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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설교 모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 시69:30-31
이 시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라는 제목입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을 보여주는 두 천사의 바구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내려 보내시며 오늘 하루 동안 드려지는 사람들의 기도를 모아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은 각각 커다란 바구니를 한 개씩 들고 성도들이 기도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찾아다녔습니다. 부잣집이건, 교회건, 학교건 간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기도를 마구 담았습니다. 저녁쯤 일을 마친 두 천사는 서로의 바구니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천사의 바구니는 들고 가기 힘들 만큼 무거웠지만, 다른 한 천사의 바구니는 들어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가벼운 바구니를 든 천사에게 어째서 바구니가 그렇게 가볍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해 달라, 저것을 해 달라' 하는 기도만 드렸지, '이렇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래서 고맙습니다.' 하는 감사의 기도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구'를 담은 저 친구의 바구니는 가득 찼지만, '감사'를 담은 제 바구니는…"하고 대답하며 한숨을 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도의 바구니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함보다 간구가 더 많다는 것은 감사할 때 더욱 넘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감사가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1. 황소를 드림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시69:30-31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황소는 제사 중에서 큰 제사였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곡식가루를 드리고, 좀 더 나은 사람은 비둘기, 보통 사람은 양을, 그러나 황소는 신분이 높거나 부자가 아니면 드릴 수 없는 제사였기 때문에 큰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부러움은 언제 나도 저렇게 황소의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 그리고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처럼 언제 나도 그런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의 제사만 잘 드려보세요.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듯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지 구하기 전에 다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은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성도는 큰 제사를 드리는 성도입니다. 먼저 마음으로 감사하세요. 그리고 입술로 노래로 감사하세요. 히13:15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감사함으로 황소 한 마리씩 하나님께 드려보십시다.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만큼 기뻐하십니다.
시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니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드릴까? 이런 욕심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도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십니다.
이번에 반기문 유엔총장이 금의환향 고국을 방문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국빈급으로 예우하고 국회에서도 반갑게 영접해 주었습니다. 고향을 찾아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고 달려나온 어머니를 얼싸안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총장을 통해 이 나라를 빛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장 기쁜 사람이 누굴까요? 반총장의 어머니일 것입니다. 반총장은 그 어머니를 가장 행복하고 영화롭게 해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 감사와 찬송의 제사입니다.
지금 성령에 붙들려 부흥을 일으키고 다니는 일군들을 보면 한결같이 찬양과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분들입니다. 성경해석도 율법적이지 않고 복음적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확신이 없으면 밑 터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마음의 정죄 때문에 아무리 은혜를 부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찬양과 기도 이 세 가지만 잘 무장 되면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분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했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음악으로 돈벌이와 상관없다 해도 음악을 가르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이니 금생과 내생에 영원히 후회 없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 큰 영광을 돌리는 왕이 되기까지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들판에서 날마다 수금을 타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는 휘파람을 분다든가 음성을 항상 들려주어야 합니다. 다른 목자들은 사람의 소리를 들려주었지만 다윗은 항상 수금을 타며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엄청난 능력과 권세를 입혀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됩니다. 왕과 같은 영적 권세가 임합니다. 감사가 그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3. 구원을 온전히 누리게 할 만큼 기뻐하십니다.
시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이 전부인 줄 아십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은 풍성한 구원입니다. 감사할 때 이 풍성한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성도들이 온전한 감사의 생활이 없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열 명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한 사람만 예수님께 찾아와 크게 영광을 돌리며 감사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7-19)하셨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구원은 감사한 사람만이 누립니다.
성경을 보면 날마다 감사한 다니엘,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시고 사자 굴에서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사자 굴과 같아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면 아무 두려울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구원을 누리려면 항상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이 지치고 지옥 같다면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입술에 찬양과 기도가 없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왕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온 나라는 압살롬을 따르고 다윗은 울면서 궁을 비우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궁을 점령한 압살롬 왕자는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왕후들을 겁간합니다. 부끄러움에 다윗은 가슴을 치지만 아들에게 당하는 놀라움에 말문이 막힙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눈물과 회개로 가득하나 사태는 더 악해져만 갑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다윗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윗을 떠났다고 판단하고 압살롬 편에 섭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여호와가 자기 방패요 영광이요 승리라고 찬송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로 하나님을 부르며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다윗의 마음에 평강과 담대함이 임하고 조금도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워 잘 수도 있고 천만인이 둘러 진 친다 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모든 난리를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있던 많은 대적은 우리의 안팎에도 있습니다. 악한 사단과 불신 의심 탐욕 우울 교만 낙심 절망 연약 불안 공포 질병 실패 어둠 환경,,,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을 믿고 감사의 찬양과 부르짖는 기도자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약하거나 임종하려고 할 때 몸과 마음이 약해지니까 사단이 와서 시험을 줍니다. 그러나 늘 찬송하고 주여만 열심히 불러도 원수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칩니다.
4. 부요함으로 넘치게 하실 만큼 기뻐하십니다.
잠3:9-19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였습니다. 감사생활 잘하면 하나님께서 영육 간에 복을 주십니다. 우리 믿음대로 우리의 창고대로 가득히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습니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 학자가 한국경제는 아무리 연구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했습니다. 망할 듯 망할 듯 하면서도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고 대부분의 물자들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인데도 엄청난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빌딩이 올라가고 경제가 발전하는 이 현상은 경제학의 원리로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경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선교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나라를 어려움 가운데서 특별히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참고사항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언자들은 한국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샨볼츠, 베니힌, 신디 제이콥스, 캐서린 브라운, 릭 조이너나 영국의 하이디 베이커, 중국의 체안 같은 분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9.11테러와 사스 등을 정확히 예언했던 릭 조이너목사의 예언을 참고해 보면 "한국은 장차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북한에 놀라운 변화의 문들이 열리고 두 개의 분단된 국가가 재 연합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때 한국은 영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 지구상의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국가들 중 하나가 되며 경제적으로도 일본과 독일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고도 있습니다. "만약 영적 파수꾼들이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지쳐버리거나, 그들의(적화) 경계태세를 소홀히 한다면 큰 위험이 도래할 것이다."하는 경고입니다.
남북 통일이 평화적으로 될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과 한국교회에 가장 큰 고비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나라가 심히 어렵니다. 경제는 고사하고 IMF가 또 다시 다가올지 모릅니다. 한국 교회도 큰 시험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언론과 방송은 대중영합의 포퓰리즘(Populism)에 빠져 필요 이상으로 연일 기독교 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비를 기도로 슬기롭게 이기면 한국교회는 제 2의 도약기를 맞아 수준 높고 뜨거운 부흥운동이 일어나 한국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이 땅은 불신자 천국이요 하나님조차 섬기기 어려운 비극적인 현실이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믿음의 잠을 잔다면 성경책을 소유하는 것조차 위법이 되는 세상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 부흥의 중요한 기폭제는 바로 복음과 찬양과 부르짖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약해지고 잃어버렸던 부르짖는 기도가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최대의 소원은 성령의 불길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하셨습니다. 믿음의 불이 다시 붙으면 심령도 살고 교회도 부흥하고 세상도 변할 것입니다. 이 운동에 성도 여러분의 참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화롭게 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감사의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감사는 황소보다 더 큰 제사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고, 온갖 부요함으로 넘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 돌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시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추수 꾼 마태복음 9:37-38, 요한계시록 14:14-20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오늘도 이 저녁에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요즘은 본격적인 추수의 계절이 되어서 모두가 눈코 들 새 없이 바쁜 계절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농번기를 맞이하여 우리들의 육신은 매우 힘들고 어려워도 여름내 땀 흘려 가꾼 농사를 거두어 드린 보람이 있기에 힘든 줄도 잠시 잊을 수가 있습니다. 일한 것만큼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시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도 얻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1년 내내 피땀 흘려 지은 농사를 태풍과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삽시간에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기근과 재앙으로 거두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학개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옥토에 떨어진 씨는 30배 혹은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항상 자연을 소재로 하여서 말씀을 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황금물결로 넘실대는 들판이나, 파란 코발트 빛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 한 점에서도, 또 우리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에서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곱게 핀 코스모스 꽃에서도, 아니면 논두렁 밭두렁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에서도, 바람결에 나부끼는 은빛 억새꽃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 시절 베들레헴 부근에서 양을 치면서 이 자연에 흠뻑 취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자연을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이 시편 19편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뉴욕에 있는 브릭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43세에 하나님 나라로 간 말트비 밥콕(1858-1901)이라는 목사님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연을 노래하였는데 그 찬송이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78장 찬송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입니다.
다 같이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3절>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듯 하도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까지 자연만을 감상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이 자연을 통하여 들려오는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러면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시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눅12:54-56)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1)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롬13:11-12)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살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2)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 할 때입니다.
(살전5:7-8)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지금은 정신을 차릴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사모해야 할 우리의 영혼이 세상 것들에 취하여 혼미한 상태에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전쟁에서도 우수한 무기가 있는 나라가 이기게 됩니다. 세상 전쟁의 최후 무기는 핵무기입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기를 쓰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기도입니다. 기도로서 악한 마귀 권세를 물리쳐야 합니다. 성령의 전신 갑주는 기도로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393장 3절>
악한 마귀 제아무리 강할 지라도 우리들의 대장 예수 앞서 가시니
두려 말고 용기 있게 힘써 싸우세 최후 승리 얻을 때까지
일심으로써 힘써 나가세 일심으로써 힘써 싸우세
마귀들의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고를 울리기까지
기도만이 성도들의 능력입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천국 열쇠입니다. 기도로서만이 하늘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3)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고후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은혜는 아무 때나 받고 싶으면 받고 받기 싫으면 그만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때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때가 지나가면 하늘 문은 닫힙니다.
말씀이 있을 때에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말씀의 기근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암8:11-1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성도 여러분!!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구하기만 하면 물 붓듯 부어주시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행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은혜의 때에 은혜 충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4)지금은 마지막 추수 때입니다.
본문 마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13:29-30절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계14:1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한 낫을 가지시고 추수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 때 추수하는 것은 구원 얻은 성도들을 하늘나라로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주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는 마지막 심판 때가 가까이 다가오는 추수 때입니다.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하늘 곡간에 들어가는 알곡 신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다 같이 찬송가 한 절을 부르겠습니다.
<306장 3절>
우리 주님 오셔서 곡식 거둬들이고
밭에 있는 나쁜 것 모두 소멸하실 때
가라지는 골라서 불에 던져 태우고
알곡들은 곳간에 길이 쌓아 두시리.
2. 일군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6: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을 부르는 모습입니다.
또 마24: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라고 주님도 일군을 부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3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눅 5:1절 이하에서는 예수님의 시몬을 부르시는 모습도 있고,
사도행전 9장에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을 부르시는 모습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때이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오늘에 이르렀던지 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기왕 부름 받았다면 이사야 선지자 같이 모세같이 여호수아같이 베드로같이 바울같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 하나님은 어떤 일군을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아무나 마구잡이로 쓰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회사의 사원을 뽑는데도 아무나 뽑지 않고 시험을 치러서 뽑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일군을 뽑으시는데 아무나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불러서 쓰십니다.
(행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사람을 부르십니다.
마태복음24: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도 하셨고 믿음 있는 백부장이나 고넬료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예수님은 항상 믿음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지 절대로 사람을 축복하시지 않았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항상 큰 일을 해 냅니다.
(3)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사자 굴에까지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도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던 나다나엘을 제자로 불러 쓰셨습니다.
고넬료는 정오에 기도하다가 천사를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가다가 미문 곁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기도하다가 하늘이 열리고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한 환상을 보고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천국 열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삼상15:22절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고 하셨습니다.
미가 6:7-8 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삼상3장에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대답하기를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큰 일군으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가 한량없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구원의 기회를 똑같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성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저희 모든 죄를 사하시고 기억 지도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추수 때에 일군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주여 나는 입이 둔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라고 핑계를 대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핑계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사명 앞에 어찌 핑계가 있을 수 있습니까?
시몬은 “네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는 주님의 부르심에 두 배 가득히 채운 만선의 고기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레위도 주님의 “나를 따르라” 는 말씀 한마디에 지금까지 돈 벌던 세리 직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부름에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하는 성도가 되어서 이 마지막 말세인 추수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추수 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라 신 16:1:-17
감사(Thank)는 생각(Think)으로부터 온 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우스운 얘기지만 대머리도 감사할 일이 여섯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1.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이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할 일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앞이마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얻어먹는 사람(거지)가 없답니다. 대머리의 모습으로 도와 달라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
4. 엘리사도 대머리였습니다. 비교적 목회자들 중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엘리사 후손이라 그렇습니다.
5. 물자를 절약할 수 있답니다. 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을 편하게 해드린답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마 10:30). 대머리는 머리숱이 적어 셀 것이 거의 없으니 주님을 얼마나 편안하게 해드리는 일입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다음주일은 2006년을 정리하며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주일이며 또한 한 영혼을 위하여 떠나는 50일간의 아름다운 여행의 종착역인 태신자 전도 총동원주일입니다. 얼마나 귀한 날입니까? 한 해의 삶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태신자들을 결실하여 인도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우리는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런데 문제는 감사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여전히 삶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고난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운 걸음을 걸어야 하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들을 만나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찾아와야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여전히 앞이 캄캄하고 길이 막혀 풀리지 않아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를 의심하며 힘들어하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기가 너무 힘듭니다.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기 보다는 짜증스런 마음이 자꾸 앞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감사하라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면 좋을까요?
첫째, 고난 중에라도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헌트 선교사가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41년 10월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감방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중 갑자기 어떤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니 이어서 곡조가 떠올라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만왕의 왕이시니 각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족속들 주를 찬양할지어다. 땅을 권세와 의로 다스리시며 파도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나니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네 감사하는 일을 기쁨으로 이루라."
그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것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외투주머니 속에서 중국 동전이 하나 남아 있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동전을 쥐고 힘껏 눌러 회벽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감방 안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얼마나 잘 써졌는지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쓰고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식별하기는 곤란했지만 알아 볼 수는 있었고 곡조도 기억이 났습니다.
잠시 후 간수가 작은 창구를 통하여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벽에 쓴 것이 무엇이냐?" 라고 의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겨우 읽을 수 있었지만 비스듬히 보이는 문에서는 창에 비치는 빛에 반사되어 뚜렷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감사와 기쁨을 간수에게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간수는 이상한 듯 감방을 휘둘러보며 "이런 감방 안에서 도대체 누가 감사할 수 있을까?" 라며 그의 동전을 압수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그는 간수의 얼굴은 매우 부드러운 표정이었습니다. 헌트 선교사의 감사할 수 없는 곳에서도 감사하는 모습에 간수는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솔맨이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말해줍니다.
"당신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내는 임신 중 이었습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럽습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합니다.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십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둘은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솔멘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3개월 후 죽었을까요?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보통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에 대개 자비하신 분으로, 고난당하시는 얼굴로 그리는데, 이분은 지도력이 있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유명해서 수백만 장이나 인쇄되었고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3개월이 어딥니까 ? 하루가 어딥니까 ? 한 달란트가 어디냐 그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감사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할 조건을 보기 보다는 인생의 무거운 짐과 문제만을 바라보며 한탄합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훨씬 더 감사할 풍성한 이유들이 발견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풍요하기에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문제가 없고 형통한 복을 누리기에 하는 감사도 아닙니다. 궁핍한 가운데 모진 고난의 풍파를 만나 힘겨운 삶을 지내는 가운데 하나님으로 인하여 드릴 수 있는 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감사의 축제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범사에” 라는 것은 모든 일에 좋은 일만이 아니라 나쁜 일 가운데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기쁠 때만이 아니라 슬픈 일이 있을 때에라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을 ‘습관들의 묶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을 부르는 습관들이 뭉친 결과요, 실패한 사람은 실패를 부르는 습관들이 뭉친 결과라는 뜻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럴만한 습관이 있고 병약한 사람은 역시 그럴만한 습관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습관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평의 습관으로 사는 인생들이 되지 말고 감사의 습관들로 뭉쳐진 인생으로 사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감사의 습관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 새롭게 하며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눔이 있는 감사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14절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수장절을 지키는 정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이들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특히 약한 이웃들과 소외된 이웃들과의 나눔을 실천하는 감사축제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절의 정신입니다.
입춘인 2월 4일,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 소공원에서 이색 환갑잔치가 있었습니다.
하객은 불우노인 400여명이 몰려 성황이었지만, 정작 축하의 인사를 받아야 할 주인공은 오전 한 때 잠시 얼굴을 내밀고는 기자들을 피해서 지방으로 떠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는 환갑을 맞은 김정숙씨가 자식들에게 "어려운 노인들에게 따뜻한 식사 한끼 대접하는게 이 시대 뜻 깊은 환갑"이라고 제안해 이루어진 자리였습니다.
당초 김씨의 자식들 4남매는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 중인 둘째와 막내까지 귀국시켜 섭섭하지 않게 잔치상을 차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김씨가 "IMF 시대에 잔치가 왠말이냐?"며 완강하게 사양하는 바람에 잔치를 치를 비용으로 노인들이 좋아하는 육개장과 인절미 등을 준비, 불우노인들을 초대했습니다.
장소를 독립문으로 잡은 것은 설 연휴 때도 이곳에서만은 빠짐없이 무료 점심이 제공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였습니다. 이 김정숙씨의 이야기는 잔치를 나눔으로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던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처음 수확을 하고 감사절을 지키게 되었을 때 그들은 지역의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를 즐겼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감사절의 정신은 나눔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며 해오는 것이 있습니다.
제단에 꾸민 과일과 채소들을 지역에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그 기쁨을 함께 소외된 이웃들에게 전하려는 것입니다. 작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올해는 더욱 풍성한 나눔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제단에 많은 과일과 채소들을 장식하고 모두 이웃들과 나누었으면 합니다.
또한 내년에는 더 많은 나눔으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절기헌금의 십분의 일을 이웃들과 나누는 잔치를 준비하면 어떨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감사의 축제를 함께 즐기면 그 축제가 바로 천국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눔의 일들을 더욱 많이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태신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복음의 기쁨을 나누며 감사의 축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헌신이 있는 감사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17절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값진 헌신이 담겨있는 감사축제를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더 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힘대로’ 라는 말씀은 적당히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 헌신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부자가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집에서 기르는 모든 동물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려 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동물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대찬성입니다
주인이 거위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거위요리가 좋겠어. 거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주인님, 저는 큰 알을 낳아주잖아요. 저 암탉을 잡으시지요.
암탉이 손을 저었습니다. 저는 아침을 알려줍니다. 양을 잡으시지요.
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저는 따뜻한 털을 제공한답니다. 말고기는 어떤가요?
말이 소를 가리켰습니다. 주인님이 여행가실 때 누가 태워줍니까. 암소고기가 최고지요
이번에는 소가 고함을 질렀습니다. 나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주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동물들은 잔치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희생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잔치와 축제는 좋습니다. 그러나 헌신은 인색합니다. 축제가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는 것은 헌신함으로 준비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 주일 예배는 감사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축제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헌신된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헌신하여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헌신이 나눔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감사의 축제를 준비합시다. 다음 주일 추수 감사절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감사의 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준비할까요?
고난 중에라도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고난과 문제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으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감사의 진정한 정신은 나눔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을 이웃들과 나눔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감사의 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헌신으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나의 헌신이 아름다운 축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축제에 태신자들을 인도하여 함께 축제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다음주일은 태신자를 초청하여 함께 오시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기도해왔던 전도대상자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함께 감사의 절기를 풍성하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로 예배하시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의 마음가짐 (눅 17:12-16)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눅 17:12-16)
일년 중 가장 축복되고 즐겁고 고마워야 할 추수감사절입니다만 감사절이 오는 때는 겨울 준비에 우리들의 고민이 하나 더 늘어가는 시기와 맞물려 감사와 감격이 없이 맞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운 연례 행사가 되어 버리는 서글픈 감이 듭니다.
금년은 더더욱 제 2의 IMF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속에서 맞이하는 감사절을 과연 어떻게 지키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와 그 은혜를 감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는 하나님을 알고 기념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고백하는 감사입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의 정신과 감사하는 생활의 비결을 성경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의 은혜 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
추수감사절에 관한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그 토지 소산의 만물을 거두어들인 후 처음 익은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그것을 여호와의 성소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아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킴으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이 고백적인 감사 노래의 도식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는 조상이 겪은 역경과 여호와께 부르짖음, 그리고 구원과 가나안 땅으로 정착하도록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서 얻은 열매로 추수감사절을 노래하면서도 추수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여호와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는 고백을 하였을까요. 이는 시편 136편 10-25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추수감사절에 추수한 기쁨에 도취되어 감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구원 역사를 기념하고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는 감사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추수 시기를 따라 지킨 추수감사절의 이름은 추수와 관계가 없는 유월절, 무교절, 장막절, 혹은 초막절로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신 행사를 기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추수 감사 축제를 즐기고 기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전체의 표현이었습니다.
최근의 감사절은 영국에서 1621년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에 상륙하여 많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지어 처음 익은 열매들을 제단에 놓고 눈물의 감사를 드린 것이 그 효시가 된 것입니다.
2.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마음의 감사
추운 초겨울 12월에 플리머스 항구에 102명이 상륙하였으나 추위와 굶주림과 병으로 인하여 절반 이상이 생명을 잃어 버리고, 그 이듬해 봄에 원주민 추장에게 감자와 옥수수 종자를 얻어 희망의 씨앗을 뿌렸으나 그들은 또다시 절망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물이 가장 필요한 때에 3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수확할 수 없는 폐농 직전에 놓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으로 성별한 기도의 날을 정하고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열심히 기도했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사 갈멜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던 기적이 그들에게서도 나타나서 가물었던 땅에 10일간 비가 내려 위기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은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생명적인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는 본래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형식적이고도 관료적인 신앙에 항거하여 보다더 생명적이고 내면적인 경건한 신앙생활을 살기 위한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12년 동안 본국에서 박해에 견디다 못해 암흑의 대륙이라고 불리던 아메리카 신대륙에 생명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며 대서양을 건넜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앙 제일주의가 그들의 생활 모습이었습니다.
1621년 11월 11일에 체결된 메이플라워 계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할지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신앙의 증진을 위하여 항해를 계속하였노라] 고 선언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든 고향과 친척들을 버리고 신대륙에 와서 죽음과 투쟁하며 결실을 얻었으므로 실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는 감사해야 할 일들보다는 슬퍼해야 할 일이 많고 고마워하기보다는 원망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슬픔보다는 기쁨을, 원망보다는 고마움을 신앙의 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감사하는 신앙의 정신인 것이며 이러한 정신이 우리들에게 되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감사절은 진정 기쁘고 감사하여 지키는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 헌금은 우리 신앙의 내면적인 은혜를 물질로써 바치는 것이기에 몸과 마음과 정성을 함께 바쳐야 하며, 과부의 엽전 두 개와 같은 헌금이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함께 깨끗해진 열 명의 나환자 중 한 명처럼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한 것을 본받아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이 없음이 아니라 감사할 마음이 없음이 곧 타락이요, 병입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제일 먼저 교회당 건축하고, 다음에 학교 건축하고 물질 이전에 정신적인 내면적인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일년에 한번씩 한 주일을 정해 감사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은 우리 교회에 주신 은혜, 하나님께서 내 개인과 가정에 주신 은혜를 감사 드립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우리는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문안 후에 감사하라 권면이 어떻게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뤼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감격으로 사무쳤고 그의 하루 생활은, 아니 일생의 생활은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이러한 감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으면 누가 감사하지 않겠는가?]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좋은 환경이나 평안한 생활로 인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3. 가난했던 지난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하반부를 읽어보면 바울의 일생을 간단히 기록한 몇 마디 내용이 있습니다. 몇 번이나 매를 맞고 몇 번이나 감옥에 갔고 몇 번이나 파선을 당하고, 에베소, 고린도,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핍박과 환난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언뜻 생각할 때 몸이 건강하거나 가정이 화평하면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몸의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쉴 만한 집도 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바울 사도는 일생토록 나그네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사는 삶 속에서 평안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감사하는 생각과 생활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그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을 심령속 깊이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마귀와 사탄에게서 해방을 받은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같이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신앙이 있으면 우리도 순경이나 역경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언제든지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닌 줄 압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니 자연히 그의 생활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선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6:22). 바울이 가는 곳마다 죽은 생명을 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든지 맺는 사람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면 열매 맺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과 역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같이 우리도 과거 가난하던 때를 기억하며 가진 것이 많은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더욱 감사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왕의 감사-추수감사절설교 역대하30:23-27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의 절기중 중요한 절기다. 부활절, 맥추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다.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추수 후 드리는 절기로 도시에 사는 성도들은 1년간 도우시고 지키시고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다. 추수감사절은 구약에서는 수장절이라고 일컷기도 한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유다왕 히스기야의 유월절 감사를 통해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제사를 드리므로 받은 축복을 전해드리고자 한다.
1. 히스기야 왕의 유월절제사 준비.
유다왕 히스기야는 북 이스라엘 멸망12년후인 BC710년 우상을 타파하고 성전을 정결케 한 후에 폐쇄되었던 성전 문을 열고 하나님께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다.
히스기야왕은 북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의 백성들에게 전령을 보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였다. 제사를 회복하고 통일 왕국을 꿈꾼 것이다.
왕과 신하와 백성이 선히 여기고 전령들이 왕의 편지를 북쪽 단에서부터 남쪽 브엘세바 까지 전하며 하나님께 귀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간 형제와 자녀들이 돌아온다고 반포하였다.
2. 조롱과 호응
보발군-전령이 전하는 왕의 유월절 제사 초청에 대한 반응은 조롱하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아셀,므낫세, 스불론 지파 중 몇 사람이 호응하여 예루살렘에 왔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감동 시키셔서 왕의 초청에 일심으로 참여하였다.
이 월에 무교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많이 모였다. 백성들이 우상을 기드론 골짜기에 버리고 이 월 십사일에 유월절 양을 잡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성결케 하고 성전에 올라갔다.
에브라임, 므낫세, 잇사갈, 스불론 지파 중에 많은 사람들이 성결치 않은 상태에서 유월절 양 고기를 먹어 규례를 어기므로 히스기야 왕이 용서해달라고 기도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고쳐주셨다.
3. 유월절제사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이 무교절과 유월절을 7일간 즐거이 지키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화목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온 백성과 회가 다시 7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또 7일 동안 제사를 드렸다.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1,000마리, 양 7,000마리를 백성들에게 제사 드리라고 나눠주었고 신하들도 수송아지 1,000마리, 양 10,000마리를 회중에게 나눠주었고 성결케 한 제사장도 많았다.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온 회중과 나그네가 다 즐거워하였는데 솔로몬 이후로 230년간 이런 희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다. BC940년 솔로몬이 타락 후에 유월절 제사를 드리지 못한지 230년 만에 회복된 유월절 제사였고 역대 왕들이 7일을 통상적으로 지켰으나 히스기야 왕과 회중들은 7일을 더 지키므로 14일간 유월절 제사를 드린 것이다.
4. 유월절 제사의 결과 온 축복.
230년 만에 유월절 제사를 회복시키고 14일을 즐거이 유월절 제사를 드린 결과 희락과 축복이 넘쳤다. 그리고 유월절 제사와 기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되었다.(역대하30:27)
제사 드린 9년 뒤에 앗수르라는 강대국의 왕 산헤립의 심복 랍사게가 18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후에 항복을 요구하였을 때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드리므로 한 천사가 나타나 하루아침에 185,000명을 다 멸하였다. 9년 전에 드린 민족적인 유월절 제사를 받으시고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국가적인 위기에서 구하여 주셨다.
얼마 후 히스기야 왕이 병들자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지않아 죽을 테니 유언이나 하라고 전하자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드리며 추억해 달라고 눈물 뿌려 기도드리니 이사야가 다시 찾아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히스기야 왕의 눈물을 보시고 기도 소리를 들으셨으며 히스기야 왕의 수한에 15년을 더 사는 생명연장의 축복을 주시고 생명연장 받은 2년 후 왕자 므낫세를 낳아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 왕은 예수님처럼 성전을 정결케 하고 230년 만에 유월절 제사를 회복하고 7일도 아니고 14일간 유월절 제사를 북 이스라엘 유민과 유다 백성들을 결집시켜 제사를 통해 통일 왕국을 꿈꾸었고 드린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9년 뒤에 나라와 자신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제사는 감사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으시고 축복을 많이 받으시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와 감사와 찬양을 성령의 감동으로 진심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와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누가복음17:13-19
자 오늘은 어떤 주일이죠?
추수 감사절이예요.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농사도 잘 되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한 해 동안 감사할 일들을 모두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주일이예요.
먼저 맥시코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줄게요.
맥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어요. 그 옆 한쪽에는 부글부글 끓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그 옆에는 얼음 묾과 같은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라요.
그러니까 그 마을의 온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가지고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갔데요. 그 모습을 본 외국 관광객들이 안내하던 맥시코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곳 부인들은 참 좋겠습니다.
“왜요?: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까요. 이곳 사람들은 온천과 냉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대답은 “오~아니요 천만예요”
“왜요?”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왜 그렇죠?
더운물과 찬물이 땅에서 나는 것은 괜찮은데 빨래하기에 꼭 필요한 것이 나오지 않아서 불평이 많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죠?
네 바로 비누입니다. 라고 했데요.
사람마음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서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이것은 어떻게보면 당연한 이치지요.
자 오늘은 성경 속에서 감사한 사람 중 문둥병자 10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각종 기적을 베푸신다는 소문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갈릴리까지 모두 퍼졌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게 되셨어요.
그때 문둥병자 10인이 마구 소리를 높여서 외치는 것이예요.
아이고 예수선생이여!! 우리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17: 13 에 보면 소리 높여 가로되 라는 말이 나와요. 이것은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절박했는가를 볼 수 있어요. 이 뜻은 한번 소리 높여 외친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 예수 선생이여 선생이여!!! 우리좀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 좀 고쳐주세요. 이렇게 소리지르며 따라온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이들이 왜이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를 불렀을까요?
그것은 그들은 문둥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예요.
문둥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들이 이토록 절박한 마음으로 소리높여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질렀을까요?
문둥병은 한센병이라고 불리우는데, 이 병은 나균이 원인으로 사람에게 걸리는 질환인데 피부와 말초신경에 생긴 병소가 특징인데, 눈·고환·코와 인두 점막도 침범한다. 나균은 말초신경을 파괴하여 감각을 잃게 하고 차츰 조직이 변성되며 결과적으로 균이 침투한 모든 부분이 변형되며 짤나나가며 없어지는 병이예요.
그러니 이 사람들의 얼굴은 다 무너져 내리고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살은 균으로 인하여 썩어들어가는 그런 증상이예요.
그리고 이 병은 전염되는 전염병이기 때문에 이들은 함께 살 수 없었어요. 가족을 만날 수도 없고 무엇을 사먹을 수도 없고 그들만의 동굴에서 숨어서 몰래몰래 살아갔지요.
이 문둥병에 대하여 또 다른 뜻이 있어요.
원전에서는 문둥병을 문둥병을 원전에서는 레프로스(lepro;") 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자, 죄로 버림 받은자, 하나님께 버림 받은 죄인들로” 규정했습니다. 바로 죄를 나타내는 병입니다. 하나님관계에서 비틀어지면, 문둥병이 생깁니다. 죄인으로 들어납니다. 죄를 문둥병으로 표시하여 들어낸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웃시야 왕이 나오는데, 하나님과 가까울 때는 나라가 부광하였고 전쟁에서 이겼고 상공, 농업에 큰 풍년을 얻었고, 강성하여 그 이름이 변방 애굽까지 펴졌습니다. 그 쯤에,,,, 웃시야왕으 교만해지기 시작하였고 선지자 제사장 말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고집으로 정치, 제사, 경제 모든면을 자기 마음대로 했어요.
여호와께 범죄하므로, 하나님이 벌을 주었습니다. ‘너는 범죄자다‘ 표시로 이마에 문둥병이 들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중에 죄를 범한 자를 구별시켜 주신 것이 문둥병이 생긴자와 나지 아니한 자로 구별시켰습니다.
이렇듯 문둥병은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 죄가 있다라는 표시로 사람들은 알았고 문둥병자 들이 지나갈 때 쯔음 사람들은 손가락질 했어요.
어머 저 얼굴좀 봐, 더러워, 저들은 얼마나 죄가 많으면 저렇게 됐지? 으아..괴물같아, 옮을까봐 옆에 가지도 못하겠다.
야 이 문둥병자들아!! 우리 옆에 알짱대지마!! 소름돋아! 너희마을로 가라구!!
너희들을 보면 죄의 냄새가 나! 파괴성, 혐오성, 격리성, 전염성, 잠재성, 이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구!
문둥병자들은 지독한 혐오 대상이였고 격리대상이였기에 그렇게 죽을 날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을 보게 된거예요.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 이름을 불렀을 지 상상이 되시죠?
어쨎든 예수님은 병은 안고쳐주시고 다른 소리를 하세요.
14절을 보면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세요. 이건 또 무슨말이야!!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레위기 13장에 보면 문둥병의 진단 기준이 나와요.
문둥병이 나았는지 안나았는지 누가 진단을 했는지 알아요?
의사가 했나요?
아니요~ 제사장들이 그것을 판단하였어요. 이들은 꼼꼼히 오랜시간을 걸쳐서 이 병이 나았나 안나았나 정결한가 안정결한가를 따져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니 몸을 보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제사장에게 갔어요. 가서 몸을 보이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일이 아니예요. 아직 낫지도 않았고 다 썩어 문드러지는 피부를 남에게 보이는 것, 내가 죄가 이렇게 많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보이는 것은 쉽지 않아요.
10명의 문둥병자들은 그래도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달려갔고 가는길에 모두 고침을 받았어요. 살이 아기피부처럼 하얗게 되었고 문드러지고 썩어없어지고 움푹 들어갔던 곳들에 새살이 찼어요. 눈이 생기고 코가 생기고..
그들은 기뻐뛰며 좋아했어요~
와~~우리가 고침받다니, 이제는 가족들에게 갈 수 있겠구나! 이제는 숨지 않아도 되! 이제는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와~~
자 그럼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서 감사를 드렸겠죠? 아니요~
예수님은 사마리안 사람 한사람만 온 것을 보시고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셨어요.
맞아요. 9명은 룰루랄라 다 제각길을 가고 사마리아인 한명만이 온것이죠.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싫어하고 깔보는 사람이였이죠.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마리안인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였고 자신에게 제2의 인생을 주신 예수님께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께 감사한 사마리아인은 육체적인 질병도 나았고 그의 영혼까지 구원받은거예요.
나머지 9명은 육체적인 질병은 고침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어요.
자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나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떤 친구들은 막 머라고 해요. 아니 전도사님, 저 9명 너무 뻔뻔한거 아니예요? 제 2의 인생을 주고 저렇게 고쳐주었는데 어떻게 모른척 하고 그냥 갈 수가 있죠? 정말 너무 뻔뻔해요. 저렇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가는게 당연해요!!
하지만 저 9명이 우리라는 생각은 안해보셨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어요. 가족을 주셨고, 건강을 주셨고, 배고프지도 않아요. 학교에도 다니죠.. 뿐만 아니라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영혼또한 구원해 주셨어요.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세요.
9명이 그냥 감사의 말도 없이 각기 자기의 길로 쌩 가버린 것처럼 우리도 많은 부분에서 감사해야함에도 그냥 쌩 지나칩니다.
또한 저 사람들이 문둥병에 걸릴 때에는 주님만을 외치다가, 병이 나으니 싹 달아났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문제가 생길 때는 주님만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냥 감사가 없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일은 해달라고 징징대고 해결된일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방법을 몰라요.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감사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보다는 불평이 먼저 나와요. 우리는 사소한 것에 불평부터 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어요. 아우 짜증나, 저 사람은 왜이래? 이 사람은 왜저래? 날씨는 또 왜이래? 오늘은 왜이리 재미가 없어? 아우 시시해.. 공부가 머 이래? 밥은 또 애이리 맛없어? 왜 사람들은 내 마음을 몰라줘?
이렇게 불평을 늘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해줘도 불만스럽고 어떤것도 감사하지 않죠.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것을 가져다주고 어떤 행복을 누리게해줘도 불평할 거예요.
불평하는 사람은 불평이 습관이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가 습관이 됩니다.
남을 험담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불평하기 전에 감사했던 일들과 현재의 위치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감사는 그냥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감사는 훈련입니다. 어릴때부터 훈련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성 때문에 금세 불평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지금의 습관들과 훈련들이 불평하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친구들은 감사하는 훈련, 습관을 가져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하겠어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감사 / 창세기 4 ; 1 - 7
찬 송 : 40, 307, (309) 310, 312, 453.복음송 : 감사 찬송(70)
※ 본문 중에 인용된 성구는 개역개정판을 사용하였습니다.
할렐루야!!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무엇을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감사가 될 수 있으며 또 온전한 축복이 되는 감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감사』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에 대하여 그 유래를 생각할 때 1620년 청교도들이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분리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견디다 못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아르미니우스 파의 반대에 부딪쳐 그들은 1620년 12월에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 매사추세츠 주에 상륙하여 익숙지 못한 기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인디안 으로부터 배워서 가꾼 옥수수와 호박 등을 처음 수확하였을 때에 그 감사함을 기념하기 위하여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 제로 지켜왔습니다.
그것이 1884년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전해지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추수감사절의 유래요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 광야에 머물 때 모세를 명하여 계명들을 주셨는데 그 때에 3대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출23:14-16)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이와 같은 명령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이 절기를 지키지 못하다가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 첫 농사를 지은 때부터 맥추절도 지키고 수장절,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초로 농경을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바로 아담의 직업(가업)은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업은 아담의 장남인 가인이 이어 받아서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곡식도 심고 채소도 심고하여 열심히 일하며 농산물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는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없이 아들 딸 낳고 농사지으면서 살다보니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한 말씀의 그 세월이 얼마가 지났느냐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가인과 아벨이 성인이 되어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아 상당한 연수가 지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것 중에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추수감사절” 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 치 않으셨기 때문에 급기야는 가인은 자기의 성질을 참지 못하여 안색이 변하고 분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가인은 결국 아우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치 않으셨을까요? 하는 의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의 제물을 모두 받으시면 이와 같은 살인 사건도 나지 않았을 것인데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의문점은 영원히 미제로서 남아 있을 것이며 그 어떤 해석도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해석과 주석과 학설들이 있습니다.
① 어떤 주석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워 주기 위하여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곳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실 구원 사업을 예고해 준 것으로 아벨은 이 뜻을 잘 알아서 양을 잡아 드렸고 가인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의 생각대로 땅의 소산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② 또 어떤 이는 땅의 농산물은 수고와 땀으로 거둔 “행위”의 제물이요, 양의 새끼와 그 기름은 “믿음”의 제물이니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한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행위” 보다 “믿음”을 택하셨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또 다른 의문을 가져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처음부터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농사짓는 자가 농산물로 드리고, 양치는 자가 양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채식보다 육식이 좋아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가인은 부친 아담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농사짓는 사람이 되었는데 아벨은 왜 양치는 자가 되었을까요?
창3:9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양을 치는 것은 먹기 위해서 기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왜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 대답은 아담과 해와가 입은 가죽옷 밖에 없습니다. 즉 가인은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담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짓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입을 것을 위하여 양을 기르고 그 가죽을 벗기고 그것으로 곡식을 바꾸어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양 새끼 밖에는 바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 새끼로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가지 결론에 닿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치 않으신 이유가 그 제물이 양이냐 곡식이냐에 있지 않고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에 함께 은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그 드리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받으실 때 제물의 종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제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농산물이기 때문에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양이기 때문에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정성과 마음과 뜻과 믿음과 나아가서는 그의 인격과 신앙까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의, 식, 주(衣食住)라면 영이 살기 위한 필수적인 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요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것을 알자 그의 낯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는 왜 자기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았는가 하는 자기반성보다는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이 없었다면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이유를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신앙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신앙과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2.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무엇을 제물로 드리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옛 부터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슨 제물을 가지고 갈 것인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들이 모두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무당들은 돼지 머리를 제물로 드립니다. 또 떡을 해서 드리는 종교도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모압 사람들이 섬기던 몰록이라는 신은 갓난아기를 산채로 불에 던져 태워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송아지나 정결한 어린양이나 비둘기로 제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시기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출23:15) 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나름대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는“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고 하였습니다.
(말1:7-8)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고 하신 말씀과 같이 가인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잠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감사가 있을 수 없고 혹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크면 감사도 크고, 반대로 믿음이 적으면 감사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믿음이 충만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 하나님이 기쁘게 열납 하시고 축복하신 제물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의 제물을 축복하셨습니다.
창22장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셨을 때 주저하지 않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서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3일 동안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우리가 추상적으로 그냥 생각하기는 아들을 드리는 것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은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장작을 쪼갤 때에 그 마음은 쪼개지는 장작보다 더 갈기갈기 찢어졌고, 3일간 황량한 광야 길을 걸어갈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광야보다 더 삭막하였으며, 이삭이 장작을 지고 고갯길을 오르면서 “나무와 불과 칼은 준비되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이삭을 찔러 죽이려고 들고 가는 그 칼이 마치 자기의 목을 찌르는 것과 같이 아팠고 제단 위에 이삭을 결박하여 들어 올려놓을 때 25살의 청년 이삭의 무게보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더 무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여호와이레」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아들 이삭에게 대답을 하였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그 말대로 하나님은 수양 한 마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창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창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2)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그 제물을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축복을 하셨습니다.
(왕상3:4-5)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나님의 이 말씀에 솔로몬은 대답하기를
(왕상3:7-9)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10-13)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3) 예수님은 성전에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막12:42절과 눅21:2절 의 말씀을 보면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었는데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면서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이 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막12:42-44)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사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이 시간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4:24) “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지니라” 우리들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우리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죄를 용서받고는 다시 나가 또 죄를 짓고 그러고는 또 다시 제물을 드리는 이와 같은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사66:3-4)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감사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시50:14,23)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잠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고 말씀하셨고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림으로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시고 하늘 문을 열어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하시는 놀라운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