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최고 문형 가문 대구서씨/약밥 장수 아들 "재상"되다
한국명문 (2004-10-28 오전 5:11:42) Hit : 107 Vote : 15
4대 최고문형 가문 대구서씨/약밥 장수 아들 "재상"되다
----- 형조판서 충숙공 약봉 서성--------
서성은 1558년에 안동군 일직면 소호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현기,호는 약봉이다. 아버지는 함재 서해이
다. 출생 후 막 첫 돌을 지내자마자 아버지를 잃었고 청상이 된 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 자라면서 이
율곡과 송구봉 양문에서 공부했다. 문학은 율곡에게, 병술은 구봉에게 배웠다. 그의 출생과 동시 서울에서
중부[휘 구, 승사랑공]가 안동으로 내려와서 안아 주며 "너는 우리 가문의 큰 재목이다."하면서 서성을 정
성껏 돌봐 주었다. 서성이 서울로 이사한 후는 중형[휘 엄, 춘헌공]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교육도 받았다.
어느날 스승 구봉[송익필]이 제자들의 재질을 시험해 보려는 뜻으로 "너희들 중에서 누가 방안에 있는 나
를 문밖으로 유인하여 내보내겠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서성이 " 방안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을 문밖으로 나가시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님께서 지금 바로 문밖에 나가 계신다면 제가 곧바로 방안으로 들어 오시도록 하겠습니다" 고 말
했다. 선생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방안에 있는 나를 문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나 문밖에 있는 나를 방안으
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나 어렵기는 한가지다." 생각하면서 그에게 "네가 무슨 재주로 문밖에 있는 나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느냐? 어디 한 번 해보려므나." 하면서 문밖으로 나갔다.
이때에 서성은 "선생님! 이제 들어 오십시요" 하면서 "제가 방안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을 문밖으로 모셔냈
습니다" 고 말을 하니 선생은 깜짝 놀라면서 그제서야 그의 술책에 속은 것을 알고 껄껄 웃으면서 방안으
로 들어왔다. 서성은 또 " 선생님께서 문밖에 나가셨다가 바로 방으로 들어오셨으니 제가 문밖에 계시는 선
생님을 방안으로 들어오시게도 하였습니다" 고 하니 선생과 더불어 제자들이 그의 기지에 놀라면서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는 스승이 아침에 산책하다 보니 "까치가 팔딱팔딱 뛰며 나르더라"고 운을 떼니, 약봉은 서당에 오느라
니까 "송아지가 풀을 오삭오삭 씹고 있더라."고 차운하였다.
13세 때 율곡이 춘헌공에게 서성으로 하여금 시 한수 지어보라 하니 그는 " 지구가 넓고 넓어 하늘과 땅이
내 술잔 속에 드는구나. 선녀가 노래 부르고 나를 위로하네, 내 정신 더욱 황홀하구나."라고 작시했다. 두
스승이 무릎을 치며 "천하 문장이로다."고 칭찬하였다.
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 전적을 거쳐 사헌부 감찰과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다. 1592년[선
조25] 임진년 왜적들이 쳐들어와서 서울로 진격하니 임금이 의주로 몽진했다. 이때에 임금을 호종하던 호
소사 황정욱이 약봉을 종사관으로 하여 두 왕자와 함께 함경도 회령에 이르렀다. 국경인이라고 하는 그 곳
토민이 난을 일으켜서 두 왕자와 더불어 황정욱,약봉이 모두 적의 포로가 되었다. 약봉은 홀로 계책을 써
서 탈출을 하였다. 격서를 붙여 육진의 의병을 일으키고 그 곳 북평사 정문부에게 주고 방략을 가르쳐 국경
인과 그들 일당을 물리치고 두 왕자를 무사하게 구해 냈다.
명나라 장수 유정을 접대하고 삼남지역에 암행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다. 그뒤 경상우도 감사로 내려가
산성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또한 평양감사로 나가 아전들을 잘 다스려 선정을 폈다.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에 한음 이덕형과 백사 이항복의 억울함을 해명하고, 우
계 성혼과 송강 정철을 헐뜯고 무고하는 정인홍 일파를 처벌하라고 주장하다 임금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어 한성부 판윤, 개성부 유수를 비롯해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등 6도 관찰사를 역임하
고 공조, 형조, 병조, 호조의 4조 판서를 지냈다.
선조는 약봉 서성, 상촌 신흠, 영의정 유영경, 우의정 한응인, 판서 허성, 금계군 판서 박동량, 판서 한준
겸 등 7명의 신하를 머리맡에 오라 하여 영창을 잘 받들라 부탁하고 운명하였다.
그뒤 광해주가 등극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을 강화로 유배하는 등 연산군 이상의 학정을 저
질렀다.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죽이고 그 가족을 관비로 만드는 등 일가 몰살을 강행하였다. 이때 유교 7신
들이 일어나 무도한 임금이라고 규탄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유교 7신을 암살 또는 유배시켰다. 이것이 이른
바 계축옥사이다.
약봉이 57세에 충북 단양으로 귀양갔다. 귀양 길을 떠나면서 자손들에게 "물이화환 태어위선" 하라는 유훈
을 줬다. 환란이 왔다고 해서 착한 일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후손들은 그 유훈을 줄여서 물
태위선이라 하고 액자에 넣어서 벽 위에 걸어놓고 자손들을 훈계하고 있다.
대북파의 영수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인목대비의 세력을 없애기 위한 방안으로 인목대비의 친정 부친 연
흥부원군을 역적으로 몰아 멸족을 획책했을 때 일이다.
달성위의 딸과 연흥부원군의 아들 김규가 결혼을 했다. 그 아들[김홍석]이 두 살 되던 해에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이때에 도위공의 딸이 김홍석의 어머니에게 유모를 급히 불러서 아기를 등에 업혀 바로 이웃에
있는 아기의 외가로 황급히 데려다 주도록 했다.
이에 유모는 아기를 업고 한 걸음에 외가댁으로 달려가서 아기를 내당에 들여보내고 "부원군댁 도련님이
옵니다 잘 피신을 시켜 주십시요" 라고 당부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곧 바로 의금부 포교가 아기의 뒤를
따라 왔다. 아기의 외조모며 선조의 맏딸이 되는 정신옹주가 아기를 받아 치마 속에 은신을 시켜서 가까스
로 화를 면하였다.
그 후 이 아기를 외가 달성위 궁에서 양육하였으며 연안김씨 연흥부원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의 후손
으로 상신이 3명 나고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계축옥사 당시에 연흥부원군이 광해주에게 사약을 받아 별세를 하였다. 장례에 역적의 시신이라고 하여
아무도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 위험을 무릅쓰고 약봉과 달성위가 주선하여 양주 땅 서산에 안장을 하
였다
이 일로 해서 대구서씨의 약봉 후손과 연안김씨 연흥부원군 후손의 세의가 각별하다.
그뒤 영해[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입안면]로, 원주로 적소를 옮겨 11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1623
년 인조반정 뒤에 풀려나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제수 받았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
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호종하여 강화도로 갔다.
1629년에 병조판서 이귀, 연능부원군 이호민, 파평군 윤동로 등 12인이 뜻을 같이 하여 연지기로회를 조직
하고 친목을 도모하며 학문을 연구했다.
약봉은 1631년에 졸하여 포천 설운리에 잠들었다. 향년이 74세다. 역학에도 밝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이항
복이 "당대에 으뜸 가는 인물"로 꼽았다. 세상 사람들도 "청렴한 관리"로 칭송했다. 약봉은 녹을 받아서 굶
주리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결식을 하는 때가 많았다. 선조가 약봉 집을 가끔 내려다 보았다. 연 3일
간 연기가 나지 않아 양식이 없어 굶을 것으로 생각하고 쌀 몇 말을 보내며 "끼니나 끓여 먹으라 했다"는
[궁중진휼기록]이 아직 남아 있다.
약봉은 증직으로 의정부 영의정 겸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를 받았다. 시호는 충숙이다.
약봉이 서거하자 부음에 접한 인조가 "기어이 떠났구나! 떠났구나! "라 하며」눈물을 흘리고 신하를 보내
조문하며 산소 규격을 능과 같이 하라는 명을 내렸다.
배위는 증정경부인 여산송씨이다. 여산송씨의 친정 아버지 광주공[송영]은 후사가 없어 외손 봉사를 하고
있다. 광주공의 조부 숙정공[송질]은 여원 부원군에 영의정을 지냈다. 이 여원 부원군의 손녀가 약봉의 중
형 춘헌공의 배위이다.
충숙공 약봉의 신도비는 이조판서 겸 대제학 김상헌이 지었으며 형조판서 겸 도총관 오준이 쓰고 이조참
판 겸 세자좌빈객 김광현이 전자를 썼으며 묘비는 예조참판 조희일이 지었다. 불천위이며 대구 구암서원
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