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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그 후 어느 해에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낙산사의 창건 연기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책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조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
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
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
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
(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했다. 대나무는 다시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연기 설화이지만, 이보다도
약 50년 전에 기록된 설화도 있다. 곧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釋益莊)의 「낙산
사기(洛山寺記)」가 그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되어 있는 이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주(襄州) 동쪽 강선역(降仙驛)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몇 리쯤의 바닷가
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백 척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만 섬을 실은 배라도 드나들 만하다.
그 밑에는 항상 바닷물이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멍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
대사(觀音大士)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굴 앞의 50보쯤 되는 바다 가운데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에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성용(聖龍)을 뵙고자 하여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
14일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볼 수가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다 속의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 대성(大聖)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라고 했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그 말과 같이 가서보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준
옥으로 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니 바로 이 절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파랑새가 나타난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낙산사 창건설화와 석익장의「낙산사기」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좌구를 물 위에 띄웠다고 했다. 그런데 굴 앞의
50보 쯤에 바위 하나가 있고, 의상이 그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는 「낙산사기」
의 내용과 관련지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삼국유사』에서는 정성으로
기도하기 7일 만에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굴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서는 14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관음 진신을 친견할 수 없어서 바다
에 몸을 던졌고, 이 때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또한 『삼국유사』
에는 다시 7일을 재계하여 진용을 친견했다고 했는데, 「낙산사기」에는 관음대성이 굴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산사기」에 의하면 동해용이 여의주와 함께 옥을 주었고, 이 옥으로 불상
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금당에 소상(塑像)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기록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관음진신이 일러준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만은 일치한다. 따라서 서역의 보타낙가산에 관음진신이
항상 머문다는 설에 따라 동해의 낙산사에도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정착되는
것은 의상법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내용출처 : www.uisang.or.kr
07시 30분경 건봉사를 출발한 백팔고찰순례단은 불교TV에서 제작한「한국의 명찰 오봉산
낙산사」를 시청하며 낙산사로 가는 도중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관동8경중의 하나인
청간정에 들러서 가기로 하였다.
청간정(淸澗亭) / 관동8경중 하나요, 설악일출 8경의 하나로 土城面 淸澗里 81번지 동해안
산록에 위치한 淸澗亭은 설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淸澗川과 만경 청파가 넘실거리는
기암절벽 위에 팔각지붕의 중층누정으로 아담하게 세워져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월출시의 장엄함과, 밀려오는 파도가 마치 뭉게 구름이 일
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가는 황홀경으로 관동팔경중 수일경으로 손꼽히고 있다. 유형
문화재 제32호 지정된 청간정의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미상이나 조선조 중종 15년(1520년)
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청간정 현판 / 단기4286년(1953년) 5월 15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것이다
嶽海相調古樓上 악해상조고루상
果是關東秀逸景 과시관동수일경
설악과 동해바다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오래된 누각(청간정)에 오르니
과연 관동의 빼어난 숨은 절경이로다.
庚申 盛夏(1980년 여름)에 최규하 전 대통령이 쓴 글이다.
홍예문(虹霓門) / 08시 50분경 낙산사 홍예문에 도착했다.
이 홍예문은 위는 누각(樓閣)이고 그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이룬다.
누각은 산불로 인해 소실되었다.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축조 방식은 먼저 문의 기단부에 걸치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
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 뒤 두 줄로
쌓아 둥근문을 만들었다. 선단석은 홍예문 등에 사용되는 맨 밑을 괴는 모난
돌을 가리킨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와 밖을 구분했다. 이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혹은 사용된 돌은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것을 가져다 쌓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빈일루(賓日樓) /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으로 지관 큰스님의 친필이다.
응향각 안에서 바라본 원통보전
대성문(大聖門) / 관음대성께 예배드리고, 찬탄하고, 발원하고, 참회하고, 공양을 올리기
위해 백팔고찰순례단원들이 대성문을 들어서고 있습니다.
칠층석탑이 서 있는 원통보전 원장(垣墻)안에 들어 섰습니다.
건칠관음보살좌상(乾漆觀音菩薩坐像) / 보물 제1362호,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음보살상
사진출처 : 문화재청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
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
을 짐작케 해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통보전은 원통전(圓通殿), 혹은 관음전(觀音殿)으로도 불리며,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다.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원통보전은 전쟁직후인 1953년, 당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관음보살의 원력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과 군인들,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된 것이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
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
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는데, 2003년 2월 3일
보물 제 1362호로 지정되었다.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도가 걸렸으며 그밖에 관음상
주위로는 오른쪽에 신중탱화(1959년)와 동종(銅鐘), 사진본으로 된 의상대사 진영 등
이 조성되었다.
2005년 4월 화마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주지 금곡 정념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노력으로 건칠관세음보살상은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산사 포교국장이신 묘향스님께서 늦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빛아래서 저희 순례단을 위하여
낙산사에 대하여 안내를 해주시고 계십니다.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칠층석탑(七層石塔) 보물 제499호
낙산사는 조선 세조 대 (재위,1455∼1468)에 중창되었는데 이 탑도 그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
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위에
상륜부가 마련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면에 2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
(地覆石)과 그 위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뚜껑돌인 갑석
(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그 밑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기단 상면에는 겹잎〔複蓮〕의 복련(覆蓮) 24잎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 양식은 강릉시 내곡동 403번지에 있는 보물 제87호 신복사(神福寺)터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이 탑은 한국전쟁 당시 손상되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낙산사를 중건할 때 함께 재건되었다. 현재 탑의 크기는 전체 높이 620㎝이다.
원장(垣墻)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네모 나게 방형(方形)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담장인 원장(垣墻)이 있다.
축조된 시기는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이 원장은 법당을 둘러싼
성역(聖域)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 담장이며,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장 안쪽의 담벽은 기와로 쌓고 담장 바깥쪽은 막돌로 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진흙과 평와(平瓦)를 차례로 다져 쌓아 담벽앞면에 기와로 가로 세로의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둥근 화강암을 바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화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고 있다.
본래 터만 남아 있었으나 근래에 전체적으로 보수하면서 연결했다. 크기는 전체 길이 220m,
높이 3.7m이다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낙산사 성보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다.
그래서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빠짐없이 들러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다.
해수관음상은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川王像)
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
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이 해수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寶陀殿(보타전)
보타전은 원통보전,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요,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음도량임을 상징하는 전각으로서, 1991년 7월 짓기 시작해서 1993년 4월 10일
에 완공했다. 규모는 앞면5칸, 옆면3칸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보타전은 배산임수의 지형 덕으로 지난 2005년 대형 산불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현재 보타전 앞에는 누각 형태의 보타락이 있으며, 그 앞에는 큰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보타전내 관음상
보타전 내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성관음(聖觀音)·십일면관음
(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준제관음(准堤觀音)·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앞면 중앙에 천수관음을 비롯해서 좌우로 6관음, 그리고 뒤쪽으로 천오백관음상이 있다.
천수관음은 입상이며, 나머지 6관음은 좌상이다. 낙산사 천수관음은 32관음신상으로도
불려지는데, 그 뒤쪽으로는 목각 후불탱이 조성되었다.
관음신앙의 성지답게 그야말로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셈이다.
이렇듯 많은 관음상을 조성한 것은 우리 민족의 구제와 해탈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1500관음상 한 분 한 분의 천수천안과 32응신상을 곱하면 그 수가 5천만 정도인데,
그것은 곧 5천만 우리 민족의 인구수와 일치한다. 곧 우리 5천만 민족의 구원과 해탈
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관음상의 재질은 모두 목조로서 백두산에서 자라는 홍송(紅松)을 사용했다.
보타전 안에는 그밖에 동종과 금고(金鼓)가 있다. 전각 외부 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7관음상을 봉안하던 날에는 이적(異蹟)이 일어나 불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날 밤, 하늘
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청학(靑鶴) 다섯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늘
거친 파도소리를 토해내던 동해 바다가 문득 조용해졌으며, 무지개와 같은 서기광명
(瑞氣光明)이 온 하늘에 가득 찼다. 또한 그날 밤 신도회장은 동해 바닷물이 해일을 일으켜
보타전까지 날아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보타락 / 보타전 앞 누각
홍련암 / 사진출처:낙산사 홈피
보타전까지 참배를 마치고 우리 백팔고찰순례단원들은 급히 홍련암으로 가서 10시
부터 시작되는 사시불공에 동참하였다.
관음조(파랑새) / 사진출처:낙산사 홈피
홍련암 / 사진출처:낙산사 홈피
산내암자인 홍련암(紅蓮庵)은 역사적으로 낙산사 창건의 모태가 된 암자로, 낙산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반드시 친견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뒤
목숨을 건 구도 끝에 마침내 백의관음(白衣觀音)을 친견한 성스러운 관음성지이다.
널리 알려진 창건설화는 홍련암에 산다는 유명한 파랑새〔靑鳥〕와 관련이 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서부터 멀리 이곳까지 찾아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파랑새〔靑鳥〕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감으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푸른 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과 관련된『삼국유사』의 기록 중 홍련암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 기록에서 의상대사가 좌구를 물 위에 띄운 곳이 현재 홍련암이 서 있는 자리이고,
그가 천룡팔부의 시종을 따라 들어간 굴이 현재 홍련암 밑의 관음굴이다. 현재 법당
마루 가운데쯤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어서 이곳을 통해 굴속으로 넘나드는 바닷
물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곳이자, 낙산사 창건의 모태가
되는 성지로 불자들 뿐 만 아니라 전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홍련암은
지난 2005년 발생한 대형 산불의 피해를 입지 않아 다시한번 관음보살의 위신력과 가피력
을 입증한 관음성지로 오늘도 많은 국민들이 찾고 있다.
출처 : 낙산사홈페이지
의상대(義湘臺)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용암 체조(龍巖 體照,1714~1779)스님이 지은 '등낙가의상대(登洛伽義湘臺)'라는 시문이
전하고 있어 위의 시를 통하여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의상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되었던 듯하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스님이 이곳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고, 스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 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 차례 중건되었다.
근래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홍련암 사시불공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해당화가.......
16차 고찰순례시 화선지에 받은 사찰 인장 / 위 왼쪽 건봉사,
위 오른쪽 낙산사, 아래 왼쪽 신흥사 인영.
아래 오른쪽 : '예불천수경' 수첩형 소책자는 낙산사에서 순례 기념으로 단원 전부에게
한권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페이지수가 225p로 예불문, 천수경 등은 물론 금강경이 수록되어 있어 순례시 버스내에서
금강경 독송을 할때 필요할것 같아서, 이번 16차 고찰순례에 참석치 못한 단원들에게 지급
하고자 며칠뒤 종무소에 전화로 10권 정도 보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바쁜지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기에 우리에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흘리며 사찰안내를 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묘향스님께 염치불구하고 전화를 하여 부탁하였더니 소관이 아님에도 직접
챙겨서 10권을 보내주었습니다. 묘향스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_()_ _()_ _()_
우리 부산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은 낙산사 선열당(禪悅堂 : 수행에서 얻어지는 기쁨으로
공양을 삼는다(禪悅爲食)는 말에서 따온 당우 이름)에서 점심공양후 16차 추가 순례사찰인
휴휴암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