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마인쯔 한인성당 30주년에 초청되어 며칠을 그곳 사제관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교회 안팎의 행사장에서 뵙거나 우연한 곳에서 만나 짧은 인사나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 그렇게 편안하게 함께 지내는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식사 후에 차를 마시다가 이렇게 물으셨다.
"로제리오는 항렬이 어찌되는가?" "할아버지는 현(鉉)자시고, 아버님이 영(永)자이시며, 저는 수(洙)자여서 '예수'와 같은 항렬입니다." 능청스런 농담에도 웃지 않으시고 물끄러미 창밖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내가 나이가 워낙 많으니, 말은 계속 내리도록 하겠네."
'뼈대 있는 양반가문'을 스스로 자처하고 사는 광산김씨들의 습속대로라면, 상대의 항렬을 알았다면 바로 자신의 항렬을 밝히는 것이 통례였으나, 그분은 그러지 않으셨다. 집안 어른들이나 씨족회보를 통해서 그분이 종씨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분께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혈연, 지연, 학연에 매이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고 들었다. 마인쯔 한인성당에 초청되었다는 기사가 교민신문에 실리자, 광산김씨 종친회에서 환영행사를 비롯하여 공항영접을 하겠다고 했으나 완강히 사양하셨다.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의 정신에 맞지 않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나중에 뒤로 조사(?)를 해보니 내 아들과 같은 항렬인 용(容)자여서 나는 추기경의 아제뻘이 된다. 아! 감동이 밀려온다. 그래서 종종 강의 중에 앞으로는 나를 '추기경의 아제'라고 불러달라고 너스레를 떤 적도 있다.
한국에 수많은 성씨가 있고 다들 나름대로 자기 씨족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겠지만, 광산김씨는 좀 유별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씨족의 노래'를 갖고 있는 유일한 성씨이며, 다른 어느 성씨보다도 핏줄에 대한 친화력이 강하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만나든지 서로의 항렬을 따져 묻고 나서는 마치 친척처럼 '아제''조카'라는 호칭을 바로 사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었으리라고 짐작되는 씨족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300만이나 되는 씨족구성원 모두를 한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심지어 일본에는 한국에도 없는 <광산김씨 씨족연구회>가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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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씨라고 양반이 아니겠는가마는, 양반서열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이조시대에 양반가문에 대한 서열을 매겼는데, 왕의 스승을 일컫는 대제학 배출순위로 정했다고 한다. 광산김씨는 7명을 배출하여 서열1위이고, 2위는 3명을 배출했다는데 여기서 굳이 밝힐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런 서열보다도 매월당 김시습과 서포 김만중이라는 할아버지가 더 자랑스럽다. 그래서 이런 농담도 가끔 했다. "옛 부터 광산김씨 가문에 인물이 셋 난다고 전해 왔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과 도올 김용옥 선생, 그리고 한 사람은 굳이 말 안 해도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요?"
이런 일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총은 곱지만은 않다. 유럽 한인사회 3대 꼴불 견이 있는데, <광산김씨 종친회(혈연)><호남향우회(지연)><고대동문회(학연)>이라고 한다. 집단의식이 유별난 공동체를 일컫는 것일 텐데, 이 세 가지에 다 해당되는 사람, 그러니까 호남 출신의 광산김씨로 고려대 나온 사람을 독일에서 만난 적도 있다. 언젠가 암스테르담 한인공동체에 초청된 일이 있는데, 공항으로 마중 나온 잘 알지도 못하는 노인께서 돗자리를 깔고 내게 절을 하겠다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분은 양반가문의 체통을 따져서 할아버지뻘 되는 나를 반드시 당신 집에서 모셔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외국나들이를 자주 하셨기에, 이런 일을 다 피해가기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단 한 차례도 그런 일에 얽히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두고 차별 없이 다가가고 싶은 열망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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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서울에서 있었던 제 44차 세계성체대회 준비가 한창일 무렵,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노동청년들의 모임에서 내가 만든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기에 성체대회 행사 중 청년들 행사에서 함께 부르도록 준비하고 싶으니, 악보와 음반을 보내어달라는 부탁이셨다. '네. 잘 알겠습니다.'라고 얌전히 대답하면 참 좋으련만, 그 때나 지금이나 까까남(까다롭고 까칠한 남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추기경님. 제가 오래전에 드렸던 음반에 수록되어 있구요. 아마도 추기경님의 책상 위 왼쪽 편에 두었으니, 개봉해 보시지 않으셨다면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찾아보시고 없으시면 다시 연락해 주셔요. 언제든지 가져다 드릴께요. 그리고 기왕에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전례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부를 수 있는 이런 생활성가를 일반 신자들이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좀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주교회의나 담당 주교님을 찾아뵙고 부탁드렸는데, 아직 교회가 거기까지 관심을 갖고 배려하기에는 역부족이니, 관심이 있다면 열심히 해보라고 했습니다. 하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겠고, 그래서 신자들이 좋아하면 살아남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너무 소극적인 대응이라고 여겨지거든요. 개신교 젊은이들의 찬양집회에 꼭 한 번 모시고 가서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요. 저는 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언제든지 시간이 나실 때 연락 주셔요."
통화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여겨서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도 보내었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비서실까지만 전달되었다. 이런저런 내용을 담은 편지들이 너무 많다는 설명이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아직까지 여전하다.
그 후로 그분은 내가 보내어 드린 악보로 열심히 연습을 하셨는지, 신자대중들과 소통하는 여러 행사에서 자주 그 노래를 부르셨다. 가난하고 여린 내 노래를 고위성직자께서 즐겨 부르신다는 사실은 나를 고무시켜 주었고,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나 또한 더 자주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음반으로 녹음된 것도 세 개나 된다. 초청된 본당에서 미사를 함께 드릴 기회가 있을 때면 자청하여 영성체후 묵상노래로 불렀는데, 그 때마다 내게 돌아오는 반응은 때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혹시 음반전시 판매대에서 미리 다른 음반을 샀다가도 이 노래가 담긴 음반으로 교환하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특히 수도자들의 유기서원이나 종신서원미사 중에 부르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시곤 했었다. 그래서 이 단순한 기도노래를 좋아하는 수도자들도 참 많다.
시인이신 이해인 수녀께서도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라며, 함께 초대된 미사에서 자주 이 노래를 청해 들으시곤 했다.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주체할 수 없도록 나온다고 했다. 딱 꼬집어서 어쩐 점이 좋다거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것도 없이,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감동과 은혜가 느껴지며, 그리고는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린이의 언어처럼 단순한 가사내용이 쉽게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김수환 추기경 또한 그런 단순함이 좋아서 즐겨 애창하셨으리라. 그분이 말하기를, 당신이 인권회복에 동참하거나 억울하게 쫒겨난 철거민들과 함께 하는 것은, 좌경이나 진보를 넘어서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했다. 당신이 부르는 노래처럼 하느님을 알고 느끼고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그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고 싶었고, 그런 삶의 정신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민중저항가요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의 대표적 중심인물인 남미의 가수 메르쎄데스 소사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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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선종 이후 며칠 동안 우리 사회 공동체가 보여준 모습은 실로 기적에 가깝다. 호사다마라고, 한 편에서는 그분의 일본유학시절을 놓고 '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복무했느냐 학도병으로 끌려갔느냐'로 말씨름을 하기도 한다. 또한 대다수의 국민이 실망을 느끼고 있는 대통령과 현 정권에 대해 친화적인 발언을 하셨다고 섭섭해 하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라 찾아온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얘기들로 열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잡음들은 그분이 살아내셨던 대부분의 삶의 모습에 비추어볼 때 조족지혈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온 국민들이 애도하며 진심으로 그분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리라.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이토록 모든 세대와 종파를 초월하여 온 국민이 애도했던 것이 딱 두 번이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죽음 앞에서였고, 그리고 이번이다.
그런데도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행렬과 명동성당을 가득 메운 장례미사 참석자들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많은 사람들이 왜 저곳으로만 찾아가고 있는지 안타까워했다. 그분의 삶이 그토록 위로를 주었다면 우리도 그리 살면 될 것이고, 끝도 없는 행렬에 나를 보태어 서로를 힘들게 하기보다, 그럴 시간에 그분께서 살아내시려고 하셨던 거룩한 삶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라고도 생각했다.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히 춥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독거노인들이라거나, 온기 없는 쪽방을 피해 공부방으로 모여드는 가난한 어린이들, 혹은 한 끼 식사를 때우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쥔 채 민들레국수집에 찾아온 노숙자들을 만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진정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가신 분의 소망을 이루는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과 하느님께 잘해드리는 것인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늘 우리 편이 되어주신 그분에게 우리 또한 그분 편이 되어주는 일은 어떤 것인지를 따져보고 싶었다. 아제는 참으로 오지랖도 넓으시다.
이런 내 심정을 드러내었을 때 아내가 말했다. "때때로 사람은 감성적일 필요가 있어. 우리가 매사에 너무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사랑하고 좋아하는 하느님을 그분이 스며있는 사람에게서 만나면 되는데도 자주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늘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잘 누리면 되는데도 자주 또 다른 하늘나라를 동경하듯이,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섭섭하고 마음 아파서 한 번이라도, 아니 잠깐만이라도 보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야.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그리 한다면, 평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도 동참하여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심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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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보통사람들의 심정을 잘 헤아리셨던 그분. 그래서 그런 보통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 스며있는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누리셨던 그분. 그랬기에 당신 스스로 지은 아호인 바보('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의 준말)처럼 늘 히죽 웃는 얼굴로 일상에서 재치와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그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편이 되어주고, 억울하게 핍박받는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똑같은 심정이 되어 거룩하게 분노하셨던 그분.
오늘은 그분의 가슴을 만나 아제인 나도 위로받고 싶다. 더 이상 그분이 모셔져 있지 않더라도, 그분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병원 침상이나 명동성당 제대 앞으로 가, 그분의 따스함을 잠시라도 누려보고 싶다. 그분의 투박한 음성으로 다시 한 번 '되게 못 부르는 그 노래'를 듣고 싶다. 모두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에. (끝)
*그 동안 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추기경의 아제'가 감사드립니다.
사진 고태환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그리고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김정식의 삶과 노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께 부탁의 말씀 올립니다. 그 동안 다음카페에서 운영되었던 <지금여기>가 지난 해(2008년) 11월 말 같은 이름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라는 독립 홈페이지 www.nahnews.net 로 창간되었습니다. 그곳에 <김정식 칼럼>이 있구요. 새로 걸음마를 뗀 <지금여기>에 힘을 실어주시는 마음으로 그곳을 방문하시고 회원가입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사랑이 희망이 됩니다.
노래 - 김정식「난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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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인이 건네주시는 덕담을 이해 몬하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 ㅎ ㅎ ...
하느님 난 당신을 알아요. .. 하느님 난 당신을 그려요.^^ 난알아요..ㅎㅎ
추기경님! 생각만해도 가슴이 온기로 더워 집니다. 길고 길게 늘어선 행렬 앞에서 되돌아 오며 "예수님을 따르던 오천의 군중이 다른 사람이 아니구나"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는길, 본당에 들러 미사를 드리며, 미사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추운 바람 속에 묵묵히 서 있던 행렬에 부끄러웠습니다. 그 분과 한 시대, 한 공간에 살았다는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추기경님이 돌아가신 이튿날인 17일에 명동 지하성당에서는 순교자현양회 시복시성미사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시복시성미사는 취소되었고 그 곳에서 추기경 추모미사가 시간마다 이어졌습니다. 미사 후에는 가톨릭회관 후문까지 이어진 줄에 서서 대성당의 조문행렬에 참여했지요. 구불구불 이어진 줄이 퇴계로 어디까지라더라 하면서도 전혀 지루하지도 그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저마다 추기경과의 짧은 만남이라도 있으면 그것들을 이야기하고 그것도 없으면 나는 왜 이렇게 추기경님과 한번도 마추쳐보지도 못한거야 한탄도 했습니다. 드디어 들어간 대성당에서는 스쳐 지나가며 유리관 속의 추기경님을 힐끗 볼 수 있을뿐!
우리 한국교회가 당신의 그 크신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