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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으로 유명한 곳이다. 해발 685m에 있는 고지대 도시이며 아람 왕국의 수도였다. 지금은 시리아의 수도이다. 위치는 서남아시아의 바라다 강변, 안티레바논 산맥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다메섹의 대부분 지역은 바라다 강의 서편에 있으며, 근대에 들어 북쪽 강변으로 지역이 확장되었다. ‘다메섹’이란 명칭은 ‘투트모세 3세’(B.C. 1484~1450)의 정복지 가운데 하나로 처음 소개되었다. 다메섹은 ‘아케나톤’(B.C. 1372~1354)의 통치 때까지 이집트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B.C. 15C에 이집트에 있는 비문에 의하면, 다메섹은 도시국가들의 수도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B.C. 732에 다메섹은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앗수르에 의해 정복되었다. B.C. 333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는 셀류커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고, B.C. 64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었다. A.D. 635에 이슬람에 정복되었다. 1076에 셀주크 터키에 의해, 1154에는 이집트에게 멸망되었다. 1860년 회교 인구가 급증하여 기독교가 파멸되어 기독교인들의 학살을 초래하기 전까지 이집트와 터키(옛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시리아를 공격하고 다메섹을 점령했다. 1946년,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다메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현재, 다메섹은 시리아의 수도이며 인구는 약 1,451,000명으로 추정된다.
다메섹은 200개 이상의 회교 사원이 있는데, 그중 70개의 사원만 사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원은 ‘우마야드’ 사원인데 마야드 모스크는 시리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 대사원으로, 아랍 권을 통틀어서도 매우 크고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기원 후 705년 우마야드 할리파 왕조 시대의 알 왈리드 1세(Al-Walid) 에 의해 대규모로 지어진 사원으로 수차례의 재앙과 더불어 1898년 대화재 때 대부분 손실 되었고 현재는 복구된 모습이다. 사원의 돔(dome) 또한 목조였으나 화재 후 복원하였다. 사원이 들어서기 전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이 건물의 코린트식 기둥이 현재 사원의 외벽으로 남아있고 이 때 교회 지하 납골당에서 사도 요한의 머리가 발견되어 현재 사원 안에 보관 중이다. 3개의 첨탑이 있고 사원의 중요한 물품을 화재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리하는 작은 보고가 있다. 건물 정면의 벽면에 있는 인상적인 그림은 전원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슬람의 천국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내부 기도 홀은 길이 130미터로 그들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챠도르를 빌려입고 입구를 들어가면 왼쪽으로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살라딘의 묘(Mousoleum of Salah Ad-Din)이다. 3차 십자군 전쟁시 이들을 물리치고 이집트 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통일한 역사적인 이슬람 세계의 인물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이 모스크는 규모뿐만 아니라 사원 안팎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우마야드 모스크의 모자이크는 아랍 모자이크 예술의 백미라는 평이다. 이 대사원은 다마스쿠스의 장구한 역사 변천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원래 이 사원이 서있는 자리는 원주민 아람인(Aram)들의 하다드신전이 있던 곳이다. 하다드(hedad)는 비를 주관하고 땅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고대 시리아의 최고신이었다. 로마제국시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는 로마인들의 최고신을 위한 주피터 신전이 건축되었고, 그후 기독교 시대였던 비잔틴 제국 때는 세례요한 교회로 전환되었다.
세례요한 머리무덤 교회 (SHRINE OF ST. JHON THE BAPTIST)
우마야드 본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홀 중앙에 돔형의 작은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모슬렘 통치자들의 무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의 부인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 마케루스 하궁에서 효수당한 후 처형에 대한 증거로 다메섹에 주재하던 시리아 총독에게 보내졌다가 이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아랍 모슬렘 시대 세례요한 교회는 이슬람교 대사원으로 바뀌었다. 그 후 화재로 소실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가는 다마스커스 구 시가지에 동서로 곧은 도로이다. 택시나 승용차들이 일방 통행으로 서에서 동으로 지나 다닌다. 도로가 협소하여 차가 지날 때는 차를 주의하여 걸어가야 한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에도 이 도로가 언급된다. 사울(Saul)이 기독교인들을 잡으로 다마스커스 근교(코아 캅)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빛이 비쳐 사울은 그만 눈이 멀게 되었다. 이곳에 사는 아나니아스(Ananias)의 꿈에 예수가 나타나 곧은 거리로 가서 다소 출신의 사울이라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아나니아스가 곧은 거리에 살고 있던 유다의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곧은 거리에는 로마 시대의 아치문도 있다. 당시의 이 곧은 거리는 지금의 4배쯤 되고 석조 기둥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상가 건물들이 차 한대 지나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바로 붙어 있어 좁은 도로가 되어 버렸다. 또한 도로도 다소 비틀 비틀 하여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볼 수 없는 말하자면 곧은 도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직가가 끝나는 동편은 지금도 크리스천 구역이어서 교회가 밀집해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이 아나니아 교회다.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세례 받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곳에 세운 교회가 아나니아 기념교회다. 아나니아스 교회는 지하로 되어 있다. 교회의 측면에는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에 기독교인들을 잡으로 오는 장면도 있고 장님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는 장면, 세례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터키, 그리스, 로마 등에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장면과 그리스에서 배가 난파되어 고초를 받고 있는 장면 등 사도 바울에 관한 모든 그림이 벽면에 죽 돌아가면서 걸려 있다.
이 훌륭한 교회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무찌오에 의해 디자인 되었다. 그는 고대의 교회의 유적을 보존하면서 교회 위의 교회를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래서 아래 교회의 바깥벽은 십자군 교회의 기초에 따라 지었고 다만 바쁜 도로에서부터 조금 떨어지도록 몇 미터를 옮겼다. 두 교회의 높이는 24m 길이가 40m 이다. 서쪽과 남쪽면은 부활과 수태 고지를 상징하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52m 높이의 놀라운 지붕은 돌과 콘크리트로 지탱된다. 천정은 구리로 덮여 있으며 둥근 천장은 전등을 둘러싸여 있다. 전통적으로 인정 받은 수태 고지 동굴은 옛 나사렛의 남쪽 끝에 있다.
마리아의 우물은 성지에서 가장 확실한 장소 중에 하나이다. 현재까지 이 도시의 유일한 식수 공급원이다. 예수도 어머니와 함께 이 우물에 와 다른 부녀자들처럼 물을 길렀음이 분명하다. 산에서 솟는 샘물은 하루종일 부녀자들이 물을 긷는 공공샘터까지 수로를 따라 흐른다. 희랍정교회는 마리아가 수태의 계시를 이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받았다고 믿어 교회를 그 옆에 세웠다.
나사렛 성 요셉 기념교회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평화의 땅」이라는 뜻의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은 이미 모세 때부터 있어 왔는데, 그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평화가 절실한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원 1천년 전 다윗이 수도로 정한 이래 36번이나 전쟁에 함락되었고, 점령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며 열 차례나 무너졌던 피의 살육이 점철된「 전쟁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성채는 1537년 터어키의 오스만 제국 당시 재건된 것이다. 예루살렘 성내 올드 시티라고 부르는 곳은 지금도 아랍 지역, 유대 지역, 기독교 지역,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구획되어진 채, 종족마다 종파마다 갈등과 반목을 계속하면서 외견상으로만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아주 좋은 예로 금요일은 이슬람의 성일이고,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 일요일은 기독교인들의 주일(主日)로 저마다 종교의식에 따라 엄격히 지켜진다. 지금은 황금색 돔의 오마르 회교 사원이 서 있는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사진은 예루 살렘 신시가지 홀리랜드 호텔에 전시되어 있는 예수 당시 성전건물의 모형이다.
마사다 요새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로마군은 먼 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비탈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
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浮城)·행정청사(行政廳舍)·욕장·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그레테
그레테는 그리스 남쪽 지중해 상의 가장 큰 섬중 하나로 길이가 256km 넓이가 64km정도 된다. 그레테는 에게해와 리비아해를 경계지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를 구분하는 점이된다. 많은 섬들과 깊은 계곡이 있고 계곡사이에는 기름진 기름진 토양이 형성되었다. 이 계곡 중사마리아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계곡으로 대자연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지역마다 변화무쌍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곳이 황량하다 싶으면 다른 곳은 숲이 우거져 온화함을 더해준다. 마을들은 과일나무와 채소로 가득채워져있다. 올리브나무, 오렌지, 포도원, 각종 채소들이 자란다. 오래된 돌로 진어진 농가, 수도원 산능선의 마을들, 성채, 경사지에 남은 교회들의 잔재같은 것이 그레테의 시골 풍경이다. 해안은 때때로 험하여 사람들이 접근 못한 바위들로 되있기도 하지만 끝없는 모래와 자갈로 된 해안이 많이 존재한다. 그레테는 여러 야생식물로 유명하다. 밤나무, 상수리, 싸이프러스, 야자나무, 상수리나무 숲이 이곳저곳 위치한다. 바위가 많은 지역에는 각종 약초와 그레테 염소라 불리는 '크리크리'가 자란다. 역사위에서 언급한 환경을 기초로 그레테가 최고로 번성한 시기는 미노아 문명(그레테 문명) 때이다. 주전 2800-1150년 동안 그레테는 지중헤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을 이루었다. 미노아인들은 궁전들을 지었는데 유명한 크노소스, 파이스노스, 말리아, 자크로스가 그 당시(주전 1700-1450) 지어졌다. 그들의 벽화와 도자기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명은 주전 1450년 산토리니에서 발생한 화산폭팔로 끝을 맺게된다. 그러나 이 것이 끝은 아니었다. 배를 이용한 상업은 계속이루어졌다. 페니키아, 시리아, 이집트인은 그들의 주요 무역대상이었다. 아가야인(미케네 문명)과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신도시인 라토와 압테라가 세워졌다. 라토(Lato)는 주전 7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로마가 다스리 시기(주후 69-330)에는 골틴(Gortyn)이 특출난 도시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일찍이 이 곳에 전파되었다.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던 이 곳(행 2:11)에 누가 복음을 전했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디도를 보낸 것을 보아 바울이 전한 장소가 아닌가한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 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Kali Limenes)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44행 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행 27:7 -14) 바울은 로마로 호송될 때 그레테를 거쳐서갔다. 그래서 아직도 미항근처의 산능선에는 바울을 기념한 교회가 위치해 있다. 오래된 교회는 세련되지 않고 지붕도 없는 상태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곳에 바울이 잠시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그레테인의 특성은 바울이 디도서에 편지을 보내며 에피네니데스(주전 6세기)의 말을 인용하여 부정적으로 얼마를 썼지만 그레테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잔자키스등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디도의 사역으로 어느정도 변화된 사람들이 있어나 보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딛 1:12-13) 잊지 말하야할 역사적 사실 중 하나는 그레테인의 최초의 조상(미노아 문명)은 헬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 이주한 것은 함족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창 10:6)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창 10:13-14) 이 함족은 고고학 증거에의해서도 밝혀졌던 서부 셈족언어를 사용하였다. 미노아 문명이 쇠퇴하고 해양민족이 이동할 때 그레테(그렛사람, 갑돌사람)인들은이동하여 가나안까지 들어왔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것을 증명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 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암 9:7)
암비볼리(Amphipolis)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데르마 만의 갑(岬)에 위치한 부산한 항구도시였다. 데살로니가 성읍은 유명한 에그나티아 가도와 북쪽으로 다뉴브에 이르는 대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으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성읍의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마게도냐의 최대 도시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패하면서 수도가 암비볼리(Amphipolis)로 되었다가 주전 146년부터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알레산드리아 드로아
현재명은 Odun Iskelesi이다. 에게 해 해안의 항구도시로서 옛 지명 이름은 ‘시기아’였고, 고대 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에게 해안 북서 소아시아의 ‘미시아’(Mysia)에 위치, ‘테메도스’(Themedos)섬 맞은편에 있었고, ‘트로이’(Troy, 지금의 ‘일리움’)의 남쪽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소아시아 북서쪽에서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 주전 4세기 아티고누스(Antigonus, 알레산더의 장군중 한 명)에의하여 건설되어 주전 133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따라서 이 항구는 안티고누스의 이름을 따라 안티고니아 드로아라고 명명했다. 그 뒤, B.C. 300 경에 드라게의 ‘리시마쿠스’왕이 확장 발전시켜 알렉산드리아 드로아로 개칭하였다(드로아는 본래 고대 트로이 주변 지역의 명칭이었다.). 원래 ‘드로아’는 특색 있는 별명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을 로마의 식민지로 삼은 후에 이 도시의 통상적인 지칭이 되었다. 한 때, 이 곳은 셀류커스 왕들의 주재지였으며, 자유도시로 발전하였다. B.C. 133에는 로마 통치권 내에 들어갔고, 크고 중요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드로아는 육로로 로마로 가기 위해 마게도냐에서 네압볼리로 가는 교차점이었다. 2C 초에는 ‘이라’산에서 드로아로 물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수로가 건설되었고 인공적 항구 갑문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이 인공 갑문들은 ‘헬레스폰트’(Dardanelles)와 밀접한 해로의 중요한 접촉점에서 강력한 북풍을 막아주는 은신처 역할을 했다. 도로아의 해변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조금 남아 있으며 내륙에는 고대도시의 유적들이 땅 속에 묻혀 있으나 긴 성벽의 일부와 체육관, 목욕탕, 수로의 유적들이 넓은 밀밭 사이에 있다. 여기서 아시아쪽을 전도하고 싶어하던 바울이 마게도니아 사람 환상을 본 뒤 유럽으로 넘어간 지점이고, 3차 전도 여행을 거의 마쳤을 때 밤늦게까지 강론하다 위층에 졸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곳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매우 먼거리를 혼자 육지를 걸어 다음 항구(아소)까지 간 곳이다. 후에 콘스탄틴이 로마 수도를 삼으려다 비잔티움으로 결정한 뒤 도시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주후 1세기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증여한 목용탕이있으며 펴허가 된 성벽들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석조물들은 새 수도 건설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많은 폐허가 해안을 덮고있고 숲이 우거져있다.
트로이 유적지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밀레도는 ‘라트미안’(Latmian) 만의 남부 해안에서 불쑥 나와 있는 갑(岬소)에 위치한다. 아시아 서부 해안에 있는 이오니안 성읍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소아시아 서쪽의 출구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로 지금까지 유명한 관광지의 명성을 유지하는 곳이다.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의 귀환 때 들린 곳이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승선한 배는 밀레도에 기항하였다(행20:15).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행20:15). 디모데후서 4장 20절의 언급은 밀레도에 대한 또 다른 바울의 방문을 언급한다. 바울은 분명 여행 중에 밀레도를 통과하거나 혹은 그 근처를 지났을 것이라고 추측할수 있으며, 거기에 ‘드라비모’를 남겨 놓았다. B.C. 8C, 흑해 지역에 많은 식민지들을 세웠으며 이집트와도 교역했다. B.C. 608, 이집트 왕 바로 느고는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밀레도 사람들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왕하 23:29, 대하 35:20).
밀레도의 역사를 보면 헬라 이전의 이름을 지닌 도시 밀레도는 선사 시대 때에 아마도 해안의 선적을 위한 안전한 정류지로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밀레도는 최초로 미노안 확장 시기에 그레데인들에 의해서 식민지화 되었다가 나중에 미케네 헬라 인들에의해 넘겨져 B.C. 14C에 요새화 된 도시이다. B.C. 1200경, 혼란으로 인해 멸망되었으나, 헬라인들이 밀레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후에는 ‘이오니안’(Ionian) 이주자들에 의해서 보강되었다. B.C. 7C에는 이오니안 해양 사업의 선도적인 중심지로 출현했다. B.C. 499, 밀레도 인들은 해양 사업의 경쟁국인 ‘리디아’(Lydia)왕국의 확장에 저항하였고, 이오니안의 반역이 시작되었다. B.C. 494, 성읍이 파괴되고 신전은 약탈당해 소실되었다. B.C. 334, 알렉산더는 밀레도를 정복하였다. 이 때는 밀레도의거대한 도시 건축물이 재건되는 시기였다. 일부 헬라 왕들은 기념비적인 건축 계획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시기는 밀레도의 증대되는 번영과 거래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번영에도 불구하고 밀레도는 상업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는데, 이 멸망의 위협은 지역 사업의 부족에서라기보다는 항구의 침전물 때문이었다. 결국 밀레도의 규모는 줄어들게 되었고, 오늘날 밀레도는 폐허로 남아있다. 밀레도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상업 및 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라트미안’ 만의 지질학적 위치는 메안더 강의 침전물 축적으로 인해 밀레도의 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이 만은 내륙의 호수이고, 한때 항구를 보호하였던 ‘라데’(Lade) 섬은 소택지의 충적 평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언덕이 되었다. 침전물로 인해 항구이 메워져서 물의 흐름이 변하였다. B.C. 7C 밀레도는 그리스 예술과 철학의 중심지였다. 그 시기 가장 중요한 헬라의 지성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 초기 진화론자 ‘아낙시더만’이 있다. 또한 연대 기자인 ‘헤카타에우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밀레도 성읍은 최초로 동전을 주조한 성읍이기도 하다. 밀레도의 유적지들은 해안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밀레도의 가장 훌륭한 조각품과 건축물들은 밀레도 남쪽 약 20km 떨어진 ‘디디마’(Didyma)에 있는데, 이는 ‘아폴로’(Apollo) 신전의 신탁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델페니온’(Delphinion, 아폴로 신전), ‘아고라’(Agora, 시장), ‘세라페움’(Serapeum, 세라리스 신의 신전), ‘파우스티나’(Faustina) 여황에게 헌증된 목욕탕, 연극장, ‘아테나’(Athena) 신전등이 유적 및 건축물로 남아 있다. 이곳의 모직 제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루스드라’는 평야지대의 구릉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중요 도시였으나, 지금은 작은 마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투사라이’에서 오른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계곡의 구릉지대에 있다. 루스드라는 32km 떨어진 이고니온과 96km 떨어진 더베를 연결하는 도로에 위치하였으며 디모데의 고향이다. 그 위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885년 ‘스테렛’(J.R.Sterrett)이라고 하는 지리학자는 루스드라의 위치를 루가오니아 지역의 이고니온에서 약 29km 떨어진 터키의 마을 ‘하툰사라이'(Hatum Sarai : 숙녀의 저택) 북쪽, 커다란 언덕으로 보았다. 요즈음 터키 현지의 하툰사라이 지역에서는 2km 정도 떨어진 곳에 교회 터가 남아 있는 휘위귀 마을을 루스드라로 보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더베에서 루스드라가 90km이상 떨어져 있기에 이고니온 남쪽에 1001개 교회가 있는 지역인 마덴세히르(Madenshir)로 주장하기도 한다. 루스드라는 ‘아나톨리아’의 ‘소금 호수’의 남서쪽에 있었던 평원, 루가오니아에 있는 고대 유적지이다. A.C. 6,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함께 루스드라를 로마의 식민지로 지정하였다. 고대 역사에 있어서 루스드라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도시였다. 루스드라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들어와서 농경 정착지로만 존재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유적 구릉들에 의해 식별되는 인접한 다른 초기의 많은 촌락들과 비슷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인들과 희랍인들이 지배하던 시대의 루스드라의 흥망성쇠는 루가오니아지방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들로부터 추측될 수 있는데 루가오니아는 처음에는 셀류커스 왕조에, 그 다음에는 아칼루스 왕조에, 마지막으로 모라인에게 복속되었다. A.C. 6,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함께 루스드라를 로마의 식민지로 지정하였다. 루스드라의 후대 역사는 더베의 역사와 유사하다. 이 두 도성은 로마에 복속된 왕 ‘코마게네’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후 ‘아트니누스 피우스’는 이 두 도성을 길리기아에 편입시켰다. 이 유적지의 후기 역사는 모호하다. 루스드라 주교들의 이름을 수록한 명판들만 남아 있다. 이 지역은 두 개의 커다란 강이 교차하는 후미진 곳이다. 따라서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헬레니즘의 루스드라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루스드라의 유적지는 1820년에 발굴하였는데, ‘하툰사라이’에서 약간 북쪽으로 떨어진 구릉지대라고 불 수 있다. ‘졸데다’ 또는 ‘조르들라 휘이크’등으로 다양하게 언급된 이 구릉은 B.C. 3000까지 그 연대가 소급되는 지층들을 지닌 곳으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의 루스드라라고 하는 희귀 마을은 마을 전체가 양을 치는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시골이며, 외지의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다. 이 마을에는 초대 교회 때, 교회로 사용했던 두 군데의 동굴 교회가 있다.
루스드라에 온 바울은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하여 고쳐준 표적이 나타났다(행14:8).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를 두 번째 방문하면서 길리기아 관문을 거쳐서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이 길을 따라 여행했을 것이다(행16:1).
첫댓글 자료 13번까지 옮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