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시 |
⇨ |
고대 |
⇨ |
중세 |
⇨ |
근대 |
⇨ |
공산주의 |
공산주의 |
노예제 |
봉건주의 |
자본주의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공상 사회가 잉태되려면 기나긴 진통이 수반되며, 그 과도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대개 과도기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로 지칭되었으며, 사회주의가 무르익어 사유재산과 계급 및 국가가 완전히 소멸된 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경우에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사ㅚ주의의 제2단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
⇨ |
사회주의 |
⇨ |
공산주의 |
자체모순에 의한 필연적 붕괴 |
프롤레타리아 독재 |
계급 없는 사회 |
4. 공산주의 출현과 전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에서는 레닌(V. N. Lenin, 1870~1924)의 주도로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거의 발달하지 못한 농업 국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공산주의 사회건설에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다.
대체로 스탈린 사망 이전인 1950년대 중반 이전까지 세계의 공산당들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계층구조를 유지하였다. 그 이후 세계의 공산주의 운동은 다원화되면서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운동이 아닌 다양한 길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자치 관리 사회주의’ 표방했던 유고슬라비아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이 독자 노선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1) 유고슬라비아의 자치 관리 사회주의
194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의 티도(J. B. Tito)가 국영기업을 노동자에게 이양하고 기업의 소유를 국가에서 사회의 소유로 전환하여, 원칙적으로 기업이 자율성을 갖는 자치적인 시장경제를 만든 데서 기인한다. 1948년 스탈린과 대립한 끝에 코민포름(Cominform)으로부터 제명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티토의 정치 이념과 그에 의해 대표되는 유고슬라비아의 정책과 체제, 나치 독일군에 대한 해방투쟁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를 획득했던 티토는 다른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과는 달리 소련의 종주권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반기를 들 수 있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축출되었음에도 유고가 자기의 실정에 맞는 자주관리노선을 내걸고 독자적인 체제를 정착시키게 되자 1956년 소련과의 관계를 자주적 차원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엄격하고 경직된 사회주의적 체제 변혁을 고집하지 않는 유고의 독자적인 정책은 서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여론에서 혹평을 받게 되었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다.
(2) 중국의 흑묘백묘론
원래 흑묘백묘는 중국 쓰촨성(四川省) 지방의 속담인 흑묘황묘(黑猫黃猫)에서 유래한 용어를 변형시킨 것으로,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이다. 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이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주장하면서 유명해진 말로, 흔히 흑묘백묘론이라고 한다. 고양이 빛깔이 어떻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지라는 뜻의 선부론(先富論)과 함께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용어이다. 그 뒤 흑묘백묘론은 1980년대 중국식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고, 덩샤오핑의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였다. 다시 말해 경제정책은 흑묘백묘식으로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서구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도정(道程)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민주 사회주의가 서유럽에서 부상하였는데 그들은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통해 사회 혁명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의회라는 정당한 절차와 민주적 절차를 거쳐 자본주의 병폐를 고쳐 나가겠다는 점진적 사회 개혁론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끝내 마르크스주의와의 완전 결별을 선언하였다. 서독의 사회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 등은 범세계적인 기구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출범시켰다.(1951)
이들 정당들은 서구의 자본주의 질서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었으며, 그 이후 서구 여러 나라에서 집권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M. S. Gorbachyov, 1931~ )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은 1985년 체르넨코가 죽자 새 서기장에 선출되어 소련 최고의 지도자로 떠오른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집약된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추진한 것을 말한다. 이는 동구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구의 사회주의 또한 소련을 뒤따라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3) 사회 민주주의와 민주 사회주의
국제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목표로 조직된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은 사상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제1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와해되고 말았다. 그 후 1919년 러시아에서는 레님의 주도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인 코민테른(Comintern)이 창설되었는데 이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배제시킨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조직이었다. 한편 비혁명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정당들은 코민테른의 등장에 자극을 받아 1923년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The Labor and Socialist International)을 결성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정당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주장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명명하였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 민주당이 추구했던 수정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로서, 폭력이 아닌 평화적이고 의회주의적인 방을 통해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유럽 국가들로부터 추방된 사회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국제 조직 결성에 합의하고, 1846년에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The 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7년에는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의 집행기관으로서 기존의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발전시킨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후 소련에 편입된 동구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이탈이라 좌파 사회당이 탈퇴하고 순수한 민주 사회주의들만이 참여한 195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제8차 대회는 조직의 명칭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The Socialist International)로 바꾸고 민주 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라는 강령을 채택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민주 사회주의 선언’ 또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에 대치되는 순수한 민주 사회주의자들만이 국제조직으로 성장하였다.
5. 공산주의 사상의 쇠퇴
오늘날 전체주의(全體主義)는 사회사상으로서의 위력과 힘을 상실한지 오래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국가, 히틀러(A. Hitler, 1889~1945)의 나치 독일, 스탈린(I. V. 1879~1953) 통치 하의 소련 등의 전체주의는 퇴조하였다. 군사력에 의한 국위 신장을 국가의 주요 목표로 생각하여 사회 구조나 국민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려고 했던 독일 제국과 만주 사변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까지의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도 마찬가지다. 군국주의는 독일과 일본의 운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현대의 총력전을 위해서는 매우 부적합한 체제임에 틀림없으며 신생 국가의 군사정권은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과두제(寡頭制)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1)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군국주의는 군사력에 의한 대외적 발전을 중시하여 전쟁과 그 준비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를 국민생활에서 최상위에 두고 정치, 문화, 교육 등 모든 생활영역을 이에 전면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사상과 행동양식이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 아래 강력한 국가 권력으로 국민 생활을 간섭 ‧ 통제하는 사상 및 체제이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 체제 속에서 공산주의를 지칭하게 되어 반공산주의 슬로건으로 전용되기 시작하였다.
프리드리히와 브랜진스키는《전체주의 독재와 독재정부》에서 전체주의적 독재를 현대 산업 사회의 특징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기존 사회를 과격하게 배척하며 세계정복을 계획하는 이데올로기, 둘째, 권력을 독점한 국가 관료제와 권력이 융합된 과두적 대중정당, 셋째, 사회 ‧ 국가 ‧ 정당을 통제하는 비밀경찰, 넷째, 여론 조작을 위한 매스미디어의 독점, 다섯째, 단체들의 관료주의적 획일화이다. 요약하면 이들은 현대적 기술의 발달을 통하여 통제의 전체성이 확보되고 있는 정치 체제를 전체주의 정치 체제로 보았다.
(2) 평등주의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
공산주의 또한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걸었다. 현존하는 공산주의 체제는 어느 나라에서나 ‘계급 없는 사회’라는 유토피아적 목표와 현실적으로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근대화 목표 간의 갈등 때문에 적지 않은 딜레마를 경험해야만 했다.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경제적 효율성을 앞세우고 물질적 유인책을 쓰게 되면 기술관료 계층의 특권화가 조장되고 불평등이 심화되어 유토피아적 목표 자체가 위협 당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토피아적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 평등을 앞세운다면 개인의 자유는 더욱 억압되고 일에 대한 동기는 약화되어 결국 경제 침체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그 때문에 많은 나라가 ‘평등주의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 가운데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평등주의 노선
계급없는 사회 라는 목표의 과도한 추진 |
⇨ |
자유 억압 |
⇨ |
일에 대한 동기 약화 |
⇨ |
경제 침체 |
실용주의 노선
근대화 추진 |
⇨ |
물질적 유인책 필요 |
⇨ |
기술관료 계층의 특권화 조장 |
⇨ |
유토피아적 목표 위협 |
(3) 자유의 결핍
기존 공산주의 체제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자유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의 자유나 창의성, 그리고 책임감이 고갈된 사회에서 경직된 관료 독재 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개인의 창의성과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을 외면한 채, 국가 독점적 생산 양식에만 의존하던 공산 국가들은 하나같이 경제 발전에 실패하였으며, 자유뿐만 아니라 물질적 토대마저도 약화되었다.
(4) 평등의 허구화
공산주의에서 가장 앞세울 수 있는 덕목이 ‘평등’이라는 가치이다. 그런데 공산국가에서는 낙후된 경제로 인하여 전반적인 복지 수준이 매우 낮았으며 생활수준도 하향적으로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가치마저도 허구가 되고 말았다.
6. 자본주의 체제에 주는 교훈
아직도 지구촌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잔존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가가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도입해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공산주의 본래의 모습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빈부격차, 불평등과 같은 자본주의 내부의 문제에 경종을 울려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사회사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쇄신과 발전을 위하여 공산주의에서 표방했던 이상 중에서 긍정적 측면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민주적 방법으로 그 정책적 실천에 앞장서서 시대의 흐름에 걸맞는 제도적 보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산주의의 역사적 몰락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역설적 현상은 줄곧 폭력으로만 지탱되었던 이들 체계가 스스로의 각성과 함께 민중의 평화스러운 저항에 힘없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역사의 교훈을 얻게 된다. 국민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못하는 체제는 당이나 군대 그리고 비밀경찰이라는 실로 막강한 억압 구조를 가지고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