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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에 있는 고대도시다.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었다. 폼페이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격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다. 이 고대도시들의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폼페이 시(인구 2만 5,081명[1991])는 고대도시의 동쪽에 있으며, 순례요지인 산타마리아델로사리오 바실리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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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역사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에는 캄파니아의 신석기시대 주민 후손들인 오스칸족이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추측된다. 전략적으로 사르누스 강 어귀 근처에 있는 오스칸족 마을들은 이미 BC 8세기에 나폴리 만 건너편에 정착해 있던 그리스인의 세력하에 들어갔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BC 7세기에 캄파니아로 들어온 에트루리아인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BC 474년 쿠마이 앞바다의 해전에서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 1세가 에트루리아의 해군을 전멸시킨 후 에트루리아의 영향력은 약해졌으며, 그리스가 또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그후 BC 5세기말이 되면서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종족인 삼니움족이 캄파니아를 정복하고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를 차지했다. 당시의 화폐는 1세기 후에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속했던 동맹을 누케리아 시가 주도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폼페이가 역사기록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BC 310년 제2차 삼니움 전쟁 때 로마의 함대가 사르누스 항에 상륙하여 누케리아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일이었다. 삼니움 전쟁이 끝날 무렵 캄파니아는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그곳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同盟市)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완전히 종속되어 로마화된 것은 동맹시전쟁을 치른 후이다. 폼페이는 이 전쟁에서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힘을 합쳐 로마에 대항했으나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포위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의 포 강 남쪽인 나머지 지역과 함께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전쟁에 가담한 데 대한 처벌로 로마 제대군인들의 이주지가 설립되고 폼페이를 포위했던 로마 장군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통치하게 되었다. 초기의 난관을 거친 후 폼페이인들과 이주민들은 서로간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적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오스칸어를 대신하여 라틴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고, 폼페이 시는 곧 제도·건축·문화면에서 로마화되었다.
59년에 폼페이의 원형투기장에서 폼페이인과 누케리아인 간에 발생했던 폭동은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에 의해 보고되고 있다. 62년의 지진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양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두 도시들은 17년 후에 일어난 마지막 지진으로 매몰되기 전까지 그 후유증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베수비오화산이 폭발한 것은 79년 8월 24일이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플리니우스는 스타비아이에서 친구들을 구조하려고 애쓰다가 죽었다. 이튿날 화산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7m의 화산력과 화산재로 덮였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스타비아이의 별장들은 그다지 많이 파묻히지 않았다. 헤르쿨라네움에서는 격류와 함께 떠밀려온 화산물질 더미가 20m 두께로 도시 곳곳을 뒤덮으면서 일종의 진흙용암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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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역사
폼페이의 유적은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6세기말에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인 1709년에 헤르쿨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고,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었다.
발굴은 현재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왔다. 초기의 발굴작업은 대체로 무책임했으며, 발굴자들은 주로 웅장한 건물이나 박물관에 진열할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굴은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발굴 감독이 되면서 종식되었다. 그는 발굴지 사이에 놓인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을 가구(街區)로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집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다(그림 참조). 또한 피오렐리는 화산재 속의 시체가 분해되어 생긴 구멍에 시멘트를 부어 신체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고대의 문·가구·밑바닥의 주형을 뜨는 데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발굴작업은 1951년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지휘 아래 집중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는 1924~61년에 발굴책임을 맡았다. 제1구역과 제2구역에 있는 아본단차 가도 남쪽의 넓은 지역이 발굴되었고, 시 성벽 외곽에 쌓인 파편들이 치워졌다. 그결과 노케라 문과 이 문으로부터 누케리아까지 이르는 도로의 양편에 나란히 뻗은 멋진 공동묘지가 드러났다. 현재 폼페이의 3/4이 발굴된 상태이다.
스타비아이와 그라냐노 근처의 발굴작업은 카를로 4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으며, 1749~82년에 12채의 별장이 발굴되었다. 그후의 발굴작업은 금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어 지금도 진행중이다. 열주(列柱)에 둘러싸인 2개의 큰 안뜰과 목욕탕이 있는 산마르크 별장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다른 별장들은 그라냐노와 폼페이 근처, 스카파티·도미첼라·토레안눈치아타 근처, 보스코레알레 및 보스코트레카세 근처의 베수비오 산 아래 경사면에서 발견되었다. 그중 많은 별장들은 발굴 후 다시 묻혔지만, 유명한 수수께끼 별장을 비롯한 여러 채는 지금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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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
폼페이 시는 선사시대의 용암이 흘러나온 자리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불규칙한 형태를 이루었다. 발굴 결과는 남서부지역이 가장 오래되었음을 시사하지만 방벽이 확장된 단계나 누구에 의해 확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둘레가 3km인 방벽은 면적이 약 63㏊인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 방벽의 최종 경계선은 삼니움족이 폼페이를 장악한 뒤에 정해진 것이라고 추측되나 그리스 양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도시로 들어오는 7개의 문이 발굴되었다. 남동-북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 중심도로인 스타비아나 가도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베수비오 문(해발 44m)과 가장 낮은 지점에 있는 스타비아 문(해발 8m)을 잇고 있다. 스타비아 문을 통해 사르누스 강과 스타비아이와의 교통이 이루어졌다. 이 중심도로에는 다른 2개의 간선도로인 아본단차 가도와 놀라 가도가 교차하고 있다. 공공건물들은 대부분 3개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남서쪽의 거대한 평지에 있는 포룸(광장, 해발 34m), 남쪽 방벽 가장자리의 만이 내려다보이는 높이에 있는 삼각 포룸(해발 25m), 동쪽에 있는 원형투기장 및 체육훈련장 등으로 분류된다.
종교·경제·시민생활의 중심이었던 포룸은 2층의 열주가 있는 현관(포티코)에 의해 둘러싸인 커다란 4각형 지역이었다. 카피톨리누스 구릉의 3대 신인 주피터·주노·미네르바에게 봉헌된 신전이 북쪽에서 포룸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다. 동쪽에는 큰 식료품 시장인 마켈룸이 있었고, 남쪽에는 62년의 지진 후 세워졌던 라르 신(도시 수호신)의 작은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그리고 부유한 후원자인 유마키아가 세운 인상적인 모직물 제조공장이 있었다. 포룸의 남쪽 끝에 있는 카피톨리움 반대쪽에는 시 의회와 행정관청 관리들이 모여서 회의하던 장소가 있었다. 중심 방의 사면이 복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실리카는 이 도시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며, 바실리카 양식의 그리스도교 교회당의 기원과 발달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지붕이 있는 이 건물은 상품거래와 재판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서쪽으로는 폼페이의 수호신인 베누스 폼페이아나의 신전이 있다. 바실리카 옆에 있는 아폴론 신전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이곳의 하층토 발굴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삼각 포룸은 폼페이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인 도리아 양식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삼각 포룸 동쪽에 있는 극장·체육훈련장·소극장은 BC 3~1세기에 세워졌다. 제우스 메일리키오스 신전, 이시스 신전, 삼니움족의 옛 체육훈련장이 근처에 있다. 폼페이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원형투기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원형투기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로마 식민지가 폼페이에 건설된 후에 세워졌다. 서쪽에는 커다란 체육훈련장이 세워져서 삼니움족의 옛 체육훈련장 대신 사용되었다. 로마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스타비아 욕장, 포룸 욕장, 화산폭발 당시 공사가 진행중이었던 중앙욕장, 호화스런 개인 주택들의 욕장 등 도시 전역에 욕장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공공 건물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발굴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수백 채의 민간 주택들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 특히 이 민간 주택들이 독보적인 이유는 적어도 400년에 걸친 가정용 주택건축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 오직 폼페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장 초기 주택들은 제1차 삼니움 점령기(BC 4~3세기)에 세워졌다. 특히 '외과의사의 집'은 이 기간 동안 세워진 초기 아트리움(중정) 주택의 예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가장 호화로운 주택들은 교역과 문화적 접촉의 증대로 세련된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되었던 제2차 삼니움 점령기(BC 200~80)에 지어졌다. 구역의 한 가구 전부를 차지하는 파우노의 집에는 2개의 아트리움과 4개의 트리클리니아(식당), 그리고 열주로 둘러싸인 2개의 큰 안뜰이 있다. 이 집의 정면은 당시의 주요건축자재인 곱게 간 누케리아산 회색 석회화(石灰華)로 되어 있다. 벽은 폼페이 제1양식(구조적 양식이라고도 함)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회반죽에 채색을 하여 대리석으로 겉치장한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 집에서 발견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자이크는 분실된 그리스의 그림을 본떠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많은 주택들은 정교한 모자이크 바닥으로 장식되었다. 높은 기둥으로 받친 으리으리한 아트리움이 있는 은혼식의 집도 이 시기에 지어졌으나 후일 개조되었다. 멋있는 연회장과 자녀들의 교실로 사용되었던 엑세드라(벽감)는 BC 80~AD 14년에 유행했던 폼페이 제2양식(건축적 양식이라고도 함)으로 장식되었다. 삼니움 시대 동안 많은 주택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로마 시대에는 그렇게 많은 집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이 시기에 지은 집들은 대체로 낮은 아트리움을 갖는 등 규모는 더 작았으나 장식은 보다 정교했다. 로마 제국시대에 지은 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은 자그마하지만 우아한 주택이다. 타블리눔(응접실)은 BC 15~AD 62년경에 흔하던 섬세한 폼페이 제3양식(장식적 양식이라고도 함)으로 장식되어 있다. 베티 저택은 로마 시대에 번영을 누렸던 상인 계층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몇몇 방은 폼페이 제4양식(환상적 양식이라고도 함)으로 꾸며져 있다.
분수와 청동·대리석 조각들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 훌륭한 그림들, 우아한 가구가 있는 아트리움-열주식 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전형적인 형태가 아니다. 도시 전역에는 수많은 작은 주택들도 있으며, 그가운데 많은 것이 상점이다. 발굴자들은 고대생활의 모든 면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서민의 집들도 부유층의 집들만큼이나 귀중한 자료이다. 지붕·2층·발코니 등이 현재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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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이 유럽 문화에 끼친 영향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와 다른 도시의 발견은 유럽인의 취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굴 소식은 고대에 대한 열광을 불러일으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755년 나폴리로 첫 여행을 했던 저명한 독일의 고전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찬사와 잠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에칭들이 발굴을 널리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영국 방문객들의 '대유럽 여행'에서 나폴리·폼페이·헤르쿨라네움은 중요한 체재지가 되었으며, 당시 나폴리 왕실의 대사(1764~1800)로 있던 윌리엄 해밀턴 경은 박식한 아마추어 고고학자 겸 열정적인 안내자로서, 또 그의 2번째 부인인 엠마 해밀턴 여사는 매혹적인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미술가·건축가·도예가, 심지어 가구제조업자들까지 폼페이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동시대의 내부 채색 장식은 발굴된 프레스코에서 착안되었다. 18세기 영국 건축가들인 로버트 애덤과 제임스 애덤은 비슷한 주조(主調)의 회반죽칠을 유행시켰다. 유명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는 작품 양식을 바꾸는 한편, 폼페이가 에트루리아인의 도시였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도자기 공장을 '에트루리아'라고 이름지었다. 프랑스에서는 폼페이 양식과 결합된 루이 16세 양식으로 퐁텐블로 궁전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방들이 장식되었고, 이 양식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와 그의 제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도 발굴에서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었다. 실제로 폼페이 발굴이 자극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로코코 양식을 대신하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예술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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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로서의 중요성
고고학적 장소들은 고대 세계의 사회·경제·종교·정치 생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출처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집 안에 잘 보존된 많은 제단들에서 지금까지 추측할 수 없었던 가정 내의 종교생활을 엿볼 수 있다. 방앗간·반죽기계·오븐(빵조각이 들어 있는 것도 있음)이 완전히 갖추어진 빵집은 일용 양식인 빵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축융소(모직을 가공하고 세척하는 공장)가 있어 당시의 주요산업을 연구할 수 있다. 조각가·공구제작자·보석세공가들의 가게뿐만 아니라 가룸(피시 소스)·램프 공장들, 많은 포도주·식품 상점들은 고대 생활의 다른 면들을 상세히 보여준다. 폼페이는 지중해 전역으로 상품을 수출하던 활발한 항구도시였다. 상인들은 성문과 포룸 근처에서 음식과 숙소를 구했다. 상당히 멋진 식당과 여인숙들이 있었다. 정원의 의자에 기대어 쉬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값싼 곳은 방이 작고 어두웠으며, 손님들은 등받이가 없는 걸상에 앉았다.
추가적인 사실들을 말해주는 명문(銘文)들에는 공공건물·묘·동상기부 등에 새겨진 기념문구, 밀랍 서판에 기록된 은행가 루키우스 카에킬리우스 유쿤두스의 유명한 사업 거래문, 검투 시합 안내문, 많은 선거 고시문, 격렬한 논쟁에 대한 여론을 써놓은 판 등이 포함된다. 계산, 장날 목록, 연인끼리 주고받은 글, 베르길리우스 작품의 인용구절, 어린이들이 긁적거린 알파벳 등이 그라피토(벽면 등에 긁어서 새긴 그림이나 문자)들로 보존되어 있다. 비문과 고고학적인 증거들로부터 사회계층을 연구하고, 고대 로마의 자유인·노예·소상인들·귀족 등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폼페이는 고대의 도시 설계와 토지 이용에 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최근의 발굴로 꽤 큰 규모의 탁 트인 땅이 발견되었다. 원형투기장 맞은편의 큰 구획은 오랫동안 포로 보아리오(우시장)라고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포도밭이었다. 많은 포도밭·과수원·정원들은 토지 이용이 덜 집약적이었고, 생각보다 인구가 적었음을 시사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