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용산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삼호정"(三湖亭)의 명칭은 호수가 셋(三湖)이 있다 해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용산 앞강이 옛날 샛강이었으므로 '사이 물' 즉 '삿물'이 '삼물'로 변했다가 한자로 옮겨진 것이다. 천주교회측에서 이곳에 성직자 묘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한 것은 현재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1887년 신학교 부지가 매입된 직후인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이 성직자 묘지로 꾸며지게 된 것은 1890년 2월 21일 블랑 주교가 서거하면서 와서(瓦署, 즉 왜고개)에서 구운 벽돌을 가져다 담을 쌓고 경계를 만든 때 부터였다. 당시 삼호정 너머 도화동 쪽은 모두 공동 묘지 자리였으며, 조선교구에서 성직자 묘지를 이곳에 매입한 이유중의 하나도 이러한 점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이 성직자 묘지가 용산 성당 구내에 위치하고 있지만, 당시의 위치는 다음과 같았다고 설명할 수 있다. 즉 옛 삼호정 정자 자리 옆에 1889년 9월 8일(성모 성탄축일)에 강복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보육원(수녀원 용산 분원)이 있었고, 삼호정 안채가 공소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공소와 보육원 바로 위쪽에 성직자 묘지가 있었던 것이다. 또 이 성직자 묘지에는 보육원쪽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묘지가 붙어 있었는데, 여기에 있는 수녀 무덤들은 훗날 이장하여 현재는 흔적만이 남아 있다.
이 성직자 묘지에는 1890년 이래로 4위의 주교, 67위의 신부,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4위의 시신이 묻혀 있다. 특히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유해가 조선교구 설립 100주년이 되던 1931년 10월 15일에 이곳으로 이장됨으로써 성직자 묘지로서의 뜻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용산 지역의 신자들은 성직자 묘지가 이곳에 조성된 때부터 이를 자신들의 조상처럼 돌보게 되었다. 공소 시절에도 공소 경당과 묘지가 바로 이웃해있었기 때문에 묘지를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성직자 묘지가 앞에서 말한 순교 성지. 신학교 등과 함께 이곳 신자들의 신심에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단순한 자부심 이상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는 점이라 하겠다.
◆ 조선교구의 설정과 브뤼기에르 초대 교구장
유진길의 서한(1825년 작성)과 움피에레스 신부(마카오 포교성성 경리부장)의 의견서가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 (布敎堂省)에 도착했다. 이를 검토한 포교성성은 북경 교구에서 조선 교구를 독립시킬 것과 그 관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기로 결정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1663년 설립)는 당시 중국, 베트남에서 전교 활동하면서 본국인 성직자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포교성성의 요청에 처음에는 재정과 선교사 부족, 입국의 어려움, 전교 역량의 분산 등을 내세워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변명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교구 위임 요청을 승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선 재정 부족 문제에 대해서 포교성성의 재정 보조 약속을 상기시키며 보조를 받는 동안 재원 확보책을 마련하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둘째, 선교사의 부족 문제는 항상 있었던 것으로 조선에 대해 널리 알리고 선교사 모집을 호소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 전교 역량이 분산된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조선 교회야 말로 가장 선교사가 필요한 곳이고 1-2명 정도의 지원은 전교회 전체에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넷째, 입국의 어려움을 말하지만 외국 선교사[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선례가 있으며 조선 교회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섯째, 전교의 가능성여부에 대해서는 시험삼아 선교사를 파견하여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합당하며 설령 순교한다 해도 선교사나 전교회에 손해 볼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누가 나설 것인가에 하는 문제에서는 브뤼기에르 신부 자신이 맡겠다고 자원했던 것이다.
전교회의 결심을 촉구하는 가운데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6월 29일에 주교품에 서임되었고 플로피낭 섬에서 사목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만난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감화를 받아 자신도 조선 전교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같은 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북경 교구를 관리하던 피레스 남경 주교를 통해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의 입국을 돕겠다고 연락해 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브뤼기에르 주교는 공식서류를 기다리지도 않은채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포교성성에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 보좌신부 역할을 행할 중국인 신부를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1834년 1월 3일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 실로 30여 년 만에 두 번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것이다. 1832년 7월 25일 플로피낭 섬에서 조선교구장 임명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신학생이었던 왕(王) 요셉을 데리고 싱가포르, 마닐라를 거쳐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는 어떤 분인가?
○ 브뤼기에르, 바르텔레미 (Bruguiere, Barthe1emy, 1792~1835)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 세례명도 바르톨로메오. 한국성은 소(蘇).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나르본(Narbonne) 근처의 레삭(Reissac)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공부한 후 카르카손(Carcassone)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는 성적이 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심이 참되고 대담 솔직하여 스승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또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부제가 된 뒤에는 소신학교 3학년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15년 12월 23일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 다음날 대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고, 후에는 일선 사목도 경험하였다. 한편 그의 외방 선교에 대한 열망은 대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자라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열망은 1825년 9월 17일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뒤 동양 선교사로 임명됨으로써 실현되었다.
1826년 2월 5일 샴(Siam, 지금의 태국) 왕국으로 가기위해 보르도 항을 출발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그 해 6월4일 샴의 수도 방콕에 도착하여 그곳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샴의 언어에 익숙해지자 곧 성무 집행을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상황 아래서 신학교와 성직을 동시에 맡는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당시 샴의 교구장은 소조폴리스(Sozopolis) 명의 주교인 플로랑(Florent) 주교로, 성직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이에 브뤼기에르 신부는 유럽으로 자주 편지를 보내 선교사 지원자들을 모집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조선 포교지의 상황을 전해 듣고 그곳으로 성직자를 파견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샴 교구에서 활동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플로랑 교구장은 브뤼기에르 신부를 주교 품에 올릴 목적으로 교황청에 청원서를 올렸다. 그리고 1828년 2월 5일자의 교황 소칙서에 따라 그를 갑사(Capsa) 명의의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고사하였다. 이에 앞서 교황청에서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과 그곳의 상황을 고려하여 조선 포교지를 대목구로 독립시킬 계획을 세웠으며, 포교성성(布敎聖省, 지금의 인류 복음화성) 장관 카펠라리(Cappellari) 추기경은 182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로와(Langlois)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장차 독립하게 될 조선 포교지를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때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즉시 포교성성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고 조선의 실상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동양 선교사들에게 서한을 보냈고, 그 결과 브뤼기에르 신부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고난의 여정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구로 입국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달레의 천주교회사를 바탕으로 연도별로 정리해 본다.
1832.07.25 페낭에서 조선교구장 임명 소식을 들음
1832.08.04 페낭에서 싱가포르로 이동(8월 17일 도착)
1832.09.12 싱가포르에서 마닐라로 향해 출범 - 동료 클레망소 신부가 자금을 빌려줌, 영국 선박 이용
1832.09.30 마닐라에 상륙 - 마닐라 세기 대주교(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댁에 며칠간 신세를 짐
1832.10.12 미국배를 타고 광동으로 출발(세기 대주교가 배삯을 꿔주고 미카오 도착하여 갚음
1832.10.18 마카오 상륙. 포교성성 경리(經理) 움피에레스 신부를 찾아감
1832.10.21 로마의 교황친서(조선교구 부임 명령) 받음
1832.11.11 외방전교회 신학교장 랑글로아 신부가 소(蘇) 주교에게 5,600 프랑 지급
1832.11.18 소(蘇) 주교 일행을 푸간(Fougan)으로 태워다 주기로 한 복건의 배가 마카오에 도착
1832.11.23 왕 요셉을 북경으로 파견, 북경 주재 남경 주교와 유방제 신부, 조선 밀사에 보낼 서한 동봉
1832.12.19 복건의 배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 (선교사 일행 중 모방 신부[사천성 파견]도 탑승)
1833.03.01 푸간(Fougan) 포구에 도착. 복건 주교[도미니코회] 댁에 여장 품
1833.03.09 모방 신부가 소 주교를 따라 조선에 가겠다고 말함
모방 신부는 복건의 소교구 힝화(Hing-hua)에 머물면서 나중에 소(蘇) 주교를 따라오기로 함
1833.04.12 강남으로 떠날 차비를 하라는 소식 받음
1833.04.23 남경행 배에 오름. 27일에 출발
1833.05.12 절강성 북쪽의 협포[Hia-pou]에서 배를 갈아타고 강남 맨남쪽의 상남부[Chang-nan-fou]로 감1833.05.15 남경 운하 근처 경당이 있는 농가에 도착
1833.05.18 남경 교구 총대리인 가스트로 신부가 소(蘇) 주교가 머무는 집까지 마중 나옴
1833.07.20 삼복 더위 속에 달단(韃靼, 만주)을 향해 출발. 나룻배로 양자강과 연결된 운하를 따라 올라감
1833.07.31 배에서 내려 육로로 여행 (절강성→황하), 여행 동안 열병과 음식, 중국 풍습 고생함
1833.08.13 황하를 나룻배로 건넘. 다시 육로 여행(황하→직례성)
1833.08.26 직례성[하북성] 교우의 집에서 1개월간 열병 치료, 그후 피부병으로 다시 6개월간 고생함
1833.09.29 소 주교 일행 출발. 마차로 이동(직례성→산서성)
1833.10.10 산서 주교 거주지[太原]에 도착. 산서 주교와 선교사[이탈리아 작은형제회]들이 소 주교를 환대함
1833.11.11 왕 요셉이 북경에서 도착. 요동 출발 준비
1833.11.18 소 주교께서 다시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냄, 조선 교우에게 내리는 지시와 서찰을 동봉케 함
1834년 중에 조선 입국을 계획함
1834.03.10 왕 요셉이 조선 교우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옴
1834.04.24 모방 신부의 편지 - 4월 1일에 북경에 도착(1833년 12월에 복건에서 출발)
1달 후 답장 - 달탄(韃靼 : 만주) 서만자(西灣子)로 가라고 지시 (모방 신부, 6월 8일 출발)
조선 입국로 답사 위해 왕 요셉 보냄 (성과 없이 9월 8일 귀환함)
1834.05.31 포교성성 마카오 경리부장의 편지 - 지원금 배당(주교, 모방, 샤스탕, 유방제 신부)
1834.08.29 조선 교우의 편지 받음 - 소(蘇) 주교의 입국을 부정적으로 대답함
1834.09.17 왕요셉을 북경에 보냄(11월 13일 성과 없이 귀환). 소(蘇) 주교도 달단의 서만자로 출발할 예정
1834.09.22 산서 주교댁에서 출발(10월 9일 만리장성에 닿음)
1834.10.08 달단 서만자에 도착 - 모방 신부와 재회
1835.01.09 왕 요셉을 북경에 보냄. 조선 교우에 질문서를 보냄(글로서 답할 것 분부함)
1835.01.26 왕 요셉, 조선 교우와 처음으로 만나보고 서만자로 귀환 (조선 교회 지도자와의 회담)
조선 교우의 편지를 받음 /소 주교의 편지 전달 (교구장의 권한으로 입국 협조 지시)
1835.01.29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냄 - 조선 밀사와 만남. 조선 교우의 편지 받음
1835.06-07 산서성과 서만자 등에 백련교도 소란 - 피신 생활
1835.10.01 요동으로 보냈던 보행군이 돌아요. 국경지대에 거처 마련
1835.10.07 조선 입국 위해 서만자 출발 예정(10월 5일자 편지)
1835.10.20 마가자(馬架子)에서 소(蘇)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35.11.21 모방 신부 집전으로 장례
1931.10.15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울 용산 성직자 묘소에 이장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신학생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교우들이 사제성소 증가에 힘껏 노력하도록 은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 정보 [내용/사진 : 2006. 10. 3 작성]