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곡창지대로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싹튼 곳으
로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각종 유물들이 군내 여러 곳에서 발견
된다. 따라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는데, 삼한시대 불
사국(不斯國)이 바로 이 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비정되고 있다. 이것이 뒤
에 비화가야(非火伽倻)로 발전하였다. 비화가야에 대해서는 문헌자료가 거
의 없으나, 창녕읍 송현리·교리와 계성면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들
은 다른 가야지역에서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유물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비화가야가 김해의 금관가야나 고령의 대가야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문화
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라 하겠다.
또한, 창녕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교
통상의 요충이었으므로 555년(진흥왕 16)에 신라가 비사벌을 병합하고 이
곳에 하주(下州)를 설치하여 군사상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561년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하고 척경비(眞興王拓境碑)를 세웠다. 그 뒤
565년에 하주가 합천으로 옮겨져 대야주(大耶州)로 됨으로써 이곳은 비사
벌군(比斯伐郡)또는 비자화군(比自火郡)이라 불리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火王郡)으로 다시 개칭되고, 현효현(玄驍縣)이 영현(領縣)이
었으니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지역이다. 또한, 같은 해에 지금
의 영산면지역이 본래 서화현(西火縣)에서 상약현(尙藥縣)으로 개칭되어
밀성군(密城郡 : 지금의 밀양시)의 속현이 되기도 했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 화왕군이 창녕군(昌寧郡)으로, 현효현이 현풍현(玄豊縣,
또는 玄風縣)으로 개칭되었다.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상약현은 영산현
(靈山縣)으로 고쳐져 밀성군의 속현으로 남았다. 1018년(현종 9)에는 창녕
군과 현풍현이 밀성군의 속현이 되었고, 같은 해 지금의 계성면지역인 계
성현(桂城縣)도 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그 뒤 1172년(명종 2) 창녕군에,
1274년(원종 15)영산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1366년(공민왕 15)
에는 계성현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1390년(공양왕 2) 다시 밀성군에 이속
되었다.
한편, 고려 말 왜구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침구하니 그 피해가 막심하
였으며, 공민왕 때 개혁에 실패한 신돈(辛旽)은 바로 이 지역의 옥천사(玉
泉寺 : 지금의 창녕읍 옥천리 소재)출신 승려였다.
〔조선시대〕
1394년(태조 3)계성현이 다시 영산현에 합쳐졌으며, 1414년(태종 14)에는
창녕군이 창녕현으로 강등되면서 감무를 현감으로 고치는 규례에 따라 창
녕현과 영산현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의 호구수는 창녕현 825호 4,352명, 영산현 257호 1,134명, 계성현 214호
972명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가 이끄는 의병이 남
강과 낙동강의 왜군 수송로를 공격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 해 8월
에는 의병장 성천희(成天禧)가 창녕을 탈환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이 지
방의 의병들이 산성을 수축하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
렀다.
1631년(인조 9) 성지도(成至道)의 역모사건으로 창녕현이 폐현되어 영산현
에 합쳐졌다가 1637년 다시 복구되었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의 호구수는 창녕현 6,192호 2만8163명, 영산현 4,264호 1
만9848명이었다.
〔근대〕
1895년(고종 32)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대구부에 속하다가 창녕현과 영산현
이 모두 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896년 경상남도 창녕군·영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산군이 창녕군에 편입되었고 영산군 읍내면은
영산면으로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영산에서 구중회(具中會)등 24명이 결사대를 조직
하여 창녕군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1956년 영
산면민들이 남산에 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삼일민속문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1922년에는 일본 육군이 대합면일대를 군용지로 징발하
여 군사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현대〕
1950년 6·25사변 때 낙동강 교두보의 마지막 저지선으로, 치열한 공방전
을 한 달 동안 계속한 끝에 공산군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창녕과 영산 지역
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55년 7월 1일 창락면이 창녕면에 편입되었으며,
1960년 1월 1일 창녕면이, 1963년 1월 1일에는 남지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
되었다.
1971년 2월 13일 남지읍에 고곡출장소가 설치되고 1973년 부곡면에 유황온
천이 개발되었고, 1977년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1976년 이래 소택지역(沼澤地域)인 창녕읍·유어면·대지면
·대합면·성산면 등을 포함하는 창녕지구 농업종합개발 사업이 시행되어
광대한 수해 상습지역이 옥토가 됨으로써 창녕군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
였다.
1984년 창녕읍 교리로 군청사를 이전하였고 1998년 9월 행정조직 개편으로
고곡출장소가 폐지되었으며, 2005년 인구는 6만6074명 행정구역은 2개읍,
12개면, 139개 법정리에 286개 행정리로 되어있다.
2010년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정부는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창녕군
길곡면과 창원시 북면을 잇는 함안보 실치를 위한 공사 중으로 2011년 하
반기에는 길곡, 남지 일대가 크게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청풍명월님"비화가야를 지키는 사람들"이란 카페를 개설했습니다.귀중한 자료라 얻어 갑니다.한번 방문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