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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을까요?”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이는 인천의 작은 과보요 유루(有漏)의 원인이어서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착한 인이 있다고는 하나 실상이 아닙니다.”
양무제가 벌인 불사의 목적은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소위 기복(祈福) 신앙이다. 기복은 불교와 모든 종교의 출발이자 존재 이유다. 나와 가족, 그리고 공동체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착한 일을 하고 남을 돕고 절대자를 믿는다는 것은 어느 종교나 같다.
그런데, 불교는 남을 돕고 착한 일을 하라는 기복신앙에서 더 나아가 중도(中道)의 종교이다. ‘내가 있다’는 입장에서 상대를 돕고 착한 일하는 것은 ‘나-너’ 양변에 집착을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있다’는 전제로 하는 모든 선행과 불사, 그리고 수행까지도 생사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양무제에게 ‘공덕이 없다’ 한 것이다.
하지만, 양무제는 ‘내가 있다’는 양변에 집착해서 자기 복을 짓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혈세로 불사를 했으니 ‘공덕이 없다’는 달마대사의 법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말년에 양무제는 그토록 원했던 복은커녕 황제에서 쫓겨나 굶어죽었으니 그의 기복 불사는 엄혹한 과보를 받았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너’라는 양변을 여읜 중도 정견에서 선행과 불사, 그리고 수행을 해야 한다. 만약 양무제가 중도 정견을 갖추고 불교를 믿고 국가 경영을 했다면,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무리한 절 짓기보다는 백성들이 잘 살고 행복하게 하는 불사를 했을 것이다.
또 건축 불사를 하더라도 황제의 사비와 백성들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시주로 했다면 그 공덕이 무한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비참한 과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양무제의 불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