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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건봉사는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
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출처:건봉사 홈페이지>
신흥사에서 14시에 출발하여 "내가 가고 싶은 절 금강산 건봉사" DVD를 시청하며 14시 50분경
건봉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말자 대웅전에 참배후 각자의 짐을 오늘 저녁 투숙할 배정된 방사
에 내려두고 등공대 참배부터 하기로 하였다.
불이문 / 1920년에 건립된 것으로 6. 25의 전화를 유일하게 면한 건물이다. 앞쪽 석주의 정면에는
커다란 금강저(金剛杵)를 새겨 놓아 눈길을 끈다. 천왕문을 따로 건립할 수 없었던 당시의 경제
사정에 의해 불이문에다 금강저를 그려서 사찰 수호의 기능까지 보탠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이문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각각의 기둥에는 금강저 문양을 새겨 놓았으며 앞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이었던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순례단원들이 불이문을 지나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 들어서고 있습니다.
천왕문을 지나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다스리는 도리천(忉利天)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서있다고 합니다.
건봉사능파교(乾鳳寺凌波橋) 보물 제1336호 /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건봉사 일원의 4개 홍예교 중 규모가 크고 가장 견실하게 보존되어 있는 이 다리는 1708년 (숙종
24) 처음 건립되었고, 1745년과 1880년에 중수되었다. 흔히 능파교(凌波橋)로 부르는데, 본래 이름
은 산영교(山映橋)가 맞다.
‘능파’란 흔히 가볍고도 우아한 미인의 걸음걸이를 형용하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고해(苦海)의 파도를 모두 헤치고 이제 해탈의 부처님 세계로 건너간다는 의미에서 능파교라
한 것으로 보인다.
닫혔던 철문을 열고 극락세계로 가는 길을 찾아 등공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등공대 / 극락세계의 문이 열린 등공대입니다.
송담스님께서 비를 맞으며 우리 단원들을 안내해주시고 등공대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계십니다.
등공이란 육신이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몸은 벗어버리고 영혼만 부처님의
연화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무술년)에 발징화상께서 원각사를
중수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푸니, 이것이 한국불교 염불만일회의 효시이다. 이 때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스님 31명과 염불을 드렸는데, 뜻을 같이하는 신도 1,820명이 환희심이 일어 자원을 하였다.
그 가운데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시주하여 주야로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는데, 일만일
(27년 5개월)동안 기도하시던 스님들이 원성왕 3년인 787년 회향을 할 때, 건봉사를 중심으로 사방
허공으로 몸이 그대로 떠올라 날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1.5km 정도를 날아오른 스님들은
육신의 허물은 그대로 땅에 떨어뜨리고, 맑고 밝은 정신만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고 시주를 하던
신도들도 모두 극락왕생을 하였다.
스님들의 다비식을 거행한 곳을, 몸을 살랐다고 하여 <소신대(燒身臺)>라고 하였다. 소신대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뜻을 기려 기도에 정진을 하였는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져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양씨 성을 가진 연대월 보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백원을 희사하고, 기념탑을 세워 봉안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를 가상히 여긴
스님들과 신도들이 동참하매, 순식간에 모인 돈이 천원이 모였다. 갑인년(1914년) 4월에 역사
를 시작하여, 을묘년(1915년) 5월에 역사를 마치고 등공탑을 세워 그 뜻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후
소신대를 등공탑이 있다고 하여서 <등공대>라고 불렀다. 1915년 세워진 등공탑 비문에 보면(운고
김일우 지음) 「절 북쪽 5리쯤에 아직도 몸을 불사른 대가 있는데, 오랜 세월을 겪다보니 꽃이피고
잎이지는 변천을 겪었다. 많은 시일을 보내자니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폐허에 돌을 포개놓고 구경하게 두매, 산도 이로 인해 무안해 하고, 물도 이 때문에 소리를 삼킬
지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신이나 액운(살)을 쫓는(삽) 개라는 뜻을 지닌 한국의 대표적인 토종개 삽사리도 우리와 함께
등공대를 참배하였습니다.
등공대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법문중인 송담스님 /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친견장인 만일염불원에서, 이곳에 5과을 모셔
일반인이 친견할수있도록 하였고 나머지 3과는 적멸보궁 보탑에 봉안하였다.
전도몽상에서 멀어진 사람만이 지혜의 눈이 생겨 (願我早得智慧眼)
문제를 문제로만 보기(있는 그대로 봄)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편을 쓴다(願我早得
善方便)...... '장미가 아름답다'는 객관이 아니라 주관이고 자기망상이다. 장미는 아름답거나
추하지 않고 장미일 뿐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내가 일으켜 놓고 객관이라고 우긴다. 장미까지
가 객관이고 아름답다고 일으킨 마음은 자기 때문인데 장미때문이라고 한다. .... 내마음에 일어
나는 모든 생각은 나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알아 차려야.......
이날 송담스님께서는 저녁 공양전과 후에 두번에 걸쳐 만일염불원에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송담스님께서 내신 문제를 맞추고 받은 합죽선입니다. 문제의 답은 금강경 사구게 중에서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법구경 기신품(己身品)중에(부채에 있는 글)
自己心爲師 자기심위사
不隨他爲師 불수타위사
自己爲師者 자기위사자
獲眞智人法 획진지인법
스스로의 마음을 스승으로 삼아라
남을 따라서 스승으로 하지 말라
자기를 잘 닦아 스승으로 삼으면
능히 얻기 어려운 스승을 얻나니
적멸보궁 / 건봉사에는 사명 대사가 모셔 놓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진신사리탑이 있고,
이 탑을 참배하기 위한 적멸보궁이 있다.
우리 순례단은 저녁예불 시간에 송담스님의 법문을 듣고, 여래지 보살만이
적멸보궁 저녁예불에 참석하여 茶공양을 올렸다.
송담스님 법문이 끝난후 우리 순례단은 적멸보궁에서 포교사이신 수행심보살님 집전으로 천수경
을 시작으로 석가모니불 정근, 108배 등으로 예불을 올렸는데, 공양간에서 우리순례단의 예불을
위해 특별히 마지(摩旨)를 지어 주셔서 수행심보살님이 마지를 올렸다.
예불이 끝난후 여래지보살이 일요일 집안행사 때문에 남은 내일 일정을 같이하지 못하고 21시
30분 시외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박사장과 내가 간성 시외버스정류소 까지
바래다주고 돌아 왔는데, 여래지보살님의 열정에 감복할 뿐이다. 그리고 여래지보살께서
저녁공양후 기도할때 간식용으로 떡(콩설기) 1말과 두유를 보시해 주셨다.
철야 정진중에 적멸보궁 뒤
철야정진기도중인 고찰순례단원 / 적멸보궁에서 10여명이 끝까지 남아 새벽 3시까지
철야정진을 하고 이어서 숙소로 가서 세수등을 하고 4시 대웅전 새벽예불에 참석하였다.
새벽 3시경 적멸보궁
새벽 3시가 가까워 옵니다.
아침공양후 또다시 적멸보궁을 참배하러 가는길
조각구름을 보개(寶蓋) 삼아 아침햇살을 받고 있는 적멸보궁 입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적멸보궁 주련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
雙林示滅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
眞身舍利今猶在(진신사리금유재)
普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
만대에 구르는 법륜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시여,
쌍림 열반을 보이신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게 하지 않으리.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탑 / 1605년(선조 38) 사명 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 온 부처님의 치아와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1724년(경종 4)에 건립하였다.
높이 3.45m인 이 탑은 한 변이 1.8m인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의 모양을 이루며 우뚝 서있다.
기단부 하대석의 밑부분에는 8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 16잎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는데, 귀꽃을 8면의 모서리에 돌출되게 세워 놓지 않고 16개의 연꽃잎 속에 바로
새겨 넣었다. 기단부 중대석에는 동심원을 새기고 그 안에 범자(梵字)와 만(卍)자를 새겨 놓았다.
상대석에는 16잎의 양련(仰蓮) 위로 다시 16개의 십자문양을 새겨 놓은 팔각의 탑신괴임돌이
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16개의 연꽃잎은 마치 웃고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여진다. 그리고
괴임돌에 새긴 심자형은’ 卍’자의 변형으로 원래 길상만덕(吉祥萬德)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탑신부는 둥근 모양의 탑신석(塔身石)과 팔각의 옥개석(屋蓋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급경사를
이룬 우동선(隅棟線)은 뚜렷하지만 처마 부분에 대한 처리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옥개석은 너무나 높게 솟아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와 후기의 부도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ㆍ복발(覆鉢)ㆍ보륜(寶輪)ㆍ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모습은 전통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체적
으로 볼 때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풍의 부도형식을 따르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보륜
에 새겨진 귀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하부의 귀꽃은 사람이 두 손을들어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요
상부의 귀꽃은 어깨에 힘을 잔뜩 넣은 사람이 두 발을 굳건하게 딪고 서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이 탑 옆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높이 1.72m의 옥개석 있는 부도와 높이 1.82m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본래 부처님의 탑 옆에는 고승의 부도를 세우지 않기 마련인데 이곳에 2기의
부도가 서 있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들 부도의 위치로 보아 부처님과 관련된 유품을 모신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리고 탑비전(塔碑殿)의 북단에는 1906년에 건립한 비가 있다.
직사각형의 대좌 위에 1.8m 높이의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운산형(雲山形)의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이 옥개석의 중앙에는 삼태극(三太極)을 새겨 놓았고 비의 정상에는 보주를
얹어 놓아 한말의 시대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높이는 3.18m이다.
아침의 적멸보궁 안입니다.
산신각 /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대웅전 구역에서 훌쩍 벗어나
적멸보궁에 가는 길목에 있다. 안에는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아침에 적멸보궁 참배를 마치고 다시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으로.....
봉서루
십바라밀 석주 / 바라밀 석주에 새겨진 열 가지 도형은 탑돌이 풍속-십바라밀 정진의식精進儀式의 잔영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위 왼쪽 기둥에는 2)별과 반달(상현달), 4)가위, 6)금강저, 8)상하로 놓인 두 개의 원,
10)세 개의 작은 원이 큰 원 속에 들어 있는 모양 등 5개가,
오른쪽 기둥에는 1)보름달, 3)신발, 5)구름, 7)좌우로 놓인 작은 원 두 개, 9)네모를 둘러
싼 두 개의 동심원 모양 등 5개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의 정진도형의 내용은 1931년에 근대의 고승 안진호(安震湖, 1880-1965)스님이 편찬한
석문의범(釋門儀範)에 해인도海印圖와 함께 (모양이 바라밀 석주에 있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
가 있으나) 설명되어 있기에 해당 페이지 사진3장을 아래에 올리니 참고하시고 특히 빨간선
안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四. 精進 剪子 사. 정진 가외 의 가외는 가위입니다.
1) 원월(圓月); 보름달을 나타낸 것으로 보시바라밀을 表한다.
재(財), 법(法0, 무외(無畏)의 3종 보시로써 중생심을 따라 모두 만족케 하는 것이 마치 청정허공에
광명월륜(光明月輪)이 무사원조(無邪圓照)함과 같으므로 보시바라밀을 보름달에 비유한 것이다. 달의 이같은 상징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수월보살, 만월보살 등 관음보살의 화현들이
있고, 월인천강(月印千江)이 널리 알려져 있다.
2) 반월(半月); 반달 또는 상현달을 나타낸 것으로 지계바라밀을 表한다.
옳지 못한 일과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정계(淨戒)를 점차 닦아 이루어 나가는 것이 마치 상현달
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지계바라밀을 상현달에 비유한 것이다.
3) 鞋經[신날]; 인욕바라밀을 表한다.
外辱을 견디고 참으면서 안으로 법성을 밝히는 것이 마치 신날이 밖으로부터 찔리는 것을 방어
하여 발을 안전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인욕바라밀을 신발에 비유한 것이다.
4) 剪子[가위]; 정진바라밀을 表한다.
一切智에 마음을 쏟아 不退転하는 것이 마치 가위[剪刀]로써 물건을 자름에 유진무퇴(有進無退)
함과 같으므로 정진바라밀을 가위에 비유한 것이다.
5)靉靆[구름]; 선정바라밀을 表한다.
마음을 깊은 한 곳에 모아서 일체의 熱惱를 소멸시키는 것이 마치 많은 구름이 드리워 대지의
열염(熱炎)을 식혀, 맑고 서늘하게 함과 같음으로 선정바라밀을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6)金剛杵(금강저); 지혜바라밀을 表한다.
지혜의 공장(工匠)으로써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의 산을 뚫고 부수어 번뇌의 광맥을 발견하고
깨달음의 불로써 제련하여 自己佛性의 金寶(금보)를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마치 금강저의
견고함 (堅)과 날카로움(利)과 밝음 (明)이 구족하여 앞으로 나아감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므
로 지혜바라밀을 금강저에 비유한 것이다.
7)좌우쌍정(左右雙井); 작은 두 개의 원을 좌우로 둔 것은 두 개의 우물을 나타낸 것인데,
방편바라밀을 表한다.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케 하여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것이 마치
근원이 하나인 원천을 두 개의 우물로 나누어 동서(東西)에 두루 편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좌우쌍정(左右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8) 전후쌍정(前後雙井); 작은 두 개의 원을 상하로 둔 것은 앞 뒤의 우물을 나타낸 것으로
원(願)바라밀을 表한다. 위 아래의 우물은 귀하고 천함,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다.
일체의 불찰(佛刹)과 일체 중생의 바다에 대원(大願)을 가지고 편입하여 보살행을 닦는 것이 마치
앞과 뒤의 두 개의 우물에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음료를 각기 얻는 것과 같으므로 전후쌍정
(前後雙井)에 비유한 것이다.
9)고리두퇴(卓環二周); 두 개의 동심원과 그 내부의 작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이 도형은 집과
그것을 둘러싼 견고한 담을 나타낸 것으로 역(力)바라밀을 表한다.
일체의 불국토에 정력(正力)으로 들어가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는 것이 마치 집과 담을 수리,
축성하여 밤낮으로 순시하여 외침을 막는 것과 같으므로 탁환이주(卓環二周)에 비유한 것이다.
10) 성중원월(星中圓月); 큰 원 안에 세 개의 작은 원을 그린 것은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지(智)바라밀을 表한다. 삼계(三界)와 삼세(三世)의 세간적인 지식<遍知>을
세 개의 조그마한 원으로 표시하고 불교의 정지(正智)를 바깥의 큰 원으로 표현하였다.
삼세의 일체법을 여래의 지혜로 두루 깨우치되, 가로막는 것도 없고 거리낌도 없는 것이 마치
달이 별무리들 속에 있으면서도 멀고 가까운 곳을 다 비치는 것과 같으므로 성중원월(星中圓月)
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지바라밀 도형은 별 무리 속에 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 속에 별이 들어 있는 형상이라
월중성(月中星)인 듯하다.
어떤 해석은 달 주변에 있는 별무리는 달빛에 은폐됨으로 권역 밖에는 별을 그리지 않고
달과 겹쳐 보이는 권역안의 별만 그려 넣은 것이라 했다.
십바라밀 정진도형 자체는 오래전부터 불교 전통 의식의 하나인 탑돌이 행사에 적용되어 왔다.
탑돌이는 보통 삼귀의례를 마친 후 십바라밀 정진도형을 따라 탑주위를 돌게 된다.
오늘날에도 탑돌이 행사 등에서는 이 정진을 행하고 있다. 또한 도는 방법도 아침과 저녁이 다르
며, 아침에는 본체를 쫒아 작용을 일으킨다(종체기용從體起用 )라고 하여 왼쪽부터 돌고, 저녁에
는 작용을 거두어 본체로 돌아간다(섭용귀체攝用歸體)라고하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돈다.
해인도海印圖 :
일명 법성도(法性圖)라고도 하는 것으로,
신라 무열왕 때에 의상조사가 당나라에 가서 지엄화상 밑에서 화엄경을 공부할 때,
스승이 원(圓)과 방형(方形)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72개의 법게상(法界相)을 그려 문도들에게
제시하자 의상조사가 72개의 뜻을 다시 요약한 게송을 일정한 도형속에 채워 쓴 것을 말한다.
해인도에는 인도[印道 : 글자가 연속적으로 쓰인 길]가 직각으로 꺾인 인각印角을 54개 가진
미로迷路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인도를 따라 30개구句, 총 210글자가 시작과 끝이 이어져 끊임
없이 반복되도록 되어 있다. <위 석문의범 첫번째 사진 왼쪽>
봉서루 아래 누하진입(樓下進入)
대웅전 / 건봉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57년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옛 강원의 자리에 군부대
에서 건립한 앞면 6칸, 옆면 4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 최근 1994년 이 건물을 헐고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다시 지은 것이다.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역무비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一體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하늘 위, 아래에 부처님 같은 이 없고
시방세계에도 역시 견줄 이 없네.
세간의 모든 것을 내가 다 보았지만,
일체에 부처님 같은 이는 없네.
대웅전의 불.보살 /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부처님 위에 보궁형 닫집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명부전 /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전각으로,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를 하고 있다.
안에는 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였는데, 6.25전쟁 때 산화한 군인을 비롯한 숱한 사람들의 영령을
모시고 있어 건봉사 명부전은 더욱 뜻이 있다.
주련
地藏大聖威身力(지장대성위신력)
恒河沙劫說難盡(항하사겁설난진)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利益人天無量思(이익인천무량사)
지장대성 위신력은
항하사겁을 설하여도 못다함일세
잠시동안 보고 듣고 절 하더라도
인간천상 이익됨이 한량없도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봉서루 / 여기서 늦여름밤 더위를 식히며 밤을 새운 순례단원도 많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치아사리 / 건봉사를 떠나기 직전에 한번더 친견하며.......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치아사리는 전세계에 15과 뿐인데 스리랑카에 3과가 있고 건봉사에 8과가
봉안되어있는데 그중에 3과는 적멸보궁 보탑에 모셔져 있고 위 사진의 5과는 만일염불원내 친견장에 모셔져 있습니다.
통도사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임진왜란때 왜군이 약탈해 간 것을 사명대사가 되찾아
와 건봉사에 모셨으며,
1986년 어느 봄날 조계종 직원의 꿈에 부처님이 현신하시어 사리가 도굴당했다고 하여, 다음날
건봉사에 가니 학술조사를 가장한 도굴범들에 의하여 정말로 도굴되었더라고 합니다. 도굴범
들은 사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질책하는 똑 같은 꿈을 여러날 연이어 꾸게되자 겁에 질려
관악구 봉천동 사거리,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가야파크호텔’ 프런트에 맡겨놓은걸
되찾아 왔다고 합니다. (아래는 당시 경향신문 기사 스크랩)
건봉사 순례를 마치고 나오면서......
하룻밤을 건봉사에서 보내면서 우리 고찰순례단원들은
철야정진기도로 업장을 닦고 지은 공덕은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였다.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_()_
원컨대 이 공덕 두루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나와 모든 중생들 모두 극락세계에 태어나
다 함께 무량수불 친견하고 함께 불도 이루어지이다.
버스가 우리 고찰순례단의 탑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전 7시 30분 다음 순례고찰인 낙산사와 홍련암을 향해 출발합니다. 홍련암에서는 사시불공에
우리 백팔고찰순례단이 동참하기로 홍련암측과 약속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