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렇게 읽읍시다 10◈
“욥기에 나타난 고난의 구속사적 의미”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게 살고자 했지만 억울한 일이나 고난을 당할 때, 또 우리 주변에서 부조리한 일들, 특별히 아무 죄도 없는 자(?)들이 재난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며 학대를 당하는 것을 목격할 때 떠올리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도 어쩌면 이런 질문에 대한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과 질문은 시편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시편 73편입니다. 그 시편의 기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실족할 뻔하였으며, 반면에 자신은 늘 정결하게 살고자 했으나 종일 재앙을 당하며 징책을 당하기에 자신이 의롭게 살고자 하는 것이 실로 헛되다고 결론을 내릴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닫고, 자신의 우매무지함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욥도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무언가 그가 행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는 친구들의 공격 앞에서 자신의 결백과 의로움을 주장하며 자칫 하나님을 불의한 분처럼 설명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욥기에는 왜 그처럼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욥이 당하는 고난 배후에 사단의 역할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섭리적 차원에서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군데군데 나타나는 보석같은 구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고난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처럼 극심한 고난을 겪은 사람이 다름 아니라 하나님 당신마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욥 1:8)”고 인정하신 ‘의인’인 욥이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욥이 그처럼 엄청난 재앙을 당하자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이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재난을 당한다는 교조주의적이고 단순한 인과응보론으로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인간 세상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재앙과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논리대로라면 의인은 반드시 복을 받고 평안해야 하는데, 만약에 의인이 재앙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면 그런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단언하시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위하여 의인의 고난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순전하게 살아 온 욥으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그런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 억울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친구들에게 정죄를 받자 그의 억울함은 극에 달하여 하나님께 항변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장차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어떤 분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기가 겪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도의 고난을 당하시게 될 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즉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도 억울할 것이 없음을 깨달아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내가 당하는 고난은 지나친 것이며 억울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런 ‘절대적 의인’의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이며 모든 질서가 어그러지고 만 세상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완벽하다면 의인은 복만 받고, 악인은 재앙만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죄인들의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질서가 깨어진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이 세상을 고쳐나가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섭리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와 관계없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이 이 세상을 구원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고난임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의 창조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고 그저 예수만 잘 믿으며 이 땅에서도 번영하고 복을 받는다고 부추기는 기복주의 신학은 욥의 세 친구들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욥이 그 고난의 끝에 친구들을 위하여 대속 제사를 드렸다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런 욥을 가리켜 ‘내 종 욥(욥 42:7)‘이라고 부르신 것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죄와 관계없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했지만, 그 이후에 친구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하여 중보의 제사를 드리는 욥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 즉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사 53:1-10).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바라며,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은 의인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런데 그 의인들이 고난을 겪은 후에 비로소 온전하게 되어 그런 중보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욥기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의인의 고난은 온 세상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쓰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창조적이고 적극적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인과응보의 단순 논리로 접근했던 친구들은 고통을 받는 욥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기독교도 고난의 적극적 의미를 이해하고, 때로는 그런 의인의 고난을 자처할 수 있을 때 그 교회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사회에 대한 치유와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가능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첫댓글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감사합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아멘 감사합니다.
별무리님, 기도의용사님,반석58님, ... 귀한 댓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고난 없는 형통주의 기독교신앙은 한국교회를 병들게 했지요. 고난은 힘들고 어렵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를 안으시고 동행하시는 길이므로 참으로 거듭난 제자들에게는 감당할 만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카페 회원 여러분들도 올바른 믿음을 지켜 나가시는 데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어라도 욥을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