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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4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리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 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 중에서 (1964년)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 모험을 사랑한 자유로운 정신 -
이사벨라 루시 버드는 1831년 영국의 북부 요크셔지방 보로브릿지 홀(Boroubridge Hall, North Yorkshire)에서 목회자인 에드워드 버드의 딸로 태어났다.
이사벨라의 로키 여행을 주제로 한 목판화
친가와 외가 모두가 중류 이상의 유복한 가문이었으며 여동생 헨리에타는 유일한 형제였다. 태어난 이후 줄곧 허약한 채로 성장했던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등의 통증 때문에 늘 괴로워했으며, 18세 때에는 등에서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몸이 약한 그녀를 위해 가족들은 여자아이였음에도 격렬한 옥외활동을 할 수 있게 배려했다. 가족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가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동안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게 된다.
성장기의 모든 시간을 자신을 괴롭히는 통증과 싸우면서 보낸 그녀는, 1844년 23세 나이에 의사의 권고로 혼자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사벨라를 딸이라기보다는 아들처럼 여겼던 아버지 덕에 19세기 말의 여성으로서 20세기에나 가능했을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뱃길을 이용하여 리버플에서 출발하여 핼리팩스를 거쳐 뉴욕까지 갔다가 오는 여행이었다.
여성들은 시중드는 사람없이는 한 발자욱도 여행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그 시대에 미혼의 젊은 숙녀가 홀로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 될 만 했다. 의사의 예측대로 항해를 하는 동안 육체적 괴로움은 사라졌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많은 교우 그리고 인상적인 풍경들을 통해 얻은 기쁨이 그녀를 훨씬 건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철도를 이용하여 보스톤과 온타리오 호수, 신시내티 그리고 동해안을 여행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녀는 1856년 《미국에 간 영국 여인(The Englishwoman in America)》을 출간했다. 그녀의 첫 번째 여행기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자 병은 다시 도졌고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옛날처럼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또다시 미국 여행을 통해 병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으나 1858년 자기 인생의 추진력이자 표준점이라고 여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8년 뒤엔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게 된다. 첫 번째 여행 이후 발이 묶인 그녀는 시간이 도망치듯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가운데 자신의 육체적 쇠락과 고통으로 불안해했다. 그 불안을 미지의 세계로 탈출함으로써 극복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에게 헌신적인 동생 헨리에타를 남겨두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1871년, 그녀는 마흔 살이 되어 있었고 그녀의 삶에서 더이상은 어떠한 도전도 탈출도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건강을 위해서 여행을 하라는 의사의 권고가 또다시 그녀에게 ‘자유’를 향해 떠나는 배표를 선사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기꺼이 이 같은 의학적 권고를 받아들였고,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그녀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이후 끊임없이 계속된 미지에 대한 탐험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지성을 겸비했던 19세기 여성 여행가’로서 명망을 얻게 한다.
1872년 10월, 이사벨라 루시 버드는 호주 멜버른의 찰머스 맨스(Chalmers Manse)에서 41세의 생일을 맞이한다. 호주의 더위와 먼지에 진절머리를 느낀 이사벨라는 뉴질랜드 또한 더 나을 것이 없음을 느꼈다. 하지만 오래된 증기선인 네바다호를 타고 오클랜드에서 하와이로 가는 1873년의 여행에서 그녀는 허리케인을 바다 위에서 만나게 되고 오히려 생기를 되찾는다. 그녀의 흥분은 지금의 하와이 섬인 샌드위치제도에 도착하자 최고에 이르렀다. 새로 도착한 곳에 매료된 그녀는 6개월 동안 그 섬에 머물렀다. 거기서 터키식 바지를 입고 남성용 안장을 얹은 말을 타면서 4천 미터 높이의 화산 마우나 로아를 등정하기도 했다.
하와이를 떠난 그녀가 새롭게 향한 곳은 로키산맥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이사벨라는 콜로라도를 여행했고 운명의 남자였던 짐 뉴젠트를 만났다. 로키에서의 생활은 미개 야만의 상태와 다름이 없었지만 이사벨라는 특유의 강인함으로 극복해내면서, 짐의 도움으로 에스티스 파크(Estes Park)의 가장자리에 있는 1만 4천 피트가 넘는 험준한 봉우리 롱스 피크(Long"s Peak)를 무사히 등정한다. 하와이와 로키에서 그녀가 경험한 놀라운 세상은 두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펼쳐졌다. 1875년에 출간한 《하와이 군도(The Hawaiian Archipelago)》와 1876년에 출간한 《로키산맥의 숙녀(A Lady"s Life in the Rocky Mountains)》로, 두 책은 모두 그녀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다음 모험지로 정한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859년에 개항을 했고 도쿄와 그 외 몇몇의 큰 도시는 이미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원한 곳은 변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옛 일본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런 곳이었다. 1878년 5월 일본에 당도한 그녀는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사무라이의 공격에 대한 위험을 감수한 채, 도쿄 주재 영국 공사의 도움과 염려 속에 여행길에 나선다. 여행을 위해 고용한 일본인 이토와 함께 도쿄 북쪽의 혼슈 지역과 니가타, 아오모리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하코다테의 아이누족 마을을 여행한다. 일본 여행을 마치고 2년 후 일본여행에 대한 결과물로 《일본의 미개척지를 찾아서(Unbeaten Tracks in Japan)》를 출간한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사벨라는 말레이시아에 들러 두 달간 그곳에서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 여행의 결과물로 역시 또 한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1883년에 나온 《황금반도와 그 곳으로 가는 길(The Golden Chersonese and the Way thither)》이었다. 일본과 말레이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이사벨라 루시 버드는 1879년 동생 헨리에타의 죽음을 맞아야 했고, 동생의 사후 헌신적인 자신의 주치의 존 비숍과 결혼하게 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된 것이다. 결혼은 그녀를 영국에 묶어두는 끈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끈 또한 오래지 않아 다시 풀리고 만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적은 나이였던 남편 존 비숍이 1886년 44세의 나이로 죽었던 것이다. 결혼 5년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모두 떠난 영국에서 그녀의 여행을 막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다. 여행을 다시 시작하기로 맘먹은 그녀는 보다 먼 여행을 계획했고 목적지를 인도로 정했다. 인도에서는 멀리 떠나려 했던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동생과 남편의 이름을 딴 기념병원을 세우는 일에 매달리면서 보냈다.
그녀는 인도가 지나치게 영국적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서 티베트를 가로질러 당도한 중앙아시아의 풍경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1890년의 페르시아 여행에는 동반자가 있었다. 중동지역의 석유와 다른 광물들에 대한 선취권을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은 조사를 위해 그곳에 탐험대를 파견했는데 그들 중의 한 사람인 허버트 소이어 소령이 그녀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그와 함께 했지만 결국은 결별하고 그녀 혼자 페르시아 여행을 완성한다. 여행의 범위는 쿠르디스탄과 터키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의 여행기는 《페르시아와 쿠르디스탄의 여행(Journeys in Persia and Kurdistan)》이라는 제목으로 1891년에 출간된다.
1892년에는 런던의 왕립지리학회에서 그녀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커즌(G. N. Curzon)과 같이 ‘치마를 입고 여행하는 여자’라고 그녀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본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회원 인정을 받게 된다. 최초의 여성회원이었다. 왕립학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큰 영예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이러한 영예에 대해 ‘여성의 일을 인정하게 된 개혁에 감사한다’는 간결한 대답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1894년 60대 중반의 나이를 맞이한 이사벨라는 사진 찍는 것을 새로 배우는 한편 극동의 나라 한국과 중국을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젊은 시절의 여행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서 오는 흥분이 가득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노년기 여행은 여행지에 대한 인류학적이고 지리학적인 관찰과 조사가 주를 이루었다. 개인의 감상이 돋보였던 이전의 여행들과는 달리 학문적 가치를 지닌 자료를 남긴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처음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94년 겨울이었다. 러시아 여행 이후 일본을 거쳐 조선에 온 그녀는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여정을 통해 조선의 중부 내륙을 보았고 육로로 금강산과 그 이북 지역을 여행했다.
이후 1897년까지 네 번의 방문을 통해 모두 9개월 간 조선에서 머물렀다. 그녀는 조선을 러시아, 중국, 일본의 가운데 놓여 있는 ‘셔틀콕과 같은’ 신세로 보았다. 그러나 ‘은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을 ‘길이 번영할 민족’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 때문에 돈과 짐을 모두 잃고 쫓겨나다시피 조선을 떠나는 경험도 한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극동아시아에 머무는 동안 비숍여사는 중국의 북부와 중앙 지역을 여행한다. 양쯔 강에서의 엄청난 홍수와 서양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면서도 의료선교활동을 겸한 중국여행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결과 1898년 《조선과 그 이웃들(Korea and her Neighbours)》를 펴냈고, 1899년에는 《양쯔 강 계곡과 그 너머(The Yangtze Valley and Beyond)》를 출간했다. 책이 출간된 후 쉴 틈도 없이 그녀는 다시 모로코 여행길에 올랐다. 1901년, 나이는 70세를 맞고 있었다. 모로코는 그녀에게 마지막 해외여행지가 되었다. 모험으로 가득 찼던 여정의 종착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1904년 에딘버러에서 73세로 인생의 여정 또한 마감한다. 성난 사무라이의 위협, 무슬림처럼 두건을 쓰고 다녀야 했던 페르시아 여정, 영국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무차별적 공격을 경험하게 한 중국에서의 여정. 그 어느 곳에서도 신체적 위협이나 마음의 두려움 때문에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젊지 않은 나이, 160 센티미터의 키에 작은 체구, 늘 통증에 시달리는 병약한 환자, 그리고 여성. 이 같은 조건 가운데 그녀의 의지를 막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조건들은 스스로를 강하게 했고, 자기 인생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 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그렇게 했던 결과 자신을 영국 빅토리아 시대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한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1894년 겨울(2월 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나가사키에서 일본우편선박회사에 소속된 증기선 히고마루(一向丸)호를 타고 15시간동안 항해하여 부산에 입항한다. 부산을 떠나 서울의 외항인 제물포까지는 뱃길로 3일이 걸렸다. 제물포는 서울의 강나루인 마포로부터 9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한강 하구에 있었다. 물살이 강하고 곳곳에서 매우 얕아지며 모래제방이 조수를 따라 옮겨 다녀 한강을 타고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비숍여사는 6명의 가마꾼이 메고 가는 교자를 타고 7시간 걸려 마포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거룻배로 한강을 건너 비로소 서울로 들어서게 된다.
부산
1894년 2월 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일본 나가사키 항을 출발하여 열다섯 시간 만에 부산에 당도한다. 배에서 부산을 바라본 첫 느낌은 헐벗은 고동색의 언덕이 주는 섬뜩함이었고, 닻을 내린 배에서 내려 만나게 된 부산의 첫인상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고 말한다.
“어느 면으로 보나 부산의 거주지는 일본풍이다. 부산에는 5.508명의 일본 인구 이외에도 8천명에 달하는 일본인 어부들의 유동인구가 존재한다. 일본 총영사관은 세련된 유럽식 가옥이다. 은행들은 도쿄의 일본제일은행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우편 전신업무 또한 일본인들에 의해 갖추어졌다. 일본인들은 거주지를 청결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산업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기계에 의한 탈곡과 정미, 고래잡이, 상어지느러미와 해삼요리, 어분 비료 제조업 등이다. 특히 고약한 냄새가 나는 마지막 사업은 엄청난 양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일본인들이 부산에서 활동한 것은 조선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관’이라는 이름의 상거래 장이 있어, 이곳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상인의 무역거래가 공적으로 허용되었다. 개항 이후 1877년 조일 간에 ‘부산구 조계계약’이 체결되면서 이미 일본인 마을이었던 용두산 주변의 초량왜관을 일본인 거류지로 개방하여 전관거류지가 된다. 조약에 의하면 일본정부가 매년 일본 돈 50엔을 조선정부에 납부하고 이곳을 임대하기로 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임대라기보다 일본 영토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경찰권, 징세권, 지방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관거류지의 설치는 곧 조선 영토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관거류지가 설치되자 일본인들의 이주가 급증했고, 이들은 주로 상업 활동을 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영사관, 군부, 거류민단, 상업회의소, 금융기관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 보호했다. 자국의 보호와 금전적 지원에 힘입은 이들은 점차 부산 근방의 토지와 가옥 특히 농경지를 매입하여 자본가로 성장하게 된다. 부산(부산 뿐 아니라 개항장들의 대부분에서)을 중심으로 한 일인 상인의 이와 같은 성장은 조선상인들의 활동을 제약했고 조선에 대한 명백한 경제적 침탈의 기초를 마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본 1890년대 중반의 부산의 모습은 이미 일본이 모든 경제적 실권을 장악해버린 뒤였다. 그녀가 부산에서 일본의 모습을 본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보이는 일본제일은행 지점은 1876년 6월 부산에 설치되었는데, 서양인들은 이곳을 통해서 환전과 예금 업무 등 근대적 은행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은행의 설치를 긍정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은행의 주요 목적은 전관거류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국민들에게 값싼 이자로 대출을 해주어 조선의 양곡과 토지 그리고 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었다. 또한 우편 전신 업무도 일인들에 의해 갖추어졌으며, 그들이 조선인들에게 기계에 의한 새로운 산업(탈곡과 정미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고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말하고 있지만 조선과 대륙침략의 기초를 닦기 위해 우편전신업무를 장악한 것이었고, 조선의 쌀을 손쉽게 대량 수탈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미소를 세운 것이기도 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부산을 방문했을 당시 부산의 외국인 거주지에는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의 상수도는 1886년에 외국인 거주지에 소규모로 설치된 것으로 거주자들의 부담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0년에 이르면 구덕 수원지를 축조하여 국내 최초의 현대식 상수도 시설이 부산에 설치된다. 불결한 식수에 의한 유행성 콜레라의 확산을 막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서양인 혹은 일본인들과 달리 조선 사람들은 같은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주거 환경이나 경제적 상황은 열악했다. 비숍여사는 부산에서 처음 맞닥뜨린 한국인과 그들이 살고 있던 곳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증기선 갑판의 먼 거리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보았다.......그 길 옆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바윗돌 위에 사다새(펠리컨)나 펭귄을 닮은 하얀 물체들이 얹혀져 있었다. 그 하얀 물체들은 사람의 보폭으로 부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물체들이 한국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한국인들이 사는 부산 구시가지는 비참한 장소였다. 부산 구시가지의 좁은 거리는 초라한 오두막집들로 채워져 있었다. 오두막집들 바깥에는 고체와 액체의 쓰레기들이 버려진 불규칙한 도랑이 있었다. 도랑 옆에는 옴이 오르고 털이 빠진 개들과 눈이 짓무르고 때가 비늘처럼 벗겨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완전히 벗었거나 반쯤 발가벗은 채로 들끓는 악취에도 아랑곳 않고 두터운 먼지와 진흙 속에 뒹굴거나 햇빛 속에서 헐떡거리며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근대적 위생개념에 익숙한 서양 여인이 보기에 당시 부산의 구 시가지와 한국인들의 모습은 비참하게 느껴질 만큼 불결하게 보였겠지만 스스로 말하고 있듯 그 곳의 모습은 당시 조선의 일반적인 도시들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일반적인 모습이었을 뿐이다.
제물포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부산을 떠나 3일 만에 서울의 외항인 제물포에 당도한다.
제물포는 조수가 11미터나 오르내리는 질퍽거리는 뻘밭이며 모래톱에 있는 좁은 정박지였다. 현대적인 규모의 배 다섯 척을 수용할 수 있는, 항구라고 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이렇게 항구답지 않은 항구가 당당하게 항구역할을 했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실리적 목적 때문이었다. 부산이 일본 혹은 서양인들이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들어오던 관문이었다면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 제물포는 조선의 왕이 거주하는 서울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다. 제물포는 부산과 함께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여 개항한 항구였다.
제물포의 경제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숙박업소를 경영했다. 그리고 상하이로부터 서양물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상점을 경영하여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상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휴식을 사치로 여길 만큼 엄청나게 일하고 그만큼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비록 무역에서는 뒤처져 있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우편업무와 은행거래를 통해 역시 외국인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고 비숍 여사는 말한다. 그리고 일본 은행(일본제일은행)이 은행업무 이외에도 조선에 수출하고 있던 영국산 면제품을 일본산 면제품으로 대체했던 것에 대해서 “다른 제조상의 문제도 있지만 영국산 면제품은 수송을 위해 최대한 다루기 쉬운 크기로 축소시킨다 해도 포장된 짐짝이 한국 조랑말에 싣기에는 너무 컸다. 반면, 일본은 하륙할 때 쉽게 하기 위해 부피를 줄였을 뿐 아니라 어디서서 쉽게 구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1887년에 3%이던 것이 1894년 현재는 40%로 향상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또한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가는 것에 대해 일본이 얼마나 대량으로 그리고 악착같이 모아 실어 나가는지도 이야기 하고 있다.
제물포에서도 비숍 여사의 눈에 비친 조선 사람들은 부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거의 망각하고 있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인 거류지 밖의 지저분한 거주지에서 살고 있었다.
마을은 ‘더러운 아이들이 떼 지어 앉아 그들의 무기력한 아버지를 본받을 방법을 찾고 있는’ 비루한 인상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 거류지에서 짐꾼으로 생활하며 어마어마한 무게의 짐을 나르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비숍여사가 처음 제물포에 당도해 느낀 바대로 제물포의 상권 장악은 중국인들이 일본인들 보다 우세했다. 중국 상인들은 조선 사람들의 배일 감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무역활동을 확장해 나갔다. 1890년대 인천(제물포)과 원산에서의 일본 상권에 대한 압도적 우위는 조선시장을 둘러 싼 양국 간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우세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상황이 달라진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당시 조선의 외국산 물품 수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외국 상품의 수요가 생긴지 13년 밖에 안 되는데 비해 조선 사람들이 외제품에 의존하고 있는 양은 놀랄만하다’고 쓰고 있다. 주요 수입품은 옷감과 등유 그리고 성냥이며, 주요 수출품으로는 쌀, 콩, 쇠가죽, 고래 고기 등과 같은 것들을 들고 있다. 이 때 수입되었던 옷감의 대부분은 면제품이었고 면제품은 영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입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조선의 시장에서 영국을 밀어내며 면직물 수출을 독점한다. 그들이 조선에 판매한 면제품은 상해나 홍콩의 영국 상인들로부터 싸게 산 것이거나 자국에서 방직기를 이용해서 생산한 값싼 면제품들로 이를 조선에 비싸게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이러한 이윤을 이용해 조선으로부터 면제품의 원료인 솜과 알곡들을 싸게 매입해 일본에서 다시 비싼 값에 팔아 이중의 이익을 내었다. 심지어 조선에서 값싸게 구입한 쌀은 조선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다시 비싼 값에 되팔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불공정한 대 조선무역이 교묘하게 이루어진 것은 조선에 개설한 일본 은행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설치된 일본 은행 가운데 조선의 경제 침탈에 가장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제1은행 지점이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개설된 이 은행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인 상인들에게 상업 활동 자금을 지원했다. 또, 조선으로부터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을 수매하는 한편, 조선의 총세무관으로 영입되었던 묄렌도르프를 매수하여 수출입 상품의 관세취급을 허가받아 조선의 관세장벽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은행권을 발행하여 개항장 주변에 유통시킴으로써 조선의 화폐유통에 큰 혼란을 초래했고 일본 화폐를 대량으로 유통시키면서 조선 화폐와의 시세 차익을 악용해 폭리를 얻는 등 공공연히 조선의 자본을 수탈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4년에 당도한 조선의 제물포항의 모습은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치밀하게 준비해가고 있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조선의 경기, 서울 지역에서 모은 쌀들은 제물포 곳곳에 바벨탑처럼 쌓여 있고, 일본인들이 조선으로부터 장악한 우편과 전신, 관세, 은행 업무가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는 등 오직 일본을 위한 항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제물포에서 교자를 타고 서울로 향한 이사벨라 버드는 거룻배로 한강을 건너 마포나루에 당도한다.
“우리는 거칠고 가파르고 불결하고 뻘밭 같은 마포의 강둑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 더럽고 좁고 질퍽거리는 마포의 거리로 들어섰다. 마포의 거리는 토산품을 파는 자잘한 구멍가게와 팔려고 길거리에 내놓은 나뭇단과 나뭇단을 산더미처럼 지고 운반하는 소들로 가득 찬 꼬불꼬불한 길이었다. 그 길에서 남자 일색인 군중들은 특별히 하는 일이라고는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그녀가 느낀 서울의 첫인상이다. 그녀가 살펴 본 서울은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수도들 가운데 하나이며, 드물게 좋은 입지조건을 가진 곳’이었고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관의 아름다움은 경탄할 만하며, 치안이 아주 잘 유지되고 있어 자유롭고 안전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울의 성벽 안쪽은 베이징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가 아닐까 생각되며, 거대 도시이자 수도로서 서울의 위엄을 생각할 때 그 불결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말한다.
“예법이 2층 건물의 건립을 금하고 있어 약 25만 명으로 추정되는 서울 시민들이 미로와 같은 골목길에 있는 ‘단층집’에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골목길이 짐을 실은 황소 두 마리가 동시에 지나가기 어려울 만큼 좁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 짐을 실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이며, 그것도 퀴퀴한 물웅덩이와 초록색 점액질의 걸쭉한 것들이 고여 있는 수채 도랑으로 더 좁아진다. 수채 도랑들은 각 가정에서 버리는 마르고 젖은 다양한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더럽고 악취 나는 수채 도랑은 때가 꼬질꼬질한 반라의 어린아이들과 수채의 걸쭉한 점액 속에서 뒹굴다 나온 옴이 오른, 눈이 흐릿한 개들의 즐거운 놀이터이다.”
《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사벨라 버드 비숍뿐 아니라 당시 서울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서울의 주거 환경을 최악의 불결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집집마다 수채를 통해 집밖에 흐르는 도랑으로 오물과 하수를 버림으로써 발생한 악취와 불결함에 대해 혐오와 경멸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감상들을 보인다. 하수시설이나 분뇨처리의 체계에 위생적 시각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에서도 인구 집중도가 가장 높았던 서울에서 외국인들이 느꼈을 당혹감은 다른 도시나 농촌에 비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서울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최악의 불결함으로 묘사한 주거 환경 속에서 대부분 밝고 건강한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남긴 일상의 사진에 있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마지막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1897년부터 서울은 크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을 새롭게 정비하기 위한 고종의 의지로 당시 한성 판윤이었던 이채연이 지휘를 맡아 서울의 도시정비가 단행된 것이다.
콜레라가 발생하던 불결한 샛길 위에 17미터 폭의 넓은 새 도로가 생겼으며 ‘좁은 오솔길은 없어졌고 진흙투성이의 시내는 포장도로 때문에 사라지고 없었다. 도로에서는 쓰레기에 때문에 겪던 고충이 사라졌으며 (작업 청소부에 의해 도시 밖으로 치워지기 때문에), 확 트인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꾀죄죄하던 상점 대신 유리로 된 진열대가 있는 상점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구 가옥과 하수 시설의 정비, 가옥 외관의 정비 등을 꾀함으로써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전에 ‘세계에서 가장 지저분한 도시였던 서울이, 이제는 극동의 제일 깨끗한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1894년 겨울과 1897년 봄 사이 나는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답사했다. 1894년 겨울, 내가 조선으로 배를 타고 떠나려 할 때 어떤 사람들은 The Korea라고 정관사를 붙여 호칭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 나의 많은 친구들은 관심을 가지고 위치를 점치기도 했는데 적도에 있다거나 지중해의 흑해쯤에 있다거나 그리스의 에게 해에 있는 다도해 어디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육을 받은, 이 유식한 사람들이 조선을 실제 경도나 위도에서 2000마일이나 틀리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희한했다. 조선 여행은 몽골리안들의 국가와 지리 그 민족적 특징을 연구해 온 내 학문적 계획의 일부였다. 처음 조선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 나라가 지금까지 내가 여행해 온 나라들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청일 전쟁 동안 조선의 정치적 불안, 급속한 변화, 그리고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이 나라의 운명을 깨달으면서, 이 나라에 대해 참으로 강렬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또 시베리아의 러시아 정부 아래 있는 조선의 이주자들의 현황을 보았을 때, 나는 미래에 있을 이 나라의 더욱 큰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조선에 머무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 나라가 처음에 안겨주는 찝찝한 인상들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강렬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조선사람들
조선 사람들은 중국, 일본 사람들과 매우 다르게 생겼다. 사람마다 얼굴생김이 뚜렷하게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복장의 통일성 때문에 더욱 눈에 잘 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유럽인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식별의 어려움이 조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갗에 있는 청동 빛깔의 흔적과 함께 몽골리안 특유의 눈꼬리 모양이 늘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의 얼굴색은 거무스름한 올리브색에서 아주 옅은 갈색까지 다양하다. 곧은 매부리코가 있을 뿐 아니라 콧구멍이 넓고 펑퍼짐한 들창코도 있다. 머리카락은 어두운 색이지만 대부분은 두드러진 황갈색이어서 맵시 있는 검은색으로 만들기 위해 유연(油煙)과 기름을 자주 바른다. 또 머리칼의 질감은 뻣뻣한 돼지털 같은 것에서 비단결 같은 것까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무성한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갖고 있고, 많은 이들이 더부룩하고 억센 수염을 가졌다. 입은 하층민들의 경우 입술이 넓고 두툼하며, 귀족들인 경우는 얇아도 모자람이 없는 형태로 다양하다.
눈의 색은 어두운 색이지만 암갈색에서 담갈색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광대뼈는 두드러지고 이마는 고상하며 지적으로 보인다. 귀는 작고 예쁘다. 사람들의 일상적 표정은 당혹하리만치 활기차다. 얼굴 생김새는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아 힘이나 의지의 강인함보다는 날카롭고 지성적으로 보인다. 조선 사람들은 확실히 잘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이다. 여자들의 평균 신장은 알 수 없으나 세상에서 가장 흉한 그들의 옷 때문에 결점이 더욱 과장되어 땅딸막하고 펑퍼짐하게 보인다. 손과 발은 성별과 계층을 불문하고 매우 작고 희며 멋지게 생겼다. 뾰족하고 아몬드 형태의 손톱은 주의 깊게 다듬어져 있다. 남자들은 힘이 세어 짐꾼들에게는 45킬로그램의 무게가 아무것도 아니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귀족이건 서민이건 잘 걷는다.
가족생활은 대가족제이며 도덕적으로 지극히 건전하다. 인구는 1천 2백만에서 1천 3백만에 이르며 여자가 더 적다. 이들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다. 스코틀랜드 식으로 말해 ‘영리하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총명함’을 상당히 타고났다. 외국인 교사들은 한결같이 이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에 비해 외국어 습득 능력과 억양이 우수하다고 말한다.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 의심, 교활함, 진실성 없음 등의 동양적 악덕을 보여준다. 그들 서로 간에 대해서도 얼마만한 신용과 미덕이 형성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여자들은 격리되어 있으며 열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의 지리
‘고요한 아침’ 혹은 ‘상쾌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조선은 단순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중국 북동쪽에 접해 있는 반도이며, 해안선의 길이는 1740마일(2,800킬로미터)로, 북위 34도 17분에서 43도에 걸쳐 있고, 동경 124도 38분에서 130도 33분 사이에 놓여 있다. 면적은 8만평방마일(20만제곱킬로미터)로 영국보다 조금 작은 크기이다. 북쪽과 서쪽은 두만강과 압록강(Yalu라고도 하는), 황해로 러시아, 중국과 경계를 짓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동해가 있어 일본과 경계를 이루지만 영국해협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방어막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두개의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과 압록강은 ‘흰머리의 산’이라는 뜻의 백두산으로부터 발원한다.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거대한 산맥이 뻗어있고 다시 수많은 지맥들이 뻗어 나와 있다. 이 산맥은 나라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산맥에 의해 나누어진 동쪽 지역은 산맥과 동해 사이에 있는 좁고 긴 지역으로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비옥하다. 한편 산맥의 서쪽 부분은 물이 잘 공급되는 비옥한 골짜기와 구릉들로 농업에 매우 적합하다. 호수는 수가 적고 크기도 작다. 바다로부터 수 킬로미터 내륙으로 항해할만한 규모의 강도 많지 않다. 예외적인 것들로 압록강, 대동강, 낙동강, 영산강, 그리고 한강이 있다. 한강은 동해에서 48.3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강원도에서 발원하여 나라를 반으로 나누며 흐른다. 서해의 제물포에서 바다와 만나며 비록 위험한 급류가 자주 있기는 하지만, 30마일(273.5킬로미터)에 걸쳐 교역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반도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좋은 항구는 드물다. 그러나 모든 항구들은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이다. 가장 좋은 항구는 부산항과 원산항이다. 제물포는 서울과 관련한 첫손 꼽히는 항구지만 전혀 항구라고 보기 어렵다. 외항은 큰 배나 군함들의 정박지일 뿐이고, 마을과 가까운 내항은 한강 어귀의 거센 조수 때문에 작은 톤수의 몇 척 정도 배를 정박시킬 수 있을 정도이다. 동해안은 가파르고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심이 깊고 조수 간만의의 차이가 불과 30-60센티미터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서쪽과 남쪽의 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7-11.6미터나 된다. 남쪽과 서쪽의 해안에는 다도해가 있어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해안선은 무수한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밀물 때 물에 잠겨버리기도 한다. 급조류 때문에 물길을 항해하는 것은 어려우며, 특히 한강의 강어귀에 생긴 큰 뻘밭은 해안선의 모양을 애매하게 만들어놓고 있다.
조선은 분명히 산이 많은 나라이며 평야라고 이름 붙일만한 곳이 거의 없다. 북쪽에는 명확한 중심지를 가진 산이 모여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백두산이다. 백두산의 높이는 2,400여 미터에 이르고 조선 사람들에게 신성한 산으로 여겨진다. 이 산맥들은 멀리 남쪽으로 분명한 산맥이 되어 해안선을 따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어진다. 이 산맥들로부터 수많은 등성이, 절벽을 만들고 그들은 떡갈나무로 덮여 있거나 또는 헐벗었거나 주름져 있고, 돌이 많은 시내를 갖춘 폭 좁고 경사 가파른 계곡들이 모여 조선을 조각내고 있다. 절경의 산과 무성한 숲을 간직한 ‘금강산’이 포함된 큰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줄어들어서 척박한 평지로 변한다.
지질학적 구성은 매우 단순하다. 중생대 암석이 황해도에서 나타나지만 전반적으로 고생대와 그 이전의 지층이 많고 화강암과 변성암이 많다. 서울의 북동쪽에는 화산암이 넓게 퍼져있으며, 북부지역에서도 용암과 화산암이 흔히 발견된다. 활동을 멈춘 지 오래된 화산 분화구들과 화산암층들 그리고 여러 화산들이 활동한 징표들이 곳곳에 있다.
기후는 의심할 바 없이 세상에서 가장 화창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곳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인들도 전혀 풍토병에 시달리지 않으며, 유럽인 자녀들은 이 반도의 어느 곳에서라도 안전하게 양육될 수 있다. 7월과 8월, 그리고 어떤 때는 9월 중순까지 덥고 비가 많이 온다. 그러나 열기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순화되어 활동은 항상 가능하다. 1년 중 아홉 달은 일반적으로 하늘이 맑다. 고요한 대기, 맑고 푸르며 구름 없는 하늘, 참을만한 건조함, 파삭파삭하고 쌀쌀한, 서리 내리는 밤 등, 조선의 겨울은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 서울의 여름 평균 기온은 약 화씨75도(섭씨 24도 가량)이고 겨울에는 약 화씨33도(섭씨 0도)정도이다. 연 평균 강우량은 882.7밀리미터이며 우기 중의 평균 강우량이 535.57밀리미터이다. 7월은 가장 습도가 높으며 12월은 가장 건조하다. 1년 중 물이 필요한 몇 개월 동안에 내리는 풍부한 강우량 때문에 물을 끌어다 쓸 경우는 오직 벼농사 때뿐이다.
조선의 동식물과 지하자원
조선에 있는 동물들은 양과 종류가 많아 주목할 만하다. 많은 수의 호랑이와 표범, 곰, 영양, 적어도 일곱 종류의 사슴, 여우, 해리, 수달, 오소리, 스라소니, 살쾡이, 몇 가지 종류의 담비, 별 가치는 없는 족제비, 줄무늬다람쥐 등이 있다. 새 종류로는 서울 근교에서 검은 독수리가 발견되며 개구리 매와 송골매, 꿩, 백조, 거위는 흔하게 볼 수 있다. 반점이 있는 오리, 청둥오리, 원앙새,(매우 수줍음이 많은) 터키독수리, 흰색과 분홍색이 섞인 따오기, 새매, 황조롱이, 두루미, 해오라기, 왜가리, 마도요, 쑥독새, 붉은발 도요새, 멧새, 보통 푸른색의 까치, 꾀꼬리, 숲 종다리, 개똥지빠귀, 딱새, 까마귀, 비둘기, 땅 비둘기, 때 까마귀, 휘파람새, 할미새, 뻐꾸기, 호반새와 옅은 푸른색의 물총새들, 어치, 도요새, 동고비, 회색 때까치, 꿩, 매, 솔개도 있다. 그러나 좀더 주의 깊은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어떤 새가 이곳의 텃새이며, 어떤 새들이 철새인지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서울 근교의 언덕들과 인근의 해안과 항구, 주요 도로의 황폐함은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또 조선 남부의 많은 곳에서 삼림이라 불릴 만한 것이 보존되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망자들의 덕(죽은 사람의 묘 때문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부와 동부 지역의 산 속, 특히 두만강과 압록강, 대동강, 한강의 수원 근처에는 매년 상당한 양의 재목들이 벌목되어 뗏목으로 강을 따라 수송된다. 하지만 아직도 나무꾼들이 손댄 흔적조차 없이 남아있는 아주 주목할만한 삼림들이 많다. 조선의 고유 수종에는 살구나무, 밤나무, 전나무, 구상나무, 소나무, 잣나무, 세 종류의 참나무, 은행나무, 싸리나무, 미루나무, 옻나무, 자작나무, 라임나무, 물푸레나무, 다섯 종류의 단풍나무, 가는잎 엄나무, 붉나무, 보리수나무, 향나무, 마가목, 개암나무, 측백나무, 버드나무, 회화나무, 서나무, 자두나무, 복숭아 나무, 화살나무 등이 있다.
식물지는 광범위하며 흥미롭지만, 진달래와 진달래속의 철쭉을 제외하고는 색이 화려하지 않다. 화려한 으아리는 몇 가지 변종이 있으며 넝쿨장미는 큰 나무들을 뒤덮고 있다. 특히 조선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덩굴은 칡넝쿨이다. 인삼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식물은 드물다. 산삼은 온스 당 15달러나 나가지만, 재배하기가 힘들어 상업적 가치는 없다.
조선의 광물자원은 논쟁거리이다. 아마 조선을 엘도라도 같은 나라로 보는 관점과 과연 땅 밑에 보물이 묻혀있기나 한지 의심받는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조선 사람들은 자기나라의 흙이 곧 금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지만 금은 개인용 장신구나 예술품으로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확실한 권위를 가진 한국 세관의 보고서에 의하면 1896년에 136만 276달러에 이르는 사금이 수출되었다고 한다. 아마 세관에 신고하지 않고 나라 밖으로 밀수출된 양도 거의 그 정도는 될 것이다. 은과 방연광도 발견되며, 구리는 매우 풍부하고, 개발되지 않은 철광, 탄광도 많다. 특히 석탄의 품질은 아주 좋다. 금을 함유하고 있는 석영은 아직 채광되고 있지 않지만 허가를 얻어 낸 미국 회사가 기계장비를 도입했고, 평안도에서 채굴 작업을 하고 있다.
제조업에서는 별게 없다. 최고의 생산품은 꾸지나무에서 만들어지는 몇 종류의 종이인데, 그 중에서도 벨럼지처럼 생긴 기름종이는 워낙 질겨서 한 장의 네 귀퉁이를 네 사람이 잡고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밖에는 품질 좋은 돗자리와 대나무를 잘게 쪼개 만든 발이 있으며, 예술품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정치와 경제
1392년 이래 조선은 현 왕조의 왕들이 통치해 왔다. 군주권은 세습되며, 근래 일본이 정치적 발언권을 갖고 있는 동안 일부 헌법상의 방향수정이 행해졌지만 왕의 권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군주의 칙령은 중국과 같이 법을 형성한다. 오랜 옛날부터 인정되어 왔던 중국의 종주권은 1895년 1월 종묘사직제단에서 왕의 서고문(誓告文)에 의해 친히 거부되었으며 그 해 5월 시모노세키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에서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완전하게 독립하였음을 중국이 승인하였다.
조선은 13개의 지방 구역과 360개의 단위 행정구역으로 나뉜다. 군대는 러시아인에 의해 훈련되는 서울의 4800명과 지방의 1200명이 있으며, 그리고 두 대의 상업용 증기선을 보유한 해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의 세입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원칙적이고 유능하며 정직하다고 여겨지는 관리들의 징세로 얻는다. 토지세는 1결(1결이란 비옥한 곳을 기준으로 6.34에이커 정도) 당 6실링이다. 가구 세는 한 가구당 60센트인데 수도에 있는 가구는 면제되고 있다. 인삼 재배에는 16실링이라는 중과세가 적용된다.
1876년 이래 조선은 일본, 중국,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과 잇달아 통상조약을 맺었고, 이런 조약들에 의해 서울과 제물포, 부산, 원산 같은 항구들이 개방되었다. 1897년에는 목포와 진남포가 추가로 개방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후, 외국 대표부들은 각국의 공사관을 지었다. 조선의 화폐는 가치가 떨어진 엽전을 쓰고 있는데 1달러에 500푼으로 거래되며 사업상 거액은 수표(어음)로 거래한다. 최근에는 20센트짜리 은화, 5센트짜리 니켈화, 5푼짜리 동화, 1푼짜리 놋쇠동전이 함께 유통되고 있다. 세련된 일본의 엔이나 달러도 이제는 모든 곳에서 유통되고 있다. 일본의 제일은행과 고하치은행은 서울과 개항장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다.
1897년 1월 현재 부산, 원산, 제물포의 항구에는 11,318명의 외국인 거주자와 266개의 외국사업체가 있다. 일본인 거주자가 10,711명이며 그들의 회사가 230개이다. 미국과 프랑스인들은 대개가 선교사이고 서울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로마가톨릭 성당(명동성당)과 미국의 감리교 교회이다. 영국인의 수는 65명, 중국인은 2,500명가량이 있고 이들은 주로 서울과 제물포에 있다. 내국인을 위한 우편제도가 네 종류의 우표와 전신 체계와 함께 새로 제정되어 서울은 이제 세계 모든 지역과 통신이 가능하게 되었다.
도로의 불편함은 악명 높으며, 주요 도로들조차도 거친 승마전용 도로 같다. 물품들은 어디서나 사람과 황소, 조랑말의 등에 얹혀 운반되고 있다. 그리고 특권을 얻어 낸 미국의 회사가 새로운 교통 수단인 철도를 제물포와 서울 간에 곧 개통하려 하고 있다.
조선의 문화
조선의 언어는 이원화되어 있다. 교육 받은 식자층은 가능한 한 중국어(한자)를 많이 사용하며 중요한 모든 종류의 문학은 중국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문학작품들은 천년 전의 중국 고전 문학을 모범으로 하고 있어, 현재 중국에서 쓰는 말과는 발음이 완전히 다르다.
조선의 글자인 언문은 중국 고전을 유일한 교육자료로 생각하고 있는 지식인층에게 전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식자층들이 쓰고 있는 중국어는 ‘한문’이라 부른다. 조선 사람들은 동아시아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된다. 몇 백 년 전부터 한문으로만 써왔던 ‘관보’에 1895년 1월부터 주요한 단어는 한자로 쓰고 일본의 가나처럼 음절마다 언문을 쓰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있기 이전에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부녀자들, 어린아이들만이 언문을 썼다. 더욱 진전된 혁신으로 독립과 개혁에 대한 왕의 선언문이 한문과 언문, 그리고 이들을 혼합한 형태로 함께 발표되었으며, 최근에는 포고령과 공문서, ‘관보’가 본격적으로 언문을 쓰고 있다. 왕의 칙령과 외국 대표부들에 보내는 외교문서들은 여전히 옛 형식을 고집하고 있다.
문자 생활에 관해 한국은 매우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외국인 선교 단체들에 의해 이 ‘속된’ 문자가 더 우월성을 가졌다는 것이 인정되었고, 언문으로 된 교재와 언문 문학교과서들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문자 해독율은 매우 높아 문자 생활에서의 이 같은 변화는 국민 정서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대다수의 대중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된 서구의 과학과 사유의 형태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조선에는 국교가 없다. 유교는 공식적인 제식이며, 공자의 가르침은 조선 사람들의 도덕적 규범이다. 한 때 융성했으나 지금은 ‘금지된’ 불교는 주로 산악 지대나 주요 도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나 마주할 수 있다. 샤머니즘의 일종인 정령숭배는 왕실과 교육 받지 못한 무지한 대중, 완전한 억압 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계층의 여성들에게 유행하고 있다. 주로 미국인들이 전파한 기독교는 이 땅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정부, 법률, 교육, 예절, 사회적 관계, 도덕에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은 압도적이다. 비록 전쟁(청일전쟁)이래로 조선은 중국에 도움을 요청 하는 것을 그쳤지만, 중국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동경은 여전하다. 고귀한 이상과 소중한 전통, 도덕적 가르침들은 여전히 중국문화에 의존하고 있다. 문학, 교육체계, 조상 숭배, 문화, 사유양식도 매우 중국적이다. 사회는 유교적인 모델에 따라 조직되어 있으며,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리나 동생에 대한 형의 권리는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승인되어 있다.
바로 이 같은 낡아빠진 상황, 구습, 치유도 개정도 어려운 동양주의적 사고, 중국을 하나로 묶는 인종적 강인함도 갖지 못한 소(小) 중화의 이 땅에 서양문명의 씨앗이 떨어져 자라기 시작했다. 거친 흔들림으로 수세기 동안의 잠에서 깬 이 연약한 독립국가는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다. 강력하고 야심 차며, 공격적인데다 치밀하지도 않은 열강들은 이 왕국에 대해 사정을 두지 않기로 담합하고 거친 손으로 유서 깊은 전통에 조종을 울리며,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고, 자신들조차 의미와 필요성을 알지 못할 개혁과 제안을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댈 것이다. 그리하여 이 왕국은 한 손에는 무서운 칼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미심쩍은 만병통치약을 든 낯선 세력에게 휘둘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을 것이다.
조선 - 길이 번영하고 행복할 민족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강우, 비옥한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조선 사람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없다. ‘협잡’을 업으로 삼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조선의 농부들이 일본 농부처럼 행복하고 근면하지 못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내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생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보장 해주어야한다는 것’이다. 여행자들은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에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기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가난은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다. 그들은 그와 그의 가족의 음식과 옷 이외의 소유물 전부를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에게 빼앗길 것을 안다.
억압의 유형은 합법적 세금의 두세 배인 부역, 소송의 경우에 강요되는 뇌물, 강제되는 대부 등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얼마간의 돈을 모은 것이 알려지면 관리는 그것을 빌려달라고 하고 빌려준 사람은 원금도 이자도 받지 못하며, 상환을 요구하면 그는 체포되고 조작된 죄목에 의해 부과된 벌금으로 투옥되며 관리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자신이나 친척이 내줄 때까지는 매를 맞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의 북부에 사는 농부들은 수확이후 확보하게 된 얼마간의 현금을 땅을 파고 묻은 뒤 물을 뿌려 얼려 놓고 관리와 도적들로부터 안전해질 때까지 언 땅 속에 보관하기도 한다.
관리들의 수탈이 정말 견디기 어렵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만 농민들은 폭력이라는 절망적인 방법에 의지한다. 그것은 역겹고 견딜 수 없게 하는 지방수령을 축출하고 때로는 죽이는 것, 때로는 수령의 심복을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 대중적인 격발은 비록 정상적인 자극에 의해 유감스러운 폭력의 행위로 끝나지만 때때로 효과적인 해결책이 된다.
조선은 개혁을 수행하고 변화를 위한 조화로운 계획을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경험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 계획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전통과 인습에 의해 타락해 있다. 모든 개혁의 시도들은 너무 조급하게 시작되어 쉽게 부서진다. 일본이 주도한 계획은 조선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을 뿐이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사건들을 보면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부르짖는 목적은 오직 조선을 차지하려는 목적에 명분을 쌓는 일에서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