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부름의 기쁨글 :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
얼마전 어느 신부님의 성서 강의에서
'예수님은 지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장 충실히 이행한 분'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문득 '심부름'이라는 그 단어가 유난히 빛나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가슴에 박혔다.
우리말 사전에는 심부름을
'남의 부탁을 받아 대신 하여주는 일'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심부름을 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일인가?
설령 처음엔 좀 귀찮고 짜증스럽게 생각되더라도 일단 끝마치고 나면
후련한 자유로움을 느끼는 심부름에 대한 갖가지 에피소드와
추억을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갖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게에서 물건을 사오라거나,
밖에서 밥도 안 먹고 놀이에 몰두한 동생을 찾아오라거나,
이웃집에 무엇을 갖다드리라고 하거나,
설거지 도와달라고 하시거나,
하여튼 나 역시 여러 종류의 심부름을하는 사이에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되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서로 불목한 두 친구의 화해를 위해
좋은 말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서로 좋아하지만 말 못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심부름을 해주다가
좋은 인연을 맺게되는 일도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크고 작은 심부름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늘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말을 아끼고, 책임감이 투철하며,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일'을 소임으로 받은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수녀修女는 누구보다 사랑과 봉사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리라.
인도의 마더 데레사처럼 오늘도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을 돌보고,
행려환자들을 데려다 거쳐를 마련해 주며,
여러 유형의 장애인, 미혼모,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심부름꾼으로서의 수도자들,
봉사자들이 우리 주위엔 많이 있다.
또 직접 현장에서 뛰진 않더라도 수도원 안에 머물면서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민과 괴로움을 정성스럽게 들어주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숨은 심부름꾼들도 많다.
자기가 기도해야 할 대상들의 긴 명단을 노트에 적어 보여주던
어느 수녀님의 그 소박한 웃음에서 난 깊은 사랑을 느꼈다.
어느 부서보다도 심부름이 더 많은 수녀원 안에서의
내 소임(비서실) 외에도 나에겐 독자들의 자질구레한 부탁이며
심부름이 꽤 많은 편이다.
- 다음 회답엔 꼭 시를 적어 보내달라.
- 책에 사인을 해서 보내 달라.
- 읽어야 할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
- 성당에 가고 싶으니 안내해 달라.
- 상심한 벗에게 격려의 전화를 해달라.
- 아기 이름을 지어달라 등등.
이렇게 강의나 원고청탁 외에도 끝없이 날아드는 개인적인 부탁들을
잘 선별해서 실행하는 일 또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야 할
사랑의 의무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때로는
모르는 척하고 싶을 때도 있는게 사실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부탁한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서 되도록
흔연한 마음으로 하려고 내 나름대로는 무척 애를 쓰고 있다.
어떤 좋은 일을 했다 해도 어린 시절처럼 누가 따라 다니며
칭찬을 해주거나 심부름값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마음과 정성을 다한 심부름을 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약간의 이기심과 허영심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하더라도
그 부끄러운 흔적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지워버리면 될 것이다.
심부름을 하다 보면 믿음, 인내, 절제, 온유, 친절, 사랑,
지혜의 덕이 필요하니 결국은 자기 수양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수도복 밑에 입는 내 속치마 주머니 속엔 늘 가로 3센티,
세로 8센티미터 정도의 조그만 메모 수첩이 들어 있는데,
내가 그것을 꺼내 쓰면 다른 이들은 무슨 시상(詩想)이라도 떠올라
적어두는 줄 알지만 실상은 내가 해야 할 일,
부탁받은 심부름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님 맞이 심부름, 편지 쓰는 심부름, 전화 심부름,
외출하는 심부름 등등 여러 종류의 심부름 중에도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심부름은 제일 기쁘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선물받는 상대에게 어울리는 물건들을 골라
고운 포장지나 꽃 달력으로 만든 봉투에 넣고 리본을 매면서 사랑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새롭히는 일은 언제나 기쁘고
설레이는 작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싱싱하고 고운 빛깔의 갖가지 과일이 들어 있는 선물 바구니를
이웃에게 건네듯 나는 오늘도 화안한 기쁨으로
내 일상의 바구니에 이런저런 심부름 거리를 모으며,
때가 되면 흔연히 심부름 나설 차비를 하며 살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의해 목숨까지 내놓은 사랑의 예수님처럼,
성모님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헌신적인 어머니들처럼
이웃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랑의 심부름꾼이 되고 싶다.
그리 되려면 우선 일상의 작은 일부터 더 충실히 해야 하리라.
최근에 읽은 김옥녀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누가 은근히 알린다
이 땅에 올 때
그분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사는 데 그만 빠져
그걸 잊어버렸다고
그로 인해서 그분 앞에
다시 서지 못하면
그건 안 될 일이지
어려운 곳으로 데려가
그곳 형제들을 내 몸같이 여기고
하늘에 소망 두라 하신 말씀
거역하고 되레 그분이 쌓은 보물
헐어버리고 있다면
그건 안 되지
-시<그것만은 안 되지>전문
참으로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는 사랑의 심부름꾼이 되려면
나 역시 얼마나 더 작아지고, 낮아지고, 부서져야 할지?
그러나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선을 다하는 좋은 심부름꾼이 되고 싶다. (1994)
「꽃삽」中에서
수녀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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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녀님의 삶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네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선물하시고 신경써 주시고 주위의 모든 사물까지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는 수녀님의 못말리는 잔정이 그 분의 심부름을 잘 하시려는 끊임 없는 노력임을 .... 사랑 실천임을 .... 저도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심부름꾼이 되고 싶어 집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