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 김주원 교무의 정전 강의 79--고락(苦樂)에 대한 법문
원광 원기99년(2014년) 7월호
고락(苦樂)에 대한 법문
고락에 대한 법문은 괴로움을 놓고 즐거움을 얻으라는 법문으로,
고통에 빠진 사람들의 삶을 즐겁고 행복한 세계로 인도하고자 했던
소태산 대종사의 경륜이 담긴 최초법어(最初法語)와 그 맥락을 함께한다.
성자들이 제도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과학문명을 발달시킨 것은
조금이라도 우리의 생활을 좋게 만들기 위함이다.
기차, 자동차, 전화기 등 세상의 모든 문물이
‘어떻게 하면 인간 생활을 조금 더 좋고 편리하게 만들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어느 무엇 하나 삶을 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는 고와 낙이 함께 존재한다.
때문에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은‘고와 낙’, 이 두 글자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락(苦樂)의 설명
누구나 고(苦)는 싫어하고 낙(樂)은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는 것들이다.
갓난아기도 누군가 옆구리를 계속 찌르고 건드리면 저절로 피하려고 한다.
철없는 아이부터 나이든 어른까지 모두 자기를 괴롭게 하는 일은 싫어하고,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은 좋아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고(苦)는 싫어하고 즐거움은 좋아하므로
싫어하는 ‘고(苦)’는 없고 ‘낙(樂)’만 있으면 좋을 텐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게다가 괴로움이라고 다 똑같은 것도 아니다.
‘고(苦)’에는 정당한 괴로움과 부정당한 괴로움이 있고,
‘낙(樂)’에도 정당한 낙(樂)과 부정당한 낙(樂)이 있다.
또한 정당하고 부정당하게 받는 고(苦)와 낙(樂)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연히 받는 것도 있지만 지어서 받는 것도 있다.
우연히 받는 고락(苦樂)이라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고락(苦樂)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천재지변을 통해 얻어지는 고(苦)와 낙(樂)이 그렇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재해를 당하는 등의 사건은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연히 받는 고(苦)이다.
이와 다르게 지어서 받는 고락(苦樂)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뭔가를 성취했다거나,
잘못으로 인한 벌을 받는 경우를 말한다. 현상적으로 보면 두 가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연히 받는 고락(苦樂)이나 지어서 받는 고락(苦樂) 모두
진리적 안목으로 바라보면, 결국 삼세를 통해 자신이 지은 것에 대한 결과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苦)는 싫어하고 낙(樂)은 좋아하면서도,
당장 주어진 고(苦)와 낙(樂)에 빠져 있어서
그것이 왜 온 것이고 어떻게 도는 것인지에 대한 원인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공부인이라면 밝은 눈으로 고(苦)와 낙(樂)이 오는 원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가 교법을 제정하고 새 종교를 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살이에서 모든 일을 지어나갈 때, 부정당한 고락(苦樂)은 취하지 않고
정당한 고락(苦樂)을 얻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낙(樂)을 버리고 고(苦)로 들어가는 원인
낙(樂)을 버리고 고(苦)로 들어가는 원인 다섯 가지에 대해 살펴보자.
1조는 ‘고락(苦樂)의 근원을 알지 못함’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고,
부처님이나 하늘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즐거움을 구하려면 즐거움을 얻을 만한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고(苦)와 낙(樂)이 온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명산대천을 찾아가 빌기만 하는 것은 고락의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2조는 ‘가령 안다 할지라도 실행이 없는 연고(緣故)’이다.
우리가 각자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아,
내가 이런 잘못을 해서 괴로움을 받게 되었구나.
이렇게 하면 즐거움을 얻는구나.’라는 것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알았으면
고(苦)는 오지 않고 낙(樂)만 오게 할 수 있는 원인을 장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실행을 하지 않는다.
건강에 안 좋은 줄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아는 것을 실행에 옮겨야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3조는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로
육신과 정신을 아무 예산 없이 양성하여 철석 같이 굳은 연고(緣故)’이다.
3조는 2조와 연관이 깊다. ‘
실행이 왜 없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기 때문이다.
‘육신과 정신을 아무 예산(豫算) 없이 양성했다’는 말은,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좋은 일이 되고 나쁜 일이 되는지,
혹은 좋은 일인지 낮은 일인지 제대로 살피지 않고
그때 그때 생각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왔다는 뜻이다.
심신을 그렇게 길들이다 보니,
그 습성도 그대로 굳어져서 변화의 결심을 제아무리 굳게 한들 실행이 어렵게 되고 만다.
4조는 ‘육신과 정신을 법으로 질박아서 나쁜 습관을 제거하고 정당한 법으로 단련하여
기질(氣質)변화가 분명히 되기까지 공부를 완전히 아니한 연고(緣故)’이다.
철석같이 굳은 습성을 그대로 두는 것은 보나 마나한 결과를 초래한다.
보나 마나한 결과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제대로 고쳐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법으로 질박는 공부’다.
성자들의 바른 법으로 습관을 길들이고, 그를 통해 나쁜 습관을 제거하며,
기질을 확실하게 변화시킬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근육이 굳은 사람이 재활을 통해 재기에 성공하고자 한다면,
근육을 펴는 고통을 감내하는 치료 과정이 필요하다.
만약 그 고통이 싫어서 편한 대로 지내고 보면 몸이 그 상태로 완전히 굳어져서 쓸 수 없게 된다.
철석같이 굳은 습관도 마찬가지다.
굳은 습관을 법으로 길들이려 다 보면 그만큼 많은 인내와 고통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결국 낙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5조는 ‘응용(應用)하는 가운데 수고 없이 속히 하고자 함’이다.
내가 해 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에는 분명 수고가 따른다.
내가 정성을 들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얻고자 하는 것은 욕속심(欲速心)이다.
욕속심이 있으면, 조금 해 보다가 진전이 없는 경우
‘나는 원래 못하는가보다. 안 되려나보다.’라고 생각하여 중도에 쉽게 포기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삶의 변화를 이루고자 하면 그 몇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고락에 대한 법문’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통해 한량없는 낙 생활을 하게 한 소태산 대종사의 대 자비 법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