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지난 일요일에 귀관의 주도로 발굴되고 있는 여주 고달사지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99년1월에도 갔었는데 경기불황의 여파인지 발굴기간이 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발굴은 완료되지 않고 연장된 기간을 다시 초과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욱이 절터입구의 몇몇 민가들이 없어졌더군요. 절 복원계획이 있습니까? 그리고 궁금한 점은 원종대사의 비와 부도는 안내판대로 같은 짝일까요? 비의 크기를 보았을 때 찬유스님의 혜진탑은 현재의 것이 아닌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부도가 아닐까요? 그렇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현재의 혜진탑에서 무슨 기명이라도 나왔나요? 겉에서 보면 아무런 표시가 없는데요.
알려주시면 인사드리겠습니다.
■박물관의 답변내용(2001/02/24)
안녕하십니까? 평소 우리 문화에 많은 관심과 아낌없는 문화재사랑에 감사드립니다. H님이 질의하신 고달사지는 사적 38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것으로 경기도박물관에서 1998-2000년까지 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현재 진행중인 발굴조사는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려드립니다. 발굴조사기관은 변경되었지만 고달사지는 현재 일부분만 조사되었으며 앞으로 연차발굴조사가 계속 진행될 예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민가들이 위치하였던 지점도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고 발굴조사가 끝나고 나면 고달사지를 정비하여 역사문화탐방장소로 꾸밀 계획이 있어 작년에 국가에서 매입하여 철거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종대사혜진탑비와 부도가 과연 제 짝인지는 현재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가 있습니다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현재 그 부분에 대하여 관련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고달사지가 계속 조사되고 있는 관계로 고달사지에 관한 학술대회가 조만간 열릴 가능성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자세한 대답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애정어린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자세한 사항에 대한 것은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실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고달사지 부도에 대한 본인의 견해
자료를 검색하다보니 H씨 작성한 고달사지에 대한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고달사지를 수 차례 답사한 적이 있고 특히 부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아왔습니다. 특히 국보 4호로 지정되어 있는 부도에 대하여는 우리 나라 최고의 부도 중 하나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와 부도비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H씨가 지적하였듯이 지금 원종대사부도와 부도비를 보면 솜씨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전문가에게 '원종대사의 부도비와 부도를 보면 솜씨에 있어 너무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여쭈어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답변은 '예전의 유물을 보면 솜씨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 부도를 보면 중대석의 용문양이 좌우가 그 솜씨를 달리하고 있어 여러 장인이 동원되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와 문화재청 뿐만 아니라 여러 문헌에서 위의 부도는 주인을 모르고 아래의 부도는 원종대사의 부도라고 적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아래의 부도를 원종대사 부도라고 인정하고 국보 4호로 지정된 부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하여 지금까지 고민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여왔던 저에게 H씨가 지적한 보물로 지정된 부도가 과연 원종대사의 부도가 맞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지적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동안 앞에서 말한 문제도 있었지만 저는 아래의 부도를 원종대사부도라고 전제하고 위에 있는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부도를 원종대사가 속한 봉림산문의 개산조인 심희나 심희의 스승인 현욱의 부도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희의 경우 그가 봉림산문을 개산한 봉림사에 그의 부도와 부도비를 건립하였기 때문에 심희의 스승으로서 실제적인 개산조이고 고달사에서 주석하고 입적한 현욱의 부도가 아닐까 생각하여왔습니다. 단지 양식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말에 만들어진 부도의 전형인 팔각당형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생각은 이 고달사를 크게 부흥시킨 원종대사 때에 와서 스승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만든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된 것은 국보인 부도와 보물인 아래의 부도를 보면 그 위치 설정에 있어 이미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탑비가 두 개있습니다. 하나는 원종대사의 것이고 하나는 머리가 없는 귀부 만이 남아 있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이 듭니다. H씨의 견해대로 라면 현재의 원종대사탑비는 국보로 지정된 부도와 관계가 있고 귀부 만이 남아있는 탑비는 아래 보물로 지정된 부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짝짓기 하는 것은 검증이 되어있지 않아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적으로 주인 없는 귀부에 대한 학술적인 검토 즉 석재를 다루는 기법 또는 문양 등의 상세한 검토가 있은 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이렇게 가정하여 봅니다. 저는 H씨의 견해를 보고 다시 원종대사부도비의 전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후반부에는 원종대사 부도를 건립하게된 내용이 있습니다. 비문에는 '다음날 신좌(神座)를 혜목산으로 옮겨 감실을 열고 보니 안색이 생전과 같았다. 터를 고르고 석호(石戶)를 시설하여 유골(遺骨)을 봉폐(封閉)하였다. 임금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선월이 일찍 빠짐을 개탄하시고......시호를 원종대사, 탑호를 혜진이라고 추증하였다. .....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층총(層 )을 만들어 문인들이 호곡을 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혜목산 서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을 준수한 것이다.'(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3: 이지관역)라고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원문: 翌日 奉遷神座於慧目山 龕觀 顔色如生 權施石戶封閉 上聞之慨禪月之早 ........... 追諡元宗大師 塔號惠眞 ...... 仍令國工 攻石封層 門人等 號奉色身 竪塔于慧目山西北崗 遵像法也) 이 비문을 보면 장례에 대하여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다비에 대한 기록이 애매하다는 것과 사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가매장하였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부도를 모신 장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비와 매장법에 대한 이야기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이므로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도 비문을 읽어보았지만 그 위치에 대하여 그렇게 신경을 쓰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록대로 '혜목산 서북쪽 산기슭'에 모셨다고 하면 현재 불대좌가 남아 있는 금당을 기준으로 볼 때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부도의 위치가 서북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직은 도상으로 검토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원종대사의 부도비를 보면 기단을 별도로 만들었고 보호각을 건립하였던 흔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호각을 만든 흔적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적인선사 부도, 광양 옥룡사의 부도전 등 과거에는 이렇게 보호각을 만들어 부도나 부도비를 모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원종대사의 부도비가 보호각을 만들어 모실 정도이라면 실제 몸이 들어가 있는 부도는 어떻게 모셨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이 된다고 봅니다. 국보로 지정된 부도를 보면 앞에 배례석이 있고 배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H씨의 가정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 곳을 답사를 하면서 느끼지만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의 경우 이곳 고달사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새로운 발상으로 전환하여 저에게 고달사 부도에 대한 그간의 고민에 대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하여주신 H씨에게 존경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