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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지난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수백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이어온
고택들이 현재와 함께 살아서 호흡을 같이한다.
주산인 설창산 남쪽으로 널찍하게 자리를 튼 마을은 집들의 군락과 배치 공간이 정감있게 와 닿으면서도 한껏 품위와
격조를 더하여 준다. 마을 앞 연꽃밭에 들어서면 마을의 넓은 품에 놀라고 오랜 세월의 숨결 앞에서 감동한다. 마을
속의 까만 기와집 처마 끝이 맞닿는 높고 낮은 흙담 사이로 말갛게 열어놓은 골목길에 들어서면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수백 년 전의 시간세계로 거슬러 온 것 같은 체면에 걸리고 만다.
포항 방향의 28번 국도를 따라 시티재를 넘고 안강을 벗어나면 영일만으로 느리게 동류하는 형산강 물길이 가슴에
안긴다.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멀리 운주산과 비학산이 마치 비상하는 학처럼 날개를 펼치고 그 날개 자락에 넓은
안강들이 아스라이 열린다.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롭고 배부르다.
북쪽의 운주산에서 흘러내리는 안락천이 형산강 허벅지에 맞닿아 두 물줄기가 하나로 된다. 안락천변을 따라 동북쪽
으로 찾아들면 설창산 골골에 숨어든 양동마을이 살며시 몸을 드러낸다. 동네 어귀, 양동초등학교 앞마당에 이르면
높은 지대 위에 놓인 집들은 팔을 크게 벌려 품을 듯이 앉아 있다.
산세가 주거공간을 품어 안은 것인지 주거 공간들이 작은 골을 다시 감아 안은 것인지 그 형세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뻗어난다.
마을은 동편의 장태골에서 발원하여 서편으로 흐르는 작은 실개천을 중심으로 남향과 북향, 두 골이 서로 마주 보게
형성되어 있다.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설창산은 물(勿)자 형태로 네 개의 능선을 만들어 남향마을을 이뤄내고,
남쪽에 선 성주봉은 북향마을을 만든다.
설창산 남쪽으로 길고 넓게 능선을 따라 발달한 동네는 양지 녘이 되고 가파르게 솟아오른 성주봉 아래로 형성된
마을은 음지 녘이 되는 것이다. 양지 녘의 중심은 물봉골이다.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안골이 형성되어 마을을 깊고도
넓게 만들어 준다. 마을에는 종택과 정자, 그리고 서원 등 옛집으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집인 서백당은
안골에서도 동북단에 위치한다.
물봉골에서 남서쪽 끝단에 차지한 집이 관가정이다. 이 두 집은 양동마을의 여러 고택군들 중에서 단연 빼어난 모습을
보인다.
양동마을의 가옥들은 능선을 따라 여유로운 공간을 이루면서 한 두 채씩 들어앉아 있어 더없이 자유로워 보인다. 크고
작은 기와집과 초가집들은 한 채씩 듬성듬성 혹은 몇 채씩 동반하다가도 다시 거리를 두어 여유 있게 전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검은 기와지붕의 큰 집에 황토 빛 담과 푸른 숲, 그 외양이 단조로운듯하지만, 전혀 무료감을 주지 않는 이유가 집과
집을 이어주는 일정한 여유 공간 때문인 듯하다.
알맞게 배치된 집들 간의 간격은 보는 이들에게 고아한 품격을 느끼게 한다. 그림 속의 여백미를 감상하는 것처럼
채움과 빔의 완성된 화폭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집과 담을 각각 독립적이고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그 사이의
간격을 둔 공간이 있어 마을의 미감을 더하여 주고 있다. 산곡이 가옥을 품고 집과 담들은 사람을 안락하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 더욱더 왕성한 생명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 여유로움과 장난끼를 엿보는 서백당의 토담
경주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 회재(이언적) 선생의 외조부이자 양동마을의 입향자인 손 소 선생이 성종15년(1454년)에
지은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이다. 물론 서까래와 기왓장 등 부재를 시절에 따라 조금씩 부분적으로 보수했지만
안채의 원통형 기둥과 사랑채의 사각형 기둥은 600여년의 흔적을 결 곱게 음각해 낸 채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감당하
고도 단단하게 주춧돌을 지키고 있다.
설창산의 서기가 응집된 이 집은 걸출한 인걸이 세 사람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었었다. 남향의 사랑채(서백당)를
연이은 자그마한 머릿방에서 이미 두 사람의 인걸이 태어났는데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다.
공교롭게도 친자와 외손이다. 외손의 등장이 집안에서는 편치 않았던 듯 나머지 한 사람의 인물은 반드시 손씨 집안
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바람이 컸기에 회재의 어머니 이후로는 시집간 딸이 친정에 들어와 출산하는 것을 금지시켰단다.
‘하루에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뜻을 가진 서백당, 당호 편액이 걸린 사랑채 중간쯤에 낮고 짤막한 토담이 있다.
마치 붓으로 한 점 획을 긋다 만 듯 뭉뚱한 담이 가림 판처럼 마당 쪽으로 불뚝 튀어나와있다.
모양은 분명 덮개까지 눌러 쓴 토담인데 담장의 기능을 할 것 같아 보이질 않더니 사랑채를 기준으로 남정네들의
공간과 아녀자들의 공간을 그 열린 담으로 가려 놓은 것이란다.
마당 공간을 경계하거나 폐쇄시켜놓지는 않았지만 그 가림은 ‘출입제한’이라는 묵언의 약속을 이행하게 하는 담장이
었던 것이다. 다시 집의 바깥 담장이라 할 마당 남서쪽 담장으로 눈길을 돌린다.
집안에서 바깥 길을 볼 수 없을 만큼의 높이를 가진 그 토담 아랫부분에 드문드문 작고 둥근 구멍이 나있다. 물론
담의 외벽은 최근에 보수 하여 매끈하지만 원래 담의 형태는 그대로인데 그 용처가 궁금하였다.
그것은 높은 지대 위에 선 서백당 기슭 아래의 골바람이 마당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환풍구 역할도 하였고 집안의
아녀자들이 길 밖 동네를 훔쳐보는 망원 공간이 되기도 했단다. 구멍이 난 토담이라, 그 본래의 역할과 무관하게
오늘의 나에게는 여유로움과 재기 넘치는 장난끼로 전해져 재미있다. 그리고 후원을 돌아 북쪽 방향으로는 아담한
별실 두 채가 있는데 그 하나는 방앗간이고 다른 하나는 측간이다.
흙담 초가인 방앗간에 가려져 있는 측간 담이 역시 이채롭다. 측간의 출입문을 살짝 가려주는 담인데 사랑채 마당에
있던 가림막과 같은 형식의 담장인 것을 보면 부끄러워 가리고 싶은, 혹은 체면치레로 모양만 흉내를 낸 담 아닌 담이
아닌가 싶다. 다른 고택에서 볼 수 없었던 두 곳의 있다가 만 듯한 담장, 마치 옷을 지어내는 내부의 소품과도 같은
작은 토담이 있어 집의 위용에 색다른 정겨움을 더해준다. 그래서 사랑채의 앞마당에서 왼쪽 동북편의 사당과 넓은
후원을 두른 바른 오각형의 토담 선이 비록 직선과 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가옥은 물론 담장 전체가 주는 이미지는
다정다감하기 그지없다.
서백당은 1992년도 영국의 황태자 찰스가 방문하여 다과를 즐기면서 환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당시 마을의 골목길은
외빈을 맞기 위해 레드 카펫처럼 붉은빛 황토를 뿌려 단장했다.
서백당에서 한참을 머물던 찰스 황태자는 고색창연한 서백당 마루와 마당을 감싸 두른 서정어린 토담을 보면서 여러
차례 걸음을 멈추고 조촐하고 정겨운 한국미에 감탄하였단다.
황태자의 눈에 양동마을의 담장은 마치 커다란 자연 박물관 속의 전시물로 보였으리라. 뭉게구름 같은 지붕의 기와와
돌꽃이 가득 피어난 토담의 수수한 색감, 그리고 한국적 건축미가 돋보이는 처마 끝을 번갈아 살피면서 여러 차례
원더풀을 외치곤 했단다. 이후 그때 수행했던 통역자가 감동 어린 눈빛을 흘리던 찰스의 표정이야말로 정말 감동적이
었다고 하더란다.
앞 마당가에 심어진 600여년 된 향나무는 마치 용트림하는 형상으로 하늘을 덮을 듯이 울창하게 뻗어난 잔가지들은
세월의 때가 오롯이 배인 채 고택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 같다. 토담 위로 풍겨나는 들꽃향내와 아울러 오래된
것들이 주는 전설이 두런두런 들려온다.
◆ 관가정 토담, 상상의 벽화를 그리는 즐거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을 가진 관가정(보물 제442호)에 이른다.
정자를 겸한 살림집인데 대사헌을 네 번씩이나 지낸 청백리 우재가 살았다. 관가의 의미를 조금 좁혀보면 더 사실적이고
흥미롭다. 남서향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간결하면서도 격조 있는 건축미를 지닌 이 집 마당은 멀리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천천히 동류하는 형산강 줄기와 함께 넓은 안강들을 품어 안고 있다.
관가정에 올라앉으면 눈앞으로 탁 트인 안강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양동 마을 앞에는 소출을 얻어낼 만한 경작지
가 한 뙈지기도 없다. 오고 가는 행인이 잠시 머물면서 우마를 정비하고 잠자리를 정하는 집이 있을지언정 마을사람들이
일용할 곡식을 경작할 만한 토지가 없다.
형산강과 안락천이 합강되는 안강들은 물길이 더없이 좋고 비옥한 곡창지대였으니 양동의 반가는 그 생산물을 모두 안강
들에서 거두어들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관가정 마루에 앉아 서쪽으로 낮게 열린 토담 너머로 바라보는 안강들녘이 그들
에게는 무한의 즐거움과 희망이었을 것이다. 알곡이 익어가는 빛깔을 보는 즐거움은 책 읽는 이상으로 선비의 도락이었
을 테니까.
관가정의 토담은 돌과 흙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ㅁ’자의 일정한 담 벽 문양으로 쌓아올렸는데 토담의 높이가 그 밖을
바라보는 경관을 결코 방해하지 않을 만큼 조절해 놓고 있다. 심지어는 담이 없는 담을 두어 자연과 더불어 무경계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관가정의 준수한 토담에 기대어 500여년 전의 집주인으로 돌아가 상상의 벽화를 그려본다. 붉은 노을에 비친 참나무
그림자, 황금빛에 익어가는 벼 이삭들…. 무논에 엎디어 손놀림을 아끼지 않는 민초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면 어느새
관가정의 담벼락은 내가 그린 풍속도로 가득 채워진다.
양동마을은 많은 고택과 함께 가옥 군락을 품어 안은 토담이 일품이다. 작은 동산이 담이고 독립의 집을 둘레 친 토담도
또한 담이다. 마을은 훼손되지 않은 옛것과 다시 쌓은 근래의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토담의 자연 박물관이라 하여도 좋을
만큼 토담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돌에서 피어난 구름 빛 석화와 청이끼 그리고 세월이 절로 그려낸 집 기둥의 무늬는 쉼 없이 명멸해가는 우리들의 일상과
무관하게 천년만년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다. 이제는 우리 것을 넘어 세계 문화유산으로서의 양동마을이 소중하기만 하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