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삭막해 보이는 겨울 농장 (12.1)
큰고니 - 양산천(12.2)
해그름 천성산 - 어렴풋이 보이는 원적산 소나무
12.3 친구아들 혼사 참석 후 행주산성
1592년(선조 25년) 7월 8일 이치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은, 12월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하여, 조방장 조경과 승장 처영 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에 진을 쳤다. 이때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 부하를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권율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도 행주산성 서북쪽에는 신라시대 때 쌓았다는 토축산성터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년)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 권율 사당인 충장사를 다시 지었다.
밀양시 청소년 수련관
이재금 시인은 1941년 밀양시 부북면 오라리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후 부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4년에 귀향하여 세종고, 밀성여중 밀성여상 등에서 후학을 가리쳤다.
1988년 '밀양문학회'를 결성하여 (말똥 글러가는 날) 등 시집을 냄으로써 한국시단의 주목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민족문학작가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문단 활동을 하던 중, 1977년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도래재는 밀양시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산외면 금곡리에서 1077호 지방도 표충사쪽으로 가다가 산동초등학교를 지나 삼거동에서 좌측으로 계속 따라가면 태산 준령 도래재가 있다. 도리재 넘어 산내면 남명리에서 다시 24번 국도를 만나게 되고 여기서 신설된 터넬을 통과하지 않고 옛길을 꼬불 꼬불 넘어서 가면 가지산 석남고개이다.
산성산(용두산) 정상
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벌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던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데로 올라가고 싶다.
윤동주 [尹東柱]
시인. 북간도 출신. 용정(龍井)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도지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다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에 가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3부를 남겼는데,
그가 죽은 후인 1948년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발간된 후 윤동주는 민족적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민족의 애수와 이상을 노래한 그의 시에는 조국을 잃은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상징적인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으며,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내외동 버스터미널(12.4. 10:52) - 영남루 - 산성산 - 밀양역(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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