년에 걸쳐 계몽자로 일컫는 성 그레고리의 신비로운 체험 끝에 세워진 교회이다. 그레고리는 코르비랍Khorvirap 수도원 지하 감옥에서 당시 아르메니아왕 트라다트왕에 의해 15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왕의 정신병을 치료해 낫게 해주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게 만든 분으로 다대오와 바돌로메의 복음전파 결실이었다.
로마 가톨릭과는 다른 계보의 기독교인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총본산인 이곳 에치미아진 마더교회 정문을 들어섰다. 정문은 로마교황 요한 바오르Ⅱ세가 2001년 이곳을 방문한 기념 조형물로 두 수장이 가운데 십자가를 받드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로마 바티칸 궁전의 교황과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수장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세계 기독교도 화합의 큰 의미를 부여한다 하겠다. 에치미아진 총교구청 경내에 있는 교회는 4세기에 계몽자 성 그레고리와 트라다트 왕이 건축한 최초의 교회를 계속 복원하며 유지해온 성소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르메니아 교회와 국가의 핵심 상징이 되고 있는 곳이다.
정문에 들어서자 십자가에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것도 이채로웠고, 여러 모양으로 장식된 십자가 형상은 유럽의 가톨릭교회에서 볼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이러한 십자가 조각이 정문에서 교회당당에 이르는 길에 가득 서 있었다. 적어도 천년은 넘었을 섬세한 돌의 조각들과 36자의 아르메니아 글자가 조각되어 있는 십자가 조각품이 교회 경내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조형물들을 지나면 우람한 신학대학·박물관과 옛날 교회와 새로 지은 교회 등 많은 건물들의 혼합된 복합동이 넓은 경내를 아름다운 조경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박물관 동에는 예수님과 마리아, 12제자에 관한 성화가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로마 병사에 의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그 창을 전시하고 있었다. 창날을 위로 향하게 액자에 넣어 벽에 게시하고 있어 지금 봐도 녹은 슬었지만 날카로운 금속성은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 창끝 쇠붙이는 예수님의 제자 바돌로메(나다나엘)와 다대오에 의해 이곳 아르메니아로 옮겨졌다고 전해져 왔는데, 처음에는 게그하드 수도원에 보관하고 있다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한다. 다대오와 바돌로메는 성령강림 이후(행8:1) 각기 시리아·아라비아·페르시아 등에서 포교활동을 했고, 특히 아르메니아에서 약 16년간 포교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AD 1세기에 베드로는 로마에서, 도마는 인도에서, 안드레는 헬라의 아가야에서,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하는 동안 다대오는 시리아에서, 바돌로메는 바빌론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에치미아진 마더교회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조각과 노아 방주의 조각으로 만든 십자가가 있는 교회로도 유명하다. 또한 예수님이 지셨던 당시 십자가의 일부 잔해를 금속과 보석으로 만든 십자가 형태의 교차점 속에 성냥개비 정도의 크기로 들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 유물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2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유라시아의 한 관문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니 감동이 가슴 속 깊이 끓어오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는 로마의 바티칸 궁전에서 만났던 ‘천지창조’보다 오히려 더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곳에는 노아의 방주 일부가 전시되어 있어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기원전 5,6천 년 전의 고페르나무(잣나무?)로 고증된 이 방주에 쓰인 나무는 지금도 눈에 덮여 당시의 흔적을 감추고 있다고 한다. 코르비랍 수도원에서 바라본 아라랏Ararat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삼각형의 거대한 설산이었다. 워낙 높고 범위가 넓어 이란의 북부와 터키의 동부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 성경(창 6-9장)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방주의 크기는 6장 14-16절 기록에 의하면 배의 길이가 삼백 규빗(135m), 폭이 오십 규빗(22.5m), 높이가 삼십 규빗(13.5m) 정도의 부피이다. 이는 한 량에 240 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는 화차 522량에 해당하는 용량의 상·중·하층 구조의 바지선 형태라고 보고 있다. 40일 주야 내린 비로 세상은 온통 홍수로 넘쳐났고, 거의 1년을 동물과 함께 지냈던 노아 가족 8명이 안착한 곳이 현재 눈앞에 펼쳐진 아라랏산 4천m 중턱이라고 생각하니 창세기의 노아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먼 성경 얘기가 아닌 현실처럼 다가왔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뒤에 종교적 충돌로 주변국에게 수백만 명이 학살당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지난 세월을 말끔히 털고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르메니아와 그 민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리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첫댓글 좋은 기행문 감상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의 기독교국가였군요. 회원가입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